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호

서울대 정원 4분의 1, 지방 국립대 편입생으로 채운다면

[신기욱의 밖에서 본 한반도] 아이오와 · UCLA · 스탠퍼드大서 일하며 본 美 대학의 힘

  •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

    gwshin@stanford.edu

    입력2022-09-30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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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련·일본·중국이 美 넘지 못한 이유

    • 산·학·정 삼각체 핵심은 대학

    • 캘리포니아주 UC-CSU-CC

    • 韓보다 유연한 美 교수 노동시장

    • 공부만 잘하는 학생 모아둘 필요 없다

    • 美에는 韓 같은 ‘대학본부’ 개념 없다

    UC버클리는 실리콘밸리에 가장 많은 인력을 공급하는 대학이다. [Gettyimage]

    UC버클리는 실리콘밸리에 가장 많은 인력을 공급하는 대학이다. [Gettyimage]

    미국의 시대는 지속되고 있다. 냉전시대의 소련과 1980년대의 일본이 미국을 추격했지만 뛰어넘지 못했다. 지금은 중국이 맹추격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이들이 뛰어넘지 못하는 미국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첫째는 기술혁신이다.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기술혁신은 세계경제를 이끌고 있다. 인텔(Intel), 애플(Apple), 구글(Google), 페이스북(Facebook), 우버(Uber), 테슬라(Tesla), 트위터(Twitter) 등 기술혁신을 이끌고 있는 기업들은 각 분야에서 글로벌 플랫폼을 구축했다.

    둘째는 군사력이다. 2022년 현재 미국의 국방비는 7500억 달러로 2370억 달러를 지출하는 2위 중국의 3배를 넘는다. 또 한국을 비롯해 가장 많은 나라와 군사동맹을 맺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중국이 미국의 경제를 추격하고 있지만 군사력을 추월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셋째는 대학이다. 미국에는 약 4000개의 대학이 있으며, 글로벌 랭킹 100위권 대학의 절반가량이 미국에 있다. 미국 대학은 글로벌 인재의 양성소 기능을 한다. 약 100만 명의 외국인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미국 다음으로 외국인 학생이 많은 영국과 캐나다의 2배 수준이다.

    미국의 시대를 뒷받침하는 기술혁신, 군사력, 대학은 서로 연관돼 있다. 핵심은 대학이다. HP를 비롯해 구글, 페이스북, 야후 등 수많은 기업이 대학에서 탄생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탠퍼드나 버클리가 없었다면 실리콘밸리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두 곳은 산학협동의 성공적인 사례다. 스탠퍼드 출신 창업자가 수두룩하고, 버클리 졸업생은 실리콘밸리 기술산업 분야에 가장 많은 인력을 공급하고 있다.

    미 국방부는 대학의 기초연구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으며(연간 1조 원 수준), 군사용으로 개발한 기술은 상업화로 연결되곤 한다. 대표적 경우가 GPS다. 이 기술은 미 국방부가 1973년에 개발했다. 1983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소련에 의한 대한항공 격추 사건 이후 상업용으로도 GPS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이처럼 미국에선 산학협동을 넘어서서 산·학·정 협동이 유기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삼각 체제의 핵심 역할을 대학이 하고 있다. 아시아는 물론 자존심이 높은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 대학들도 영어 강의를 늘리고 산학협동을 강조하는 등 ‘대학의 미국화(Americanization)’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럼 미국 대학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 글에선 최근 30여 년간 미국 대학에 재직하면서 보고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 질문에 답하며 한국에 주는 시사점을 찾아보려고 한다. 학령인구는 감소하고 재정 상황은 악화하며 수도권과 비(非)수도권 대학 간의 불균형이 심화하는 가운데 한국 대학의 생태계는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대학의 변화는 한국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하고도 시급한 과제다. 대학을 비롯한 교육은 노동, 연금과 함께 윤석열 정부가 핵심 과제로 추진하는 3대 개혁 중 하나이기에 다른 나라에서 시사점을 찾아보는 작업은 시의적절하다.

    상생의 생태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어떤 제도이든 건강한 생태계가 중요하다. 구성원 간의 유기적인 협력과 상생의 생태계를 조성하지 않으면 그 제도는 오래 지속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선 미국 대학의 생태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2019년 통계를 보면 약 4000개의 대학 중 공·사립학교가 거의 절반씩 균형을 이루고 있다(미국의 공립은 주립이나 시립 등이며 국립은 없다). 이 중에는 4년제, 2년제 대학도 있고 박사과정을 두고 연구를 강조하는 종합대학뿐 아니라 학부 중심의 1000~2000명 규모 작은 리버럴 아츠 대학, 그리고 누구나 입학할 수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도 있다. 또 숫자는 적지만 이윤을 추구하는 대학도 있고, 온라인 대학도 있다.

    좀 더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내가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주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캘리포니아주 인구는 4000만 명으로 한국보다는 조금 적지만 경제 규모는 1.7배 정도 가까이 된다. 스탠퍼드대·남가주대 등 종합 사립대학뿐 아니라, 포모나 칼리지 등 우수한 리버럴 아츠 칼리지도 있다. 특히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내에서 가장 우수한 공립학교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어 한국에 주는 시사점이 크다.

    캘리포니아주의 대학은 캘리포니아대(University of California-UC), 캘리포니아주립대(California State University-CSU), 커뮤니티 칼리지(Community College-CC)로 체계화돼 있다. UC는 버클리에서 시작해 로스앤젤레스, 샌디에이고 등 10곳에 캠퍼스가 있다. 전체 학생 수는 30만 명에 달한다. 주민의 경우 등록금은 2022년 현재 약 1만4000 달러로 6만 달러에 육박하는 사립대학에 비해 비교적 저렴하다. 대학뿐 아니라 우수한 대학원과 리서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다음은 CSU로 23개의 캠퍼스에서 약 50만 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UC와 달리 입학이 어렵지 않고(경쟁률은 1.2대 1정도) 등록금도 6000달러 정도로 저렴하다. 학생과 교수 모두 파트타임이 많고 졸업까지 평균 6~8년이 걸린다. 캘리포니아주 교사 자격증 소지자 절반 이상이 CSU에서 나오는 등 그 나름대로 특화돼 있는 분야도 적잖고, 라티노 등 소수계 학생이 많다.

    마지막으로 2년제 커뮤니티 칼리지는 캘리포니아주에만 116개가 있다. 등록금은 2000달러 정도로 매우 저렴하다. 누구나 입학해 다닐 수 있는데, 약 210만 명의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중요한 것은 UC-CSU-CC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캘리포니아주 공립대학의 생태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인기가 높고 입학 경쟁이 심한 UC의 경우 신입생을 선발할 때 3분의 2정도만 고등학교 졸업생 중에서 받아들인다. 나머지 3분의 1가량은 편입생을 받는데 그중 대부분이 커뮤니티 칼리지 졸업생이다. 요즘 가장 인기가 좋다는 UCLA의 경우 2021년 입학생 자료를 보면 6585명만이 고등학교에서 바로 진학했다. 편입생이 3436명이었는데 이들 대부분(93%)이 커뮤니티 칼리지 출신이었다.

    편입은 제2의 기회 주는 제도

    ‘캘리포니아 메모리얼 스타디움’에 있는 UC버클리대 창업 지원 기관 ‘수타르자센터(SCET)’ 사무실 전경. [동아DB]

    ‘캘리포니아 메모리얼 스타디움’에 있는 UC버클리대 창업 지원 기관 ‘수타르자센터(SCET)’ 사무실 전경. [동아DB]

    UCLA 편입생 중 44%가 그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에 가는 학생(퍼스트 제너레이션)이고, 36%는 소수민족 출신이며, 72%가 재정지원을 받고 있다. 또 편입생들의 합격률은 19%로 11%에 불과한 일반 전형에 비해 입학이 다소 수월한 편이다. 다른 UC 캠퍼스도 사정은 비슷하다. UC로 편입하기가 어려운 경우는 조금 낮춰 CSU로 편입한다. 편입은 재정 형편이나 다른 이유로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들어가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제2의 기회를 주는 좋은 제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UC-CSU-CC는 그 나름대로의 역할 분담을 통해 협력과 보완 관계를 유지하면서 캘리포니아 공립대학 생태계를 유지하고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대가 제로섬 게임을 하듯 대립하거나, 대학이 미래의 일과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난데도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재수·삼수를 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환경과는 대조된다.

    한국 대학의 생태계를 활성화할 방법은 무엇일까. 일단 사립대학은 제외하고 국립대학에 한정해서 본다면, 서울대 정원의 4분의 1을 지방 국립대 출신 편입생으로 채우고 지방 국립대 정원의 4분의 1을 전문대 출신 편입생으로 채우는 식의 구조 개편을 고려해볼 만하다. 그러면 서울대, 지방대, 전문대 간에 좀 더 유기적이고 공생적인 관계가 만들어질 수 있다. 서울대와 지방 국립대 간의 수준 차가 큰데 어떻게 가능하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커뮤니티 칼리지 2년을 이수하고 UC버클리나 UCLA 등의 명문대로 편입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는 경우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졸업률의 경우, 편입생(88%)이 신입생(84%)으로 입학한 경우 보다 오히려 조금 높다.

    교육 생태계 내에서 순환이 이루어지면 ‘한번 루저는 영원한 루저’라는 인식은 사라질 수 있다. 재수·삼수를 하지 않아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므로 입시에 지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고, 사회적 불평등 문제를 일정 정도 해소하는 효과도 낼 것이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전문대로 진학했어도 뜻이 있다면 그곳에서 열심히 해 지방 국립대로, 더 나아가 서울대로 편입학할 기회가 열린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또 한국 대학의 고질적 병폐인 서열화를 약화시키고 다양성을 고양할 수 있다.

    SAT 만점 받아도 떨어지는 이유

    이러한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건 제도 못지않게 그 구성원이다. 미국 대학의 경우 다양성만큼이나 구성원을 충원하고 평가하는 기준도 다양하다.

    스탠퍼드나 UCLA와 같은 종합대학에선 교수의 연구 업적이 매우 중요하다. “논문을 출간하지 못하면 망한다(publish or perish)”라는 말이 생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리버럴 아츠 칼리지에선 연구 업적 못지않게 강의와 학생 지도가 중요하다. 커뮤니티 칼리지에선 학생들이 2년간 열심히 공부해 4년제 대학으로 편입하는 걸 도와주는 게 교수들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다.

    미국 대학의 교수들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는 테뉴어(tenure) 제도다. 테뉴어를 받으면 범죄행위를 하지 않는 한 본인이 원할 때까지 재직할 수 있다. 한국에선 종신교수라고 번역한다. 하지만 테뉴어는 직업 보장이라는 의미보다는 학문적 자유를 보장하는 의미가 더 크다. 정치 등 외부 상황에 눈치를 보지 말고 소신껏 연구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보장하는 것이다. 대신 테뉴어 심사는 매우 엄격한데 가장 중요한 심사 기준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의 학문적 평가다. 보통 12명 이상의 외부 전문가로부터 평가받고 1년간 심사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비교적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다.

    테뉴어를 받지 못하면 1년 이내에 이직해야 하므로 보통 급을 낮춰 가지만 이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반면 연구 업적이 뛰어나면 환경이 더 좋은 대학으로 이직할 수도 있다. 대학 간에는 우수한 교수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설사 현재의 대학에서 테뉴어를 받지 못해 조금 못한 대학으로 옮겼더라도 그곳에서 우수한 업적을 쌓으면 다시 더 좋은 대학으로 갈 수 있다. 한국과 달리 대학교수 노동시장이 유연하게 형성돼 있다는 뜻이다. 내 경우도 아이오와대에서 첫 3년을 재직한 후 UCLA로 옮겨 7년간 있었고, 2001년 스탠퍼드대로 이직해 지금까지 재직하고 있다.

    교수들의 충원과 평가 못지않게 학생들의 선발도 매우 중요하다. 스탠퍼드대를 비롯한 미국의 명문 대학은 공부만 잘하는 학생을 선발하지 않는다. 물론 일정 수준의 학습 능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성적이나 SAT 등의 점수가 중요하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대학에서 공부할 지적 능력이 있느냐를 보는 일종의 필수 조건이지 합격 여부를 결정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다. 성적은 전부 A를 받았고 AP(Advanced Placement·고등학생이 대학 수준의 과목을 대학 입학 전에 학점으로 따서 이수하는 제도) 과목도 여럿 들었으며 SAT(Scholastic Aptitude Test·대학수능시험)는 만점을 받았지만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최근엔 SAT를 없애거나 비중을 줄이는 추세다. UC에서는 아예 제외됐다.

    대학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다

    미국 대학은 크기나 미션(학교가 추구하는 목표) 등에 있어 매우 다양한 만큼 입학 사정 기준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대체로 좋은 대학일수록 미국 사회에 필요하고 더 나아가 글로벌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 학생을 선발한다. 이때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요소가 학업 성적 이외에 ‘리더십’과 ‘커미트먼트(commitment)’다.

    리더십을 갖기 위해서는 본인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과 희생·봉사정신을 갖는 게 중요하다. 이것이 바로 리더십의 출발점이다. 커미트먼트는 ‘약속, 헌신, 전념’으로 번역된다. 뭔가 정확한 어감은 아니지만 본인이 정말 하고 싶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에 대해 포기하지 않고 열정을 바치는 것이다. 공부든 운동이든 음악이든 봉사활동이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있는지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선 이른바 ‘스펙(specification의 속어)’을 쌓는 데 많은 시간을 쓰고 노력한다. 엄청난 스펙을 갖고 있는 학생을 보면 겉으로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과연 어느 하나라도 진지한 열정을 갖고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스카이 캐슬’의 화려함에 가려진 허상과도 같다. 미국 대학에서는 화려한 스펙을 가진 학생보다는, 하고 싶은 일에 대해 오랫동안 열정을 갖고 전념한 학생에게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

    또 미국의 대학은 학생을 선발할 때 그 구성원의 다양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스탠퍼드대만 해도 백인 학생의 비율이 절반에 미치지 못하고 남녀 비율도 대등하다. 7월호 ‘신동아’ 칼럼에서도 논의했듯이 과거처럼 소수자 우대 정책(Affirmative Action)을 펴진 않지만 다양성은 학생이나 교수 선발에서 미국 대학의 매우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대학 지원자들도 획일적 기준에 맞추려 하기보다는 본인만이 갖고 있는 독특함을 통해 대학 사회에 어떠한 공헌을 할 수 있을지 보여줘야 한다.

    대학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니고 또 공부만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둘 필요도 없다. 대학은 그 사회에 필요한, 책임 있는 리더와 구성원을 육성하는 곳이다. 다양한 배경과 관심을 가진 학생이 모여야 서로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구글이나 야후 등 실리콘밸리 첨단 산업의 창시자들이 스탠퍼드대에 다니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창업에 성공한 것은 이런 입학 정책과 무관치 않다.

    한국도 21세기형 인재를 어떻게 선발하고 육성할지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의 교육개혁엔 이런 고민을 담아 글로벌 인재를 육성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는 방안이 포함돼야 한다.

    공급자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대학이 사회와 분리돼 존재할 수 없는 만큼 고고한 상아탑으로 남아선 안 된다. 사회와 경제를 선도해야 하며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

    이젠 산학협동이 일반화됐지만 이를 선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스탠퍼드대의 프레드 터만 교수다. 카이스트(KAIST) 설립에 기여한 바가 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인물이다. 스탠퍼드 산업 공원(Industry Park)을 만들었고 학생들이 창업하도록 장려한 선구자다. 이후 스탠퍼드대 학생들이 창업한 회사는 4만여 개에 달한다. 터만 교수는 현재의 실리콘밸리를 만드는 데 중추적 역할을 했다. 대학이 상아탑 속에 머물러 수요자인 사회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스탠퍼드대가 반도체부터 IT(정보기술)를 거쳐, 현재의 AI(인공지능) 등을 선도하는 데는 이러한 학풍의 결과다.

    최근엔 ‘지속 가능 대학(College of Sustainability)’이 생겼다. 스탠퍼드대에 단과대학이 새로 생긴 건 7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공대, 의대, 경영대와 같은 전문 분야가 아닌 일반인에게는 아직도 생소한 특정 이슈를 중심으로 대학이 생겼다는 것이 흥미로운 일이다. 앞으로 인류가 마주해야 할 두 가지 중요한 문제가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를 선도적으로 연구하고 해결책을 만들어보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교수진 이외에 60명의 교수를 새로 충원하고 과학뿐 아니라 정책과도 연결할 것으로 기대된다.

    새로운 단과대학을 만드는 데는 실리콘밸리의 벤처 캐피털리스트인 도어(Doerr) 부부의 기부가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들이 기부한 11억 달러(한화 약 1.4조 원)를 포함해 약 2조 원의 기부금을 토대로 새로운 단과대학이 세워졌다. 기부금 제도는 미국 대학의 생태계를 활성화하는 윤활유와도 같다. 이를 바탕으로 하버드대(532억 달러), 스탠퍼드대(378억 달러) 등의 사립대학뿐 아니라 텍사스 대학 계열(421억 달러), UC 계열(121억 달러) 등 공립대학도 엄청난 기금을 갖고 대학 발전에 활용하고 있다.

    한국에선 이러한 제도를 입학하기 위해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미국 사립대학에선 동문이나 대학에 기여한 사람의 자녀들을 입학 사정에서 고려하는 레거시 제도가 있긴 하지만 돈을 내고 입학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최근에 이런 사례가 몇 건 발견돼 학생의 입학은 취소됐고 부모는 법적 처벌을 받았다.

    오히려 미국의 경우 도어 부부의 기부처럼 대학이 미래의 과제를 발굴하고 연구를 선도하는 데 지원한다. 또 우수한 교수를 채용하고 재정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을 지원하는 데 사용한다. 스탠퍼드대의 경우 부모의 수입이 연 7만5000달러 이하면 등록금을 비롯해 기숙사비 등 대학 비용 전액을 면제해 준다. UCLA의 경우도 전체 학생 중 45%가 학자금 보조를 통해 등록금을 면제받고 있다. 미국에선 우수한 학생에게 주는 스칼러십이 있긴 하지만 재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주는 재정 보조가 대부분이다.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 하진 않는다. 기부금 제도는 부의 재분배 효과도 거두고 있으며 이를 활성화하기 위해 기부자에게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준다.

    서울 관악구에 있는 서울대 정문. [동아DB]

    서울 관악구에 있는 서울대 정문. [동아DB]

    등록금과 교수 봉급은 동결되고 기업, 개인의 기부는 미미한 상황에서 한국 대학이 글로벌 리더가 되긴 어렵다. 교수 수가 비슷한 스탠퍼드대의 연간 예산이 약 9조 원인 데 비해 서울대 연간 예산은 6분의 1 수준인 1조6000억 원이다. 교육부 예산 중 대학지원금은 약 12조 원으로 유아·초등 예산의 6분의 1 수준이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권이다.

    대학이 경제·사회의 새로운 수요에 부응하고 이를 선도하는 리더가 되려면 재정 확보가 절실하다. 정부의 더 큰 지원뿐 아니라 대학에 대한 통제와 간섭도 줄여야 한다. 기업과 개인이 미래를 바라보고 대학을 지원할 수 있게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동시에 대학은 책임 의식을 갖고 미래를 선도하는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거버넌스 차이… 韓 대학의 단기 리더십

    미국 스탠퍼드대 부설 아시아태평양연구소(소장 신기욱 교수)가 위치한 건물 엔시나 홀의 전경. [동아DB]

    미국 스탠퍼드대 부설 아시아태평양연구소(소장 신기욱 교수)가 위치한 건물 엔시나 홀의 전경. [동아DB]

    마지막으로 대학의 거버넌스 문제다. 한국과 비교해 볼 때 미국 대학의 리더십은 훨씬 더 중장기적이고 연속성이 크다. 내가 UCLA에 재직할 당시 총장이었던 찰스 영(Charles Young)은 29년간 총장으로 일했고, 내가 스탠퍼드대로 옮길 당시 총장이었던 존 헤네시(John Hennessy)는 16년간 재직했다. 대부분의 학장도 오래 재직하고 내 경우도 스탠퍼드대의 아시아태평양연구소장직을 2005년부터 지금까지 17년째 맡고 있다.

    또 미국 대학엔 한국과 같은 본부라는 개념이 없다. 대학 운영이 상당히 분권화돼 있기 때문이다. 교수 채용 등 단과대 학장 등의 승인이 필요한 사안이 있고, 법률적 검토가 필요한 경우엔 학교 법무팀의 도움을 받지만 거의 모든 사안에 일일이 ‘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한국 대학과는 다르다. 실례로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와 한국 대학의 연구소가 협력을 위한 서류에 사인한다고 하면, 미국에선 내가 연구소장으로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도 한국에선 대부분 본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미국 대학의 운영이 분권화돼 있는 대신 교수들은 엄격한 바운더리 내에서 활동해야 한다. 스탠퍼드대의 경우 (다른 대학들도 대동소이하지만) 매년 5월이면 학교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가 2개 있다. 지난 1년간 교수로 활동하면서 ‘책무의 상충(conflict of commitment)’과 ‘이해관계의 상충(conflict of interest)’이 있었는지 자발적으로 밝혀야 한다.

    몇 해 전 필자는 한국의 한 대학으로부터 겸임교수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좋은 기회라 싶어 학교에 문의했지만 ‘책무의 상충’이 있다는 답을 받고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스탠퍼드대의 경우 교수들의 학회 활동은 물론이고 1년에 52일까지는 컨설팅 등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스탠퍼드대 교수 본연의 책임과 임무를 수행하는 데 지장을 준다면 책무의 상충에 해당하는 것으로 판단해 매우 엄격하게 규제한다.

    ‘이해관계의 상충’ 역시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기업, 정부 등 외부 기관의 자문이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할 경우 대학의 품위를 손상하거나 이해관계가 상충하지 않도록 세밀한 규정을 갖고 있다. 즉, 외부 컨설팅 프로젝트에는 스탠퍼드대라는 이름이나 로고를 사용할 수 없으며 외부 기관의 디렉터나 매니저 등 의사결정권이 있는 관리직은 맡을 수 없다.

    한국도 엄격한 룰(rule)을 정하되 그 안에서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이를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종종 논란이 되는 폴리페서(현실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교수) 등 외부 활동의 문제도 책무의 상충과 이해관계의 상충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대학은 정치와 마찬가지로 리더십이 단기적이어서 연속성이 결여돼 있다. 대부분의 대학 총장은 업무 능력에 상관없이 4년 단임에 그치고, 학장 등 보직 교수들의 임기도 보통 2년 길어야 4년이다. 그렇다 보니 단기적 성과에 집착하고 긴 호흡을 갖고 미래 지향적으로 대학을 이끌어가기가 어렵다. 또 마치 정권교체로 들어선 정부가 그렇듯 새로운 대학 집행부가 들어서면 전임 집행부와 차별화하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거버넌스의 문제는 총장 직선제와 연관이 깊어 보인다. 미국 대학에선 한국과 같은 총장 직선제는 상상할 수 없다. 대신 교수, 대학 이사, 동문을 포함한 다양한 구성원으로 총장 선출 위원회를 만들어 1년 정도에 걸쳐 글로벌 서치를 통해 선임한다. 선정에 신중을 기하는 만큼 업무 수행에 문제가 있지 않는 한 오래 맡긴다. 한국의 직선제가 민주화라는 시대적 소명하에서 탄생한 점은 분명하나, 이젠 그 소임을 다했고 외려 대학 사회를 정치화하는 부작용만 커졌다. 새로운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초강대국을 만든 힘

    미국의 쇠퇴에 대한 논쟁이 있긴 하지만 여전히 초강대국으로 세계를 리드하는 데는 대학의 힘이 크다. 미국 대학은 기술혁신의 원천이며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뒷받침한다. 한국도 우수한 교육과 엄청난 교육열로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 수 있었다.

    학령인구의 감소, 수도권·비수도권 대학 간 불균형의 심화, 열악한 재정 상황과 거버넌스의 정치화 등으로 한국의 대학은 위기를 맞고 있다. 한국이 다시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대학 생태계를 활성화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의 미래가 대학에 달려 있다는 점을 명실해야 할 것이다.


    신기욱
    ● 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미국 워싱턴대 사회학 석·박사
    ● 미국 아이오와대, UCLA 교수
    ● 現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학과 교수 및 아시아 태평양 연구소장
    ● 저서 : ‘슈퍼피셜 코리아: 화려한 한국의 빈곤한 풍경’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하나의 동맹, 두 개의 렌즈’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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