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에 차게 먹어야 제맛인 음식을 꼽으라면 평양냉면을 떠올리는 이가 많을 것이다. 나는 ‘단술’이 맨 먼저 생각난다. 단술은 쌀알이 동동 뜨는 감주, 즉 식혜를 말한다. 여리여리한 단맛에 구수함이 배어 있는 식혜는 식재료로서 쌀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음료다.
겨울 음료로 인기 많은 식혜(오른쪽). 단술이라고도 하며 농익은 단맛이 매력이다. [GettyImage]
쌀로 만들 수 있는 음식은 식혜 말고도 많다. 차지고 단맛 좋은 쌀은 달콤한 푸딩 재료도 된다. 식은 밥을 냄비에 담고 밥이 잠기도록 우유를 부은 뒤 설탕을 넣는다. 이 재료를 약한 불에 올려 끊임없이 저으며 우유가 밥에 스며들도록 끓인다. 농도가 되직하다 싶으면 우유를 좀 더 넣어 촉촉하면서 부드럽게 만든다. 쌀이 떠먹기 좋을 정도로 걸쭉하게 익으면 불을 끈다. 이때 버터 한 조각과 달걀노른자를 풍덩 빠뜨려 골고루 섞으면 조금 더 이국적 풍미가 난다.
쌀로 만든 요리의 풍부한 식감
식은 밥에 우유와 설탕을 넣고 잘 익히면 풍부한 식감의 푸딩이 된다. [GettyImage]
밥알이 살아 있는 쌀 요거트. [김민경 제공]
밥알이 살아 있는 쌀 요거트는 그대로 먹어도 좋고, 마시기 전 곱게 갈아 시판 요거트처럼 만들어도 된다. 시큼하고 구수한 풍미에 쌀 특유의 단맛이 연하게 난다. 달콤한 재료를 섞으면 시판 요거트에 좀 더 가까워진다. 이외에 불린 쌀을 곱게 갈아 팬케이크를 만들어도 맛있다.
여러 가지 재료가 한 그릇 안에 들어 있어 맛이 풍성하다. 최근에는 밀가루 섭취를 줄이려고 주키니호박이나 가지 등을 얇고 길게 썰어 라자냐면 대신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아무래도 씹는 맛이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면 넣을 자리에 채소 대신 볶은 쌀을 넣으면 쫄깃한 식감을 살리면서 오밀조밀 고소한 맛까지 더할 수 있다. 쌀은 여러 재료가 층을 이루도록 단단히 잡아주는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니, 여러모로 쓸모가 좋다.
볶은 쌀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생쌀의 물기를 뺀 뒤 식물성 기름에 달달 볶는다. 이때 마늘이나 양파를 넣어 향을 내도 된다. 전복죽 끓일 때와 비슷한데 참기름은 오래 볶으면 안 되니 올리브유나 포도씨유, 현미유 같은 걸 쓰는 게 좋다.
부지런히, 한참을 볶으면 새하얗던 쌀 표면이 조금 투명해진다. 그럼 물을 조금 넣고 계속 볶는다. 맹물보다는 채수나 육수를 넣으면 요리 맛이 더 좋아진다. 물을 한꺼번에 많이 넣으면 죽이 되니 조금씩 여러 번에 나눠 넣는다. 쌀이 쫄깃하게 익으면 소금, 후추로 간을 맞춘다.
이탈리아에서는 볶은 쌀 요리를 리조토(risotto)라고 한다. 쌀을 볶을 때 육수 대신 레드와인을 조금씩 넣으면 레드와인 리조토가 된다. 쌀이 익기 시작할 때 버섯, 호박, 콩처럼 수분이 많이 나오지 않는 채소나 해산물 등을 넣고 함께 볶아 요리 맛을 더할 수 있다. 쌀이 쫀득하게 익을 무렵 토마토소스, 크림소스 등을 넣어 한소끔 끓이고, 마지막에 버터 한 조각을 넣어 골고루 저으면 꽤 근사한 볶은 쌀 요리가 완성된다.
고슬고슬 바스락~ 안남미 볶음밥 만들기
버섯과 크림소스로 맛을 낸 버섯리조토(왼쪽). 안남미로 만들어 바스락거리는 볶음밥. [GettyImage, 마켓컬리 제공]
찰기 없는 안남미는 밥을 지어놓아도 알알이 폴폴 날린다. 씹는 맛이 부드러우면서도 건조한데 바로 그 바스락거림이 매력이다. 안남미로 밥을 짓고 베이컨, 달걀, 쪽파 등을 썰어 넣어 볶음밥을 만들면 중국집 요리 부럽지 않게 고슬고슬 맛있다. 안남미는 쌀보다 전분이 적어 탄수화물 함량이 낮다. 혈당 관리와 다이어트에도 다소 도움이 된다.
매일 먹는 우리 쌀을 색다르게 즐기고 싶을 때는 버섯솥밥을 해보자. 냄비 바닥에 도톰하게 썬 양파를 넉넉하게 깔고 그 위에 불린 쌀을 넣은 뒤 맨 위에 버섯을 듬뿍 얹는다. 버섯은 아무리 많이 얹어도 숨이 팍 죽으니 양손 가득 잡아 두 움큼 정도 얹어도 된다. 향을 즐기고 싶으면 표고버섯, 씹는 맛을 즐기고 싶다면 느타리·백만송이·팽이버섯 등을 택한다. 밥물은 평소보다 조금 적게 잡고 바글바글 끓여 익힌 다음 밑바닥 양파까지 골고루 섞어 먹는다. 양파가 눌으면 더 맛있으니 물이 잦아든 뒤 냄비 바닥에서 타닥타닥 소리가 날 때까지 잠깐 둬도 된다. 구수하고 향긋한 버섯물이 스며든 밥에 달게 익은 양파를 섞어 먹는다. 간을 안 해도 심심하지 않다. 반찬 생각이 나면 생김에 양념장 곁들여 한 입씩 싸 먹으면 된다.
송화버섯과 은행을 넣은 솥밥. [마켓컬리 제공]
시래기와 곤드레나물처럼 향이 좋은 묵은 나물도 솥밥 짓기에 알맞은 재료다. 물에 불린 나물을 삶아 입맛대로 간을 살짝 한다. 들기름에 다진 마늘을 넣어도 좋고, 참기름에 국간장을 조금 섞어도 좋다. 나물을 먹기 좋은 길이로 썬 뒤 쌀과 섞어 밥을 지으면 끝이다. 구수한 나물 솥밥에는 청양고추 쫑쫑 썰어 넣은 칼칼한 양념간장이 제격이다.
솥밥은 되도록 냄비에 짓는다. 압력밭솥으로도 가능하지만 쌀 외 재료에서 나오는 수분 양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면 밥이 질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솥 바닥에 붙은 눌은밥 긁어 먹는 재미를 보려면 주물이나 바닥이 두꺼운 스테인리스 냄비를 택하는 게 좋다.
솥밥 짓기가 번거롭다면 버무리밥에 도전해 보자. 버무리밥은 밥을 지은 다음 다른 재료와 섞어 먹는 밥을 일컫는다. 비빔밥인가 생각할 수 있지만 좀 다르다. 비빔밥은 여러 재료와 양념이 절묘하게 어우러져야 맛이 난다. 손이 많이 가고 만들기 쉽지 않다. 버무리밥은 단순함이 매력이다. 쌀을 안쳐 밥을 짓는 동안 원하는 재료를 준비해 휘휘 버무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내가 즐기는 버무리 재료는 나물 종류다. 미나리, 취나물, 참나물, 냉이, 깻잎순, 고춧잎, 시금치 등 연한 나물이면 뭐든 가능하다. 이왕이면 향긋한 것으로 하는 게 맛있다. 깨끗이 손질한 나물을 끓는 물에 소금 넣고 살짝 데친다. 물기를 최대한 꽉 짠 다음 먹기 좋게 썬다. 여기에 참기름, 다진 마늘, 다진 파, 국간장을 넣고 간을 맞춘다. 참기름 대신 들기름, 국간장 대신 고운 소금으로 맛을 내도 된다.
뜨거운 밥이 완성되면 양념한 나물을 넣고 살살 섞어 그릇에 담아 먹는다. 간단한 조리 과정에 비해 맛은 놀랍도록 좋다. 갓 지은 밥 사이사이에서 향과 함께 씹는 맛을 끝없이 뿜어내는 나물 덕분이다. 뜨거운 밥에 버무려지며 살짝 익은 마늘과 파가 참기름과 어울려 내는 향이 더욱 입맛을 북돋운다. 김 몇 장 혹은 장아찌 한두 쪽, 멸치볶음 한 술 정도 있으면 밥 한 그릇이 뚝딱 사라진다.
갓 지은 밥과 제철 재료의 기막힌 조화
장아찌를 넣고도 버무리밥을 만들 수 있다. 씹는 맛이 좋은 무장아찌, 향이 좋은 매실고추장장아찌, 고춧잎장아찌, 깻잎장아찌, 고추장아찌 모두 다 좋다. 장아찌를 다진 뒤 갓 지은 밥에 넣고 골고루 섞으면 끝이다. 김을 조금 부숴 올리거나, 깻잎을 곱게 채쳐 함께 올리면 향긋함이 더해진다. 밥을 먹기 전 참기름, 통깨를 한 번 둘러주면 더욱 좋다.젓갈버무리밥도 가능한데, 자칫하면 짠맛이 세지니 밥 한 공기에 젓갈 한 큰술 정도를 섞는 게 적당하다. 젓갈 역시 잘게 썰어 뜨거운 밥에 버무린 다음 부추, 깻잎, 돌나물, 상추처럼 생생한 푸성귀를 조금 얹어 먹는다. 밥을 채소에 싸먹는 쌈밥도 추천! 젓갈버무리밥에 오이고추를 송송, 잔뜩 썰어 넣고 섞어 먹어도 좋다. 아삭하고, 짭조름한데 매운맛이 살며시 올라온다. 의외로 맛이 좋아 입꼬리도 슬며시 같이 올라간다.
버무리밥은 도시락을 쌀 때 매우 유용하다. 준비 시간이 얼마 안 걸리고, 간을 해서 쉬 상하지 않는다. 여기에 마른반찬 한두 가지만 곁들이면 꽤 정성스러운 구성으로 보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