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대학원생은 전근대적 억압·통치 관계
‘쪽수’에 의해 결정되는 의사결정 구조
시간강사 울린 강사법
일부 교수들의 도덕·윤리적 타락 점입가경
‘동아일보’ 2018년 4월 12일자 ‘교수비리 내부고발 했더니…대학원생 미래가 날아갔다’ 제하 기사에 실린 대학원생들의 ‘갑질 폭로’ 발언. [동아DB]
정치는 비정상이 가득한 혐오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더 좋은 쪽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직접적이고 강한 효력을 갖는 분야다. 정치에의 참여는 민주시민으로서 갖는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다. 정치를 험상궂은 벌레 바라보듯이 배척하는 것은 기가 막힌 일이다.
심하게 욕먹는 정치인들도 우리와 같은 시대에 사는 한국 사람이다. 그 말은 곧, 정치인들의 의식이나 행동수준은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어떤 정치인이 막말을 하고 권력을 부당히 사용해 치부를 했다면 이는 우리 사회에서 만들어진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당연히 우리는 그 원인의 창출에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한다. 마치 남 말 하듯이 정치인들이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존재인양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존중의 온실’과 구린내
정치인들과는 상반되게 대단히 너그러운 대접을 받는 것이 대학사회와 교수들이다. 요즘은 대학사회의 일그러진 양상이 한 번씩 보도가 돼 어느 정도 실상이 알려져 있다.한국은 기본적으로 교육자를 높이 쳐주는 사회다.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이념이 우리 정신의 깊은 곳에 박혀 있다. 대학은 ‘상아탑’이자 ‘지성의 전당’으로 추앙을 받는다. 희귀물(稀貴物)이자 맑고 아름다운 상아로 만든 탑을 대학이라고 하는 것은 대학과 교수가 존중받는 현상을 상징적으로 일러준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존중의 온실’에서 망쳐지는(spoiled) 곳이 바로 대학사회다. 구석구석마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구린내가 숨어 있다. 어떤 곳은 사회 일반보다도 더 심하다. 대학은 결코 상아탑이 아니다. 짧게 정의하자면, 최고의 지성들이 존재하는 동시에 최악의 야만도 함께 있는 곳이 대학이다.
일단 대학교수가 되면 최대한의 영역이 보장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교수가 하나의 ‘성주(城主)’와 마찬가지라는 게 대학사회의 일반적 인식이다. 교수는 가르치는 제자들과 수직적 관계에 놓이기도 쉽다. 도제식으로 논문 지도를 받아야 하는 대학원생들과의 관계는 가히 전근대적 억압과 통치의 관계로 빠져들곤 한다. 교수가 엄청난 지성의 힘으로 자신의 욕구를 컨트롤해 나가지 않는 한, 그 욕구는 무풍지대를 향해 달려 나간다. 물론 ‘신독’(愼獨)의 외롭고 의로운 행동준칙을 실현하는 교수들도 많다. 일반적으로 말해 재단의 간섭이 있는 사립대학이 그마저도 없는 국공립대학보다 교수 일탈의 강도가 약한 편이다.
신임교수 채용이나 학장, 총장 선출 과정에서 벌어지는 파벌싸움의 실상을 한 번 보면 누구나 학을 뗄 것이다. 그것은 무자비한 전쟁터다. 상대방 집단의 교수들이 제 아비를 죽인 것도 아니건만 불구대천의 원수로 삼기 일쑤다. 파벌싸움이 교수들의 일상까지 지배하고, 무섭게 다가오는 압력을 견디지 못한 교수는 자살까지 하는 판이다.
‘형식적 다수결’이 만드는 패거리
대학은 상아탑이 아니다. 최고의 지성들이 존재하는 동시에 최악의 야만도 함께 있는 곳이 대학이다. [동아DB]
헌법재판소는 일찍이 한국 대학사회와 같은 다수결주의를 ‘형식적 다수결’이라고 했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다수결은 구성원 간의 대화와 토론, 상호존중에 의한 타협을 이뤄가는 ‘실질적 다수결’이라는 의미다. 헌재는 이것이 우리 헌법상 요구되는 요소라고 판시했다. 대학사회가 형식적 다수결주의로 일관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다.
대학원생들이 자기밖에 모르는(selfish) 교수들에 의해 겪어야 하는 비정상적 상황도 어느 정도 알려졌다. 일부 교수들은 노예 부리듯 대학원생을 이용한다. 여학생에 대한 성적 착취도 드물지 않게 이뤄진다. 대학원생 딸을 둔 부모들은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무엇인지 대체로 이해할 것이다.
시간강사들도 무척 열악한 처지에 있다. 대학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곳이 아니다. 차별이 구조화, 내면화된 곳이다. 정규직인 교수들과 비정규직인 강사들 간 처우가 하늘과 땅처럼 심하게 나뉜다. 그것이 빚어내는 어둠이 대학을 숨 막히게 한다. 시간강사들은 목숨을 내버리면서까지 부당한 대우를 세상에 외쳤다. 그들의 처참한 외침이 과연 우리 사회에 무슨 반향을 일으켰던가? 대학은 그들에게 불타는 지옥을 만들어 놓고 말았다.
정부는 시간강사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시간강사법’을 만들어 시행했다. 강사들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조치를 취하기가 재정적으로 버거운 대학들은 강사를 대거 해고했다. ‘보따리 장사’처럼 시간강사를 하면서도 교수로의 찬란한 비상을 꿈꾸던 이들이었다. 그들이 그나마 갖고 있던 꿈마저 대학에 빼앗겨버리는 쪽으로 일이 전개되고 있다.
해결책은 단 하나다. 정규직의 처우를 내리고, 비정규직의 처우는 올리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평균적인 정규직, 비정규직 간 격차 수준으로나마 차별을 시정한다면 이 비극은 쉽게 끝낼 수 있다. 그러나 그 실행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방적 복종관계가 빚어낸 일탈
일부에 한정된 것이긴 하나, 소수 교수들이 저지르는 도덕적·윤리적 타락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작은 성 안에서 평생 독재 권력을 행사하다 보니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조차 잊어버린 듯하다. 대학사회의 비리 특히 일방적 복종관계에서 일부 교수들이 행한 성적(性的) 일탈, 금전적 비리 등을 교육부가 작심하고 조사하면 그 규모의 방대함에 놀랄 것이다.한국사회에서 방종한 성(性) 문화의 결정판이 ‘룸살롱’이다. 한국인들이 중국이나 몽골, 동남아권으로 진출하며 가장 먼저 한 일 중의 하나가 한국식 룸살롱의 개설이었다. 한국에서 오는 사람들이 주요 고객인 해외의 그 많은 룸살롱은 성업을 이뤘다.
교수들은 학회나 세미나 참석 등으로 해외출장의 기회가 잦다. 일부 교수는 출장 전에 미리 지인이나 제자들에게 부탁해 ‘물 좋은 곳’을 마련해 놓으라고 한다. 신나게 놀 수 있고 성매매까지 가능한 룸살롱 말이다. 예약해둔 곳에 도착하면 그들은 발정기의 동물로 변한다. 눈이 시뻘개져 성매매 대상을 찾는다. 소리를 꽥꽥 질러가며 여성을 데려오라고 호통친다. 이런 일부 교수들의 탈선을 보며 다른 교수들은 구역질을 한다.
한 보직교수가 내게 직접 한 말이다. “성매매가 왜 나쁜 거요? 나도 중국에 가면 성매매 해요. 이것이 뭐 잘못됐어요? 남자의 아랫도리에서 벌어진 일은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비겁한 행동이지요.” 그의 확신에 찬 장광설은 사실 병든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들이 쓰곤 하는 표준적인 말일 뿐이다. 또 이런 자들이 패거리 형성을 잘해 학내 주도권을 장악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식이다. 제자들에게 모범이 되고 끊임없이 자신의 연구에 몰두하는 교수들은 무시된다.
더 늦기 전에, 더 많은 피해자가 생기기 전에, 대학사회에 대해 대대적인 조사를 한 번 벌여보자. 그 피해자들은 우리의 소중한 자식들이다. 조사를 통해 그나마 혼신의 힘을 다해 대학사회의 오염과 타락을 막고자 노력해온 교수들의 아름다운 선행도 드러나게 해보자.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생생한 부분을 살려나가는 것이 치료의 정도(正道)다. 이런 과정을 통해 확연한 변모를 해야 한국의 대학이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대학은 우리가 가진 힘의 큰 원천이 될 수 있다.
*가을이 가기 전에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짓고 밭을 정리한다.
■ 가을 햇살
한 해 농사 마무리로
이곳저곳 정리하자니
땀 흐르는 이마, 그 위에
가을 햇살 넘실댄다
엄마 손처럼 부드럽다
머리를 쓰다듬고
꼬옥 끌어안는다
엄마의 눈을 올려다보니
태고의 파도가 출렁인다
잔잔하고 슬프게 숨 쉬는
끝 모를 용서가 담긴 파도
*식어가는 대지의 온기를 혼신의 힘으로 끌어올리며, 화단과 밭에 꽃들이 피었다. 저 꽃들이 지면 겨울이 성큼 다가온다.
왼쪽부터 ‘다알리아’ ‘코스모스’ ‘천일홍’. [신평 제공]
● 1956년 출생
● 서울대 법학과 졸업
● 제23회 사법시험 합격·사법연수원 제13기
● 인천지방법원, 서울가정법원, 대구지방법원 판사
●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헌법학회 회장 역임
● 저서: ‘법원을 법정에 세우다’ ‘로스쿨 교수를 위한 로스쿨’ ‘들판에 누워’(시집)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