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 기본원칙 무시’ 비판 봇물
신용등급 낮은 차주 대출 비중 늘어날 듯
부실 위험↑, 전반적 금리인상 가능성
고소득자 소비 줄어 경기침체 우려
2020년 11월 23일 서울 한 은행의 대출 창구. 앞서 같은 달 13일 금융위원회는 연소득 80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가 은행에서 1억 원 넘는 신용대출을 받는 경우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40% 규제를 적용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뉴스1]
금융사 처지에서는 이런 냉정한 평가가 꼭 필요하다. 신용등급을 책정하는 이유는 개별 소비자로 인한 손실 위험도를 가늠하기 위해서다. 대출을 해줄 경우 해당 소비자가 원금과 이자를 갚을 확률을 알려주는 게 바로 신용등급이다. 소득이 높고 그간 대출금을 잘 갚아온 소비자라면, 당장 대출해 줘도 돈을 떼일 확률이 낮다. 그래서 대출도 많이 해주고 이자도 적게 받는다. 월급이 적고 연체 기록이 잦은 이라면 위험도가 크니 높은 이자를 받고 돈도 적게 빌려준다. 그래야 금융사도 자꾸 돈을 떼이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다.
왜 금융위는 고소득층 노렸나
금융 당국 처지는 어떨까. 금융 당국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금융사의 건전성 관리다. 우선 금융사가 돈을 벌기 위해 무분별하게 대출을 늘리는 것을 막는다. 단순히 총량을 제한할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평가 시스템에 따라 합리적으로 대출하도록 규제하고 검사한다. 이를 통해 금융 시스템이 부실화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여기까지는 금융계에서 하나마나 한 뻔한 이야기에 속한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논리에 역행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금융 당국이 나서서 신용등급이 높은 고소득자의 대출을 제한하고, 상대적으로 리스크가 큰 대출을 독려하는 양상이 연출되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2020년 11월 13일 금융위원회가 내놓은 가계부채 대책이다. 대책에는 고소득자에 대한 대출 규제 강화 방안이 담겼다. 연소득 80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가 은행에서 1억 원 넘는 신용대출을 받는 경우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40% 규제를 적용키로 했다. 그간 규제지역 내 시가 9억 원 초과 주택을 담보로 한 대출에만 적용되던 DSR 40% 규제를 고소득자 신용대출로까지 확대한 것이다. 또 1억 원 이상의 신용대출을 받은 차주(借主)가 대출 실행 1년 이내에 규제지역에 있는 주택을 구입하면 해당 대출을 즉시 회수하는 방안도 담겼다.
정부는 최근 부동산시장 과열 등으로 가계대출이 급증하자 추가 규제 카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DSR을 강화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됐다. DSR은 모든 가계대출의 연간 원리금 상환액을 연소득으로 나눈 값을 말한다. 연소득으로 원금과 이자를 제대로 갚을 수 있는지 살펴보는 지표다.
일각에서는 정부가 DSR을 일괄적으로 강화하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지만, 금융위는 ‘핀셋 규제’를 택했다. 모든 금융 소비자의 대출을 조이면 급하게 돈이 필요한 서민까지 대출을 받지 못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문제는 금융위가 핀셋으로 집은 계층이 고소득자라는 점이다.
정부는 왜 고소득자를 지목했을까. 한 금융 당국 관계자는 “고소득자의 고액 신용대출을 규제하는 방안이 그나마 부작용이 적었기 때문”이라고 귀띔하면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사태 속에서 전면적으로 규제를 강화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단계적으로 실행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신용대출이 급증하는 흐름을 막긴 해야겠는데, 부작용이 우려되니 그나마 논란이 크지 않을 만한 방안을 차선책으로 짜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당장 대출이 끊겨도 소득만으로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소득자의 경우 자금 여력이 있기 때문에 대출금을 부동산 투기 자금으로 쓸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고려됐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고객 부담 커질 수도”
[동아DB]
먼저 금융 당국이 금융시장의 기본 원칙을 무시한 방안을 내놨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단 연 8000만 원보다 소득이 적은 사람의 신용대출 한도가 더 높아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 금융사는 차주의 신용등급에 따라 대출 규모와 금리 수준을 ‘냉정하게’ 정해야 하는데, 고신용자에게 되레 대출을 적게 해줘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셈이다.
2020년의 경우 코로나19 사태로 소상공인이 어려움을 겪자 정부가 은행 등 금융사에 이들에 대한 대출을 독려했다. 금융사는 리스크가 큰 소상공인과 서민 대출을 늘리고, 반대로 고신용자에 대한 대출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장기적으로 금융사의 건전성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한 은행 관계자는 “신용등급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들의 대출 비중이 높아질 경우 부실 위험이 커지게 된다”면서 “이 경우 전반적인 대출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결국 다른 고객들의 부담이 커질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고소득자 대출을 규제하겠다고 발표하자 다른 부작용도 생겼다. 규제가 적용되기 전 고소득자들이 일단 대출을 받아놓고 보자면서 줄줄이 은행 점포를 찾아간 것이다. 금융위에 따르면 2020년 11월 말 은행의 가계대출은 10월보다 13조6000억 원 늘었다. 이는 2004년 관련 통계가 집계된 이래 월 최대 증가 폭이다. 이 중 신용대출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타 대출의 경우 전달보다 7조4000억 원 늘며 역시 가장 큰 증가 폭을 기록했다. 고소득자의 경우 대출 여력이 큰 만큼 증가 폭 역시 컸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 정도 부작용은 금융 당국도 어느 정도 예상했을 터다. 보통 대출 규제 강화 방안을 발표하면 일시적으로 돈을 빌리려는 사람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이후에는 다시 대출 규모가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또 있다. 고소득자들이 향후 대출을 못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하면 저축률이 상승할 수 있다. 저축이 늘면 좋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저축이 늘어난 만큼 소비는 줄어들게 마련이다. 소비가 줄면 경기는 침체한다. 특히 고소득자의 소비가 줄면 더욱 더 그럴 수 있다.
일시적 브레이크냐 교란이냐
이처럼 많은 부작용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금융 당국은 고소득자를 콕 짚어 핀셋 규제를 단행했다. 워낙 가계대출이 늘다 보니 일시적 브레이크가 필요했다는 태도다. 다만 이번 가계부채 대책이 사실상 부동산시장의 과열을 잡기 위해 내놓은 정책이라는 점에서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규제할수록 과열되기만 하는 부동산시장을 잡기 위해 금융시장을 교란하면서까지 금융 당국이 나서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이다.2020년 11월 23일 서울 한 은행의 대출 창구. 앞서 같은 달 13일 금융위원회는 연소득 80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가 은행에서 1억 원 넘는 신용대출을 받는 경우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40% 규제를 적용키로 했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