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월호

홍세화 “민주건달들이여 진보를 참칭하지 마라”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20-12-1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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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文, 임금님 그만두고 대통령으로 돌아가라

    • 국정 철학 없는 대통령, 선의의 약속과 침묵의 정치

    •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르는 민주건달들

    • 공수처는 더 큰 권력일 뿐… 민주적 통제 아니다

    • ‘우리가 조국이다!’와 상징폭력

    • 도대체 어떤 멘탈이기에 추미애를 수호하나

    홍세화 장발장은행 은행장. [조영철 기자]

    홍세화 장발장은행 은행장. [조영철 기자]

    문재인 대통령의 ‘사과’를 놓고 해석이 분분했다. 2020년 12월 7일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서 “혼란스러운 정국이 국민들께 걱정을 끼치고 있어 대통령으로서 매우 죄송한 마음”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마침내 사과’라고 했고, 누군가는 ‘사과 같지 않은 사과’라고 했다. 혼란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략된 ‘수수께끼 같은 사과’라고도 했다. 

    홍세화(74) 씨는 문재인 대통령의 모호한 화법과 처신을 ‘착한 임금님’에 비유했다. 25년 전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으로 화제를 일으킨 바로 그 홍세화다. 

    “일방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자리는 불편하지 않다. 임금님은 불편한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고 불편한 자리에 가지 않아도 되지만,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팽목항에 가야 했던 것도 임금님이 아니라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불편한 질문, 불편한 자리를 피한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은 대통령보다 임금님에 가깝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으로 백성한테서 ‘상소문’을 받는다는 점도 그렇다.”(한겨레 2020년 11월 20일자 기고). 


    “헛소리 그만두고 택시 운전이나 해라”

    2020년 2월 25일 민갑룡 경찰청장과 홍세화(오른쪽) 장발장은행장이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협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경찰청 제공]

    2020년 2월 25일 민갑룡 경찰청장과 홍세화(오른쪽) 장발장은행장이 서울 미근동 경찰청사에서 협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경찰청 제공]

    그럼 왜 ‘착한 임금님’일까. 불편한 자리는 피해도 선의의 약속을 하는 자리는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나 위로하면서 진상규명을 약속하고, 김용균 씨 유가족을 만나 위로하고 김용균법을 약속한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이 지지부진하고 ‘김용균이 적용되지 않는 김용균법’이 제정되자 대통령은 침묵한다. 부동산 문제, 공직자들의 미투 사건, 낙태 합법화, 성소수자 문제 같은 불편한 자리에서 대통령은 질문을 받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무엇보다 국민과 열심히 소통하겠다는 약속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홍세화 씨는 현재 ‘장발장은행’ 은행장이다. 2015년 2월 25일 설립된 ‘장발장은행’은 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받은 사람들 중에 벌금을 낼 형편이 못 돼 교도소에 갇혀 강제노역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빌려주는 은행이다. 이자도 없고 담보도 없고 신용조회도 하지 않는다. 대출한도는 300만 원, 6개월 거치 후 1년 동안 분납 상환하는 조건이다. 장발장은행은 지금까지 8900여 명이 보내준 11억6000만 원의 성금으로 864명이 교도소에 가지 않도록 지원했다.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에 가서 강제노역을 하는 사람이 연간 3만5000명에 이르는 현실에서 ‘가난의 대물림’을 끊는 작지만 의미 있는 시도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통념부터 깨야 한다던 그가, 이번엔 민생을 외면하는 이 정부에 단단히 화가 났다. 



    용산구 효창원로에 있는 인권연대 사무실에서 홍 대표를 만나자마자 ‘우리 대통령은 착한 임금님’ 제하 칼럼의 후폭풍에 대해 물었다. 

    “평생 먹을 욕 다 먹었습니다. 나이 칠십이 넘은 내게 ‘헛소리 그만두고 (파리로) 가서 택시 운전이나 하라’더군요. 자신들의 생각과 조금만 달라도 바로 튀어나오는 말이니까 이젠 신경 안 씁니다. 다만 그 글을 쓴 의도가 편한 임금님 노릇 그만하고 대통령이라는 엄중한 자리로 돌아가라는 바람이었는데 지금 대통령을 보면 제 뜻이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네요.”

    설득하기는 어렵고 선동하기는 쉬운 사회

    -다른 사람의 생각과 행동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인정해 주라는 ‘톨레랑스(관용)’ 개념을 한국에 전파했는데, 진영 논리에 따른 앵톨레랑스(불관용)가 활개를 치는군요. 

    “예상했던 반응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합리적 사고가 진영 논리에 완전히 갇혀버렸다고 할까요. 진영이 블랙홀이 돼버렸어요. ‘논리의 힘’이 아니라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죠. 그 위험성은 여러 학자가 지적했어요. 사회심리학자인 어빙 재니스 교수가 집단사고를 ‘응집력이 강한 집단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만장일치를 이루려고 하는 사고의 경향’이라고 했고, 철학자 마이클 린치는 ‘지적 오만함은 파벌적일 때 가장 치명적이다’라고 했어요. 우리는 여기에 ‘빠’와 ‘양념’의 정치, 공작 정치가 더해져 진짜 정치는 실종된 거죠. 그래서 제가 설득하기는 어렵고 선동하기는 쉬운 사회라고 한 겁니다.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수정하거나 변화시키는 설득보다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을 더 극단으로 몰아가는 선동이 더 쉽거든요.” 

    -국민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현안에 대통령이 침묵으로 일관한다고 지적했는데요. 

    “문재인 대통령이 왜 집권했는지 잘 모르겠어요. 무슨 국정 철학을 갖고 있고, 무슨 정치철학을 갖고 있는지, 무슨 미래 청사진을 갖고 있는지 보이질 않잖아요. 국정 최고지도자라면 국민 사이에 의견이 분열돼 있는 현안에 대해 자신의 뜻을 피력하고 토론하고 설득하고 추진하고 돌파해야죠. 욕먹을 각오를 해야죠. 안간힘이라도 써야죠. 그런데 정치가 팬덤화되다 보니 비판적 목소리는 아예 외면합니다.” 

    -검찰개혁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는 여러 차례 확인됐습니다. 

    “대통령이 계속 검찰개혁, 공수처를 붙들고 있는데 지금 만들려는 공수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더 큰 권력일 뿐이죠. 이것은 민주적 통제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검찰이 기소를 독점하지 않고 범죄 피해자가 직접 소추할 수 있는 사소권(私訴權)을 인정함(사인소추제도)으로써 검찰의 공소권 남용을 제한하고 있어요. 이처럼 시민적 통제가 가능한 제도를 만드는 것이 민주적 통제이고, 국회가 할 일이고, 검찰개혁인 거죠. 그런데 지금은 윤석열만 제거하면 된다, 싫으면 내 편에 서라가 검찰개혁이 돼버렸어요.”

    ‘우리가 조국이다!’와 상징폭력의 정치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이 모든 국정 이슈를 삼켜버렸습니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흥미진진하고 저급한 공방이 인민의 삶이 조금도 바뀌지 않는 세상을 가려주는 스펙터클이 된 거죠. 부동산, 일자리, 교육처럼 우리 삶을 개선하는 중요한 문제는 뒷전이고 현란한 권력다툼에 시선을 빼앗긴 거죠. 대통령과 시민이 아니라 임금님과 신민(臣民)인 거죠. 신민이 타율성으로 복종하는 존재라면, 시민은 자율성을 가진 주체적 존재입니다.” 

    그는 현 정치 상황을 ‘상징폭력’으로 설명했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개념화한 상징폭력은,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사회적 위계를 정당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함으로써 지배자들에게 복종하도록 이끄는 지배 기제다. 

    그는 한국 사회에 퍼진 ‘상징폭력’의 실상을 태극기 부대의 광화문 집회와 “우리가 조국이다!”를 외치는 서초동 집회에서 확인했다. 진영 논리가 정책과 이념을 실종시켰고, 정치인에 대한 호오 감정에 따른 팬덤 정치가 옳고 그름에 대한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했다. 

    “이 분노의 감정은 논리적이지 않다 ‘조국이 무너지면 문재인이 무너진다’고 비약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잃었던 지난날의 울분과 연결시켜 두 달 전까지 적폐 세력 청산의 주역이라고 박수를 쳤던 검찰에 분노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보냈다. 급기야 검찰은 적잖은 사람들에게 악마의 화신이 돼야 했다. 검찰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누가 부정할까마는 자기들에게 동참하지 않으면 수구 세력과 한패인 양 몰아붙인다. 분노의 감정이 논리적 사유의 가능성을 없앤 탓이다.”(홍세화 사회비평에세이 ‘결: 거침에 대하여’ 중 ‘상징폭력’)


    수구세력과 보수세력의 권력 요요게임

    그는 ‘문재인 정권은 무엇으로 진보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질문을 던졌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가 ‘자유전쟁’에서 ‘자유를 빼앗기는 것도 위험한 일이지만, 자유 개념을 빼앗기는 것은 더 위험하다’고 했는데, 진보 개념을 빼앗기는 것 또한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묻는다. 문재인 정권은 무엇으로 진보인가?”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국민의 다수가 민주당을 지지하는데, 문재인 정부가 진짜 진보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는 뭡니까. 

    “지금의 보수는 보수가 아니듯, 진보도 진보가 아닙니다. 분단체제에서 수구세력, 즉 극우적인 반북 국가주의자들이 보수를 참칭했고, 반일 민족주의를 앞세운 자유주의 보수세력이 진보를 참칭한 겁니다. 저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권력다툼을 ‘어제까지 아주 좋았는데 오늘 그런대로 괜찮은 세력’(수구세력) 대 ‘어제까지 그런대로 괜찮았는데 오늘 아주 좋은 세력’(보수세력) 간에 더 좋은 내일을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놓고 다투는 장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진보가 제자리를 찾으려면 보수가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데 지금 보수는 자신들이 지켜야 할 보수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몰라요. 그냥 기득권이라 부르는, 어제가 좋았던 것밖에 없는 사람들이죠. 

    수구와 보수의 권력다툼에 진보의 자리는 없어요. 진보란 어제도 오늘도 열악했던 사람들을 위해 더 좋은 내일을 열어가는 것이에요. 지금 여당이 그런 진보인가요? 수구세력이 엉겁결에 보수가 되니, 보수세력이 엉뚱하게 진보 행세를 하고 있어요. 이렇게 권력의 요요게임을 하는 구도가 서로에게 윈-윈이니까. 겉으로는 티격태격하는데 내용상 별반 차이가 없어요. 포괄적차별금지법, 중대재해처벌법 등에 대해 두 당 모두 관심이 없잖아요. 일본 제품 못 쓰게 하는 게 진보인가요. 일제 부역자 찾아낸다고 죽창까지 등장하더니 이제는 정부가 일본과 관계 개선한다고 하니까 입장이 싹 바뀌죠. 놀랍고 우스운 일입니다. 이런 일에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사람들까지 가세하고 있어요. 상대를 부정하는 것으로 정체성을 삼는 세력이 진보일 수 없어요.” 

    그가 정의하는 진보 정치는 이런 것이다. 

    “오늘날 더욱 격심해지는 불평등주의 체제의 극복이 진보(정치)의 핵심 과제라면, 토마 피케티가 적시한 임금노동자의 의결권 및 권력 분유(分有), 강력한 누진소유세, 기본소득을 넘어선 보편적 자본 지원, 탄소 배출의 집단적 규제, 실질인 평등주의 교육권 등 가볍게 넘길 사안은 하나도 없다.” 

    피케티가 말한 “자본주의와 사적 소유를 넘어서서 참여사회주의와 사회연방주의를 기반으로 한 정의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을 한국 사회라는 현실 속에서 모색하는 정치. 그것이 곧 진보정치라는 것이다. 그 기준으로 볼 때 기업이 0순위이고, 노동이 1순위인 정권이 진보일까. 이념은 진영 속에 묻은 채 검찰과 언론 한두 곳에 정조준하는 정권이 진보일까. 

    “박근혜 대통령 때 ‘친박’ ‘진박’ 하는 게 우스웠는데 이 정권에선 ‘조국 수호’라니. ‘나라를 수호한다’는 말도 한물간 얘기인데 왜 한 사람을 수호하나요. 그것도 하면 안 되는 일까지 포함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해 ‘기회의 사재기’를 한 가족을 위해 ‘우리가 정경심이다!’라고 외쳐요. 이제는 추미애를 수호한답니다. 도대체 이런 일을 지지하는 40%가 어떤 멘탈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요.” 

    -‘생각의 좌표’ 이후 11년 만에 사회비평집 ‘결: 거침에 대하여’를 펴낸 동기는 무엇입니까. 

    “‘결’은 최근 10년간 제 생각을 정리한 책이에요. ‘이 땅의 기득권 세력이 저지른 윤리적 범죄행위 중에서 가장 앞선 것은 자유의 의미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더럽혔다는 것이다’라고 했죠. 가까운 예로 우리가 코로나19 방역을 잘 해왔다고 평가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과연 개인의 자유, 인권의 문제에 대해 얼마나 고려했는지, 이 모든 걸 그냥 덮고 가도 되는 것인지. 진보라면 그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어야죠. 국가주의와 집단주의에 의해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문제를 고민해야죠.”


    빼앗긴 자유, 버림받은 자유를 위하여

    -분단국가라는 현실에서 자유라는 개념이 유린당했다고 지적했습니다. 

    “분단국가에서 ‘공산세계’에 대립하는 ‘자유세계’라는 상상의 공동체가 있었고 기득권 세력은 반대파를 친북 좌경, 빨갱이로 몰아가며 권력을 강화했고 자유를 유린했죠. 당시 우리에게 자유란 이승만의 자유당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자유시장이 등장해 또 자유의 개념을 가져갔죠.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빼앗긴 대신 민주화를 외쳤어요. 자유의 가치를 전면에 앞세우기가 버거워 민주화라는 방패 뒤에 숨었던 건 아닐까. 하지만 민주공화국은 자유로운 시민들을 주체로 하지 않을 때 허울에 지나지 않아요. 노동조합에서 조합원이 동원의 대상이고, 조직의 우산 아래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는 수혜자인 것은 자발적 복종이지 진정한 자유가 아니죠. 

    민주, 정의, 평등, 평화에 비해 뒷전으로 밀려난 자유, 한국 사회에서 자유가 얼마나 왜곡되고 폄하되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개념이 됐는지. 김지하 시인이 엘뤼아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타는 목마름으로’에선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원래 엘뤼아르의 시 제목이 ‘자유’였어요.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민주화는 줄탁동시(啐啄同時) 관계인데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얘기하지 못하고 민주화만 앞세운 거죠. 민주화가 되면 개인의 자유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불의와 몰상식 앞에서 침묵과 무관심을 거부하고 노예 되기를 거부하는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는 얘기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30년 전 민주화를 외치던 86세대가 지금 정치의 중심에 있습니다. 

    “2009년쯤 내가 한 얘기가 있어요. 이명박 정권은 수구세력이고 민주화운동 세대는 ‘민주건달’이라고 했어요. 제대로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실제로 돈 버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르는 민주건달. 하지만 이들이 집권하는 이 시기도 한 번은 거쳐야 한다고. 조제프 드 매스트르가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 국민은 자기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고 했잖아요.”

    그는 얼마 전 문 대통령의 취임사를 다시 읽었다고 했다. 

    “좋은 내용은 다 있는데 대통령이 직접 작성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군요. 설령 다른 사람이 썼다 해도 내가 하고자 하는 방향, 내 의지와 일치하면 되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그에게 처음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25년 만이네요”라는 답이 왔다. 1995년 3월 그의 이름을 처음 알린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란 책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신동아’ 기자가 직접 파리로 가서 그와 인터뷰했다. 정확히 말하면 25년 9개월 만이다. 신동아 1995년 4월호에 ‘남민전(반유신과 민주화, 민족해방을 목표로 1976년 결성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의 약칭이다.) 사건 홍세화, 파리 하늘 밑의 정치망명자-분단의 상흔 세느강에 씻고…’라는 제목으로 당시 48세의 홍세화가 등장한다. 1979년 10월 9일 발표돼 국민에게 공포를 심어줬던 ‘남조선 민족해방전선준비위’ 사건에 직접 관계한 홍씨가 오랜 정치 망명생활 끝에 ‘갈 수 없는 조국’을 향해 쏘아 올린 피맺힌 외침이라고 소개했다. 그는 1999년 20년 3개월 만에 고국을 방문했고, 2002년 영구 귀국해 현재 가족이 있는 프랑스를 오가며 살고 있다. 

    25년 전 기자가 그에게 물었다.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합니까? 

    “볼셰비키는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는 사회주의자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니까 친북이겠지’라고 말한다면 우습다는 거죠? 

    “그렇지요. 왜 그렇게 이분법적으로만 사고해야 합니까. 분단에서 온 결과인지 모르지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분법적 사고의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 진보를 생각하기 어렵게 되고, 도대체 사람들의 사고가 한없이 왜소해지지 않겠습니까. 저에게 땅, 사람, 사회에 대해 지금 당장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한다면 질색입니다.” 

    그는 한결같이 살았지만 그가 꿈꾸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의 에세이 ‘결’에서 찾은 문장이다. 

    “진실은 소극적이고 정의는 언제나 지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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