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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스터 박영순의 커피 인문학

계몽魂 불사른 지식인 아지트 ‘다방’

구한말-일제강점기 숨은 커피史

  • 박영순 |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계몽魂 불사른 지식인 아지트 ‘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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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영국에선 왕정을 무너뜨리는 데 기여했고 프랑스에선 대혁명을 일궈냈다. 대서양 건너 미국에 들어가선 독립운동의 불을 붙이는 데 결정적 오브제로 작용했다. 커피가 이끌어낸 시대적 각성은 구습을 타파하는 용기로, 부당한 압력을 거부하는 저항으로 표출됐다. 지도자는 물론 국민에게도 ‘비합리적인 권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깨우침을 준 덕분이다.

‘계몽의 힘’이야말로 카페인의 위대한 자산이다. 커피는 한국에서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을 해냈을까. 커피가 전파된 구한말은 계몽과 저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기였다. 하지만 일본과 서구 열강에 의한 국권-주권 피탈 위기에서 커피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는 기록을 찾아보긴 힘들다.

우리의 아픈 역사에서 지성을 일깨우는 커피의 축복은 진정 없었던 걸까. 몸부림조차 없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커피를 매개로 한 지식인의 처절한, 그러나 암울한 시대적 상황 탓에 은밀할 수밖에 없었던 고독한 절규는 분명 있었다. 일제의 교묘한 왜곡과 친일파의 자발적 식민사관으로 인해 그런 움직임이 기록되지 못했을 뿐이다.  



‘정동파’의 등장

고종을 무기력한 임금으로 단정하는 시선이 적지 않다. 부친 흥선대원군과 부인 명성황후 사이에서 기가 눌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결국 나라를 빼앗긴 왕으로 비하된다. 그러나 커피를 코드 삼아 재조명한 고종은 처절했으나 단호했고 고독했으나 숭고했다.



고종이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4개월 만인 1896년 2월 11일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아관파천)은 커피 애호가에겐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러시아공사관에서 커피 이야기가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한국인으로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인물로 고종을 떠올린다. 그러나 이보다 12년 앞서 마포나루 인근 ‘담담정(The House of the Sleeping Waves)’에서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고종을 최초의 커피 시음자로 공공연히 말하는 건 커피보다 아관파천에서 배워야 할 역사적 교훈 때문일 것이다. 주한 러시아공사 웨베르와 마리 앙투아네트 손탁이 아관파천에 모종의 역할을 한 건 분명하지만 주도한 건 결코 아니다. 일국의 국모를 살해할 정도로 잔악무도한 일본이 청일전쟁 승리로 기고만장한 상황에서 러시아가 조선의 친일정권을 통째로 바꾸려 자처하고 나설 형편은 못됐다.

고종이 아관파천에 수동적으로 응한 게 아니라 적극 추진했다는 사실은 춘생문(春生門) 사건에서 엿보인다. 이 사건은 을미사변 발생 50일 후, 친일파에게 포위돼 경복궁에 갇혀 지내던 고종이 친미-친러파 관리와 군인들의 도움을 받아 탈출함으로써 새 정권을 수립하려던 시도다. 친위대 대대장 이진호의 배신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밀약하던 ‘정동파(貞洞派)’가 이 사건을 계기로 수면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고종의 노림수

정동파는 고종의 각별한 지원을 받은 ‘해외 유학파 관리들의 모임’이다. 민영환, 윤치호, 이상재, 이완용(후에 변절) 등 개화파 인사들로 구성된 정동파는 외국어를 구사하며 서구 열강 외교관서가 밀집한 정동에서 활약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이 이해득실을 따지며 합종연횡하는 혼돈 속의 외교전은 그야말로 전쟁처럼 치열했다.

이런 와중에 고종은 손탁을 발굴해냈다. 손탁은 프랑스에서 태어났지만 독일 국적을 지녔으며, 웨베르 공사의 가족 자격으로 1885년 입국했다. 손탁 여동생의 남편이 웨베르 의 처남이다. 손탁은 4개 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해 개화 초기 고종에겐 보석 같은 존재였다. 고종이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가깝게 두는 외교 전략을 펴는 상황이라 손탁은 경복궁을 자주 출입할 수 있었다. 손탁은 명성황후와 고종의 신임을 얻으면서 순종의 외국어 개인교사로 일하다 황실 전례관 자격까지 얻었다.

고종은 손탁에게 정동의 땅과 한옥 한 채를 하사해 외교관들을 맞는 공간으로 활용케 했다. 마침 구미 각국에서 온 외교관들에게서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다는 불평이 터져 나오던 때다. 고종은 손탁에게 서양식 침실과 카페 공간까지 만들게 하는데, 노림수는 따로 있었다. 손탁이 새로 꾸민 공간은 ‘정동화옥(정동의 꽃처럼 아름다운 집)’으로 불리다 1902년엔 규모를 키워 ‘손탁호텔’로 면모를 갖췄다. 고종은 이곳을 사실상 영빈관으로 활용하며, 정동파 인사들로 하여금 나라를 지키기 위한 외교전을 펼치게 했다.

손탁호텔의 레스토랑은 당시 외국 인사들이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정동파는 이곳에서 구미의 외교관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며 친분을 쌓고 국제사회에 지원을 요청했다. 친미-친러 개화파 인사들이 주축인 정동파는 외교관들 사이에서 ‘정동구락부(정동클럽)’로 불리며 조선 외교의 상징이 됐다. 고종은 사람을 끌어모으고 이야기꽃을 피워내는 ‘커피의 마력’을 외교에 적극 활용한 것이다.


‘커피 외교’는 계속되고

정동구락부를 중심으로 펼쳐진 조선의 외교는 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를 우군으로 끌어들이며 일본을 상대로 거대한 전선을 형성하는 데 성공하는 듯했다. 그러나 곧 벽에 부딪혔다. 일본이 1904년 2월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키며 유발한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일본이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하는 조건으로 러시아와 휴전하면서 손탁호텔의 주고객이 러시아인과 미국인에서 일본인들로 바뀌었다.

설상가상 미국이 필리핀을 지배하는 조건으로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를 인정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으면서 정동구락부는 설 땅을 잃는다. 든든한 친구로 알았던 미국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하루아침에 한반도를 일본에 넘긴 것이다. 일본은 영국마저 우군으로 만들었다. 영국과 일본은 각기 인도와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동맹을 맺었다. 이로부터 4개월도 못 돼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다.

이익을 위해서라면 친구도 손쉽게 팔아먹는 구미 열강의 저속한 행태는 신의를 소중히 여기는 정동구락부 인사들로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손탁호텔에 상주하며 정동구락부의 핵심인물이던 이완용을 포섭해 몸종처럼 부리며 결국 나라까지 팔아먹게 만들었다.

그러나 정동구락부의 정신은 계승됐다. 주요 멤버들은 독립협회를 만들어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위한 계몽운동에 나섰다. 한국에 들어온 커피가 정동파의 외교적 수단으로 애용된 데 이어, 마침내 정동구락부 회원들로 하여금 독립협회를 결성케 함으로써 국민에게 시대적 각성을 촉구하는 운동에 나서게 한 것이다.

고종이 손탁을 헤이그 밀사로 파견하려 추진했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은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감지하고 1909년 손탁을 사실상 추방한다. 손탁이 고종의 밀명에 따라 정동구락부와 카페를 중심으로 펼친 국권 수호 ‘커피 프로젝트’는 이로써 수포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목숨을 바쳐 그 불씨를 이어간 인물이 고종이다.



고종 승하와 ‘문화통치’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본색을 드러냈다. 헌병을 앞세워 우리 국민을 쥐어짰다. 긴 칼을 차고 다니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 처단하는 무자비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무단통치’의 악랄한 기세를 꺾어버린 게 고종의 승하다. 고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일본의 독살설이 가시지 않는다. 다른 한편에선 ‘자살’이라는 말도 나오는데, 그 속뜻을 살펴보면 고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게 아니라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일본이 당신을 죽이려는 걸 알고도 의연했다는 것이다. 드라마틱한 관점이긴 하나 완전한 허구는 아니다. 관련된 증언이 적지 않다.

식민지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의 3·1운동을 벌인 날이 고종의 장례일이라는 게 우연일까. 일제는 3·1운동에 화들짝 놀라 우리 민족을 회유하는 ‘문화통치’로 전환한다. 치안담당 세력이 헌병에서 순사로 바뀌고 한글 신문 간행도 허용됐다. 물론 순사는 헌병만큼이나 악랄했고, 일제 치하 신문에 정론을 기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기세가 한풀 꺾인 건 분명했다.

그 단서를 일제강점기 다방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문화통치로 인해 조선인도 문화예술을 영위하는 데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커피 문화와 관련해선, 지식인들이 다방을 열 수 있게 된 것이 큰 소득이었다.

고종의 숭고한 죽음과 거국적인 독립만세운동, 국민적 저항정신의 표출을 겨우 다방과 연결 짓느냐고 생각한다면 식민사관의 농간에 놀아나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언론이 우리 지식인에 대해 좋게 써줬을 리 없다. 통치에 방해가 될 성싶으면, 없는 것도 만들어낸 일제가 아닌가. 일제는 언론을 통해 지식인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그들이 운영하는 다방을 단지 잡담거리로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됐다.

일제는 1909년 경성역(현 서울역)에 조선 땅 최초의 다방으로 기록되는 남대문깃사텐을 연다. 그들은 조선보다 한발 앞서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덕분에 커피가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다방을 독점해 한 밑천 잡아보겠다고 욕심을 냈겠지만, 3·1운동 이후 조선인에게도 다방업이 허용된다.

1920년대 일본인이 몰려 살던 청계천 이남 충무로와 명동 일대엔 ‘후다미’ ‘금강산’ 등 다방이 즐비했다. 일본은 여성 접대부를 두고 술을 팔며 춤도 추게 한 곳을 ‘카페’라고 불렀다. 그래서 조선 지식인이 커피를 팔던 곳은 카페라 칭하지 않고 ‘다방’이라 불렀다. 1920~30년대 명동과 충무로는 밤이면 카페로 불야성을 이뤘다.

우리 지식인들은 프랑스 대혁명 때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카페에 진을 치다시피 하면서 시민들과 커피를 나누며 혁명의 기운을 키운 사실을 잘 알았다. 이런 기대감에 조선인으로선 처음으로 다방을 차린 인물이 영화감독 이경손(1905~1977)이다. 그는 1927년 안국동 네거리쯤에 ‘카카듀’라는 다방을 연다. 영화 ‘밀정’에서 카카듀가 재현됐지만 현실에선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종로 관훈동 3층짜리 벽돌 건물의 1층이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 언론매체들은 카카듀에 하와이 출신의 ‘미쓰 현’이란 여인이 있었으며, 이경손과 수상쩍은 관계였다는 식의 가십 거리나 부정적인 내용만 보도해 분노를 자아낸다.


이경손의 ‘카카듀’

남녀가 밀착해 춤추며 술을 마시는 일본식 카페와 카카듀는 품격이 완전히 달랐다. 당시 유학에서 돌아온 예술인들은 카카듀에서 자주 무료 전람회를 열었고, 문인들은 톨스토이 탄생 100주년(1928년) 기념행사를 여는 등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리기 위해 애썼다. 이런 자리에서 어떤 얘기들이 오갔는지를 당시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하긴 힘들다. 분명한 것은 일제강점기에 시대적 각성과 조선인 간 문화교류를 시도한 곳이 카카듀이며 그곳이 바로 다방이란 사실이다.

이경손은 지인들에게 “카카듀는 프랑스 혁명 때 계몽주의 사상가와 시민들이 당국의 감시를 피해 몰래 만난 비밀 아지트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속삭인 것으로 전한다. 일제는 그가 마담과 노닥거리며 재미로 다방을 운영한 듯 소문을 냈지만, 실체는 완전히 달랐다. 나운규를 발굴한 그는 이 시기에 영화사를 만들어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쳤으며, 조선일보에 영화소설 ‘백의인(白衣人)’을 연재하기도 했다. 이 작품은 항일 색채를 띠었다고 일제의 압박을 받기도 했다.

이경손은 1931년 일제가 문화통치를 접고 말살통치에 나서자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김구 선생의 임시정부에 가담한다.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항일정신을 고양시키는 영화를 만드는 데 몰두했다. 이경손은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에 연루돼 쫓기는 몸이 되자 태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도 숨죽여 살지 않았다. 초대 태국교민회장을 맡아 이국땅의 우리 국민을 결집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다방을 연 인물의 진면목이다.

커피가 일군 계몽의 역사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인물이 천재 시인 이상(1910~1937)이다. 그는 1933년 종로 1가 청진동 입구에 ‘제비’라는 다방을 열었다. 앞서 그는 건축기사로서 다방 ‘식스나인(69)’의 인테리어 공사를 맡으며 다방과 인연을 맺었다. 이상은 결핵 때문에 황해도 온천으로 요양을 갔다가 기생 금홍을 만난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지만 주변에선 부부로 인정했다.



이상의 다방

이상은 실패를 거듭하며 ‘카페 쯔루’ ‘무기’ 등 5, 6곳의 다방을 열었다. 그가 생계를 위해 다방을 열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다방을 문인들의 모임 장소, 지식인과 일반인의 교류 장소로 활용하면서 끊임없이 창작과 계몽의 혼을 불사른다. 자신도 다방을 연 이후 작품활동에 더욱 몰입했다. 1934년 구인회에 입회했으며, 그해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다. 이 작품에서 ‘13인의 아해(아이)’가 등장하는데, ‘13’은 고종 때 확정된 조선 땅의 13개 도(道)를 의미하기도 한다.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겨레의 불안과 공포감, 저항의식을 난해한 문구에 숨겨뒀다. 이 시는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그의 작품들에 주목하게 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로 시작되는 ‘날개’가 나온 것도 이즈음이다. 이 소설은 금홍과의 생활을 모티프로 만들어졌는데, 작품에 대한 해석이 구구하다. 소설에서 금홍처럼 보이는 여인은 일제, 몽롱한 상태에서 주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주인공은 조선인을 비유한다는 관점도 있다.

소설은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한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로 끝나는데, 주인공이 박차고 날아오르려는 장소가 미쓰코시(三越) 백화점 옥상이다. 그곳엔 일본인과 친일파가 애용하는 커피 전문점이 있었다. 이상이 일제의 검열을 피하면서 소설에 조심스레, 그러나 강렬하게 담고 싶어한 메시지가 무엇인지, 커피 애호가들은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은 ‘날개’를 발표하고는 일본으로 향한다. 현실을 박차고 날지 못한 아픔에 대해 한풀이를 하듯 일본에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벌이다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붙잡혀 옥살이를 하고, 후유증으로 이국 땅에서 숨진다. 이상의 다방은 이경손의 카카듀처럼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국민적 에너지를 결집하는 아지트였다.



박 영 순

● 충북대 미생물학과 졸업, 고려대 언론대학원 석사
● 세계일보 기자, 메트로신문사 취재부장, 포커스신문사 편집국장  
● 現 인터넷신문 커피데일리 발행인, 커피비평가협회장,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경민대 평생대학원 바리스타과정 전담교수






신동아 201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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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순 | 경민대 호텔외식조리학과 겸임교수 twit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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