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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글자로 본 중국

충돌과 저항 ‘관문’의 운명

津 - 베이징의 ‘수호 거인’

  • 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충돌과 저항 ‘관문’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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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하무인 정복자

해가 지지 않는 국력을 자랑하던 영국은 아편전쟁에서 간단히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안이한 청 조정은 아편전쟁을 베이징에서 머나먼 변방 광둥성에서 일어난 해프닝쯤으로 인식했다. 영국은, 청을 진정으로 굴복시키려면 베이징을 점령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억지 트집을 잡아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켰다. 과연 수도권 점령은 청나라에 크나큰 충격을 줬다. 영국·프랑스 연합군의 톈진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함풍제는 바로 베이징을 버리고 열하 피서산장으로 줄행랑쳤다.

1858년 톈진 조약을 맺으면서 전쟁은 일단 끝났지만, 청 조정이 침략자들을 비난하며 조약 이행을 거부하자 1860년 영·프 연합군은 다시 톈진에 상륙해 베이징을 점령했다. 새로 베이징 조약을 맺으며, 톈진 조약 때만 해도 개항지가 아니었던 톈진도 개항한다.

톈진항은 열렸지만, 톈진인의 마음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톈진인의 눈에 톈진·베이징 조약은 불합리했고, 서양인은 정복자처럼 안하무인이었다. 특히 서양의 위세를 업은 교회는 무척 고까웠다. 중국 민중은 ‘톈주자오(天主敎)’를 ‘주자오(猪叫)’, 즉 ‘돼지 멱따는 소리’로 바꿔 불렀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교회는 고아원 운영에 많은 힘을 쏟았다. 이는 자선사업이기도 했지만, 선교 활동이 어려운 중국에서 신도를 확보하기 좋은 수단이기도 했다. 더욱이 죽어가는 아이에게 세례를 주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교회엔 중요한 실적이어서, 곧 죽어갈 아이도 기꺼이 받아들였다.

고아를 데려오면 사례금을 주자 불량배들은 민가의 아이들을 유괴해 사례금을 받고 교회에 넘겼다. 중국인의 눈에는 이것부터가 인신매매로 보였는데, 교회에서 죽는 아이가 많자 의혹이 증폭됐다. 서양 선교사들이 아이들의 심장, 눈 등 장기로 약재를 만든다는 유언비어가 횡행하면서 중국 관청도 수사에 나섰다.



조사 과정에서 중국 관청, 중국인, 서양인들이 충돌했다. 프랑스 외교관이 중국인을 총으로 쏴 죽이자 격분한 중국인들이 서양인과 중국 기독교인 20여 명을 죽이고 교회, 영사관, 고아원을 불태웠다. 1870년의 톈진 종교사건은 청이 프랑스에 46만 냥을 배상하고 톈진 지부·지현을 면직했으며, 20명의 난동자를 처형하는 것으로 끝났다. 총을 먼저 맞았는데도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내고 여러 명이 처형당하자 중국인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8대 1의 싸움

제아무리 ‘선박은 견고하고 화포의 성능은 우수하다(船堅砲利)’지만 결국 서양인은 ‘하찮은 재주를 가진 교활한 무리’에 불과했다. 왜 찬란한 문명을 가졌고 예의범절을 숭상하는 중화가 인간의 도리 따위에는 관심 없고 돈만 밝히는 오랑캐들 앞에 무릎을 꿇게 됐는가.

답은 간단하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라는 군사력을, 백성은 체력을 길러야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이전에는 어느 중국인이 조계지의 외국 여자가 공놀이 하는 것을 보고 이렇게 물었다. “저 여자는 공을 차면 돈을 얼마나 받기에 매일 저처럼 힘들게 사나?” 그러나 이제 체육은 나라를 구원하는 길이 됐다. 해군사관학교인 톈진수사학당(天津水師學堂)은 생도들에게 검술, 봉술, 권투 등을 가르쳤다. 논객들은 체력을 국력과 동일시했다.

“개인이 약하면 사회 진보에 방해가 된다. (…) 이것은 당연한 자립의 의무, 생존의 원칙이다.”

또한 중화 문명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중국인들은 서양·기독교에 대한 반발로 중국 고유의 것을 고집했다. 중국 전통문화와 체육을 강조하는 두 흐름이 합쳐져 하나의 결론이 나왔다. 중국무술이었다.

상무(尙武)의 기풍 속에서 톈진의 ‘무인(武人) 곽원갑’은 높은 명성을 떨쳤고, 의화권(義和拳)이라는 단체는 무술을 수련하며 인기를 모았다. 무술을 수련하면 기공으로 칼과 총알도 튕겨낼 수 있다는 과장은 무술로서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낼 수 있다는 반외세 감정과 결합했다. 급기야 1899년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의화단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당대 최강국들이 한데 뭉쳤다.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미국, 일본,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8개국 연합군이었다. 이들은 각기 절대강자로 군림하며 식민지를 지배했고, 두세 나라가 연합해 다른 연합국들에 맞선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1개국만을 상대로 한꺼번에 8개국이 뭉친 적은 없었다. 제국주의 사상 초유의 일이다.

열강은 뭉쳤건만 중국은 오히려 분열했다. 서태후와 의화단원들이 열강에 맞섰지만, 광둥의 리훙장(李鴻章), 산둥의 위안스카이(袁世凱), 후베이의 장즈퉁(張之洞) 등 당대의 실력자들은 협조하지 않았다. 이들은 의화단을 민란집단으로 여겼고, 의화단 운동도 가망 없다고 봤다.

이들의 예측대로 무술 실력만 믿은 의화단은 열강의 총 앞에 무력하게 쓰러졌다. 이때에도 8개국 연합군은 톈진에 상륙해 베이징을 점령했고 서태후는 시안(西安)으로 도망쳤다. 전쟁이 끝난 후 톈진은 승리한 8개국에 벨기에를 더한 9개국의 조계지가 됐다. 제2차 아편전쟁과 유사하게 진행됐으나 결과는 훨씬 비참했다.



窮則變 變則通

충돌과 저항 ‘관문’의 운명

톈진의 명물 진흙인형(泥人形)은 도심 곳곳에 보인다. 

충돌과 저항 ‘관문’의 운명

톈진 우다다오(五大道)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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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사진 김용한 | 중국연구가 yonghankim7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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