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6 권력 엘리트와 청년의사 간 두 개의 세계

• 농촌의 감수성 vs 첨단기술 문명의 세례

• 동지·우애·헌신의 가치 vs 인센티브에 의한 보상

• 쪽수·집단주의·문화 vs 실력·개인주의·전문지식

• 의·과학 지식, 인문교양보다 가치 없다 보는 386

• 文정권 파워엘리트 114명 中 106명이 문과

• 과학·데이터 아닌 과장된 동지적 연대로 얼룩

• 산업 일군 기업인·전문가 대신 유시민·김어준 주도권 잡아

_{민경우(55) 민경우수학연구소 소장은 1983년 서울대 의예과에 입학한 후 중퇴했다. 이듬해 같은 학교 국사학과에 재입학했다. 그는 1987년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을 지냈다. 그 뒤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으로 일했고,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했다. 그는 NL(민족해방 계열) 진영의 핵심 이론가로 꼽혀왔다. 민 소장이 의사 파업을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했다. <편집자 주>}


의사 파업은 여러 갈래에서 논할 수 있는 이슈다. 먼저 정책의 맥락에서 의대 정원이나 ‘의료 수가’의 문제로 다룰 수 있다. 또 다른 맥락에는 사상이나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다. 문재인 정권의 생각과 그에 저항하는 의사들, 특히 청년 의사들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짚어야 한다. 

나는 의사 파업을 서로 다른 세계관의 대충돌로 본다. 이렇게 보는 까닭이 있다. 이번 사태는 내 지난 과거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는 운동권의 세계에서 30년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문재인 정권이 추진하는 각종 정책에는 공히 1980~90년대 운동권의 정서와 사상이 흐르고 있다. 정부·여당이 내놓는 정책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시곗바늘이 3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의사 파업을 둘러싼 각종 논란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의사 파업에 담긴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 수십 년 전의 과거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다.

긴 밤 지새우고, 거친 들판에 서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을 통해 발전했다. 이 저항을 문화적으로 상징하는 사람이 김민기다. 김민기는 20대 청년의 마음을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아침이슬에 비유했다. 양희은이 부른 ‘상록수’에 이르면 맑고 순결한 청년 대학생들의 마음은 “거친 들판에 솔잎이 되리라”는 다짐으로 나아간다. 

아침이슬처럼 맑게 살자던 청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만의 공동체관·사회관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은 분단과 전쟁의 역사를 지주-소작 관계, 혁명의 관점에서 다룬다. ‘태백산맥’에 따르면 빨치산 운동의 역사는 계승해야 할 과거다. 



즉 ‘태백산맥’은 문학 텍스트라기보다는 정치 텍스트에 가깝다. 휴전이 되고 지리산에 고립된 빨치산들은 선택의 기로에 직면한다. 이때 그들은 현실투쟁에서 역사투쟁으로 태세를 전환한다. 소설 속 작중인물 염상진은 역사투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현실투쟁은 인민해방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눈앞에서 성취시키는 것이며 역사투쟁은 인민해방을 우리가 목숨을 바쳐 뒷날 역사 속에서 성취시키는 것입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1980년대 후반 운동권의 사고가 실제로 그랬다. 학생들은 매년 초 지리산을 찾아 수십 년 전 빨치산 투쟁을 기억하며 새해를 맞곤 했다. 그들은 빨치산 투쟁을 40년 전의 불행했던 과거가 아니라 계승해야 할 현재의 이야기로 봤다.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고 첨단 과학이 발전하는 시대에 그들은 그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당시 운동권은 이론과 학습에 기초했다기보다는 문화나 인간적 의리에 기초한 정서적 공동체였다. 이에 ‘태백산맥’에서 형성된 인간관·사회관은 그 소설이 표방하는 현실의 옳고 그름과 무관하게 질기게 살아남았다.

농촌의 감수성과 첨단 기술문명의 세례

‘태백산맥’에서 정점에 이른 운동권 청년들의 인간관·사회관은 2020년 최고의 엘리트 집단인 청년의사들과 충돌한다. 

첫째, 운동권이 주목한 이들은 주로 노동자와 농민 같은 전통 집단이었다. 그들은 제국주의와 기득권 세력에 의해 경제 발전이 억제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노동자와 농민의 숫자가 늘어야 하고, 또 이들이 수행할 역할이 크다고 봤다. 

문 대통령을 포함해 집권 세력이 노동자와 농민 등을 중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재인 정부가 강조하는 ‘노동 존중’은 로봇이나 인공지능(AI) 시대의 노동자가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설을 통해 주장한 대로 ‘착취받는 제조업 노동자’를 뜻한다. 농촌과 농민에 대한 애정도 유사하다. 

1990~2000년대 한국은 세계 일류의 산업국가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지식노동자, 엔지니어 등 전문 지식인층이 두텁게 형성됐다. 의사는 그들 중 가장 중요한 집단이다. 

사실 두 집단은 전혀 다른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문 대통령과 386 권력 엘리트들은 농촌에서 자랐고, 청년 시절 농촌을 배경으로 한 사회이론을 추구했다. 청년의사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도시화된 사회에서 첨단 기술문명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둘째, 386 권력 엘리트들은 사회 구성 원리로서의 인센티브를 부정한다. 농촌 공동체나 동지적 관계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기제는 주로 이웃에 대한 애정과 우애 또는 사회적 헌신 같은 가치다. 

반면 인센티브는 사람 관계를 규율하는 작동 원리다. 교육·보건·통신·전기 등 첨단 기술문명은 엔지니어와 전문 지식인에 의해 지탱된다. 동시에 엔지니어와 전문 지식인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인센티브 제도의 의해 유지된다. 인센티브 제도가 없다면 첨단산업이 존재할 수 없다. 즉 인센티브 제도를 고려하지 않는 제반 정책과 언술은 헐거운 기반 위에 위태로이 서 있을 수밖에 없다. 

386 권력 엘리트가 사회 작동 원리로 논했던 우애와 헌신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았다. 소련과 동구권이 붕괴한 터여서 더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과거의 향수 혹은 문화적이고 정서적인 바탕에서 우애·헌신에 대해 사고했다. 386 세대 권력 엘리트는 권력에 근접했을 때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고 작동하는지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조국 사태’나 ‘정의연 사태’ ‘박원순 사건’이 잘 보여줬다. 

386 권력 엘리트에게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라는 게 없었다. 자기비판 및 상호비판 등 추상적인 동지적 관계가 이를 대신했다. 견제·균형과 같은 제도적 시스템이 없는 조건에서 그들은 손쉽게 비리와 범죄의 유혹에 시달렸다. 그렇게 386 권력 엘리트들은 ‘문서 위조, 공금 횡령, 성추행 의혹’에 휩싸였다. 

그들은 인센티브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사회적 책임 대신 모든 사람이 평등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주택에 살자고 제안했다. 막상 그것이 자신의 문제로 전이됐을 때 거의 대부분의 386 권력 엘리트들이 ‘내로남불’의 덫에 빠졌다. 그들은 미국을 비난하면서 자녀를 미국에 유학 보냈고, 특권 교육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특목고에 자녀를 입학시켰다. 

여기서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386 권력 엘리트의 주장 대부분은 현실에서 검증된 정책 이론이 아니다. 청년 시절 가졌던 판타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아이들이 많이 태어났다. 당시 태어난 이들을 베이비붐 세대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1955~1963년생을 1차 베이비붐 세대, 1968~1974년생을 2차 베이비붐 세대라고 한다. 1975년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 격인 1955년생이 20세가 됐다. 성인이 된 1차 베이비붐 세대는 거대한 인구를 무기 삼아 이내 군부를 퇴장시키고 민간 정치인들을 정치의 전면에 부상시켰다.

의사 되는 데는 특별한 노력 필요 없다?

현재 집권 세력은 이 시기를 배경으로 성장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감수성과 심리 상태를 기저에서 결정한 요소는 ‘쪽수’였다. 쪽수가 많았기 때문에 자신의 집단을 효과적으로 규합할 수만 있다면 어지간한 목표는 이룩할 수 있었다. 집단적 일체감을 중시하고 이론보다는 문화와 정서에 몰두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 

1980~90년대 한국은 급속히 산업화·현대화됐다. 전문가·엔지니어를 중심으로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됐다. 이들 중산층은 자신들도 공부를 열심히 해 부를 형성한 만큼 자녀 교육에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의대 신화는 그렇게 시작됐다. 

1970년대만 해도 서울대 공대의 입학 커트라인이 매우 높았다. 물론 서울대 의대의 입학 커트라인이 더 높았지만, 서울대 공대의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다. 서울대의 거의 모든 이공계열 학과가 연세대 의대보다 입학 커트라인이 높았다. 연세대 의대가 그러하다면 다른 의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거의 모든 의대가 서울대 공대보다 입학 커트라인이 높다. 

의사 파업을 주도한 청년의사들은 최정상급 학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학창 시절 남보다 노력해 자신의 목표를 쟁취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노력으로 남보다 좋은 결과를 얻고, 이를 통해 사회적 부와 존경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집권층인 386 권력 엘리트 집단을 만들어낸 키워드가 쪽수, 집단주의, 문화와 감수성이라면 청년의사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키워드는 실력, 개인주의, 전문지식이다. 특히 공공의대 신입생 선발을 둘러싼 논란에서 양자 간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났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공공의대 신입생을 시민단체가 추천한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386 권력 엘리트들은 의대 공부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지 못한다. 그들 대부분은 제대로 된 전공 공부도 하지 않고 대학을 졸업했다. 베이비붐 세대가 나이를 먹고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큰 노력 없이 성공할 수 있던 사람들이다. 

386 권력 엘리트가 보기에 의대에 진학하고 의사가 되는 것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도 가능한 일이다. 그들은 의사가 갖고 있는 첨단과학 지식에는 거의 문외한이다. 정작 의학·과학이 역사와 철학 등 그들이 한때 습득했던 인문교양에 비해 한물 떨어지는 기능적 지식이고, 의사들은 자신들이 민주화운동 하던 시절 공부나 하던 덜떨어진 속물이라고 본다. 

따라서 386 권력 엘리트는 적당한 수준의 지식이 있으면 누구라도 의사가 될 수 있고,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문 지식보다 인문적 소양 또는 품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인문적 소양과 품성은 민주화운동 경력을 가진 본인들이 판단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조금 더 적나라한 이야기

조금 더 적나라한 이야기가 있다. 386 권력 엘리트, 즉 ‘민주화 세대’ 대부분이 자신의 민주화운동 경력을 과장하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당시 대학생들은 해방구에 가까운 캠퍼스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렸다. 가끔 있는 경찰과의 충돌 이외에는 대부분의 운동 국면이 축제에 가까웠다. 

학생 시절 운동을 했음에도 아무 지장 없이 직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판·검사나 교사가 되는 데도 거의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운동권 경력은 점차 훈장이 됐고, 부동산 가격 상승과 고임금 등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특별한 혜택까지 입었다. 

반면 386 권력 엘리트가 쌓은 지식과 소양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들이 활동했던 공간의 대부분은 과학적 탐구와 데이터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었다. 과장된 동지적 연대와 이를 확인하는 문화적 행사로 얼룩졌다. 그들이 갖고 있던 지식의 상당량은 이미 학문적으로 틀렸다고 판명이 난 주장이었다. 그들은 그런 주장을 검증도 없이 반복해서 외쳤다. 

시민단체 대부분이 그러하다. 단언하자면 환경단체들의 경우 원자력발전 문제에 개입할 전문성은 물론 과학과 공학에 대한 기초 지식조차 없다. 공공의대 선발 과정에 시민단체들이 관여할 수 있다고 구상했던 것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현대 과학의 수준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2005년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 격인 1955년생이 50살이 됐다. 그즈음부터 한국 사회는 베이비붐 세대의 입맛에 맞게 차례로 변모할 운명이었다. 다소간의 예외는 있지만 민주화 세력은 차례로 교육감 선거, 국회의원 선거, 대통령선거 등을 석권하며 한국 사회의 주류로 떠올랐다. 불행한 것은 그 과정에서 민주화 세력 중 가장 복고적이고 사변적인 집단이 주도권을 잡았다는 점이다. 

2017년 대선 직후 매일경제신문사에서 문재인 시대 파워 엘리트 114명을 소개한 일이 있다. 필자는 114명을 학부 시절 전공 기준으로 문과와 이과로 구분한 바 있다. 분석 결과, 114명 중 문과 출신이 106명으로 약 93%에 달했다. 비문과 출신은 강기정(전남대 공대), 김용익(서울대 의대), 박정(서울대 농생), 손혜원(홍익대 응용미술), 염한웅(서울대 물리), 우원식(연세대 토목), 전현희(서울대 치대), 정청래(건국대 산업공학)였다. 

즉 문재인 정부 파워 엘리트 집단의 대부분은 역사나 노동, 세월호 참사나 위안부 문제 등에 관심이 많고 담론과 논쟁 그리고 편 가르기에 능한 사람들이다. 반면 한국이 고도로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성장한 기업인, 엔지니어, 전문가 집단은 배제됐다. 오랜 세월 산업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 대신 유시민, 김어준 같은 이른바 논객들이 주도권을 잡았다.

거대한 판타지의 종말

역사 바로세우기, 적폐청산과 같은 거대한 판타지가 막을 내렸다. 대신 우리는 생활 현장에서 매우 낯선 두 개의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세계 일류의 원자력 대신 태양광과 같은 친환경 에너지를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사고나 특목고는 특권교육이며, 1가구 1주택 기준을 넘어서는 주택 보유는 투기에 해당한다고 소리 높여 말한다.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더 양질의 교육을 원하고 수도권의 번듯한 아파트에 살기를 희망한다. 

이 충돌의 정점에서 우리는 의사들의 파업을 지켜봤다. 한쪽은 평등주의로 무장한 사변적인 몽상가들이다. 다른 한쪽은 전문지식과 그에 따른 정당한 보상을 원하는 청년의사들이다. 양자의 충돌은 의료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떤 모양새여야 하는지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제기했다. 이것이 의사 파업을 비전과 사상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아마도 2020년 청년의사들 덕에 수면으로 드러난 이 전선은 순차적으로 정치의 전면에서 존재감을 드러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