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기지 않고 평범한 나한상
서민의 얼굴 닮아 공감 불러일으켜
왕가 여인들 가족 걱정 담다 보니
세속적 표정 지을 줄 아는 불상 탄생
강원 영월군에서 출토된 창령사터 오백나한상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자리를 잡았다. [국립중앙박물관]
머리와 상체가 지나치게 크고 대신 하체는 빈약하다. 매우 이례적이다. 종교 조각 특유의 이상적인 숭고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궁금증이 가시지 않던 차에, 흥미로운 석불을 만났다. 강원도 영월의 나한상(羅漢像)이다.
갑남을녀의 얼굴을 닮은 나한상
2018년 8월, 강원 춘천시 국립춘천박물관에서 ‘창령사터 오백나한, 당신의 마음을 닮은 얼굴’이란 전시가 열렸다. 강원 영월군에서 발굴된 나한상 돌조각들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흔하디흔한 나한상이려니 했던 관객들은 신선한 충격과 함께 깊은 감동을 받았다. 오백나한의 모습이 너무나 소박하고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이다.나한(羅漢)! 나한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성자를 뜻한다. 부처의 제자 500명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흔히 ‘오백나한’이라 한다. 나한상은 일반적인 불교조각상보다는 소박하고 편안한 편이다. 그럼에도 전시에 나온 창령사터 나한들은 좀 더 특별했다. 그 소박함과 투박함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미소 띤 나한, 슬픈 표정의 나한, 입술을 꽉 다문 나한, 고개 들어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나한, 수줍어하는 나한, 합장하고 있는 나한, 바위 뒤에 숨어 살짝 고개만 내민 나한, 생각에 잠긴 나한…. 그 표정은 모두 달랐지만 하나같이 우리의 얼굴이었다. 창령사터 나한상들은 얼굴과 상체가 집중적으로 표현되고 하체는 과감하게 생략됐다. 그래서 좀 더 투박하고 소박해 보인다. 화강암의 거친 질감이 이런 분위기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창령사터 나한상의 얼굴은 저 멀리 있는 고상한 종교적 얼굴이 아니라 우리가 오다가다 만나는 지극히 평범한 얼굴들이다. 그렇기에 희로애락이 담겨 있으며, 그럼에도 얼굴은 맑고 천진하다. 슬퍼하는 표정조차 편안하다. 관객 반응은 뜨거웠다. 국립춘천박물관 전시는 몇 개월 더 연장돼 2019년 초까지 계속됐다. 전시는 2019년 5월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어졌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는 한발 더 나갔다. 전시의 한 축은 국립춘천박물관 전시의 틀을 유지했고, 다른 한 축은 파격을 시도했다. 설치미술가 김승영의 작품 ‘Are you free from yourself?’를 오백 나한과 함께 연출한 것이다.
21세기 서민 표정도 담은 나한상
2019년 5월 3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오백나한상이 스피커 구석구석 자리 잡고 앉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김승영은 소통과 기억을 주제로 다양한 설치미술을 연출해 왔다. 특히 스피커 설치미술로 주목을 받아왔다. 그는 청동 모형을 쓰기도 한다. 1970, 1980년대 사용했던 스피커를 청동으로 형태를 떠내 제작한 뒤 수백 개를 높이 쌓아 탑처럼 만드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에서는 청동 모형이 아니라 실제 오래된 옛날 스피커를 동원했다. 화강암 나한상과의 조화를 위해 아날로그 실물의 맛을 살린 것이다.
김승영의 스피커 미술은 나한상의 매력을 한껏 드높였다. 스피커와 나한상의 조합은 관객이 사색에 빠지도록 도왔다. 관객들은 열광했다. “아 나는 누구인가”라고 되뇌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스피커 탑이 도시의 빌딩을 상징하고 그 사이사이의 나한은 빌딩 숲에서 성찰하는 인간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 스피커 사이에 있는 나한상들은 도시 속의 우리들이었다.
아날로그 스피커와 나한상의 만남은 도시와 인간이라는 도식적 이미지에 국한되지는 않는다. 스피커 미술 작가의 직관적인 감각은 창령사터 나한상을 효과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김승영이라는 작가의 창의성도 돋보였지만 전시의 주인공은 창령사터 나한상이었다. ‘소박하고 볼품없는’ 나한상이 없었다면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불타는 창령사에서 살아남은 나한들
이 나한들은 2001년 5월 강원도 영월군에서 한 개인이 암자 건립 공사를 하던 도중 우연히 발견됐다. 정식 발굴이 진행됐고, 돌조각 나한상 317점을 발굴했다. 이 가운데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완형은 64점이었다. 몸체만 발굴된 것은 135점, 머리만 발견된 것은 118점이었다.이곳에선 ‘창령(蒼嶺)’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함께 출토됐다. 이를 통해 고려 때 창령사라는 절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전문가들은 창령사가 고려 때 창건돼 조선 전기로 이어진 뒤 임진왜란 직후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한다.
발굴단은 놀랍게도 일부 나한상이 불길에 노출된 흔적을 확인했다. 나한상들을 모셨던 금당은 화재로 무너진 흔적이 역력했다. 이것은 무슨 상황일까. 이런 추론이 가능하다. 임진왜란 때에 훼손됐거나, 그 무렵 누군가가 창령사를 의도적으로 폐사시키면서 나한상도 함께 훼손한 것이다. 말이 훼손이지 파괴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추론이 이즈음에 미치자 이런 생각이 몰려온다. 저 소박한 나한상들이 뜨거운 불길을 견디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창령사터 나한상을 볼 때마다 수종사 8각5층석탑에서 나온 자그마한 불상들이 떠오른다. 표정과 외형이 창령사터 나한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서글퍼 보이기도 하고, 옹색해 보이기도 하다. 1957년과 1970년 두 차례에 걸쳐 수종사 8각5층석탑에서 발견된 불상은 30구. 이후 4점이 분실됐고 현재는 26점이 서울 종로구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수종사 석탑에서 나온 불상들은 대부분 등이 굽었다. 당당하고 성스러운 법열(法悅)의 모습이 아니라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불상이 어떻게 이런 모습일 수 있을까.
왕가 여인들이 바친 등 굽은 불상
경기 남양주시 수종사 8각5층석탑(왼쪽). 이 탑 내부에 30점의 불상이 들어 있었다. [동아DB]
성종이 세상을 떠난다면,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에서 후궁의 자식들은 정치적으로 탄압당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후궁들의 친정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다.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식을 둔 어머니로서는 너무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런 연유에서 성종의 건강 회복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불상을 발원해 탑 속에 봉안한 것이다.
주상에게 큰일이 닥치지 않게 해 오래오래 살게 해주시고, 그래서 우리 후궁들의 자식들도 별 탈 없이 무사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염원이었고 그들에겐 매우 절박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494년 성종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끝내 세상을 떠났다. 후궁들의 간절한 기대가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인목대비 죽은 혈육 생각하며 나한상 바쳐
좀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인목대비(仁穆大妃)가 1628년 발원한 불상 23점이다. 선조의 계비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이며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가 발원한 불상이다. 인목대비는 1628년 23점의 불상을 조성해 수종사 8각5층석탑을 열고 내부에 봉안했다. 광해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버지와 아들 영창대군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서였다.인목대비는 1602년 19세의 나이에 선조의 계비가 돼 1606년 영창대군을 낳았다. 하지만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아버지 김제남(金悌男)과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 폐서인(廢庶人)이 되고 말았다. 1618년에는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함께 서궁(西宮·당시 경운궁이자 현재의 덕수궁)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했다.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드라마틱한 반전이 찾아왔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위된 것이다. 복위는 됐지만 이미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뒤였다.
인목대비는 유폐 기간 불경을 제작하는 등 불교와 함께 분노와 외로움을 달랬다. 복위된 이후에는 사찰을 중창하고 불화, 불상을 제작하는 데 적극적으로 힘을 보탰다. 그렇게 불교에 의지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원통함을 풀어내고 동시에 살아남은 자들의 무사 안위를 기원했다. 수종사 8각5층석탑에 봉안한 불상이 그 증거다.
인목대비가 발원한 불상에는 “1628년 소성정의대왕대비(昭聖貞懿大王大妃)가 발원하고 23존을 주조하여 보탑에 안치하오니 후세에 중생을 구제하여 주시옵소서. 화원(畫員) 성인(性仁)”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좀 옹색하다. 전체적으로 웅크린 자세로 허리를 약간 구부리거나 뒤로 젖히고 있다. 상체에 비해 하체는 빈약하고 그로 인해 불상의 비례감이 많이 떨어진다. 부자연스럽다. 어깨는 좁고 처져 있으며 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물론 미소를 짓기도 하지만 왠지 쓸쓸해 보인다.
절박함과 죄책감이 빚어낸 페이소스
수종사 8각5층석탑에서 출토된 30점의 불상 중 26점이 서울 종로구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불교중앙박물관]
1493년, 나이 어린 자식을 둔 후궁들은 성종의 병이 하루빨리 치유돼 장수하고 그 덕분에 자식들이 무사하기를 바랐다. 1628년 인목대비는 비명에 목숨을 잃은 아버지와 아들의 명복을 비는 일 그리고 자신과 아들과 친정의 원한을 푸는 일이 무척 간절했을 것이다. 수종사 석탑 불상은 모두 왕실의 여성들이 발원한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다른 불상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워야 할 텐데, 의외로 옹색하고 볼품없다. 불상을 발원한 성종의 후궁들과 인목대비에게는 이런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자식을 지켜내야 한다는 어미로서의 절박함, 자식을 지켜내지 못한 어미로서의 처절한 죄책감.
금동불상을 제작한 사람은 조각승 성인(性仁)이다. 인목대비가 그에게 어떤 말을 전했고 그가 불상을 만들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불상에서 인목대비와 왕실 여성들의 힘겨움과 서글픔을 만나게 된다. 위엄이라고는 전혀 없는, 옹색하고 볼품없는 차림새로 자신의 아픔과 분노, 죄책감을 드러내고자 했던 건 아닐까. 수종사 석탑에서 나온 금동불상들은 모두 높이 10cm 내외의 소형불이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아들 영창대군의 모습을 이렇게 가슴에 묻으려고 했던 것 아닐까. 자꾸만 이런 상상을 해본다.
옹색함과 볼품없음, 세속의 또 다른 미학
창령사터 나한상 전시는 인기에 힘입어 부산으로 이어졌고, 2020년엔 고향 영월의 동강사진박물관에서 특별전이 열렸다. 이를 두고 “20년 만의 귀향”이라고 했다. 국립춘천박물관은 창령사터 나한상을 전시하는 상설전시실을 만들었다. 전시실에 이름까지 붙였다. ‘창령사터 오백나한, 나에게로 가는 길.’ 소박하고 볼품없는 나한상이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도 아주 절절하게 말이다. 스피커 미술가 김승영의 말처럼, “당신은 당신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Are you free from yourself)”라고 묻는 것 같다.아름다운 불상은 많다. 국보로 지정된 석굴암 불상도 있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도 있다. 그러한 불상에서는 말 그대로 고결한 법열의 미, 종교적 사유를 발견하게 된다. 이에 비하면 창령사터 나한상과 수종사 석탑 불상들은 지극히 소박하다. 석굴암 불상, 반가사유상과 다른 매력을 느끼게 된다.
우리 삶은 고결하지만, 한편으로는 초라하고 옹색하다. 분노와 원망이 가득하기도 하다. 그래서 볼품없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돌아보면 또 맑고 순수하다. 그것이 삶이 아닐까. 창령사터 나한상과 수종사 석탑 불상에서 우리네 세속의 미학, 볼품없음의 미학을 만난다.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