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호

“꿀 빨아” “귀태”… ‘빠’에 취한 갈라치기 정치

[말이 죽었다! 말이 말이 아닌 정치㊤] 위기의 한국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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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기자

    jayko@donga.com

    입력2020-12-24 10: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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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열은 대한민국 뉴노멀

    • 30대 초선에서 50대 중진까지 막말

    • SNS 커뮤니케이션, 현실로 전염

    • ‘갈라치기’ ‘확증편향’에 오염된 언어

    • 비뚤어진 소영웅주의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은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평생 독재의 꿀을 빨았다”고 했다.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은 문재인 정부를 두고 “민주주의를 가장한 귀태”라고 했다. [동아DB]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은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평생 독재의 꿀을 빨았다”고 했다. 배현진 국민의힘 의원은 문재인 정부를 두고 “민주주의를 가장한 귀태”라고 했다. [동아DB]

    내전(內戰)이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나라가 찢기고 조각났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은 사람과 진영을 가르는 선이 됐다. 그전에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선이었다. “너는 어느 편이냐”는 질문은 “추(秋)와 윤(尹) 중 누구를 지지하나”로 치환됐다. 분열은 대한민국의 ‘뉴노멀(New Normal)’이다. 

    분열을 극한까지 밀고 가는 요소는 말이다. ‘설저유부(舌底有斧)’, 즉 혀 밑에 도끼가 들었다는 표현은 한국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까발린다. 소설가 김훈은 “말이 병들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듣는 자가 있어야 말이 성립되는데, 악악대고 와글거릴 뿐 듣는 자는 없다”(‘연필로 쓰기’ 중)고 썼다. 갈등을 조정해야 할 국회는 병든 말의 양성소 노릇을 하고 있다. 초선에서 중진까지 민주주의 마비 대열에 합류했다.

    윤호중, 배현진과 트럼프의 거리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인 윤호중(58)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20년 12월 7일 법사위 전체회의에서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평생 독재의 꿀을 빨더니 이제 와서 상대 정당을 독재로 몰아간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여당의 법안 강행 처리를 독재라고 비판하자 맞대응 격으로 꺼낸 말이다. 윤 의원은 86세대 운동권 그룹이자 친문(親文) 실세로 꼽힌다. 

    그가 원색적 표현을 꺼낸 건 처음이 아니다. 11월 26일 윤 의원은 기자 출신인 조수진 국민의힘 의원을 두고 “그 양반이 지라시 만들 때 버릇이 나오는 것 같아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4월 7일 민주당 사무총장으로 당 현안점검회의에 참석했을 때는 김종인 당시 미래통합당 공동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돈키호테에 비유하며 “황교안 애마를 타고 박형준 시종을 앞에 데리고 대통령 탄핵이라는 가상의 풍차를 향해 장창을 뽑아 든 모습”이라고 비난했다. 

    야당에서는 방송사 앵커 출신으로 말을 직업으로 다뤄본 초선 의원이 논란을 빚었다. 당 원내대변인을 맡고 있는 배현진(38) 국민의힘 의원은 12월 8일 페이스북에 “지금 이 순간 온 국민 삶을 피폐하게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가장한 귀태(鬼胎·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존재), 바로 문재인 정권”이라고 썼다. 



    귀태는 정치권의 대표적 금기어다. 2013년 7월 당시 홍익표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박근혜 대통령을 “귀태의 후손”이라고 칭해 논란을 일으켰다. 곧장 여당(현 국민의힘)에서 “도를 넘었다”는 비판이 나왔고 여론이 악화하자 홍 의원은 결국 원내대변인을 사퇴했다. 

    윤호중·배현진 두 의원이 쏟아낸 병든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상대편을 조롱하거나 비하하면서 ‘내 편’ 만 들으면 된다는 의식이 묻어 있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상대편을 향한 비하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남발했다. 두 의원과 트럼프의 거리는 멀지 않다. 민주주의는 이견을 가진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통해 집단적 결정을 내리는 것을 정당한 권력의 행사로 간주하는 체제다. 두 의원은 애초부터 정당한 권력을 행사하려는 의지가 없었던 거다.

    敵 찾는 게임 전락한 정치

    2020년 11월 4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우리가 이번 선거에서 이겼다”고 승리를 선언하고 있다. [AP=뉴시스]

    2020년 11월 4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백악관에서 “우리가 이번 선거에서 이겼다”고 승리를 선언하고 있다. [AP=뉴시스]

    배 의원은 페이스북, 그러니까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쓴 글로 설화(舌禍)를 빚었다. 본래 글은 말보다 정제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다.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의 전환은 근대화의 신호탄 중 하나였다. 

    하지만 SNS 발달로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간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다. 모바일 메신저의 대중화로 이런 양상은 더 짙어지고 있다. 과거라면 전화로 잡았을 약속도 지금은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메신저로 할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글과 말 혹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차이를 또렷이 인식하지 않는다. 

    장민지 경남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인터넷 도입 20년이 지나면서 익명으로 폭력적 표현을 온라인에 쓰는 게 익숙한 풍경이 됐다. 여기에 SNS 발달로 온·오프라인의 경계가 사라지자 직접 대면해서도 대화의 예의를 잊어버린 경우가 잦아졌다”고 진단했다. 

    SNS가 바꾼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정치는 적(敵)을 찾는 게임에 불과하다. 진영 논리가 도드라진 사회에서는 정치가 적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이를 위해 동원되는 전략이 ‘갈라치기’다. SNS는 ‘갈라치기’에 가장 적합한 도구다. 미국 민주주의를 뿌리부터 뒤흔든 트럼피즘(Trumpism·트럼프주의)의 발원지도 다름 아닌 SNS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2016년 10월 ‘사회과학 담론과 정책’에 발표한 논문 ‘‘미디어혁명’이 파괴한 ‘위선의 제도화’’에 이렇게 썼다. 

    “트럼프에겐 유권자들과 직거래를 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걸 가능케 한 것이 SNS와 인터넷이었다. 트위터에 700만, 인스타그램에 100만 명 넘는 팔로어를 거느린 트럼프는 온라인에 자신만의 뉴스룸을 구축했다. 기성 매스미디어는 문명의 이름으로 이런 전사들을 중도하차하거나 몰락하게끔 만드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워왔다. SNS와 인터넷이 그 방어벽을 해체하면서 트럼프의 발판이 마련됐으니, 이 어찌 ‘미디어 혁명’이 만든 ‘트럼프 현상’이 아니겠는가.” 

    ‘한국형 트럼피즘’의 전진기지는 페이스북이다. 배현진 의원이 페이스북에 쓴 ‘귀태 글’은 2020년 12월 16일 현재 ‘좋아요’ 2314회, 댓글 538개, 공유 125회를 기록했다. 댓글 대다수는 배 의원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내용이다. 이날 기준으로 그를 팔로우하는 사람은 1만7962명이다. 

    여기다 ‘유튜브 저널리즘’이 뒤섞였다. 유튜브는 AI(인공지능) 알고리즘을 통해 사용자의 취향과 관점에 부합하는 영상을 지속 추천한다. ‘극우 정치평론 채널’을 시청하는 빈도와 시간이 늘면 향후에도 비슷한 영상에만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문빠(문재인 대통령 열성 지지자)’를 자처하는 사람이 특정 채널만 구독하는 까닭도 여기 있다. 이에 지지자는 ‘확증편향’에 빠지게 되고, 정치인은 지지자를 결집하기 위해 자극적 표현을 쏟아낸다.

    “‘빠’ 현상은 정치운동”

    SNS가 깔아놓은 판에 특정 정치세력과 정치인만을 추종하는 ‘빠’ 현상이 결합했다. ‘진보석학’ 최장집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2020년 6월 ‘한국정치연구’에 발표한 논문 ‘다시 한국 민주주의를 생각한다’에서 “‘빠’ 현상은 강고한 결속력과 공격성을 핵심으로 한 정치운동”이라며 “가상으로 조직된 다수가 인터넷 소셜미디어를 통해 여론을 주도하고, 이견이나 비판을 공격하면서 사실상 언론 자유를 제약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썼다. 

    정치인 처지에서는 상대편을 원색적으로 비난해도 지지자는 호응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기 용이한 구조다. ‘다른 사람은 주저하는데 나는 할 말은 한다’는 비틀어진 소영웅주의가 잉태하기 좋은 환경이기도 하다. 의사소통과 공론 형성이 요체인 민주주의에는 거대하면서도 항구적인 위기다. 

    장민지 경남대 교수는 “정치인이 자극적·폭력적으로 말할수록 지지자가 더 열광적인 반응을 보내고, 이것이 다시 SNS를 통해 정치인의 언어에 영향을 미치는 악순환 구조”라고 말했다.



    고재석 기자

    고재석 기자

    1986년 제주 출생. 학부에서 역사학, 정치학을 공부했고 대학원에서 영상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해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5년 하반기에 상아탑 바깥으로 나와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유통, 전자, 미디어업계와 재계를 취재하며 경제기자의 문법을 익혔습니다. 2018년 6월 동아일보에 입사해 신동아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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