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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독립의지 북돋운 ‘건국 음료’

커피를 사랑한 사람들 | 미국편

  • 박영순 |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독립의지 북돋운 ‘건국 음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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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네덜란드를 통해 미국 땅에 들어간 커피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항해 독립 의지를 일깨우는 매개체가 됐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보다
  • 역사가 짧은 신대륙이지만, 커피의 역사와 문화에선 유럽과 시대를 함께했다.
미국에선 국가보다 커피가 먼저 있었다. 미국이 영국과 벌인 독립전쟁에서 승리(1775)하고, 13개 식민주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토머스 제퍼슨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을 공포한 것이 1776년. 이어 독립전쟁 영웅 조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한 정부가 수립된 때는 프랑스 혁명 발발보다 두 달 반쯤 앞선 1789년 4월 30일이다.

그런데 커피는 미국 건국보다 170년가량 앞선 1620년대에 전해졌다. 네덜란드는 1624년 서인도회사를 통해 맨해튼 섬을 차지한 뒤 1626년 인디언에게서 현재 가치로 단돈 24달러를 주고 섬을 사들여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이라 명명했다. 이곳은 1674년 영국이 차지하면서 ‘뉴욕’으로 불리게 된다.

네덜란드는 커피의 가치를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상인 피터 반 덴 브루케가 1616년 예멘에서 커피 묘목 몇 그루를 암스테르담으로 몰래 빼내 재배했다. 이후 식민 지배하던 인도 말라바르와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중심 지역인 바타비아(Batavia)에 커피를 심어 대량생산했다. 기록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맨해튼에 식민지를 구축하면서 미국 땅에 처음 커피를 들였다.

미국에 커피를 전파한 주역을 1607년 버지니아 제임스타운을 점령한 영국인 존 스미스 선장이나 1620년 매사추세츠 주 대서양 연안 플리머스에 도착한 메이플라워 호의 청교도들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엔 영국에 커피가 전해지지 않았다. 일각에선 청교도의 짐 속에 나무로 만든 절구와 절굿공이가 있던 점을 들어 이들이 미국 땅에 커피를 처음 들여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절구가 훗날 커피 원두를 분쇄하는 데 사용됐는지는 몰라도 당시엔 곡물이나 향신료를 빻는 용도로 쓰였다.   

커피가 유럽에 상륙한 건 1615년 이탈리아 베니스 항구를 통해서다. 영국에 커피가 전파된 것은 1637년(프랑스는 1644년) 터키 유학생에 의해서였다. 메이플라워 호 청교도들 가운데 종교박해를 피해 네덜란드에 갔다가 온 이들이 미국 땅에 커피를 들고 갈 수도 있었겠지만, 이와 관련한 기록은 전하는 바 없다.





네덜란드 통해 美 전파

주목할 것은 영국의 식민 지배(1607~1783) 끝에 미국이 생겨났지만, 미국 땅에 커피가 전해진 것은 영국보다 되레 10여 년 앞섰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의 커피 문화는 영국에서 전래된 게 아니다. 이런 관점은 미국 독립전쟁의 도화선으로 평가받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커피가 네덜란드를 통해 미국 땅에 들어가긴 했지만, 영국 식민 지배기에 초기 이민자들이 즐겨 마신 건 홍차였다. 두 세대쯤 지난 1670년에서야 미국 최초(정확히 말하면 ‘북아메리카 영국 식민지 최초’)의 커피 전문점 ‘런던 커피하우스(London Coffee House)’와 ‘거트리지 커피하우스(Gutteridge Coffee House)’가 문을 연다. 둘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에 대해선 명확한 자료가 없다.

유럽에선 이미 1645년 베니스에 커피하우스가 문을 열었고, 영국도 1650년 옥스퍼드 대학에서 첫 커피하우스가 선을 보였다. 미국의 기록은 이보다 다소 늦고, 프랑스(1686년 카페 르 프로코프)보다는 앞선다. 미국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역사가 짧은 신대륙이지만, 커피의 역사와 문화에선 유럽과 시대를 같이했다고 봐야 한다.

북아메리카의 초기 이민자들은 영국에 뿌리를 뒀기에 차를 주로 즐겼지만, 17세기 말 유럽에서 불기 시작한 커피 열풍에 점차 영향을 받게 된다. 보스턴에 살던 도로시 존스가 대서양 건너편에서 벌어지는 커피 붐을 감지하고 1689년 영국 정부로부터 커피 판매권을 받아내 사업을 시작했다. 1696년엔 뉴욕에도 ‘더 킹스 암스(The King's arms)’라는 커피하우스가 처음 등장한다. 커피가 대중화하는 시기, 그 나라엔 운명적으로 계몽사상이 싹튼다. 커피 애호가들은 이런 현상의 원인을 두고 “커피를 마시며 정보를 주고받는 문화가 형성되면서 시대적 각성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라고 말하길 좋아한다.

미국에서 커피가 널리 퍼지기 시작한 17세기, 영국에선 세상을 바꾸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다. 청교도혁명(1649)으로 공화국이 탄생한 데 이어 명예혁명(1688)이 발발했다. 1689년엔 마침내 의회가 “인간의 권리는 신성불가침의 권리”라는 내용을 담은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채택함으로써 절대왕정을 종식시킨다. 권리장전은 미국 독립선언(1776)과 프랑스 인권선언(1789)에도 큰 영향을 끼치는데, 이 과정에서 영국, 미국, 프랑스 지식인 사이에 커피가 지성의 상징이 되면서 결국 민중을 일깨우는 각성제로 맹위를 떨친다.



‘Green Dragon Tavern’

미국 역사에서 커피 애호가로 처음 언급되는 인물은 벤저민 프랭클린(1706~1790)이다. 이민 3세대로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는 토머스 제퍼슨과 독립선언문의 기초를 마련하고 13개 주의 단합과 독립 의지를 이끌어내 ‘최초의 미국인’이라는 영예로운 호칭을 얻었다. 45세에 펜실베이니아 주의회 의원이 된 그는 보스턴에 있던 런던 커피하우스에서 정치 모임을 자주 열고 계몽사상과 자치 의식을 퍼뜨렸다. 그는 “나는 런던커피하우스에서 만나는 모든 정직한 영혼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정도로 커피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겼다.

프랭클린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원두를 유통하기도 했으며, 먼 길을 갈 때면 커피 원두를 꼭 챙겼다. 그와 커피의 인연은 업(業)처럼 이어졌는데, 어머니(애비아 폴저) 집안에서 후일 세계적인 커피 브랜드로 성장하는 ‘폴저스(Folgers) 커피’를 설립했다.



미국 역사에서 18세기 중엽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자치 욕구가 극대화한 시기다. 커피가 그 결정적 구실을 했다. 영국은 내전과 제국의 팽창을 위한 잇단 전쟁으로 인해 재정난을 겪었다. 영국은 1764년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처음으로 설탕에 세금을 부과(Sugar act)한 데 이어 1765년엔 인쇄물에도 ‘인지 조례(Stamp act)’라며 세금을 매겼다. 버지니아 의회는 즉각 “대의권 없는 과세는 식민지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반발하면서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러나 영국의 사정은 다급했다. 거센 조세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년 뒤인 1767년 종이와 차(tea)에 대해서도 관세를 거두는 ‘타운센드 법령(Townshend Acts)’을 시행했다. 식민지는 술렁였다. 당시 지식인들이 매일 모여 토론하고 성토하며 머리를 맞대고 대안을 찾던 곳이 1697년 보스턴에 문을 연 커피하우스 ‘그린 드래곤(Green Dragon Tavern)’이다.

세금으로 야기된 영국과 식민지 간 분쟁에서 1770년 3월 보스턴 시민 5명이 영국 경비대의 총에 맞아 죽는 ‘보스턴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민심이 흉흉해지자 영국은 타운센드 법령을 철폐했는데, 차에 대한 세금만은 그대로 뒀다. 이런 조치는 영국에 대한 식민지인의 분노를 차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차는 영국의 식민지 개척회사 노릇을 한 동인도 무역회사가 독점했던 터였다. 새뮤얼 애덤스를 중심으로 한 독립혁명 지도자들은 그린 드래곤에 모여 동인도 무역회사에 타격을 줄 전략을 짠다. 영국 의회에 식민지의 권익을 대표하는 대표자를 임명하지 않아 정부 정책 결정에 대한 투표권도 없는 상황에서 세금을 거둬가는 것은 부당하다는 게 명분이었다. 애덤스를 위시한 혁명 지도자들은 이를 토대로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ve)’는 구호를 만들었고, 이는 미국 독립혁명의 모토가 됐다.



영국茶 불매운동

칼바람이 몰아치던 1773년 12월 16일 밤. 애덤스의 지휘 아래 시민들은 보스턴 항에 정박한 동인도회사 선박을 습격, 342개의 차 상자를 깨뜨려 모조리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 보스턴 차 사건이 훗날 미국 독립혁명의 도화선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뒤이은 사건 때문이다.

영국은 보스턴 차 사건을 빌미로 탄압을 강화했다. 보스턴 항을 봉쇄하고 군대를 주둔시키며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이에 보스턴 시민은 똘똘 뭉쳐 배상을 거부하며 시위를 벌였다. 저항의 방식 중 하나가 즐겨 마시던 차를 끊고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영국차 불매운동이 시민의 저항심에 불을 붙이면서 커피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차를 마시다 갑자기 커피로 음료를 바꾼 시민들은 커피의 강한 맛을 줄이려고 물을 많이 타 옅게 마셨다. 이를 오늘날 ‘아메리카노 커피’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영국차 불매운동과 함께 커피를 마시는 이른바 문화 시위가 널리 확산되면서 식민지 시민의 독립 의지를 북돋우는 정신운동으로 발전했다. 매사추세츠 하원의회가 이에 동조해 ‘혁명정부의 모체’를 구축했는데, 이로 인해 1775년 4월 19일 영국 정부와 미국 식민지 간 무력 충돌이 벌어진다. 이것이 미국 독립전쟁의 포문을 연 렉싱턴 콩코드 전투다.



“커피 아니면 죽음을”?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뉴욕의 ‘머천트(Merchant) 커피하우스’에선 연일 대중 집회가 열렸다. 뉴욕의 재력가들이 독립전쟁을 후원하기 시작했으며, 머천트 커피하우스에 지식인들이 모여 13개 식민주를 통합해 미합중국을 세우자는 제안서를 작성해 보스턴 혁명정부로 발송했다.

후일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환영 행사도 이곳에서 열렸다. 마침내 1775년 5월 식민지 대륙회의(Continental Congress)가 열려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영국을 상대로 독립을 선포했다. 미국 독립전쟁이 본격화한 것이다.

이 시기, 커피와 관련한 명언이 미국 독립혁명 지도자이자 웅변가인 패트릭 헨리(1736~1799)에게서 나왔다. 그가 “내게 커피를 주시오, 아니면 죽음을 주시오!”라고 웅변했다고 널리 퍼져 있으나, 이를 공식 문서로 입증할 도리는 없다. 헨리가 1775년 3월 23일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의 세인트존 교회에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는 기록은 있다. 그는 이날 영국의 탄압에 맞서 민병대를 조직해 무력으로 대항하자고 연설했는데, 끝부분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쇠사슬과 노예화란 대가를 치르고 사야 할 만큼 우리의 목숨이 그렇게도 소중하고 평화가 그렇게도 달콤한 것입니까. 전능하신 하느님, 그런 일은 절대로 없게 해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은 어떤 길을 택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 기록은 1805년 윌리엄 워트라는 변호사가 헨리에 관한 전기를 쓰면서 당시 연설장에 있던 사람들의 진술을 받아 정리한 것이다. 끝부분이 “As for me, give me a cup of coffee or give me death!”로 바뀌어 시민들 사이에서 회자된 것은 독립혁명 의식이 커피하우스에서 싹텄고, 헨리가 커피 애호가였던 데서 만들어진 스토리텔링인 것으로 보인다.

400만 흑인 노예를 해방시킨 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1805~ 1865)은 호텔에서 맛이 안 좋은 커피를 제공받고 위트 있게 일침을 준 일화가 전한다. 나중에 다시 그 호텔에 가게 된 링컨은 웨이터가 음료를 가져와 앞에 놓으려고 하자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게 커피라면 내게 차를 갖다 주세요. 만약 그게 차라면 내게 커피를 갖다 주세요.”

이 표현은 링컨의 격조를 에둘러 말하는 데 자주 인용된다.

‘미국 문학의 링컨’으로 불리는 ‘톰 소여의 모험’의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은 하와이 코나 커피에 찬사를 보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한 그는 1866년 하와이에서 넉 달간 머물며 쓴 ‘하와이로부터의 편지(Letters From Hawaii)’에 “코나 커피의 향미는 그 어느 곳에서 재배되는 커피보다 풍성하다. 코나 커피는 최고의 커피가 자라야 할 곳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당신의 찬사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라고 적었다.


하루 3.8L 마신 루스벨트

네덜란드 상인에게서 커피를 구매하던 미국은 소비량이 급증함에 따라 1825년 브라질에서 커피 나무를 가져다 하와이에 심음으로써 생산량은 적지만 커피 생산국이 됐다. 세계 명품 커피 산지로 세 손가락에 꼽히는 하와이 코나엔 1828년 선교사 새뮤얼 러글스가 브라질에서 커피 나무를 가져와 재배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한다.

신문기자로도 활동한 마크 트웨인은 러일전쟁(1904~1905) 종군기자로서 대한제국을 방문했는데, 한국 최초의 커피숍으로 기록된 손탁호텔에 머물며 고종황제에게 커피를 끓여준 손탁(러시아명 존타크) 여사의 커피를 맛보기도 했다.

20세기 시작과 함께 세계사에 새롭게 떠오른 나라가 미국이다. 1901년부터 9년간 대통령을 지낸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는 미국을 국제사회에 등장시킨 대통령으로 기록될 만큼 초기 부흥기를 이끌었다. 19세기 말 유럽은 쇠퇴기로 접어든 반면 미국은 남북전쟁(1861~1865)을 치르며 건국 이후 내부의 해묵은 골칫거리를 해결하고 경제 부흥에 박차를 가했다. 그의 취임 초기에 공업 총생산이 영국과 프랑스를 합친 액수를 넘어서며 세계경제의 헤게모니를 거머쥐었다.

루스벨트도 소문난 커피 마니아였다. 커피를 하루에 3.8L나 마셨다는 얘기가 전한다. 커피를 많이 마시는 습관 탓에 그의 커피 잔은 유난히 컸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커피 머그는 욕조보다 커 보였다”고 했을 정도다.

이 시기에 ‘미국 건국의 음료’로 사랑받은 커피는 산업적으로 육성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한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일화가 있다. 맥스웰하우스 커피는 1892년 식품회사의 한 부서로 시작했는데, 1907년 그가 테네시 주 네슈빌의 맥스웰하우스 호텔에 머물 때 일이다. 그는 그곳의 커피 맛에 매료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맛있구먼!”이라며 기뻐했다. 맥스웰하우스 커피는 이를 놓치지 않고 이 문구를 광고에 활용했고, 지금까지 100여 년간 상품마다 브랜드 아래에 표기하고 있다.



헤밍웨이 작품 속 커피

미국의 커피 역사에서 마크 트웨인과 함께 문학가로서 굵직하게 이름을 남긴 인물은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미국 현대문학의 효시’로 높게 평가한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다. 그는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 수상작인 ‘노인과 바다’를 비롯해 ‘무기여 잘 있거라’ ‘킬리만자로의 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등의 작품에서 커피를 소재로 자주 활용했다.

‘노인과 바다’에서 소년 마놀린은 청새치와의 싸움으로 녹초가 된 노인 산티아고를 위해 카페 라테라자로 달려가 따뜻한 커피를 깡통에 담아 온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선 마리아가 로버트 조던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당신이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를 가져다 드릴게요”라고 말한다. 이 말은 커피업체의 광고 문구로 오랫동안 애용되고 있다.

헤밍웨이가 쿠바 크리스털마운틴이나 케냐AA, 탄자니아AA 커피를 좋아했다고 각각 주장하는 말이 나돌지만, 이는 이해관계가 있는 커피업자들이 마케팅을 위해 지어낸 얘기다. 이들은 마크 트웨인이 하와이 코나 커피를 예찬한 것처럼, 헤밍웨이가 자신들의 커피를 칭찬한 듯 말을 퍼뜨리지만, 헤밍웨이는 특정 지역 커피에 찬사를 보낸 적이 없다. 쿠바로 낚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 매료돼 20년간 머물면서 작품을 쓴 헤밍웨이의 사연을 보고 쿠바 커피를 파는 사람들이 그를 크리스털마운틴 애호가로 만들었을 뿐이다.

헤밍웨이가 사자나 코뿔소 사냥을 하기 위해 케냐를 여러 차례 드나들었고, 인접한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산을 배경으로 ‘킬리만자로의 눈’이라는 단편소설을 집필한 것을 구실로 그를 케냐 커피나 탄자니아 커피 마니아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이는 고흐가 프랑스의 아를에 머물며 그림을 그릴 때 예멘에서 수입한 커피만 접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용해 예멘 모카 커피를 고흐가 사랑한 커피라고 광고하는 것과 같다.

“나는 내 일생을 커피 스푼으로 되질해왔다(I have measured out my life with coffee spoons).”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1888~1965)이 22세 때 쓴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에 나오는 이 구절은 커피와 함께 명상을 즐기고자 하는 애호가들이 사랑하는 문장이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났으나 영국으로 귀화해 영국이 자랑하는 시인이자 비평가가 됐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캐츠(Cats)’의 원작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를 쓴 작가로 더 친근하다.



“커피는 현상이다”

‘길 잃은 세대(The Lost Genera-tion)’란 말로 유명한 거트루드 스타인(1874~1946). 문학적 소양을 알아보는 데 밝기로 손꼽히던 헤밍웨이가 거의 유일하게(?) 존경한 그녀도 소문난 커피 애호가였다. 피카소와 마티스 등 세기적 작가들을 발굴하고 후원한 그녀의 안목과 예술혼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스타인이 커피의 의미를 묘사한 문장은 지금까지도 긴 여운을 남긴다. 다음은 그 일부다.

“커피는 단지 음료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엇이다. 커피는 일어나고 있는 어떤 현상이다. 커피는 시간을 주지만,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연의 자신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한 잔 더 마시기를….”

여성 비행사이자 작가인 앤 모로 린드버그(1906~2001)는 블랙커피에 의미 부여를 했다. 사상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1927)한 찰스 린드버그의 아내인 그녀는 “훌륭한 의사소통은 블랙커피만큼 자극적이며, 커피처럼 후에 잠들기 어렵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녀는 첫아이가 유괴돼 숨지는 사건을 겪고는 코네티컷 해안 한적한 곳으로 가 명상적인 삶을 살다가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말년엔 말로 하는 의사소통보다 교감을 중시하는 메시지를 많이 남겼는데, 한국에서도 발간된 그녀의 작품 ‘바다의 선물’에 커피와 명상을 언급한 구절이 나온다.

“여러분도 오늘 이 순간, 한 잔의 커피를 들고 침묵이라는 사치를 누려보세요. 잔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마냥 바라보며 여러분 속에 내재된 ‘또 하나의 나’와 교감을 나누며 이렇게 격려해주시면 어떨까요. 그래, 난 잘 살고 있어. 내가 항상 지켜봐줄게. 혼자라고 생각하지 말고 꿋꿋하게 살아가자. 그리고 매순간 행복하자.”  

박 영 순


● 충북대 미생물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사
● 세계일보 기자, 메트로신문사 취재부장, 포커스신문사 편집국장  
● 現 인터넷신문 커피데일리 발행인, 커피비평가협회장,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경민대 평생대학원 바리스타과정 전담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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