[국민의힘 호남 껴안기②]
농담 같은 이야기에 죽자고 덤비는 사람들
자유한국당의 한심한 5·18 공청회
지지하지 않을 텐데 무슨 헛수고?
바짝 엎드려 껴안고 토닥이는 게 정치
두드리고 또 두드려라!
김종인 당시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8월 19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5월 영령 앞에 무릎을 꿇고 참배하고 있다. [뉴시스]
‘광주봉기’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이 일컫는 말이다. 북한이 그것을 자신들이 주동했다거나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주민들에게 은연중에 소문을 퍼뜨리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어떤 일이든 북한에 유리해 보이는 사건에 대해 “영명하신 장군님께서 직접 지도하셨다”고 내부 심리전을 펼치지 않는다면 북한 정보기관 입장에서는 업무 태만 아닐까? 특수부대 광주 암약설 역시 그렇다. “6·25 때 말야, 내가 중공군 1개 사단을 몽둥이로 때려잡았어!”라고 술만 마시면 뻥을 치던 우리 동네 홍씨 아저씨의 그것과 다를 게 무엇일까. 그냥 웃어넘기면 되는 일이다.
농담 같은 이야기에 죽자고 덤비는 사람들
그런데 이런 농담 같은 이야기에 죽자고 덤벼드는 사람이 있다. 1980~ 1990년대에 ‘말’이라는 월간지가 있었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펴내던 잡지인데 당시 운동권, 특히 NL(민족해방)계열 운동권에는 필독서와도 같았다. 거기 실린 칼럼 하나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은행에서 번호표 뽑아 순번 기다리는 시스템을 칭찬하는 내용이었는데 필자 약력이 좀 특이했다. 시스템공학 박사라나. 그런 학문 분야도 있는가 하고 신기하게 여겼는데, 게다가 필자가 군인 출신이었다. 그것도 예비역 대령. 그런 사람이 ‘말’에 기고하다니 용감하단 생각이 드는 한편 ‘말’이 저변을 넓히려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별난 뿌듯함마저 느꼈다. 그래서 오래도록 그 이름을 잊지 못했나 보다. 그가 바로 5·18 북한 개입설을 꾸준히 주장하는, 그 이름도 유명한 지만원 씨다.5·18 북한 개입설까지는 백번 양보해 그렇다 치자. 지만원 씨가 이른바 ‘◦번 광수’라는 인물을 지목하기 시작했을 때 필자는 일종의 미러링 그런 건가 했었다. ‘광수’는 광주의 광(光)과 특수부대의 수(殊)를 결합한 조어로, 지씨가 1980년 5월 광주에서 찍힌 사진을 인터넷 게시판에 올리며 “이 사진에 희미하게 얼굴이 나오는 사람은 북한의 누구와 닮았다 (…) 그러니까 31번 광수”라는 식으로 번호를 매기는 놀이(?)를 시작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그런 증거로 북한이 광주의 배후라고 주장했다. 처음엔 정말 놀이인 줄 알았다. 놀아도 굉장히 뜨악하고 유치한 놀이. 물론 본인조차 그것이 억지란 걸 알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북한군 광주개입설을 검증하고픈 일종의 오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정말 진지하게 그렇게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의 ‘광수’에는 한계가 없어, 한국으로 망명한 황장엽 전 조선노동당 비서까지 ‘71번 광수’로 지목하는 기발한 주장을 이어가고 있다. 1980년이면 황장엽이 예순에 가까운 나이인데, 그리고 노동당 총비서장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권총 차고 잠수함 타고 광주까지 내려와 활약했다고? 아예 람보나 코만도, 슈퍼맨과 배트맨도 광주에 들렀다 하지 그런가? 결국 5·18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려는 깊은(?) 의도 아닐까 싶다. 그가 약간이라도 정상적 사고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는 가정하에 부득불 추정하자면 말이다.
세상엔 희한한 사람이 많고도 많아, 이런 오만가지 잡다한 이야기에 다 신경 쓰다 보면 피곤해 살 수가 없다. 반박할 가치조차 없는 유치한 놀이에 일일이 대꾸하면 자신마저 초라해질 수 있으니 그런 일엔 아예 시선조차 던지지 않는 편이 낫다. 뭐라 떠들든 말든 내버려두면 되는 일이다. 지만원 씨의 광수 놀음이 그렇다.
자유한국당의 한심한 5·18 공청회
그런데 공당의 국회의원이라는 사람들이 이런 희한한 사람을 불러 ‘공청회’라는 이름으로 강연회를 열었다. 2019년 2월에 벌어진 일이다. 귀를 씻고 싶은 말들이지만 당시 발언을 다시 꺼내보면 다음과 같다.“5·18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우파가 물러서면 안 된다 (…) 제가 제일 존경하는 지만원 박사 (…)”(김진태) “5·18 폭동이 20년 후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됐다. (…)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는 것을 밝혀내야 한다.”(이종명) “종북 좌파들이 판을 치면서 5·18 유공자라는 괴물 집단을 만들어내 우리 세금을 축내고 있다.”(김순례)
이런 말을 과연 ‘표현의 자유’라고 너그러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대저 황당한 발언에 대해서는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다르다. 그러나 당신이 그 생각을 말할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우겠다”고 말하면 좀 개념 있어 보인다. 그렇게 젠체하려고 김진태 등의 발언을 ― 내용이 아니라 형식 측면에서 ― 두둔해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당사자들이 언행에 비해 지나치게 가혹한 처벌을 받고 있다고 판단될 때나 가능한 법이다. 이들의 망언에 당시 자유한국당 지도부는 어떤 조치를 취했던가.
국민의힘이 자유한국당 시절 벌인 일들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한심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중 가장 한심한 일이 바로 이 5·18공청회 아닐까 싶다. 나경원 당시 원내대표는 당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남 일처럼 말했고, 김병준 당시 비상대책위원장은 그런 얘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만 말하는 데 그쳤다. 당시 한국당 지도부가 이 문제를 얼마나 미적지근 안이하게 바라보고 있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징계는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후에야 이루어졌다. 김진태는 가장 낮은 수준 징계인 경고를 받았고, 김순례는 3개월 당원권 정지에 처해졌다. 이종명에 대해서는 제명 처분이 내려졌으나 이를 최종 결정할 의원총회를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총선 직전에야 위성정당인 미래한국당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제명됐다. 이게 제명인가? 게다가 김순례는 당원권 정지가 끝나자마자 최고위원으로 복귀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공동선대위원장까지 맡았다. 김진태도 당당히 공천받았다. 그런 통합당이 총선에서 100석이라도 건진 것은 오히려 기적 아닐까?
지지하지 않을 텐데 무슨 헛수고?
5·18민주화운동 [동아DB]
김종인의 사죄가 있던 날, 포털사이트 뉴스 댓글을 보니 대체로 호평 일색인데, 간혹 이런 의견이 눈에 띈다. “거기 가서 사과한다고 호남 사람들이 통합당을 지지하지도 않을 텐데 무슨 헛수고냐.” 김종인이 호남에 간 것이 과연 단순히 ‘호남 표’를 얻으려는 의도일까. 김종인이 광주에서 사과한 것이 단지 ‘광주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시도일까. 잘라 말하면 김종인의 사죄는 “통합당이 점차 정상적인 정당이 돼가고 있습니다”라고 행동으로 보여주려는 메시지 아닐까 싶다. 굳이 계산적으로 사고하자면 “정상화의 흔적을 보여주는 데 이만한 상징직 이벤트도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광주 사람이다.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다. 대학을 나온 뒤로는 서울과 경기에서 살고 있으나 언제 어디에 살든 내가 ‘광주 사람’이란 사실을 잊은 적 없다. 누구나 고향을 떠올리면 애틋한 마음을 갖게 마련이지만 호남 사람이 고향에 갖는 감정은 유독 남다른 측면이 있다. 그건 역시 ‘5월 광주’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픈 누이를 남겨두고 고향을 떠나온 그런 심정과 같다.
누구는 짐승처럼 말한다. 이미 40년이나 지난 일을 갖고 “징하게 해 처먹는다”고(한국당 시절 차명진이 세월호 사건에 대해 한 표현이다). 또 누군가는 짐짓 냉정하게 말한다. 다른 민주화운동이나 비극적인 사건들과 형평에 맞지 않는 것 아니냐고, 왜 광주만 유독 우대해 줘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물론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5·18이 품고 있는 역사적 의미, 사회적 감정 등을 정확히 알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번 김종인의 사과문에서 유독 눈에 띄는 단어가 있다. 바로 ‘고립’이란 표현이다. 김종인은 6·25 때 자신과 가족들이 북한군에 쫓기던 기억을 이야기하며 “쫓기는 자의 공포와 고립된 자의 좌절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5·18로 인해) 호남 주민들이 겪었을 고립과 슬픔의 감정 또한 그에 못지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대목이었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면 이런 고립감의 의미를 쉽게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짝 엎드려 껴안고 토닥이는 게 정치
광주 사람들이 5·18에 대해 갖는 감정은 단순히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는 그런 희생의 의미가 아니다. 가장 쓰라린 기억은 ‘고립됐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일종의 집단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전시도 아닌데 민간인이 군인에게 ― 그것도 ‘우리’ 군인에게 ― 숱하게 총을 맞아 죽었다 (물론 전쟁 중에도 그것은 허용되지 않는 학살이다). 그것도 일체 뉴스와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남모르게 외로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죽었다. 그런 일이 벌어진 뒤에도 광주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숨죽이며 살아야 했고, 그 사실을 알리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고, 워낙 기막힌 일이라 외지 사람들은 듣고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만 외로이 바다에 남아 거센 파도를 맞는 ‘바위섬’이 된 기분이었다. 그것이 광주가 지닌 오랜 고립감이다. 애초에 호남이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됐다는 다소 섭섭한 감정이 있던 차에 고립감은 분노로 바뀌었고, 표출할 수 없는 분노는 오래도록 설움이 돼 쌓였다. 그것이 호남이 지닌 역사의 한(恨)이다.혹자는 광주의 집단 투표 성향을 나무라듯 이야기한다. 어떻게 그렇게 특정 정당에 몰표를 던질 수 있는 거냐며 조롱하는 의미로 말하기도 한다. 광주 사람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직 멀었다”고. 한을 풀려면 아직 멀었다고. 광주의 몰표는 ‘우리끼리라도 똘똘 뭉치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는 깊은 고립감에서 나왔다. ‘이것만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합법적 힘’이라는 간절함과 절박함에서 나왔다. 전략적 투표 성향이 없다느니, 그런 몰표가 오히려 다른 지역에 역효과만 낳는다느니, 그런 말은 다 소용없을 것이다. 광주는 광주의 길을 가는 거니까. 살고자 하는 단결 앞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나. 광주와 호남의 오랜 정치적 고립감을 풀어주지 않고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평범한 시민으로 정치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깨달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국민을 가르치려는 태도로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바짝 엎드려 껴안고 토닥이면서 나아가도 될 듯 말 듯한 영역이 바로 정치라는 비즈니스다. 광주에 대해서도 그렇다. 껴안는 것 말고 대체 무슨 방법이 있겠나. 광주가 큰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무슨 엄청난 대우를 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그저 폄훼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의 이른바 5·18공청회에 광주가 분노한 이유는 예우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다. ‘조롱’ 당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인터넷에 떠도는 여러 모욕의 문장 역시 그렇다. 광주를 정치적으로 포위하고 기를 죽여 이기겠다고? 아서라.
두드리고 또 두드려라!
게다가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광주는 그저 광주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1980~1990년대 대학을 다닌던 사람들에게,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함께하지는 못하더라도 미안한 마음으로 지켜본 사람들에게, 같이 고립감을 느낀 사람들에게, 광주는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지금도 적잖이 그럴 것이다. 광주가 모욕을 당하는 것은 내 청춘이 부정당하는 것이란 느낌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하니 광주와 싸우고 싶으면 싸우시라. 그것은 광주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대와 싸우는 일이 될 터이고, 내내 역사와 맞붙는 일이 될 것이다. 광주를 불가촉 성역(聖域)으로 남겨두란 말이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리란 말이다.다시 ‘김종인’으로 돌아와 보자. 그의 무릎 사죄를 보면서 역시 김종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쇼인지 진심인지는 심장을 들여다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지만, 어떻게 하면 중도를 끌어올 수 있는지, 그는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이다. 오랜 시간 한국의 보수정당은 호남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거기 가봤자 표도 안 나올 텐데” “환영받지 못할 텐데” 하는 식으로 시큰둥하게 대했고, 어차피 당선 가능성도 없을 테니 출마하고픈 사람은 하라는 식으로 후보자 공천마저 특별한 고민 없이 하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히 호남을 버린 것이 아니라 전국 유권자 20~30%가량을 아예 포기하고 시작한 셈이다. 김종인은 그 마음을 돌리려 광주를 찾은 것이다. 보수정당에 광주는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무한한 기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미래통합당이 ‘국민의힘’으로 이름을 바꿨다. 전두환이 만든 원죄로 인해 과거 민정당의 명맥을 잇는 정당의 후보가 광주에서 당선될 가능성은 요원한 일이고, “우리는 그때 그 정당이 아닙니다”라고 백번 말해도 광주 시민들은 등을 돌리겠지만, 두드리고 두드리고 또 두드리다 보면 광주의 마음이 조금은 풀리지 않을까, 광주에서 나고 자란 필자는 그렇게 생각한다. 비록 ‘쇼’라고 할지라도 가고 또 갔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코로나19 때문에 김종인 홀로 갔다지만 사태가 진정되면 국민의힘 소속 의원 전체와 당직자 모두 버스를 타고 갔으면 좋겠다. 굳이 무거운 마음 가질 필요 없이, 친구 집에 가는 것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간다 해도 상관없으리라. ‘5·18 왜곡 처벌법’이 갖고 있는 우려와 문제점 같은 것도 그때에야 비로소 흉금을 터놓고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하자. 광주가 폭동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은 광주의 진실을 더욱 널리 알림으로써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것이지 한 줌도 되지 않는 철없는 무리의 입을 기어이 틀어막음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않을까. 죽음의 고립 속에서도 자유와 민주를 외친 5월 영령들도 그런 법안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김종인의 사죄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역사의 화해는 가해자의 통렬한 자기반성과 고백을 통해 가장 이상적으로 완성될 수 있습니다만, 권력자의 진심 어린 성찰을 마냥 기대할 수 없는 형편에서 그 시대를 대표하여 제가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 (…) 너무 늦게 찾아왔습니다. 벌써 일백 번이라도 사과하고 반성했어야 마땅한데 이제야 그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이러한 고백과 반성, 그리고 화해를 향해 나아가는 훈훈한 모습을 더욱 많이 보고 싶다. 그때 우리는 용서를 이야기할 수도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