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호

돈·권력 후각 남달랐던 총학생회 ‘꼬마 권력자’들

[봉달호 편의점 칼럼] 우리는 ‘총학’에 왜 그리 목맸나

  • 봉달호 편의점주

    runtokorea@gmail.com

    입력2020-10-3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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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락치 오인 폭행 사건… “인륜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 총학은 ‘재정적 빨대’이자 ‘대중적 보호막’

    • 비자금은 일반의 상상을 넘어설 정도였다

    • 작은 권력 누리며 거짓말·권모술수·진영논리 실컷 익혀

    • 민주주의 악용하는 온갖 못된 짓을 ‘그곳에서’ 배웠다

    1990년대 초반 대학가 집회 광경.  [동아DB]

    1990년대 초반 대학가 집회 광경. [동아DB]

    대학 시절 나는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전대협, 한총련 의장을 수두룩이 배출한, NL(민족해방)의 아성으로 불리는 국립대학을 다녔다. 그런데 나는 NL계열 총학생회장이 아니었다. 우리 대학 역사상 두 번째로 당선된 비(非)NL 계열 총학생회장이었다. 항간에는 비운동권 - 혹은 반(反)운동권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우리 스스로 그러한 호칭을 탐탁잖게 여겼고, 우리 딴에는 ‘새로운 학생운동’을 주창하긴 했으나 사실 내가 새로운 학생운동을 위해 뭘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부터 회고하는 이야기는 그 오래된 1년에 대한 한참 뒤늦은 고백이자 반성이다.

    프락치 오인 폭행 사건

    1997년 5월 말 우리 대학에서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이튿날 지방지 사회면에는 “술 취한 사람이 캠퍼스에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해 응급실에 싣고 갔는데 이미 숨진 상태였다”는 내용의 조그만 토막 기사가 실렸다. 그때만 해도 이 사건의 숨은 내막을 사람들은 몰랐다. 차차 밝혀진즉, 그것은 우리 대학 총학생회 간부들이 대학가를 배회하던 청년 한 명을 공안기관 프락치로 지목해 집단으로 구타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었다. 피해자가 정신을 잃자 강제로 소화제와 각성제를 먹였는데, 그것이 기도에 걸려 질식해 숨졌다.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우발적으로 때린 것이 아니라 몇 시간 동안 골방에 가둬놓고 고문하듯 때렸다는 사실이고, 피해자가 죽자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대책 회의까지 열었다는 사실이며, 그렇게 보름이나 쉬쉬하다 나중에 알려졌다는 사실이다. 자칫 단순 변사 사건으로 처리될 수도 있었던 이 사건은 피해자 어머니가 “수상한 전화가 걸려온 적 있다”고 경찰에 알리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가해자들이 고문 과정에 피해자 집에 전화를 걸어 우리 대학 재학생이 맞느냐고 확인해 본 것이다. 우리 대학으로서는 20년도 넘게 지나간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부끄럽고 부담스럽게 여길 것이다. 당시에도 학교 이미지가 나빠질까, 그것을 걱정했던 것 같다. 

    그해 봄은 잔인했다. 6월, 한양대에서 또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대학가를 배회하던 청년을 프락치라며 잡아 구타했다. 이 사건이 끔찍했던 이유는 폭행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피해자를 이불로 둘러싸 물까지 뿌려가며 때렸다는 사실이고, 역시 밤새도록 가둬놓고 때렸다는 사실이며, 피해자의 코에 최루탄 분말을 집어넣어 고문하면서 프락치라는 사실을 자백하라 다그쳤다는 사실이다. 남영동 대공분실 풍경이 과연 이러했을까. 너무 지나치지 않으냐는 주위의 만류에 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지금은 전쟁 상황이다. 인륜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는 발언은 당시 언론을 통해 서글프게 회자됐다. 그들 또한 대책 회의를 열어 입을 맞추고 사건을 은폐하려 애썼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 전해인 1996년 8월, 연세대 사태가 있었다. 광복절을 맞아 이른바 통일 행사를 한다며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연세대에 대거 집결했는데, 경찰이 포위하자 닷새가량 학교 건물을 점거하고 대치한 사건이다. 6000명이 연행됐고 500명이 구속됐다. 일본 학생운동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도쿄대 야스다 강당 사건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 사건으로 한국 학생운동은 이미 조직력에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는데, 이듬해 전남대와 한양대에서 잇따라 터진 민간인 폭행 치사 사건으로 도덕성까지 무너지며 회복 불능 상태로 치달았다. 그런 시국에 우리 대학에 반(反)한총련 총학생회가 탄생한 것은 적잖은 화제가 됐다. 조금 정치적으로 느껴지는 표현이긴 하지만 그만큼 우리 대학 ‘학우’들의 판단이 현명했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되돌아봐도 그런 선택을 고맙게 여긴다. ‘고맙다’는 표현은 이럴 때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전남대뿐 아니다. 박근혜를 탄핵하고 치른 선거처럼, 1997년 대학가 총학생회 선거는 어쩌면 결과가 뻔한 선거였는지도 모른다. 그해처럼 전국에 비운동권-반운동권 총학생회가 대거 깃발을 꽂은 적도 없다. 후대에 역사를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세의 흐름에 따라 식은 죽 먹는 식으로 당선됐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당사자인 우리로서는 그렇지 않았다. 더욱이 전남대는 그랬다. “부자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처럼, 조직력과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었지만 아직 수백~수천 명을 거뜬히 동원할 수 있는 NL계열에 맞서 우리 선거운동원은 기껏 스무 명 남짓이었다. 한 달 가까운 선거운동 기간 동료들이 겪은 고통과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당선된 후 총학생회 운영은 쉬웠을까? 여기서부터 반성과 회한이 시작된다. 총학생회장 선거는 이겼지만 단과대학 학생회는 후보조차 내놓지 못했기 때문에 어차피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았나 싶다. 대통령을 당선시켰지만 국회는 극단적 여소야대 상황이랄까. 총학생회 중앙운영위원회에 참석하는 열댓 명가량 단과대학 학생회장 가운데 ‘우리 편’은 두세 명에 불과했고, NL은 3분의 2 이상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정치권으로 말하면 야당이 개헌선까지 넉넉히 확보한 셈이다. 그 1년 내내 남아 있는 기억은 지루한 싸움뿐이다.

    학생회관서 장사하려면 ‘운동권 운영자금’ 대야

    1996년 이른바 ‘한총련 연세대 사태’. [동아DB]

    1996년 이른바 ‘한총련 연세대 사태’. [동아DB]

    당연한 이야기지만, 표결에 대한 입장이 완전히 달랐다. 상대편은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모든 사안을 표결로 밀어붙이려 하고, 우리는 어떻게든 표결을 피하려 애썼다. 상대편은 그것을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졸지에 우리는 반(反)민주가 됐다. 그때의 논쟁을 되돌아보면, 형식 논리에 밀리다 보니 나 자신도 억지 주장으로 일관한 적도 많았다. 고백건대 제발 중앙운영위원회가 열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때때로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부회장에게 회의 진행권을 넘기고 도망가기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어찌나 홀가분하던지. 밖에서는 이른바 협치(協治)를 하라, 논리로써 설득하라 권하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겪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나를 철천지원수이자 적(敵)으로 인지하는 상대방을 설득하는 일이란 바윗돌 위에 씨앗을 뿌려 꽃을 피우는 일과도 같으리라. 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는 2년을 집권(?)했다. 첫 총학생회가 어수선했음에도 다음번 선거에서 학생들이 또 우리를 선택한 이유는 그만큼 당시에 반NL, 반운동권 정서가 강력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와 고백건대 사실은 1기 학생회를 마감하며 우리는 다음번 선거에 후보를 내지 않으려 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싸우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인 데다 ‘이런 식이라면 도대체 총학생회를 이끌어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회의감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거의 우기다시피 ‘차기 총학생회도 접수할 것’을 주장했고, 스스로 출마해 당선된 것인데, 권력욕 때문이었을까, 당시 내가 동료들에게 내걸었던 내부적인 명분은 “NL의 자금줄을 계속 끊어놓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총학생회를 ‘접수’하고 우리는 NL의 신기원을 발견했다. 흔히 ‘총학생회 비리’라고 하면 학생회비 유용이나 착복 등을 떠올리지만 사실 운동권이 장악한 대학에서 학생회비는 ‘푼돈’에 지나지 않았다. 학생회비는 정기적인 감사를 받는데다 - 그래봤자 감사위원도 전부 한통속이지만 - 사용처가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어 유용하기 쉽지 않았다. 간혹 그런 소문으로 구설에 오르내리는 다른 대학 총학생회를 보면 NL 입장에서는 3류로 느껴졌을 것이다. 학생회비 이외에 형성되는 비자금(?)이 일반인의 상상을 넘어설 정도인데 굳이 공식적인 학생회비에 손댈 이유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학생회관이 운동권의 왕국처럼 여겨지는 치외법권이었고, 거기서 장사를 하려면 누구든 ‘운동권 운영자금’을 대야 했다. 가장 큰 ‘돈줄’은 자동차 운전면허 학원이고, 영어학원이 뒤를 이었던 것 같다. 이건 학생회의 공식적인 수입으로 잡히지 않는 재원(財源)이다. 그런 수입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학생이 태반이니 감시나 견제도 있을 리 없다. 이 밖에도 학생회 재원은 숱했고, 합법을 가장한 금전적인 커넥션 또한 다양했다. 우리 대학 총학생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규모와 수법은 달랐을지라도 1980~90년대 웬만한 총학생회가 그랬다. 그들이 학생회 선거에 그토록 사활을 거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총학생회장을 맡은 연도는 학생회관 입주 업체들이 일괄 재계약을 하는 해였다. 그분들은 학교 측과 합법적 계약을 하고 장사하지만, 학생회 간부들이 입찰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는 탓도 있고, 사실 학생회가 명분과 구실을 만들면 업체 하나쯤 넣고 빼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예컨대 현재 업체를 살리고 싶으면 “학생복지 침해하는 신규 입찰 반대한다”고 시위하면 되는 것이고, 신규 업체를 들이고 싶으면 “무분별한 재계약에 반대한다”고 반대로 시위하면 되는 것 아닌가. 논리 따위 필요 없다. 그 과정에 뒷거래가 오가지 않을 수 없다. 

    ‘부패의 백과사전’과도 같은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기간에 걸쳐 벌어졌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 했던가. 운동권 세력이 강력한 대학일수록 그 규모는 크고 은밀했다. 그런데 이렇게 재정과 관련된 부분은 운동권에서도 극히 소수만 아는 비밀이고, 심지어 총학생회장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총학생회장은 모르는 편이 나은 일이었다. 총학생회장은 구속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고, ‘위대한’ 회장님은 지고지순 좋은 것만 보면서 투쟁에만 전념해야 하니까. 

    그럼 이런 비자금은 대체 어디에 쓰였을까? 운동권 학생회에서는 당연히 집회나 시위를 하는 데 사용했고, 운동권 조직을 운영하는 데 쓰였다. 전대협이나 한총련 의장을 결정하는 과정에도, 물론 다양한 요소가 고려됐지만, ‘의장’의 전국적인 활동력을 보장할 수 있는 ‘자금력’이 무시할 수 없는 측면이었다. 우리 대학에서 유독 전대협-한총련 의장이 많이 배출된 이유를 꼽자면 그러한 배경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의장을 배출한 대학은 공식적인 분담금이 상당했고, 상근 간부를 파견하고 출범식 등 전국 단위 집회를 개최하는 비용 역시 학생으로서는 상상 못 할 자금이 소요됐다. 우리는 NL운동권의 그러한 자금줄을 잠시나마 눌러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당선된 비운동권-반운동권 총학생회는 부패의 고리를 일체 끊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학생 다이어리 제작이나 축제 비용과 같은, 이른바 ‘좋은 일’에 쓰면 된다는 명분이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학생회 외부 수입원을 완전히 공개해 버리자는 내부 의견도 있었으나 역시 무시했다. 우리도 조직 운영을 하고, 다음 총학생회 선거를 준비하고, 새로운 학생운동 연대체를 결성하는 작업 등에 비자금을 소모했다. 그러니까 부패의 권력자만 바뀐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비자금 조성과 운영 실태를 훤히 알고 있는 NL 측에서도 2년 동안 그런 문제는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던가. 다음번엔 자신들 차지가 될 수 있는 밥상은 걷어차지 않는 조심스러운 현명함(?)이 있었던 것이다. 

    가장 크게 반성하는 점은, 내가 임기를 마감하며 후배들이 다음 총학생회 선거를 치를 때 우리 간부 가운데 한 명이 양심선언을 한 일이다. 재정 파트에 있던 간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폭로는 하지 못했고,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다양한 이유로 우리는 다음 선거에 졌을 가능성이 높지만, 선거운동 기간 우리는 도덕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과정이 어떻든,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소란을 피운 점에 대해서도 뒤돌아 후회하고 반성한다.

    뒤늦게나마 사죄하는 이유

    당시 학생회 간부의 양심선언에 우리 총학생회는 특별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괜히 가타부타 논박해 봤자 득이 될 것 없다는 정치적 판단을 했던 것이다. 가까운 친구들이 물었을 때도 “고발자가 원래 정신이 좀 이상한 놈” “권력욕에 그러는 것”이라는 식으로, 가벼운 해프닝이라는 듯 거짓말을 했다. 우리는 ‘내부고발자’를 그렇게 대했다. 그렇게 오늘의 정치를 익힌 셈이다. 20년이 지나서야 이토록 뒤늦게, 그때 그 간부에게 깊은 사죄의 말씀을 전한다. 물론 가장 큰 사죄는 우리를 믿고 선출해 준 당시 학우들에게 드려야 하겠다. 일말의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귀중한 ‘신동아’ 지면을 빌려 이렇게 개인적인 참회의 변이나 늘어놓는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독자 여러분이 내가 행간에 전하려는 말을 이미 눈치챘으리라 믿는다. 

    대체로 대학가는 11월에 각급 학생회 선거를 치른다. 대학을 나온 이후로 총학생회 선거에는 관심조차 없다가, 최근 후배에게 “아직 대학에 NL계열 학생회가 존재한다”는 말을 듣고 적이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들이 그것을 쉽게 포기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럼 그렇지’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여전히 ‘단물’은 남아 있는 것이다. 오늘도 대학가에는 운동권과 비운동권이 치열하게 다투고, 여의도 국회 뺨치는 정치 활극이 캠퍼스 안에서 벌어지고, 부패의 커넥션은 여전히 강고하고,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 밥그릇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소식 또한 전해 들었다. 왜 역사는 1㎜도 진보하지 않는가.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이런 것도 우리의 ‘종특’인가 싶은 씁쓸한 자괴감마저 밀려왔다. 

    대저 학생회 활동을 통해 대화하고 타협하고 협상하고 토론하고 설득하는 민주와 포용의 자세를 익혀야 할 텐데, 현실은 반대의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대학에서 작은 권력의 맛을 한껏 누리고, 민주주의를 악용하는 온갖 못된 짓을 배우고, 강한 권력의지를 키우고, 거짓말과 권모술수, 억지스러운 진영논리만 실컷 익힌 사람들이 그때의 경력을 바탕으로 어디에서 또 어떤 능력을 발휘할지! 이제는 국민도 대충 아는 사실이다. 꼰대가 젊은이들 하는 일에 끼어드는 것과 같이, 내가 이런 훈수 둘 자격이 있는가 싶지만, 반성의 의미로 남기는 말이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어떤 것

    시간을 거슬러 1985년,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학생회가 부활했다. NL은 빠르고 영악하게 전국 학생회를 장악했다. 그때 내세운 이론이 이른바 ‘전투적 학생회론’인데, 말이 ‘이론’이지 내용은 간단하다. “지하조직을 감추기 위한 외피로 학생회를 활용하자.” 속셈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역시 NL은 대중 감각, 정치와 권력에 대한 후각만큼은 시작부터 남달랐던 것이다. 그리하여 학생회는 좋게 말하면 운동권 노선과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대중적 보호막’이 됐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재정적 빨대’ 구실을 수행했다. 그렇게 그들은 대학가에 ‘철옹성’을 구축했다. 40년 가까운 세월, 거기서 숱한 ‘꼬마 권력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 학생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지금 우리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조용히 성찰하며 되돌아볼 일이다. 

    요즘처럼 민주주의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시절도 없는 것 같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어떤 것’을 피부로 강하게 느끼는 계절이다. 올가을에도 짙어가는 낙엽과 함께 대학가 선거 소식이 들릴 것이다. 올해도 투표율이 미달해 총학생회를 구성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올 것이고, 선거 일정을 몇 번이나 연장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릴 것이며, 저것이 과연 스무 살 학생들의 소행이 맞을까 싶어 쯧쯧 혀를 차게 되는, 싯누런 은행(銀杏) 냄새와도 같은 사연 또한 진동할 것이다. 

    진영논리의 배후에 숨어 실컷 사익을 추구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오늘의 위정자를 보면서, 이념집단이 아니라 이익집단이 된 지 오래인 맹목적 추종자들을 보면서,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은 대학 학생회 풍경을 보면서, 많은 것이 겹쳐 떠오른다. 우리는 학생회를 통해 과연 무엇을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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