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사상과 성리학의 친연성(親緣性)
1970~80년대 대학생, 농촌·농민 성역화
전대협과 통일 행사, 주사파의 집단체험
‘탐욕의 선진국 vs 순수한 사회주의’ 판타지
2020년 12월 2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 본 서울 아파트 단지(왼쪽)와 1972년 3월 9일 경기 이천 풍경. [뉴스1, 동아DB]
한국에서 도시와 농촌은 오랫동안 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1970년대 곳곳에서 도시와 농촌이 충돌했다. 1970년대 농촌과 도시의 관계가 변곡점을 이뤘다. 서울 종로구에서 10대 시절을 보낸 내게는 더욱 그랬다.
우리 집엔 대학생 누나들, 시골에서 올라와 집안일을 돕는 형, 누나들이 있었다. 대학생 누나들은 팝송을 즐겨 들었다. 내가 세계적 팝 가수 아바나와 김민기의 노래를 안 것은 대학생 누나들 덕분이다. 시골에서 올라온 형, 누나들의 애창곡은 이미자와 남진의 노래였다. 이렇듯 1970년대 종로구의 가정집에는 너무도 다른 두 세계가 공존했다.
1970년대 중반 한국 사회는 또렷이 달라지고 있었다. 대도시에 거주하는 청년들은 낙관적이고 창창한 미래를 대변하는 노래와 영화를 대량으로 소비했다.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의 노래와 ‘바보들의 행진’ 같은 영화가 있었다.
1970년대 후반 신세대 청년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대학가요제와 개그콘테스트가 떠오른다. 대학가요제와 개그콘테스트가 나에게 준 느낌은 가벼움이었다. 나는 김민기나 양희은의 노래가 아니라 이수만·노사연의 노래, 심형래·최양락의 개그가 당시 대학생들의 생각과 처지를 더 정직하게 대변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1980년대 민주화운동은 먼 훗날 중산층이 될 대도시 청년들의 정서와 지향을 대변하는 것이어야 했다. 김영삼(YS) 김대중(DJ), 양김씨의 노선이 그랬으나 민주화운동을 현장에서 주도한 청년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키워가고 있었다.
주체사상은 완고한 보수적 이념
1993년 5월 28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출범식. [동아DB]
나는 최근 주체사상이 성리학과 사상적 친연성(親緣性)을 가졌다는 주장을 듣곤 한다. 주사파이던 내가 보기에 그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주체사상이 농촌에 뿌리박은 완고한 보수적 이념처럼 느껴진다.
1970~1980년대 대학생 운동가들을 농촌과 도시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그들은 농촌에서 자라 도시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도시에서 나이를 먹었다. 나처럼 도회지에서 태어난 사람도 물론 있지만, 나 역시 부모가 동대문시장에서 장사를 했기에 가난과 궁핍과 관련한 정서가 많이 배어 있다.
농촌에서 자라 농촌적 정서를 잔뜩 가진 대학생들이 박정희의 유신과 만났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농촌과 농민을 성역화하는 농민론과 성리학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유신에 반대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고 암울하고 우울한 전망에 빠져들었다. 당연하게도 그들은 이촌향도(離村向都)에 따른 농촌의 피폐상을 유신체제의 본질로 받아들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도시 인텔리와 노동자의 이야기였다면 주체사상은 농민과 도시로 이주했어도 농촌 정서를 기억하는 도시 빈민의 스토리가 중심이었다.
사회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도시화·산업화되고 있었다. 운동가들은 스티브 잡스의 컴퓨터 혁명, 리처드 도킨스의 생물학 혁명이 아니라 농촌 색채를 물씬 풍기는 복고주의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그 나름의 경제이론과 인간 공동체가 있었다.
농촌 지향적 경제이론을 대표하는 이론 체계가 이른바 내포적(또는 내생적) 발전론이다. 나는 1984년 대학에 입학해 학교 잔디밭에서 동료들과 변형윤 교수 등이 쓴 책을 읽었다. 내포적 발전론은 농업과 농촌을 기반으로 중소기업과 연계해 점진적으로 발전하자는 전략이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1990년대 운동권을 석권한 박세길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등의 담론이 이를 기반으로 한다.
NL 경제이론은 판타지
간단히 말해 이 낭만적 경제이론은 틀렸다. 지금 와서 틀린 게 아니라 1980년대 중반, 아니 1970년대 후반 시점에 이미 잘못된 것이었다. 김대모(‘고용 및 임금 구조의 변화와 소득분배’ ‘한국의 소득분배와 결정요인’)에 따르면 1971~1977년 사이 전 직종 평균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전문기술직은 179에서 203.2, 행정관리직은 270.9에서 328.7로 증가했다. 전문기술직과 행정관리직에 적합한 청년들은 손쉽게 직장을 구했다. 임금이 빠르게 올랐으며 훗날 중산층이 돼 마이카와 서울 아파트를 소유하게 된다.NL(민족해방) 계열 경제이론의 뼈대가 된 내포적 경제발전론은 경제이론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판타지였다. 농촌이나 농민이라는 거대한 근원적 실체에 이론을 맞춰가는 구조였다. 이때 농촌이나 농민이라는 존재는 사회·역사 이론을 구성할 때 하나의 공리처럼 전제된다. 별다른 근거도 없이 그들과 그 공동체는 평화롭고 우애로운 인간 공동체인 것으로 묘사된다.
1980년대 중반 현실과 이론 사이의 괴리가 매우 커진다. 주사파는 한국사회의 주된 문제점이 지주-소작 관계라고 규정했는데, 나는 당시 지주-소작 관계는커녕 ‘농활’ 때가 아니라면 농민을 볼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주사파가 대세가 된 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이론이 아니라 허구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은 여전히 미소 냉전체제였다. 소련과 사회주의권이 건재했고 북한은 미지의 세계였다. 학생들은 반(反)독재투쟁에 나서면서 사회주의권에 대한 환상을 가졌다. 탐욕스러운 서방 선진국과 순수하고 조화로운 사회주의라는 판타지에 빠진 것이다.
‘사이공의 흰옷’ ‘중국의 붉은 별’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가 인기를 끌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도시적 감수성과 중국·베트남·북한의 농촌형 정서가 우열을 겨뤘다. 그중 후자가 강력한 민족주의 전통, 농촌적 감수성과 맞물려 삽시간에 운동권을 석권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베트남·중국·소련을 담은 문학작품이 대부분 사라지고 북한을 연상케 하는 예술작품만 살아남았다. 대표적인 게 ‘태백산맥’이다.
주사파에 대한 연구와 검토는 이제껏 거의 없었다. 그 많던 주사파도 자신들의 시대를 정직하게 돌아볼 마음이 없는 듯하다.
급진적 통일운동, 주도권 쥐다
1993년 2월 24일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민주대개혁 촉구대회’를 가졌다. [동아DB]
1988~1997년은 특이한 시기다. 1987년 6월 항쟁을 계기로 민주주의가 발전했지만 노태우, 김영삼 정권이 잇따라 집권했다. 따라서 반독재투쟁이 상당한 대중성을 가졌다. 사람들은 이념이 아니라 민주화투쟁에서 학생들의 역할에 주목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은 사상적 해방구에 가까웠다. 결국 급진적 통일운동이 운동권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통일 행사는 과격한 정치적 주장을 담고 있었다.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주장이 난무했다. 물론 대학 저학년이 참가하는 행사는 문화적이고 어느 정도 대중적이었다. 운동권에서 활동하면 시련과 좌절을 경험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시련과 좌절은 집단적 성취감의 근원이 됐다. 각종 행사 때 경찰을 뚫고 교정 밖으로 나가면 뜻을 같이하는 수만 명의 군중과 마주했다. 우리는 밤새워 춤추고 노래 부르며 집단적 일체감을 확인했다. 문재인 정권의 강력한 지지 기반인 40대 중 상당수도 이 같은 대학 시절을 보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농촌과 농민에 뿌리 둔 혁명이론 주체사상이 대중적으로 공유됐다. 분명히 할 것은 주체사상이 공유됐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다.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받아들인 집단은 주사파 안에 거의 없다. 팸플릿 ‘강철서신’을 쓴 김영환 등 초창기 주사파 집단, 지하조직에서나 이론으로서 주체사상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주사파 핵심 정도로 분류되는데도 주체사상을 놓고 주변 사람과 토론한 적이 거의 없다. 심지어 나는 주체사상의 핵심 ‘혁명적 수령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주체사상은 농민 공동체가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자신들의 서사를 만들어간 이야기다. 제국주의 침략 이전의 농업공동체는 순결하고 조화로운 사회로 묘사된다. 제국주의에 맞선 투사들의 삶은 동지적 인간관계로 구성된다. 이러한 사상과 생각, 문화, 감수성이 1980년대 후반 청년들과 어떤 지점에서 어울렸던 것이다.
현실과의 괴리는 뚜렷했다. 한국 사회는 급격히 발전했다. 후배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NL 총학생회장의 옷차림이다. 1980년대 후반 NL 총학생회장은 두루마기나 치마저고리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전형적으로 NL적 발상이다. 1990년대가 되면 정장 차림으로 바뀐다. 1990년대 중반 치마저고리는 골동품에 가까운 유물이 된다.
옷차림새가 아니라 생각과 사상을 바꿨으면 어땠을까 싶다. NL식 집단주의와 농촌형 감수성은 현재에도 많이 남아 있다. 국지적 영역에서는 그러한 집단주의와 농촌형 감수성이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을 수 있으나 국가를 그렇게 경영하면 심각한 문제가 노정될 수밖에 없다. 발전의 핵심인 이윤 동기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파란의 진원지는 사회·경제 정책이다. 부동산 대책을 보자. 생각의 뿌리에 농촌 공동체가 있다면 이농(離農) 자체가 잘못된 것이거나 고향을 배신한 행위다. 도시로 몰려든 천박한 것들이 정신적 고상함을 잃어버리고 돈잔치를 벌이며 세운 도시가 서울이다. 이해찬이 실제로 이와 유사하게 발언했는데 그 기저에 깔린 생각은 이농 자체를 불온시하는 것이다.
유령처럼 배회하는 복고적 사상
1970년대 대학생들은 농촌형 공동체에 버금가는 대안적 미래를 꿈꾸기 시작한다. ‘전태일 평전’이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그 같은 생각이 담겨 있다. 소박하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추구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 사회 분위기와 맞물려 사회주의적 인간형의 추구로 발전한다.사회주의가 붕괴했으며 그들 자신이 나이를 먹고 중산층이 됐다. 그러자 새로운 관점에서 자신들이 가진 지향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농촌공동체를 지향하던 청년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 벌어지는 일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다. 그 사람들에게 부동산은 의식주 중 주거라는 인간적 권리의 문제인 것이지, 그것을 이용해 돈을 버는 일을 할 수는 없다.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중 부동산 투기를 뿌리 뽑겠다는 구절이 유독 많은 것은 그런 이유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서울에 위치한 쓸 만한 아파트다. 그런데 그들은 한사코 서울은 아니고 기어코 아파트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아파트가 들어설 수 있는 곳에서 희한한 도시재생 사업을 벌이고 있다. 도시 재생사업은 서울 부동산 공급을 구조적으로 위축시킨 원인 중 하나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이나 자기 자식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만 그런 삶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문재인 정권을 두고 ‘내로남불’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고상하다. 그들의 머릿속은 심리학적 연구 대상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고자 농민의 규모를 찾아봤다. 1980년 1082만 명이던 농촌 인구는 2019년 225만 명으로 줄었다. 앞으로는 과거의 농민국가 한국을 지탱한 농민이 아닌 첨단 기계로 무장한 신세대가 농업을 꾸려갈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2020년대의 한국에 농민과 농촌을 발원지로 하는 복고적 사상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 1965년 출생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진보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 저서 : ‘수학 공부의 재구성’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