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호남 껴안기①]
5·18 정강·정책에 넣고 광주서 ‘무릎 사죄’
민주당 칼 겨눈 전선에 방어막 설치
“野 찍지 않아도 반감 낮춰…대선에 유효”
“金, 이낙연 대세론에 의구심”
김종인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8월 19일 광주 5·18 민주묘지에서 참배하고 있다. 그는 방명록에 “5·18 민주화 정신을 받들어 민주주의 발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뉴스1]
수일 전부터 당내에서 오가는 말에 반감이 스몄다. ‘민주당 따라 하기’니 ‘유사 정의당’이니 같은 군말이 나왔다. 기본소득과 경제민주화를 정강·정책에 삽입하는 게 강경 보수층의 반발을 살 거라는 경고도 있었다. 자칫 당내 갈등의 진원지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뇌관은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문구를 적시하느냐 마느냐에 있었다. 그가 기억을 더듬었다.
“5·18을 정강·정책에 적시하자 하니 처음에는 이견이 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5·18을 활자로조차 담지 못한다면 호남과 말로만 함께하는 정당일 뿐이다. 마지막 특위 회의에서 이견 가진 사람들을 설득해 최종적으로 해당 내용이 담겼다. 여론도 긍정적이었다. 이후 당내에서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없다.”
현재 국민의힘 정강·정책 전문에는 “2·28 대구 민주운동, 3·8 대전 민주의거, 3·15 의거, 4·19 혁명, 부마항쟁, 5·18 민주화운동, 6·10 항쟁 등 현대사의 ‘민주화운동 정신’을 이어간다”고 적혀 있다.
이번엔 8월 19일. 김종인 당 비상대책위원장은 광주 5·18 민주묘지를 찾아 무릎을 꿇고 “광주 정신을 훼손한 정치인에 회초리를 못 들어 당 책임자로서 사과한다”고 밝혔다. 그는 “부디 용서를 구한다”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죄송하고 또 죄송하다”며 거듭 말했다. 발언 도중 감정이 북받치는 듯 울먹이는 모습도 보였다.
‘너희는 5·18 거부 세력’ 표적 제거
5·18은 국민의힘의 취약 전선이었다. 당내 일부 인사들의 5·18 폄하 발언에 지도부가 미온적으로 대처한 탓이 컸다. 민주당이 무시로 칼날을 겨눠도 적극 대응하지 못했다. 김 위원장의 ‘무릎 사죄’는 표적을 제거하는 효과를 냈다. 장성철 공감과논쟁 정책센터 소장은 “앞으로 민주당에서 ‘너희는 5·18을 거부하는 세력이야’라고 더는 공격하기가 어렵게 됐다. 방어막을 쳤다는 점에서 굉장히 성공적인 행보”라고 설명했다.김 위원장은 4년 전에도 같은 장소에서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 2016년 1월 31일 그는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 신분으로 5·18 민주묘지를 방문해 윤상원·박기순 열사 묘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참여한 전력도 사과했다. 한 인물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양당 수장 신분으로 두 차례나 무릎을 꿇었다. 한국 정치사에 남을 반전 드라마다.
지역 언론의 사설은 밑바닥 여론을 간접적으로나마 가늠할 수 있는 지표다. 8월 20일 ‘광주일보’는 “김 위원장의 사죄는 당의 불모지인 호남 민심을 끌어안기 위한 포석의 하나겠지만 그동안 보수정당이 보여준 모습에서 진일보한 것임에는 틀림없다”라고 썼다. 같은 날 ‘남도일보’도 “만시지탄이지만 김 위원장이 통합당을 대표해 역사와 5월 영령 앞에 사죄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고 했다.
반대 강도 낮추기…與의 긴장감
서진(西進)은 겉으로 ‘호남 껴안기’의 모양새를 띠고 있다. 실제 목적지는 가까이는 내년 서울시장 보궐선거, 멀리는 내후년 치러질 대선이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김 위원장의 ‘무릎 사죄’는 수도권을 겨냥한 것”이라면서 이렇게 설명했다.“선거에서는 나를 찍게 하는 것뿐 아니라, 나에 대한 반대 강도를 낮추는 전략도 필요하다. 특히 대선에서는 반감을 낮추는 전략이 상당히 중요하다. ‘난 안 찍겠지만 남 찍는 건 말리진 않겠다’와 ‘저 세력이 이기면 우린 다 죽었다’의 차이는 엄청나다. 대선 차원에서 보면 (김종인의 서진에) 민주당이 긴장감을 가질 수 있다.”
전국 곳곳 호남 출신 유권자의 표심에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정치권에는 수도권 유권자의 30% 정도가 호남 출향민이라는 정설이 있다. 장성철 소장은 “호남에서 민주당에 보내는 80~90% 지지뿐 아니라, 전국에 흩어진 호남 유권자의 강력한 결속 덕에 문재인 정부의 지지도가 추미애 장관 아들 의혹이나 부동산 문제에도 40~45% 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민주당은 여전히 호남당”이라고 말했다.
보수 계열 정당 출신으로 호남에서 10%대 득표율을 기록한 대선후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유일하다. 박 전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때 전북 13.2%, 전남 10.0%, 광주 7.8%의 득표율을 올렸다. 덕분에 1987년 이후 첫 과반 득표 당선인 타이틀을 쟁취했다. 그는 호남 유력 인사인 한광옥·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 등을 영입해 외연 확장을 시도했다. 19대 총선에서 ‘복심’인 이정현 전 의원이 광주 서구 을에 출마하기도 했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의 상대는 부산 출신인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후보였다. 반면 현재 민주당의 유력 대권주자는 전남 영광 출신의 이낙연 대표다. 이 대표가 본선행 티켓을 따내면 국민의힘 후보가 호남에서 득표율 10%를 넘길 가능성은 낮다.
실제 이 대표가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지휘한 4·15 총선에서 민주당은 광주, 전남·전북 지역구를 합해 27석을 건졌다. 직전 총선 성적표는 3석이었다. 민주당의 비례정당인 더불어시민당은 광주, 전남·전북에서 각각 60.95%, 60.34%, 56.02%의 득표율을 올렸다. 20대 총선 때 민주당은 호남 3곳에서 30% 안팎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쳤다. 4년 사이 바뀐 점은 호남 민심을 등에 업은 대권주자가 안철수에서 이낙연으로 바뀌었다는 점밖에 없다.
김종인의 의구심
호남발(發) ‘안철수 대망론’이 사그라졌듯 ‘이낙연 대세론’의 운명도 아직 안갯속이다. 총리는 대통령의 장막 뒤에 숨을 수 있지만, 여당 대표는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 지지도는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다. 한국갤럽이 9월 9~10일 전국 18세 이상 10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선후보 선호도 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결과 이재명 경기지사가 22%를 기록해 21%를 얻은 이 대표를 오차범위 내에서 앞섰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광주, 전남·전북에서 이 대표의 지지율은 43%로 이 지사(23%)를 크게 웃돌았다. 이 지사는 경북 안동 출신으로 수도권에 정치 기반을 두고 있다. 이 대표의 상승세가 꺾이면 43%의 지지율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미지수다. 호남 쟁탈전이 원점에서 재출발하는 거다. 그때는 김 위원장의 서진 행보가 전략적 묘수로 작동할 공산이 크다. 민주당 주류인 친문의 지역 기반은 부산·경남(PK)이다.
김 위원장과 가까운 국민의힘 핵심 관계자는 “향후 이낙연·이재명 세력 간 갈등이 표출될 가능성이 크다. 2014~2016년에 짙었던 호남의 반문(反文) 정서가 이후 사라지게 된 데는 전남지사와 총리를 지내며 대세론에 올라탄 이 대표의 힘이 컸다”면서 “이 대표가 대권 가도에서 미끄러지면 문 정부를 지탱하던 호남 민심이 흔들릴 것이다. 이미 김 위원장은 ‘이낙연 대세론’의 지속 여부에 의구심을 갖고 있다”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