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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

연애를 혁명처럼 혁명을 연애처럼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와 산타클라라

  • 글 · 사진 오동진 | 영화평론가

연애를 혁명처럼 혁명을 연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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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개 도시를 일정한 기간 안에 일주(一周) 여행을 한다는 건 패킹(pack- ing)과의 싸움을 의미한다. 저녁이 다 돼서야 호텔에 체크인하고 그다음 날 아침에 바로 바리바리 짐을 싸서 황급히 나와야만 다음 행선지로 갈 수 있게 된다. 여행 초반에는 그게 쉽지가 않다가 후반에 이르러서는 모양도 착착 슈트케이스에 이것저것 잘도 싸서 넣게 된다. 짐 싸는 데 몇 분도 안 걸릴 만큼 손이 익으면 이제 돌아갈 때라는 얘기가 된다.

모든 일이 그렇다. 쿠바에서도 그랬다. 웨이트리스에게 ‘워터, 플리즈(Water, please)’보다 ‘아구아포르 파보르(Aguapor favor)’가 입에 붙을 때쯤,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면서 ‘미스터’와 ‘미스’보다 ‘세뇰(Sen~or)’ ‘세뇨라(Sen~ora)’ ‘세뇨리타(Sen~orita)’ 같은 말이 미소와 함께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쿠바의 연인

아바나에 처음 갔을 땐 체 게바라를 보러 가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쿠바 아바나에 살고 있는 22명의 남한 사람(누구는 27명이라고도 한다. 정확하지는 않다. 어쨌든 매우 적다. 그리고 한국 사람은 아바나 외에는 전무하다) 중 얼마 전 최초의 한국 음식점, ‘수 미라마르(Su Miramar)’를 연 정호현에게 산타클라라를 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파안대소했다. 차로 열심히 달려도 4시간 반이 걸린다고 했다. 거기는, 다음에 일정을 길게 잡고 왔을 때 가라고 했다.

정호현은 대신 나를 아바나 주변의 해변으로 데리고 갔다. 그녀의 일곱 살짜리 아들 이안과 한국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오로지 쿠바 재즈에 미쳐서 여기까지 흘러들어온 20대 윤초원이 동행했다.



정호현은 원래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한국에 있을 때 적잖은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주로 이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한 여성의 주체적 의지에 대해 얘기하는 작품들인데, ‘정씨 집안 딸들’ ‘엄마를 찾아서’ 등이 그녀의 주요 작이다. 정호현의 다큐멘터리는 그녀의 자전적 스토리를 담은 것이 대부분인데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 부모 세대, 특히 엄마와의 갈등이 주요 내용으로 나온다.

정호현의 엄마는 교회에 ‘미쳐’ 살아가고, 그걸 그녀는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정호현은 캐나다로 영화 공부를 위해 떠나는데, 그건 아마도 집안과의 종교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그녀가 토론토에 있다가 우연히 쿠바로 여행을 떠난 것이 ‘화근’이 됐다는 점이다. 그녀는 그렇게 쿠바에 눌러앉았다.



트로츠키와 레닌, 게바라와 카스트로

열 살 아래 쿠바 남자 오리앨비스를 만나 춤을 췄고 모히토를 같이 마셨으며 그러고는 사랑에 빠진 것이 직접적인 이유다. 아들 이안은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다. 아이가 크는 동안 정호현과 오리앨비스는 헤어졌다. 한동안 오리앨비스는 한국에서 살았다. 정호현은 아이와 쿠바에 남아 있었다. 지금은 아이가 한국에 있고, 아빠는 플로리다에, 엄마는 쿠바에 계속 살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대신 한국 음식점을 운영하면서.

정호현과 오리앨비스가 왜 헤어졌는지는 모른다. 굳이 알 필요 없는 얘기다. 쿠바의 이혼율이 워낙 높고, 누구든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풍토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문화적 격차를 끝내 좁히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둘이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기까지, 무엇보다 쿠바에서의 삶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는 다큐멘터리 작가 정호현의 영화 ‘쿠바의 연인’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 작품은 2009년 제35회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돼 ‘대상 특별언급상(Special Mention Prize)’을 받았다.  

이 영화, ‘쿠바의 연인’은 오히려 지금 보면 시의적절하다. 쿠바를 모르는 사람, 그런데 쿠바를 가보려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꼭 봐야 할 작품이며, 아마도 한국과 쿠바 사이가 가까워지고 더욱 더 많은 사람이 쿠바로, 쿠바로 향하게 될 향후 2~3년을 생각한다면 다시 한 번 적극적으로 ‘재발견’돼야 할 작품이다. 국내에 DVD가 출시됐는데, 그 재킷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연애는 혁명이다.’



연애를 혁명처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혁명을 연애처럼 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체 게바라다. 지난 7월, 두 번째로 쿠바를 갔을 때 아바나에서 이틀을 보내는 동안 좀이 쑤셨다. 그전 5월에 왔을 때 아바나는 다닐 만큼 다녔다는 생각이었다. 빨리 산타클라라에 가고 싶었다. 게바라의 묘역이 거기 있다고 들어서다.

게바라를 보고 싶었다. 너무 보고 싶었다. 쿠바는 분명 카스트로의 나라이긴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정녕 카스트로만의 나라인가, 하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그건 러시아 혁명이 블라디미르 레닌만이 해낸 것인가, 라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러시아 혁명 역시 레닌 말고도 트로츠키가 없으면 설명이 되지 않으며 어쩌면 트로츠키가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당시의 역사를 더욱 더 사랑하고, 기억하고, 흠모하는지도 모른다.

생각해보면 트로츠키와 체 게바라는 비슷한 점이 많다. 아니, 체 게바라가 트로츠키의 노선을 따라간 셈이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도 ‘영구혁명론’을 주장해, 볼셰비키 혁명의 완수를 우선시한 레닌과 결별했다. 트로츠키는 사회주의 혁명이 영속해서, 무엇보다 국제적인 규모로 계속해서 진행돼야 한다고 믿었다.



같이 지낼 수 없는 동지

체 게바라도 마찬가지다. 아르헨티나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대를 나온 체 게바라(‘체(Che)’는 스페인어로 ‘여보게’ ‘자네’라는 뜻으로, 쿠바 혁명 과정에서 그가 인민들에게 얼마나 친근한 지도자의 상징인지를 보여준다.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절친인 알베르토 그라나다와 함께 중고 오토바이 ‘라 포데로사 2(La Poderosa 2)’를 몰고 남아메리카를 종단하는 여행을 통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사상에 눈을 뜬다.

아르헨티나 사람인 게바라가 쿠바의 혁명에 참여한 것은 트로츠키식 영구혁명론에 동조했기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가 쿠바 혁명이 끝난 후에도 모든 특권과 기득권을 버리고 볼리비아로 간 것 역시, 거기서 한 줌의 게릴라들과 동고동락하며 또 다른 혁명을 기획하고 실행한 것 역시 자신이 신봉한 이론을 실천하겠다는 의지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

게바라는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됐다. 1967년. 39세 때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젊은 나이다. 거꾸로, 지금 그 나이들이 너무 어리고 철없이 산다는 얘기도 된다. 그건 그렇고 어쨌든 그는 꼭 볼리비아로 가야만 했을까.

1965년 2월 알제리에서 열린 ‘아시아 아프리카 연대회의’에 참석한 체 게바라는 “사회주의 블록이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가 돼 자신이 보호해야 할 나라들을 수탈하고 있다”며 흐루시초프 체제의 소련을 맹비난했다.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냉전 블록에서 소련을 선택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둘은 더 이상 같이 지낼 수 있는 처지가 못 됐을까.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로 떠난 것은 그때 이후다. 역사적인 인물들은 최후가 늘 비극적이라고, 게바라가 그랬듯이 트로츠키 역시 스탈린 독재를 피해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1940년 망명지 멕시코에서 도끼로 암살당했다.

아바나에서 산타클라라로 향하는 도로를 4시간 넘게 달리는 동안 머릿속에선 역사의 드라마를 쓰게 된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피델 카스트로는 그를 만났을까. 영원한 혁명 동지를 자처한 두 사람이기에 오히려 둘은 만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골수 사회주의자 게바라와, 사실은 생존을 위해 사회주의 블록을 선택한, 의식적 사회주의자 카스트로는 생래적으로 끝까지 같이 가기 어려운 파트너이자 라이벌이었을 것이다.

산타클라라로 가면서 더욱 확고하게 느끼는 것은 바로 그 점인데, 카스트로는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는 영구혁명보다 순수한 측면에서 자국 이기(利己)의 그 무엇을 추구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까 둘은 결국에 가서는 헤어질 운명이었을 것이며 정적이 될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혁명 상품’의 아이콘

역설적으로 게바라가 볼리비아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 둘을 영원한 혁명 동지의 상징으로 만들어놓는 데 일등 공신 노릇을 한 셈이다. 그건 슬프고도 가슴 아픈 얘기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딱 들어맞아 보인다. 같이 살기보다는 한쪽의 희생으로, 그나마 얻은 혁명의 가치를 유지한다면 그걸 선택해야 하는 법이다. 역사는 그런 것이며 때론 냉혹한 것이 더 인간적일 수 있다.

카스트로 정권이 게바라의 무덤을 혁명의 수도 아바나에서 400km쯤 떨어진 산타클라라에 조성한 것도, 그를 가깝게 하면서도 동시에 멀리 떼어놓음으로써 자신들의 혁명 이상을 ‘갈등 없이’ 지킬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 아닐까. 전 세계에서 체 게바라를 자본주의적 상품의 아이콘으로 만든 것도 그의 대중적 인기를 높여 쿠바 혁명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킴과 동시에 그를 그 정도로 ‘전락’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아성을 더욱 공고화하려는, 교묘한 전략 전술은 아니었을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하지만 모든 것은 골백번 읽고 생각하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최고다. 산타클라라의 체 게바라 혁명광장에 들어서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체 게바라 기념관 앞에 건립된 거대한 동상 아래 서면 더욱 더 그렇다. 젊은 나이에 죽은 그이기에 이상하게도 더욱 친밀한 느낌이 들며 대화를 하고 싶은 듯한 마음이 든다.

오른손에 소총을 들고 그의 상징인 베레모를 쓴 채 어딘가를 향해 걷는 듯한 포즈의 게바라는 그다지 용맹스럽거나 뭔가 투지에 차 있거나 한 표정이 아니다. 왼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다. 부상 때문일까. 오히려 그냥 덤덤하다. 그에게 혁명은 영속적인 것이니까. 그에게 변혁이란 늘 일상이니까. 그에게 세상의 변화란 죽을 때까지 해나가야 할 하루하루의 노동과 같은 일이니까. 그 과정에서 부상을 당하는 일은 부기지수였을 테니까.

체 게바라의 기념관에는 볼리비아에서 같이 ‘학살’당한 부하, 동지들의 무덤이 조성됐다. 그는 당시 24명의 부하와 함께였다. 묘역 안에선 한마디로 게바라의 모든 것을 일람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사진부터 카스트로와 함께한 시절의 사진과 편지, 일기 등등. 하지만 묘역 안에서는 왠지 모르지만 촬영이 금지돼 있다.

빔 벤더스의 ‘부에나비스타소셜 클럽’ 얘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그건 이 여정이 끝나는, 쿠바를 한 바퀴 돌고 다시 아바나로 ‘귀경’한 이후의 얘기다. 그때 가서야 그 유명하다는 클럽, 부에나비스타소셜 클럽을 가기 때문이다.

관광객 대부분은 거길 가기 위해 때 빼고 광을 내는데, 그중 하나가 거기까지 한 번 타는 데 40쿡(CUC),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5만 원이 드는 ‘올드카’를 타고 간다는 것이다. 대부분 바티스타 정부 때 미국 마피아들, 카지노 자본가들이 남기고 간 차들인데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는 ‘클래식카’들을 쿠바 정부가, 아니 쿠바 사람들이 알아서 관광용으로 개발해놓은 것이다.

차는 참 그럴듯한데 이게 참 좋다고 말해야 할지 나쁘다고 말해야 할지, 아무튼 애매모호한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오픈카인만큼 앞차가 내뿜는 매연을 감당해야 한다. 쿠바의 거리는 우리의 1970년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자칫 거리에 잘못 서 있다가는 콧속이 새까매질 수 있다.

아르헨티나도 아니고 브라질 사람인 월터 살레스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만든 것이 생각해보니 특이하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니 특이하지 않다. 그건 쿠바 혁명이 가진 세계성 때문일 것이며 바로 그 점이야말로 체 게바라적 정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이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멕시코인이다.



오토바이로 쓴 혁명일기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특징은 오히려 전혀 혁명적이지 않다는 데에 있다. 퓨세라는 애칭의 에르네스토 게바라와 알베르토 그라나도가 오토바이 한 대로 8000km에 이르는 여행을 한 것을 촘촘히 담아내는, 기록물과도 같은 극영화다. 장르적으로는 일종의 로드 무비인데 이런 유의 영화답게 때로는 풍광도 아름답게 담고, 때로는 중간에 여자와 만나 사랑도 나누며(젊은 애들인데 아무렴), 또 어떤 때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월터 살레스 감독이 담으려 한 것은 아마도 그 모든 과정을 가슴속에 깊이 새겼던 게바라의 ‘인본주의적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궁극적으로 혁명이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나 영원히 그렇게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려 한 것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 주연을 맡은 가엘 가르시아 베르날은 게바라처럼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니라 작고 (남자치고는) 예쁘며 가녀린 모습이다. 이런 친구가 혁명아가 됐다는 것은 그가 그러려고 했다기보다 시대가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여정이 많이 남았다. 내일은 트리니다드를 거쳐 또 다른 혁명지인 시엔푸에고스를 가야 한다. 오늘은 호텔에 아예 짐을 풀지 말아야 한다. 근데 그럴 수 있을까. 아바나에 돌아가 부에나비스타소셜 클럽에 가서 진탕 놀(?) 생각이 머리에 어른거린다. 미인이 얼마나 많을까. 이곳 위스키인 ‘하바나 클럽’은 몇 년산이 맛있을까. 꿈인지 생시인지, 그러다 까무룩 잠이 든다. 쿠바의 열대야가 또다시 깊어진다.  

※쿠바 이야기는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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