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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암은 이노베이터이자 프로모터였다” [+영상]

[경제사상가 이건희 탐구㊳] 일평생 '사업보국' 신념으로 좋은 수종 골라 사업 개척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입력2023-09-14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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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년 경술국치 때 태어난 호암의 파란만장한 삶

    • 광복 이후 ‘사업보국’ 결심… 수출 위해 제조업 선택

    • 정보화 사회 대전환기, 수종(樹種) 선정에 천착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호암의 청년 시절(오른쪽). [호암재단]

    호암의 청년 시절(오른쪽). [호암재단]

    호암이 신입 사원과 담소하는 모습. 호암원도 없는 우리가 잘되려면 결국 ‘사람을 키우는 것이 제일’이라고 했다. 
[호암재단 홈페이지]

    호암이 신입 사원과 담소하는 모습. 호암원도 없는 우리가 잘되려면 결국 ‘사람을 키우는 것이 제일’이라고 했다. [호암재단 홈페이지]

    나라가 강하려면 풍족해야 한다

    호암은 경술국치가 있던 1910년생이다.

    그는 회고록 ‘호암자전’에서 “민족과 국가의 수난의 해가 기구하게도 내 출생의 해였다는 것은 파란만장했던 그 후의 나의 인생을 되돌아볼 때 무언가 암시적인 것이 있는 듯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했다.

    그의 예감대로 호암의 삶은 파란만장이란 말이 부족할 정도로 격동의 삶이었다.

    호암은 1919년 3·1운동,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1945년 광복의 격변기를 모두 체험했다.



    그리고 ‘규제’로 말할 것 같으면 지금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첩첩산중이었던 일제강점기 때 창업을 했다. 그가 기업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 민족정신의 발로였다는 것을 짐작게 하는 에피소드가 ‘호암자전’에 나온다.

    호암은 1930년 스무 살 나이에 일본 와세다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부산으로 가서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부관연락선을 타는데 이 배 안에서 그의 말대로 ‘평생 잊지 못할 불쾌한 사건’과 맞닥뜨린다. 그의 말이다.

    “당시 부관연락선은 3000t 급으로 상당히 큰 것이었으나 선실 등 내부 설비는 매우 허술하였다. 배가 부산항을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2등 선실에서 갑판으로 나갔다가 동향인 안호상 박사를 만났다. 안 박사는 독일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교토대학에서 다시 1년 동안 동양철학을 연구하기 위해 도일(渡日)한다고 했다.

    배는 파도가 거센 대한해협에 접어들자 요동이 심했다. 안 박사와 나는 뱃멀미가 심해져서 시설이 다소 나은 1등 선실로 옮기려고 하였다. 그런데 선실 입구에서 일본인 형사가 우리를 저지했다. 우리가 한국인인 줄 대번에 안 그는 거만하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조선인이 무슨 돈으로 1등 선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다.’

    그러면서 우리의 신분을 꼬치꼬치 캐는 것이었다. 안 박사가 비꼬는 투로 응수했다. ‘우리는 돈을 듬뿍 가지고 일본으로 놀러 가는 참이오. 그래서 이왕이면 1등실로 가려는 거요.”

    노(怒)할 줄 모르는 자는 어리석다고 한다. 그러나 노할 줄 알면서 능히 참는 자는 현명하다고 한다. 우리는 치미는 분노를 간신히 억눌렀다.
    나는 이때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의 참뜻을 처음으로 실감하였다. 사소한 사건일지 몰라도 다감(多感)한(혈기왕성하다는 뜻) 청년에게는 (그날의 경험은) 굴욕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호암은 그러면서 이렇게 다짐한다.

    “나라는 강해야 한다. 강해지려면 우선 풍족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풍족하고 강한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 훗날 내가 오로지 사업에만 몰두하게 된 것은 식민지 지배하에 놓인 민족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겨두게 했던 그 부관연락선에서의 조그마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호암은 일본에서 자취 생활을 하면서 각기병을 얻는 바람에 1년 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해야 했다. 사전에 가족에게 연락도 하지 않고 가방 하나 들고 홀연히 귀국한 그의 마음은 허무감으로 가득했다. 친구들과 한밤중까지 노름에 빠져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귀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실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운이 없는 것일까. 세상이 나쁜 것일까. 자성과 자제를 잃은 무위도식의 나날이 그 후에도 한동안 계속되었다.”(호암자전)

    그렇게 2~3년 흐른 어느 날 정신을 차린 호암은 문득 악몽에서 깨어난 듯 ‘너무 허송세월했다. 뜻을 세워야 한다’고 마음을 먹는다.

    “무엇인가 해야 한다. 독립운동을 할까, 관리를 할까, 사업을 할까 여러 가지가 있다. 독립을 위해서 투신하는 것 못지않게 국민을 빈곤에서 구하는 일 또한 시급하다. 식민지의 관리 생활이란 떳떳하지 못하다. 사업의 길을 찾는 것이 성격에 가장 알맞다. 사업에 투신하자. 나의 인생을 사업에 걸어보자.”

    그는 1936년 창업을 한다. 정미업, 양조사업, 부동산 투자로 대지주가 되기도 했지만 이듬해 중·일전쟁이 터지자 갑자기 일본 정부가 대출 중단을 선언하는 바람에 파산한다. 2년 뒤인 1938년 재기했지만 다시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1945년 광복 때까지 칩거한다.

    반대 무릅쓰고 무역업에서 제조업으로

    호암은 훗날 사업가로서 몇 번의 각성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26세 때 무위도식하는 방황 끝에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 첫 번째 각성이었다면 광복과 함께 결심한 사업보국의 신념이 두 번째 각성이었다고 한다.

    광복은 일제 식민지하에서 기업다운 기업 하나 제대로 일으킬 수 없었던 경제인들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호암도 마찬가지였다. 독립국가 한국의 기업가로서 무엇을 해야 할까. 자본과 기술이 전무하고 전기도 부족한 상황에서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무역업’이었다.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 오징어와 한천(寒天·우뭇가사리 같은 것을 끓여 식혀 만든 끈끈한 물질로 음식이나 약 또는 공업용으로 썼다)을 수출하고 면사(綿絲)를 수입했다.

    그가 설립한 삼성물산공사는 1949년 거래액이 무역업 랭킹 7위를 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한다. 하지만 이듬해 6·25가 터지면서 인천과 용산 보세 창고에 보관돼 있던 수입 상품이 공산군에 털리면서 파산한다.

    대구로 겨우 피신한 호암은 절망에 빠졌다가 옛 양조장 동료들의 도움으로 1951년 1월 10일 임시 수도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만들며 재기한다.

    1951년 설립한 삼성물산주식회사 간판. [호암재단]

    1951년 설립한 삼성물산주식회사 간판. [호암재단]

    삼성물산은 출자금이 1년 만에 20배로 늘어나는 급성장을 하지만 인플레도 극심해 운영비와 세금을 빼면 남는 돈이 별로 없었다. 호암의 고민은 깊어갔다. 단지 돈 때문만이 아니었다. 과연 이 시점에서 무역업이 급선무인가 하는 본질적인 고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호암이 추구한 기업가 정신의 위대함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그의 ‘사업보국’ 신념이다. 그는 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나라에 보탬이 될 것인가’를 물었다. 단지 돈만 보았다면 무역업을 더 키웠을 것이다. 하지만 호암은 그러지 않았다.

    “소비 물자를 수입에만 의존하면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 국민들이 소비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야 한다. 사람 외에는 자원다운 자원을 갖지 못한 우리는 원자재를 수입해 다양한 상품을 가공해서 수출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수한 기술과 가공 생산시설을 갖춘 제조업을 해야 한다.”

    호암의 결심을 들은 사내외 사람들은 모두 말렸다. 자금 회임 기간이 긴 생산 공장에 막대한 돈을 투입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물건을 만들어낸다 해도 기술이 떨어져 판로 확보가 쉽지 않다는 거였다.

    하지만 호암은 ‘깊은 고독감에 사로잡히면서도 숙려 끝에 일대 용기를 내어’ 제조업 투자를 결정하고 1953년 제당업, 1954년 모직업에 진출한다.

    그런데 뜻밖의 장애물을 만난다. 기계를 일본에서밖에 들여올 곳이 없는데 이승만 정부가 반대한 것. 배일(排日) 감정이 높았던 이승만 정부는 일본제 설비는 물론 일본인 기술자의 입국 자체를 아예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로서는 당연한 국민정서이기도 했다.

    1954년 제일모직 근로자 모습. [호암재단]

    1954년 제일모직 근로자 모습. [호암재단]

    일본 밉다고 태평양 밖으로 밀어낼 수 없어

    호암의 일본 인식은 이중적이었다. 식민 지배에 대해서는 분노했지만 자신을 도와준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고마움을 잊지 않고 ‘호암자전’에 기록해 놓고 있다.

    1936년 정미소를 세울 때 은행 융자를 받았는데 당시 일본인 지점장이 전폭적으로 신뢰해 줘 사업을 키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호암은 6·25전쟁 직전인 1950년 2월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15명으로 구성된 일본 경제시찰단 일원으로 도쿄를 방문했을 때 일부러 그를 찾아 만나기까지 했다고 한다.

    당시 호암의 도쿄 시찰은 미 점령군(GHQ) 초청이었지만 한국과 교역을 통해 경제부흥을 도모하려는 일본 경제계의 제안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호암으로서는 피지배국 국민에서 독립국가 국민으로서 일본 땅을 밟는 첫 방문이었다.

    광복 이후 한국의 분위기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 극심한 반일 정서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 감정도 철저했다. 일본과 경제활동을 하거나 친선을 하는 것은 민족정기에 위배되는 일로 간주됐다.

    이런 분위기에서 일본과 교역을 시작한다는 것은 ‘역적’으로 몰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호암의 마음은 복잡했다. 하지만 현실적이었다.

    “반일 감정이라고 나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일본열도를 태평양 저쪽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현실은 직시해야 한다. 하물며 무역과 같은 경제관계는 싫다 좋다 하는 감정으로 좌우되어야 할 문제는 아니다.

    머지않은 장래에 일본과의 무역이 반드시 활발해진다고 확신하고 있던 나는 이 기회에 일본 경제계의 실정을 가능한 한 면밀히 살펴보리라 생각했다.”

    당시 호암이 둘러본 도쿄는 전쟁이 남긴 상처로 쑥대밭 자체였다.

    “우리 시찰단은 3개월 동안 교토 오사카 나고야 등 일본 각지를 정력적으로 돌아보았다. 하네다공항에서 도심에 아르는 연도에는 판잣집이 즐비했다. 천황이 사는 황거(皇居) 앞의 석조 빌딩에 휘날리는 성조기만 유난히 눈에 띄었다.

    ‘제국 일본’의 중무기를 생산하던 가와사키중공업은 공장 건물의 골격만 남아 있을 뿐, 내부 시설이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이 폐허나 다를 바 없었다. … 일본 국민들의 생활상도 비참했다. 혹독한 가난에 시달리면서 제2차 대전의 패망을 가져온 군부를 원망하고 있었고, 정부에 대한 불신도 컸으며 내일을 바라보는 희망의 갈피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쿄 어느 바의 여급들은 내가 입은 양복 깃을 손으로 만져보며 ‘순모(純毛) 선생’이라고 수다를 부렸다. 일본의 전통적인 예의나 조심성이니 하는 것을 다 잊어버린 듯 수다스러웠다. 백화점의 상품들도 하찮은 것뿐이었고 그나마 일반 서민들의 백화점 출입은 여의치 않은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성실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특유의 직업 정신이 호암의 머리에 깊게 박혔다.

    “어느 날 저녁 가로등도 없는 도쿄 아카사카의 뒷길을 걷다가 길가 허술한 이발소에 들어갔다. 가위질을 하고 있는 40세 전후로 보이는 주인에게 별다른 생각 없이 말을 건넸다. ‘이발 일은 언제부터요?’ ‘제가 3대째니까 가업이 된 지 이럭저럭 한 60년쯤 되나봅니다. 자식 놈도 이어주었으면 합니다만….’’’

    호암은 이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패전으로 완전히 좌절했어야 할 사람들이 담담하게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투철한 직업의식에 놀란 것이다. 다시 호암의 말이다.

    “일본인들의 직업의식은 경탄할 만하다. 직업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무슨 일이든 대를 이어 그것을 계승하고 기술을 전승한다. 튀김 가게 5대, 과자 가게 4대, 여관 16대째라는 노포가 각 분야에 고루 있다. 몇 대를 이어 같은 일에 종사하므로 자연히 기술도 축적되고 개발되게 마련이다.

    때마침 영국 학계와 재계 대표들로 구성된 또 다른 시찰단 40여 명도 도쿄에 와 있었는데 그들은 일본인 기자들과의 회견석상에서 ‘일본인들의 의리와 신의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결코 망하지 않고 재기할 것이라고 믿습니다’라고 말했다. 내 생각과 꼭 같았다.

    일본은 한국의 6·25전쟁을 계기로 유엔군의 군수품 조달이라는 특수 붐 덕분에 일어나 경제부흥의 토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패망의 잿더미 속에서 그들이 다시 재기한 데에는 일본인 특유의 백절불굴(百折不屈)의 국민성이 저력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확신 설 때까지 확인 또 확인

    호암은 생전에 일본에 대한 감정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별로 없지만 그가 얼마나 일본을 철저히 연구하고 일본 인맥을 통해 배웠는지 자세히 말해 주는 자료와 증언이 있다.

    우선 소개하고 싶은 증언이 호암 옆에서 함께 일했던 고(故) 강진구 전 삼성전자 회장의 증언이다.

    그의 증언을 듣다 보면 새로운 사업 구상에는 국내에서 눈을 돌려 세계로 향하라는 것, 거기서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신사업 구상은 어떻게 하는 것이란 영감을 받을 수 있다. 사업이란 지려야 질 수 없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 다시 말해 철두철미한 준비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는 말도 인상적이다.

    다음은 강 전 회장이 남긴 회고록 ‘삼성전자 신화와 그 비결’에 나오는 ‘도쿄 구상’이란 제목의 글 전문이다. 그는 호암이 반도체 사업을 선언한 1983년 2월 초 어느 날의 장면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한다.

    “1983년 2월 초 나는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을 방문하여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일본에 체류 중인 호암께서 홍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받고 있는 홍 회장의 표정에서 나는 무언가 중대한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대화 내용은 반도체에 관한 것이었다.

    통화를 끝낸 홍 회장은 ‘호암께서 반도체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일 준비를 하라는 지시를 하셨다’고 전해주었다. 당시 호암께서 다음 신규 사업을 물색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는 직간접적으로 듣고 있었는데, 그룹의 다음번 주력사업으로서 마침내 반도체 사업이 선정되었구나 싶었다.”

    그에 따르면 호암은 매년 12월 20일을 전후해 일본으로 건너가 거기서 새해를 보내고 1월 중순 귀국하는 것이 연례행사처럼 돼 있었다고 한다. 매년 김포공항에서 도쿄로 떠나는 호암을 배웅했다는 그는 “호암의 연말연시 도쿄행이 언제 시작됐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주변에서는 흔히 ‘도쿄 구상’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의 말이다.

    “호암의 도쿄 구상이란 철학자나 수도자의 방법과는 전혀 달랐다. 우선 호암은 일본의 여러 방송 매체가 기획한 특별 프로그램들을 유심히 살폈다. 지난 한 해 경제 동향에 대한 총결산과 새로 맞이할 신년의 전망에 대해 일본의 저명한 석학이나 저널리스트들이 벌이는 좌담이나 그런 유의 특별기획 프로그램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다음에는 일본 업계 동향에 정통하고 나름대로 일가견을 가지고 있는 경제 담당 기자들을 점심이나 저녁식사에 초대해 얘기를 나눴다.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로 만나서 지난해 일본에서 업적이 우수한 업종은 무엇이었으며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는지 또 새해 전망은 어땠는지를 캐물었다. 기자들을 통해 일본 경제의 큰 흐름을 파악한 다음에는 흥미 있는 분야를 골라 대학교수 등 저명한 학자들을 만났다. 호암이 만나는 학자들은 이론에만 밝은 게 아니라 재계 동향에 대해서도 꿰뚫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호암은 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지난해 우수 업종과 신년도 예상을 물으면서 왜 잘됐으며 무엇 때문에 잘될 거라고 보는지를 일일이 캐물었다. 학자들이란 이런 식의 질문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명쾌한 해답을 주었다.

    그런 다음에는 이름난 사업가들을 초청했다. 호암은 일본 재계에 발이 넓어 친분이 두터운 사업가가 아주 많았다. 사업가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견해가 있고, 또 구체적이기 때문에 크게 참고가 됐다.

    이렇게 해서 호암은 일본을 통해 삼성에 새롭게 도입할 신제도나 관리 기법을 알아냈고, 이를 비서실에 지시해 실시해 나갔다. 특히 신규 사업을 시작할 경우에는 이 과정이 더욱 철저했다. 호암은 확신이 설 때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강 전 회장에 따르면 호암의 공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동경 체류가 끝나고 귀국이 임박해지면 서점에 가서 책을 몇 아름씩 골라 샀다는 것. 그리고 귀국하는 즉시 자신이 직접 작성한 유망 업종 리스트를 비서실에 건네주면서 “우리 실정에 비춰 사업 타당성을 검토해 우리에게 맞는 사업을 선정하라”고 했다는 것. 삼성의 보험업, 제지, 합섬, 매스컴은 물론 전자, 중공업, 석유화학이 모두 이런 과정을 거쳐 설립됐다고 한다.

    호암의 철두철미했던 ‘도쿄 구상’

    강 전 회장은 “호암이 일본 재계의 동향을 철저히 알아보고 삼성의 다음 업종을 결정한 데에는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유사성에 주목한다는 기본 철학이 깔려 있었다”고 전한다. 그의 말이다.

    “호암은 미국에서 잘되는 사업이라고 한국에서도 꼭 잘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잘되는 사업이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에서도 잘된다면, 그런 사업은 한국에서도 잘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우리와 일본은 식생활이나 주거생활 등 여러 면에서 생활양식과 문화 형태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호암이 이런 식으로 엄선해서 착수한 신규 사업들은 하나같이 크게 발전했다.

    강 전 회장은 “외부에서는 삼성이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그 많은 사업을 시작했는데도 실패하지 않고 모두 성공한 이유를 궁금해하는데 그 동력은 호암의 ‘도쿄 구상’이었다”고 단언하고 있다. 다시 그의 말을 인용한다.

    “사정을 모르는 세간에서는 삼성비서실 스태프들이 아주 우수한 두뇌 집단인 데다가 철저하게 타당성 검토를 거쳐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그럴듯하게 유포되고 있었다.

    물론 스태프들이 우수하고 회장 뜻을 잘 받들어 철저하게 타당성을 검토하고, 적절한 타이밍을 정하고, 필요한 준비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삼성그룹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역시 호암의 ‘도쿄 구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업가에게 업종 선택은 대단히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다. 거대한 자본을 투자한 사업이 실패라도 한다면 그룹 전체가 흔들린다. 그러므로 새로운 업종 선택이란 사업가에게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결단 중의 결단이다.

    호암은 이런 지난(至難)의 결단을 내리기까지 따져보고 또 따져봤다. 그런 확인 과정이 ‘도쿄 구상’이었다.”

    호암이 일본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성급하게 뛰어든 적은 없다고 한다. 호암의 사업 선정은 철두철미했다.

    “호암은 일본에서 히트했다고 해서 당장에 시작하라고 지시한 일은 없었다. 그는 사업가 중의 사업가였다. 지난해 크게 히트했다고 해서 금년에도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업종이 계속 성장하는지 예의 주시하고, 그것이 성공하게 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다.

    호암은 이처럼 혼신의 힘을 기울여 신규 사업을 시작해 사업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항간에서는 이를 일언지하에 ‘문어발식 경영’이라고 매도하는 경우도 없지 않으나, 그야말로 사업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의 어리석고 무책임한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사업가는 총력을 집중해서 신규 사업을 시작한다. 이를 자산가의 게임 정도로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된다. 어떻게 보면 호암은 위대한 병법가에 비유할 수 있다. ‘옛날의 명장들이란 이기기 쉬운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다. 그러므로 명장의 승리에는 기승(奇勝)이란 없다’고 손자병법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질 뻔했는데 극적으로 역전시켰다고 하는 것은 명장이 하는 싸움이 아니다. 지려야 질 수 없는 싸움, 다시 말해서 필승이 보장되어 있는 싸움만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명장이라고 손자는 말하고 있다. 호암은 손자병법의 원칙을 기업전쟁이라는 다른 형태의 전장에서 실천한 진정한 의미의 사업가였다고 나는 확신한다.”

    호암은 또 신규 사업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이 확인하고 또 확인한 것을 스태프들에게 철저하게 검토하게 해 계획을 수립하도록 했으며, 주도면밀한 준비를 갖춘 다음에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호암이야말로 ‘국가의 중대사인 전쟁을 결정할 때 중신이 묘당(廟堂)에 모여 도·천·지·장·법(道天地將法) 5가지 요소를 비교 검토해야 한다’는 손자병법 시계편(始計)의 원칙을 기업에서 그대로 실천한 분이라 생각한다.

    최고 기업가, 최고경영자의 결단이 요구되는 일은 업종 선정과 폐기(廢棄·못쓰게 되는 것을 버림)다. 그것을 우리는 수종(樹種)이라고도 한다.

    좋은 수종을 심으면 쑥쑥 자라서 거목이 돼 훌륭하고 값비싼 재목이 되지만, 나쁜 수종을 모르고 심으면 아무리 해도 쓸모가 없다. 지금은 정보화 사회로 대전환 중이므로 좋은 수종도 많고 버려야 할 수종도 많다.

    지금이야말로 최고경영자, 기업가는 자기 책임하에 좋은 수종을 골라 새로 시작할 것은 시작하고, 바꿀 것은 늦기 전에 바꾸어야 한다.”

    “반드시 일본을 따라잡는다”

    청년 시절의 호암. [호암재단]

    청년 시절의 호암. [호암재단]

    일본 경제평론가 하세가와 게이타로 역시 생전의 호암과 가까웠던 인물로 호암이 도쿄에 머물 때 자주 만났던 사람이다. 조선일보 2010년 2월 5일자에 그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는데 당시 그의 나이 83세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호암과 인연이 시작된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내가 1978년 ‘한국의 경제’라는 책을 펴냈는데 당시만 해도 일본에서는 ‘한강의 기적’은 더 이상 없다는 비판만 있을 때였습니다.

    하지만 난 ‘한강의 기적은 계속된다. 한국은 반드시 선진 공업국 멤버에 들어갈 것’이라고 썼지요. 책을 읽은 이병철 회장이 출판사를 통해 연락처를 알아내 직접 만나자고 전화를 했어요. 그 후로 일본에 오시면 저를 불렀습니다.”

    하세가와 씨는 신문기자를 거쳐 1963년 평론가로 독립한 뒤 일본·아시아·세계 경제를 망라하는 수많은 책을 저술했다. 인터뷰 기사 일부를 인용한다.

    당시 한국은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일본과 차이도 많았고.

    “만나면 말씀했어요. ‘한국인은 결코 자질이 나쁜 국민이 아니다. 우수한 국민이다. 단지 역사와 시스템 결함 때문에 격차가 벌어진 것’이라고. 그러니 반드시 격차를 메울 수 있다고,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지요.”

    정말로 ‘따라잡겠다’고 말씀했나요.

    “여러 번 들었습니다. ‘하세가와상, 당신은 일본인이라 유쾌하게 들리지 않겠지만 일본을 능가하고 싶은 것이 내 진심이오. 참 힘들지만 회사를 키우면 언젠가 대등하게 (일본과) 정면에서 이야기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라고 말했지요. 일본의 힘이 아주 강할 때 그는 도전했고, 결국 세계 1위를 만든 것입니다.”

    한국은 아무것도 없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위대한 것이지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성공 모델을 만든 것입니다. 호암은 이노베이터(innovator·혁신가)였지요.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던 한국이 키울 수 있는 것은 인재(人材)뿐이라고. 그래서 먼저 일본에 요청한 것이 인재였지요. 탁월한 판단이었습니다.”

    일본에서 인간관계가 넓었나요.

    “넓다기보다 깊었습니다. 항상 3명이 함께 식사를 했는데 1명은 NTT(일본 최대 전화 회사) 초대 사장을 지낸 신토 히사시(2003년 작고) 씨였습니다. 이시카와지마하리마(石川島播磨) 중공업(현 IHI) 사장을 지낼 때부터 친했지요. 신토 씨도 전면 협력했습니다.”

    한국 발전에, 삼성 발전에 일본이 많은 도움을 줬습니다.

    “도움만으로 세계 1등을 만들 수 없습니다. 물론 삼성 반도체도 인력, 장비, 부품, 원료를 모두 일본에 의존해 시작했습니다. 도시바, 히타치에서 많은 인재를 데려갔지요.

    요코하마에 연구소를 만들어 일본의 인재 1500명을 한데 모았습니다. 인재에 대한 대단한 정열이었지요. 하지만 이 회장은 수많은 삼성 인재를 거꾸로 일본 대학에 보냈습니다. ‘빌리는 것만으론 안 된다. 우리가 소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이 노선에 이건희 회장이 더 많은 돈을 투자해 지금의 삼성이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회장은 일본에 오면 주로 무엇을 했나요.

    “먼저 책방에 갔습니다. 당시 삼성 도쿄지사가 있던 가쓰미가세키 빌딩 책방에 주로 가셨습니다. 엄청난 독서가였지요. 경제, 기술, 역사, 추리소설까지 샀습니다.

    그리고 아키하바라 전자상가를 다니면서 신제품을 사 모았어요. 그걸 보면서 ‘제품은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 고장이 없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일본 기준까지 올라가려면 삼성은 아직 멀었다’고 말씀하셨지요. 책과 전자제품 이외에 이 회장이 직접 무엇을 사는 걸 본 일이 없습니다.”

    이 회장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그는 최대의 프로모터(promoter·기획자)였습니다. 모직·제당·전기·반도체·액정·중공업…. 전 분야에 걸쳐 기술혁신을 만들어낸 최대의 공로자이지요.”

    일본 경영자를 비교하면.

    “전 혼다 소이치로(혼다자동차 창업자)를 들고 싶습니다. 공격적으로 파고든 강한 집념이 서로 닮았지요.”

    무엇에 파고든 것입니까.

    “꿈이요. 일류 기업이 되겠다는 꿈이었지요. 수십 년 동안 꿈을 잃지 않고 꿈을 계속 추구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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