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호

환상극장

도술사 장한웅과 오니(鬼)

  • 윤채근 단국대 교수

    입력2022-06-0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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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채근 단국대 교수가 우리 고전에 기록된 서사를 현대 감성으로 각색한 짧은 이야기를 연재한다. 역사와 소설,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져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Gettyimage]

    [Gettyimage]

    흥인문 밖 흉가에 장한웅이 도착했을 때 이미 날이 저물어버렸다. 악귀 퇴치를 다음 날 아침으로 미룬 그는 객사에 여장을 풀고 뜨락을 거닐며 달구경을 하고 있었다. 심심하던 차에 흉가 주인이 어린 꼬마 한 명을 데리고 찾아왔다. 주인이 말했다.

    “이 아이는 천애고아로 제가 데려다 기르는 아이입니다. 마침 장 도사님을 뵙고 싶다기에 함께 데려왔습죠.”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한웅이 물었다.

    “부적이나 만들고 귀신이나 물리치는 날 왜 보자 했는고? 혹시 이 일이 훌륭해 보여 부러웠던 거라면 그냥 물러가거라. 돈이야 좀 벌지만 험난한 일이다.”



    총명해 보이는 검고 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꼬마가 당돌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도술사님 명성이나 재물이 부러워 뵙고자 한 게 아닙니다.”

    무릎을 굽혀 상대와 눈높이를 맞춘 한웅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제자가 되겠다고 온 게로군? 그렇지? 그게 그거 아니더냐? 도사 소리 들어가며 돈도 벌고 천하 유람이나 하겠다는 거지? 어린놈이 심보가 고약하다.”

    입술을 뒤틀며 야릇한 미소를 짓던 꼬마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실은 저도 귀신을 봅니다.”

    한참을 꼬마를 노려보던 한웅이 몸을 일으켜 세운 뒤 주인을 향해 물었다.

    “이 꼬마 말이 사실인가? 괜히 날 시험해 보려는 수작이라면 지금 바로 돌아가려네.”

    어깨를 움츠린 주인이 꼬마 어깨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언제부턴가 이 녀석이 귀신을 본다고 하지 뭡니까? 처음엔 야단을 쳤지만 또 가끔 신통하게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이 아이 신통력도 진짜인가 확인할 겸 데려온 게 맞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도사님을 부르자고 먼저 제안한 것도 이 꼬마였습죠.”

    신통력 가진 아이

    흥인문 밖 최고 부자였던 칠봉의 집에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 건 수개월 전이다. 안방 깊숙이 감춰둔 귀한 물건들이 자주 사라졌고 멀쩡하던 가족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집 안엔 귀기가 가득했다.

    어느 날 칠봉이 운영하는 객사 종업원으로 일하던 꼬마 업동이 장부를 전달하러 방문했다.장부를 전한 후 마당을 거쳐 대문으로 향하던 업동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 모습을 눈여겨보고 있던 칠봉이 천천히 다가가 물었다.

    “업동아. 네 녀석이 귀신을 볼 수 있다고 했었지? 가끔 객사에서 뭘 쫓아냈다고 자랑도 했지 않느냐? 혹시 여기서 뭐가 보이는 게 있니? 내 그래서 널 부른 거야.”

    마당 한가운데 있던 홰나무를 노려보던 업동이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뭐가 있긴 있습니다.”

    잔뜩 긴장한 칠봉이 업동의 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뭐냐? 저 나무에 붙어 있느냐?”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은 업동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나무를 자세히 관찰하며 대답했다.

    “이상하게 안 보입니다. 뭐가 있긴 있는데, 제 눈을 피합니다.”

    “기가 센 놈이로구나? 그치?”

    어깨를 움찔한 업동이 겁도 없이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밑동부터 어루만지던 업동은 급기야 두 팔로 나무를 끌어안고 귀를 가져다 댔다. 한참을 혼잣말처럼 중얼대던 업동이 소중한 걸 힘겹게 놓아주듯 나무를 감싼 두 팔을 풀고 칠봉에게 돌아왔다.

    “뭐냐? 뭐가 있느냐?”

    초조하게 묻는 칠봉을 향해 업동이 불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뭐가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없으면 좋은 것 아니냐?”

    양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세게 저은 업동이 다시 대답했다.

    “모든 생명에는 생기란 게 있습니다. 그게 인간에겐 영입니다. 오래된 나무에도 그 비슷한 영이 있게 마련인데, 그게 아예 없습니다.”

    “안 좋은 거냐?”

    “아주! 저 나무는 진즉에 죽었습니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무언가가 차지해 자기 집으로 삼은 지 오래입니다.”

    침을 꼴깍 삼킨 칠봉이 두 손을 떨며 간신히 다음 질문을 했다.

    “지금은 어디 있느냐? 내 나무를 차지한 그놈 말이다.”

    팔짱을 낀 채 업동이 희미하게 웃었다.

    “제가 다가가자 나무를 벗어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 신통력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듯하오니 영험한 도술사를 부르시면 어떻겠습니까?”

    내공 대결

    객사 마루에 마주 앉아 칠봉의 얘기를 다 들은 한웅이 마당에 서 있던 업동을 향해 손짓을 했다.

    “이리 와 앉아보거라.”

    칠봉 옆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은 업동이 달빛에 드러난 한웅의 얼굴을 힐끗 보며 싱긋 웃었다. 그 모습을 한참 응시하던 한웅이 물었다.

    “내 너의 내력은 이미 들어 알겠고. 하나만 묻겠다. 네 부모는 누구더냐? 아예 낳자마자 버리진 않았을 것 아니냐?”

    칠봉이 불쑥 끼어들었다.

    “전혀 기억을 못 합죠. 그 갓난 게 어찌 부모를 기억할 수 있었겠습니까?”

    턱을 어루만지던 한웅이 의심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평범한 갓난 게 아니라서 하는 말이지. 도골(道骨)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이 제 부모도 찾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어서 말을 해보래도?”

    오래 망설이던 업동이 느릿느릿 대답했다.

    “찾아보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다만 이상하게 다가갈수록 부모 실체를 보는 게 두려웠습니다. 가까이 다가갔다 되돌아오길 반복하다 요즘엔 아예 포기했습니다. 그저 몸뚱이를 만들어준 부모가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말입니다. 나이가 더 든 뒤에 그때도 보고 싶다면 또 시도하려 합니다.”

    업동을 쳐다보는 한웅의 볼이 몇 차례 씰룩거렸다. 그가 몸을 뒤로 물리며 말했다.

    “네 녀석 나이가 몇인데 그런 절제력을 갖췄단 말이냐? 심히 의심스럽지 않은가? 게다가 네 이놈 아까부터 숨도 쉬지 않고 있었지? 도대체 나이를 가늠하질 못하겠구나! 정체를 밝혀라!”

    당혹스러운 표정이 된 업동이 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역시 듣던 바대로 조선 최고 도술사다우십니다. 호흡하는 흉내를 내며 살아온 게 맞습니다.”

    벌떡 일어선 한웅이 소매에 감춰뒀던 짧은 음양검을 꺼내 들었다. 곧 업동의 목을 내리칠 기세였다. 칠봉이 만류하며 외쳤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지요? 자초지종이나 설명해 주십시오. 칼은 어서 거두시고.”


    칠봉의 손목을 꺾어 뿌리친 한웅이 예리하게 빛나는 눈동자로 업동을 주시하며 말했다.

    “저 녀석 아까부터 단 한 차례도 숨을 쉬지 않더군. 나이를 속이려는 수작이지. 호흡은 나무 나이테와 같아서 절대 속일 수가 없는 법이거든. 어서 숨을 뱉어보아라! 어서!”

    고개를 든 업동이 소리가 나도록 숨을 몰아쉬더니 천천히 공중으로 뿜어냈다. 호흡으로 배출된 공기가 코끝으로 전해지자 한웅이 이를 음미하듯 들이마셨다. 한참 동안 감았던 눈을 뜨며 한웅이 속삭였다.

    “이 늙은 녀석이 사람을 잘도 속였구나! 도대체 몇백 살이더냐?”

    다시 고개를 조아린 업동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헤아려보진 않았으나, 대충 300살 정도입니다.”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 칠봉을 향해 한웅이 속삭였다.

    “태어나면서부터 호흡법을 할 줄 안 녀석이었어. 사람이 늙는 건 결국 호흡 때문일세. 호흡을 멈추거나 느리게 하면 남들보다 길게 사는 법이지.”

    제자리에 앉으며 음양검을 소매에 도로 넣고 한웅이 또 말했다.

    “날 시험했구나? 그렇지? 내 내공을 엿보려고 했어. 그럼 어디 네 녀석 솜씨를 좀 볼까? 이 객사에 지금 귀신이 여럿 숨어 있다. 손으로 가리켜보아라.”

    몸을 일으킨 업동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객사 대들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음으로 마당 화단을 가리키고 한웅의 양옆과 칠봉의 등을 가리켰다. 칠봉이 놀라 바닥에 엎드렸다. 빙그레 미소를 띤 한웅이 살짝 흥이 올라 말했다.
    “제법이구나.”

    홰나무

    날씨가 우중충했다. 칠봉 가족이 거처를 옮기면서 방치된 흉가는 괴괴하며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었다. 제자로 받아들인 업동과 집주인인 칠봉을 대동하고 빈집에 들어선 한웅이 곧장 홰나무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업동에게 물었다.

    “분명 여기에 뭔가 있었다고?”

    고개를 살짝 끄덕인 업동이 한웅 뒤에 서서 나무를 찬찬히 관찰했다. 보자기에서 지필묵을 꺼낸 한웅이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총 여섯 장을 쓴 그가 홰나무의 동서남북 방향에 부적을 파묻었다. 그렇게 나무 주변을 봉인한 한웅은 업동에게 물 한 바가지를 떠오게 했다. 남은 부적 두 장을 태운 재를 물에 섞은 한웅이 주문을 걸었다. 때마침 비를 부르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정화된 물을 입에 머금은 한웅은 쏜살같이 나무로 달려들어 내뿜기 시작했다. 분무처럼 퍼진 정화수가 나무에 닿자 괴상한 신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홰나무가 마치 살아 있는 동물처럼 가지를 흔들었는데 한웅을 밀어내려 안간힘 쓰는 것처럼 보였다. 천둥소리가 진동한 뒤 갑자기 비가 쏟아져 내렸다. 한웅이 업동을 향해 외쳤다.

    “비가 내리면 정화수 효력이 사라져 봉인이 풀린다. 홰나무 주변에 빨리 팔괘를 긋고 부채를 꺼내 오너라!”

    나무 주변 팔방에 각각 팔괘를 그은 업동이 한웅에게 부채를 건넸다. 마지막 정화수 한 모금을 입에 머금은 한웅이 나무 주변을 향해 부채질을 했다. 그러자 내리던 빗방울이 홰나무를 비켜 흩어졌다. 그 순간 나무 밑동이 꿈틀대며 움직였다. 밑동 아래 뿌리가 뱀처럼 땅에서 기어 나와 한웅을 향해 달려들었다. 한웅이 입속 정화수를 뿜자 뿌리 끝이 사람 얼굴 형상으로 변했는데, 눈은 초승달처럼 처져 있었고 입술은 화장한 것처럼 붉고 도톰했으며 달걀처럼 갸름한 얼굴은 분칠한 듯 하얗게 빛났다. 조선에선 본 적 없는 괴기한 형상에 한웅도 잠시 주춤했다. 얼굴이 웃으며 말했다.

    “더 큰 재앙이 찾아온다. 막을 수 없는 재앙이 찾아온다.”

    소매에서 꺼낸 음양검을 힘차게 휘둘러 괴이한 얼굴의 양미간을 찌른 한웅이 자신의 도력을 응집해 살기를 퍼부었다. 나무는 끝내 서서히 시들기 시작했고 뱀처럼 요동치던 괴물은 쓰러졌으며 덩달아 날씨도 쾌청해졌다.

    조심스레 나무로 다가간 한웅이 말라서 비틀어진 뿌리를 살짝 밟아보았다. 밟자마자 작은 조각들로 산산이 부서졌다. 사악한 기운은 사라졌지만 후환을 아예 없애는 게 중요했다. 그가 칠봉에게 말했다.

    “이 홰나무를 불로 태워버리게. 온 집안을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횃불로 밝히고, 내가 일러주는 주문은 정해진 시각에 꼭 외우도록 하고.”

    아버지의 실종

    종기나 부스럼을 고치는 의원이었던 한웅의 아버지는 그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졌다. 어머니가 한웅을 낳다 사망했기에 그는 졸지에 고아가 됐다. 환자들을 받던 진료실 방을 아무리 뒤져도 아버지의 유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먼 친척들을 차례차례 찾아다녔지만 헛수고였다. 아버지는 세상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오래 방황하던 한웅은 아버지가 사라지기 직전까지 탐독하던 의학서들을 보며 상심한 마음을 달래보고자 했다. 그렇게 의서들을 독파해 가던 어느 날, 책들 사이에서 도가 술법서들을 발견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유학에 조예가 깊던 아버지는 남몰래 비결서를 숨겨두고 읽을 사람이 아니었다.

    영생불사를 이루기 위한 운기법부터 신선이 되는 데 필요한 약물 제조법을 담은 책까지 아버지의 서고에는 없는 게 없었다. 책들을 건성으로 들춰보던 한웅은 어떤 책 하나에 눈길이 꽂혔다. 아버지는 해당 책을 다 읽은 날 그 소감을 표지 겉면에 적어뒀는데, 그 날짜가 정확히 실종되기 열흘 전이었기 때문이다. 책 이름은 ‘운기현화(運氣玄化)’였다.

    한웅은 책을 읽기 시작하자마자 그 내용에 빠져들었다. ‘운기현화’는 그가 허황되리라 짐작해 왔던 흔한 도가 서적이라기보다 생명 현상의 본질을 추적한 현묘한 이론서에 가까웠다. 읽으면 읽을수록 궁금증이 쌓여갔다. 때로는 막연한 두려움에 막아뒀던 죽음이라는 문제에 절실히 직면하게 됐다. 죽음이란 문제를 모호한 상태로 미뤄둔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하고 비겁한 짓인지에 대해서도 새삼 깨닫게 됐다. 죽음에 맞설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그는 책을 만 번 반복해 읽었다. 이유가 없지 않았다. 실종되기 전날 진료실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웅아. 뭘 하든, 아니 무얼 하지 않더라도 좋다만, 혹시 무언가 하고 싶은 게 생긴다면, 절대 포기하지 말고 만 번을 반복해라. 만 번을 한다는 기분으로 해봐.”
    만 번이란 수가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농담 좋아하는 아버지가 또 실없는 말씀을 하신다고 심상히 여기고 말았지만, ‘운기현화’를 마주한 한웅은 이상하게 그 말을 문득 떠올렸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운명이란 때로 그렇게 고집의 산물일 수도 있었다.

    책을 만 번 독파한 후, 한웅에겐 비상한 통찰력과 이해 능력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그는 도술서들에 담긴 수련 요령을 손쉽게 파악해 응용할 줄 알게 됐다. 귀신들을 볼 수 있었고, 부적을 쓸 줄 알게 됐으며,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오갈 수 있었다. 조선팔도를 주름잡는 도인이 된 그는 아버지가 끝내 영생을 이뤄 신선이 됐다고 결론 내렸다.

    수락정사

    수락산에 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웅의 정사는 넓지는 않았지만 규모가 있었고 정갈했다. 평상에 마주 앉은 업동이 한웅의 아버지 얘기를 다 듣고 나서 물었다.

    “스승님의 부친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만 번 노력해야 한다는 말씀은 가슴을 깊이 울리는군요.”

    업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웅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내가 아버지 얘기를 한 건 감동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죽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업동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죽음. 죽음이라. 죽음이라는 그걸 우리 같은 사람들이 왜 걱정해야 합니까?”

    잠시 실눈을 뜨며 업동을 주시하던 한웅이 비장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가 호흡을 참는다 한들 그게 영원하겠느냐? 언젠간 너도 죽는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배시시 입가에 웃음을 흘린 업동이 조금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스승님 부친께선 영생을 얻으신 게 아닙니까? 저와 스승님도 더욱 정진하면 그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않더라도?”

    “네. 그렇게 될 수 없다고 해도, 적어도 수명이 수백 년은 더 남아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비루한 인간 세상에서 그게 영원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건 영원과 분명코 다르다. 그리고 아버지는 영생을 얻은 게 아니었다.”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조금 전에?”

    “어릴 때는 그렇게 믿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어떻게 달라지셨습니까?”

    “시해(尸解)라고 하지? 신선이 되어 감쪽같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말이다. 그건 모두 빈말일 뿐이다. 그런 멋진 시해는 없다. 남들보다 더 오래 살 수 있을 뿐, 우리도 도력이 쇠하면 평범하게 죽는다.”

    “그럼 부친께선?”

    “나도 모른다. 최후를 직감하시고 어디론가 죽을 자리를 찾아가셨겠지.”

    업동이 고개를 숙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한웅이 속삭였다.

    “네놈 생각을 내가 안다. 자기 최후를 미리 알 수 있는지 궁금한 게 아니더냐? 내가 내 최후를 알고 있는지도 몹시 궁금하겠구나?”

    그 말을 들은 업동의 태도가 조금씩 방자하게 바뀌더니 급기야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한웅이 다시 말했다.

    “알려주마. 아주 잘 알고 있다. 네 녀석 정체도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고. 숨을 멈춰 나이만 들지 않으면 뭐하느냐? 지혜가 고작 그 정도인 것을.”

    업동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차츰 변하더니 홰나무 뿌리에서 돋아난 뱀 괴물의 형상으로 화했다. 음산한 목소리로 업동이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깨달았지? 내 정체?”

    느긋하게 몸을 일으켜 평상 밖으로 벗어난 한웅이 대답했다.

    “내가 팔방에 팔괘를 그으라고 하지 않았더냐? 네 녀석은 일부러 괘 하나를 그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홰나무 괴물이 봉인을 풀고 탈출할 기회가 딱 한 번 열렸지. 난 널 끝까지 의심했기에 음양검으로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네놈은 화근이다. 오늘 여기서 나와 함께 사라져줘야겠다!”

    시해

    강화도의 용한 역술가 정붕은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한웅이 찾아오자 몹시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정붕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자네 진정 살아 있었는가? 남쪽 어느 산성에서 왜군에게 살해당했다 들었네만.”

    벗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한웅이 쾌활하게 대답했다.

    “도사가 죽는 척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실은 내 요상한 걸 만나 조금 고생은 했지.”

    “요상한 거라니?”

    “왜란이 일어나기 직전이었어. 흥인문 밖 흉가에서 퇴마를 할 때 이상한 어린놈을 만났거든.”

    “대개 어린놈은 위험하지 않나?”

    “위험하지! 암 그렇고말고. 그래도 꽤 흥미를 느꼈어. 못 보던 물괴였거든.”

    “물괴?”

    “그래. 홰나무에 깃든 요괴를 퇴치하는 걸 놈이 도왔네. 그런데 그 짓을 하고 있는데 말이지. 홰나무 요괴를 그 어린놈이 돕고 있는 거였어. 가소로웠지만 워낙 특이해 일단 살려뒀지.”

    “바로 제거했어야지! 이 사람아.”

    입맛을 다시고 먼 산을 한 번 응시한 한웅이 친근한 어투로 말했다.

    “탁주나 한 사발 주려는가?”

    정붕이 술동이를 내와 섬돌에 받치고 한 사발 가득 떠 한웅에게 내밀었다. 시원하게 들이켠 한웅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놈은 일본에서 건너온 오니였어. 내력을 알아내려 부모에 대해서도 묻고 이것저것 시험도 해봤지만 잘 안 넘어오더군. 수락산까지 데려가 마지막으로 떠봤더니 역시 조선 귀물이 아닌 일본 요괴 오니였어. 부모가 애초에 없는 물괴였지. 어그러진 자연이 잘못 빚은 물괴 말일세!”

    “그래서? 곧장 퇴치했나?”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은 한웅이 침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난 말일세. 내 죽음을 기억한다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늘 죽음을 기억하며 살아왔어. 그날 밤, 수락산이 내 죽을 자리였어.”

    정붕이 말없이 한웅의 손에 들려 있던 사발을 건네받아 다시 술을 담아 권했다.

    “자넨 여기 이렇게 살아 있지 않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켠 한웅이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잘 마셨네! 오니는 말이야. 분신술을 한다네. 하나를 죽여봐야 소용없거든. 정말 끈질기게 따라붙는 놈이지. 그나저나 자네 정유년에 특히 조심하게. 난리가 또 벌어지네. 이만 가네.”

    정붕은 멀어져가는 친구 등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웅이 얼굴에 하얀 분칠을 한 어느 왜병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사망한 한웅의 몸에서 흰 피가 솟아났다는 소식까지 접했더랬다. 그건 최종적 시해의 증거였다. 그런 벗이 어떤 환술로 다시 자신 앞에 나타났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었다.

    * 이 작품은 허균의 ‘장산인전’을 모티프로 창작됐다.


    윤채근
    ● 1965년 충북 청주 출생
    ● 고려대 국어국문학 박사
    ● 단국대 한문교육학과 교수
    ● 저서 : ‘소설적 주체, 그 탄생과 전변’ ‘한문소설과 욕망의 구조’ ‘신화가 된 천재들’ ‘논어 감각’ ‘매일같이 명심보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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