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반일 논할 사항 아니거늘
北과 전쟁 시 일본 손은 뿌리칠 텐가
여권이 내놓을 수 있던 ‘정답’은…
10월 12일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왼쪽)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오른쪽)가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빌딩 컨벤션홀에서 열린 ‘2022 국민미래포럼’에 참석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10월 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한 말이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 도발이 연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한·미·일 동해 연합 군사훈련을 두고 “외교 참사에 이은 국방 참사”라며 대단히 강경한 코멘트를 던진 것이다.
돌발적 발언이 아니다. 바로 전날, 서울 용산구 합동참모본부에서 열린 국회 국방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재명은 김승겸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상대로 “일본 자위대와 독도 근해에서 합동(연합) 훈련을 하게 되면 자위대를 정식 일본 군대로 인정하는 것 아니냐”고 질문했다. 김승겸이 “독도 근처라고 하지만, 독도와 185㎞ 떨어져 있고 일본 본토와 120㎞ 떨어져서 오히려 일본 본토와 가까웠다”고 답하자, 이재명은 준비해온 듯한 한 마디를 던졌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들어와서 작전을 해도 되는가?”
다시 역사논쟁에 빠진 대한민국
민주당 당대표가 반일 공세를 몰아가는 가운데, 윤상현 국민의힘 의원이 포문을 열었다. 10월 9일 그는 페이스북에 “왜 이 대표는 일본에는 죽창으로, 미국에는 쇠막대기로, 윤석열 정부에는 각목으로 공격하면서, 우리를 위협하는 북한에는 한없이 부드러운 깃털로 공격하는 시늉만 하는 것인가”라고 썼다.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참전하면서 이 논쟁은 단순한 국방 문제에서 근현대사를 바라보는 역사관의 문제로 승화됐다. 정 위원장이 10월 11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해본다.
“조선은 왜 망했을까? 일본군의 침략으로 망한 걸까? 조선은 안에서 썩어 문드러졌고, 그래서 망했다. 일본은 조선왕조와 전쟁을 한 적이 없다.”
조선이 일본에 의해 합병된 것은 조선 스스로의 탓이거나, 적어도 남을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말하자면 ‘조선망국론’에 기반한 주장이다.
이재명의 발언에 대해 정부와 여당이 내놓을 수 있는 ‘정답’은,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 따로 있다. ‘퇴행적인 역사논쟁과 반일몰이는 그만둬라,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면서 민생을 챙기기도 바쁜 시점이다’라고 응수하면 그만이다.
핵탄두를 가진 북한이 발사체를 개량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1400원대를 넘나드는 환율과 그로 인한 고물가가 서민들을 괴롭히고 있으며,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높인 탓에 이른바 ‘영끌족’을 비롯한 고액 대출자들 역시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국정 전반에 대해 포괄적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정부와 여당은 추상적이고 먼 과거에 대한 논의보다는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 우선 집중하는 편이 옳다.
엎질러진 물을 되담을 수는 없는 법. 2022년 10월 현재, 대한민국은 다시 한 번 역사 논쟁에 빠지고 말았다. 일본이 공식적으로 ‘군대를 가진 나라’가 된다는 것은 과연 우리에게 위협인가, 아니면 도움이 되는 일인가.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일본과 협력하는 것은 싫어도 먹어야 하는 쓴 약 같은 것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미래지향적 행위인가.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사악한 침략자 일본 제국주의 때문인가, 아니면 조선왕조 스스로의 문제 때문이었는가.
6월 29일 한‧미‧일 3국 정상이 스페인 마드리드 이페마 국제회의장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석열 대통령,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대통령실사진기자단]
6‧25전쟁과 일본
한국이 전시 상황에서 일본의 도움을 받는 일은 과연 상상할 수 없는,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국방 참사’일까. 그런 상황을 전제로 우리의 국방 정책을 계획하고 논의하는 것은 ‘극단적 친일’일까. 그렇지 않다. 국군 및 대한민국 전체가 유사시에 일본 및 일본 군사력의 도움을 받는 것은 친일, 반일을 논할 사항이 아니다. 20세기 중반 이후의 현실 속에서 그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외교·안보의 당연한 전제 조건 중 하나일 뿐이다. 심지어 역사적으로 볼 때 이미 현실 속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스튜디오 지브리의 2011년작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1963년의 요코하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은 열여섯 살 소녀 미츠자키 우미. 언덕 위의 코쿠리코 하숙집을 운영하며 양친 없이 살아간다. 어머니는 미국으로 유학을 가 있고, 선장이었던 아버지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우미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매일 아침 배들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깃발을 내건다.
앞서 말했듯 우미는 열여섯이고, 배경은 1963년이다. 1945년,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항복한 바로 그 해에 태어난 ‘전후세대’다. 그리고 우미는 아버지와의 추억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미의 아버지가 세상을 뜬 것은 우미가 태어난 1945년 이후의 일이다. 대체 어떤 일로 우미의 아버지는 목숨을 잃게 됐을까.
정답은 6‧25전쟁이다. 많은 이들이 운전할 줄 아는 자동차와 달리 비행기나 배는 해당 기체를 다룰 줄 아는 인원이 동시에 전쟁에 끌려들어가는 일이 적지 않다. 군인이 아닌 민간 해운회사의 선원이던 우미의 아버지가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 건 그런 이유에서다. 흥남철수 당시 1만3000여 명의 피난민을 싣고 부산으로 향한 메러디스 빅토리호, ‘칼레의 기적’으로 불리는 됭케르크 철수작전에 투입된 수많은 어선과 마찬가지다.
우미의 아버지 설정을 만들 때 지브리의 제작진이 참고한 실화는 다음과 같다. 전쟁에 동원된 민간 화물선 중 하나인 센잔마루가 기뢰 탓에 침몰하고 피해자가 발생한 것이다. 간단히 말해, 6‧25전쟁에서 한국을 돕다가 일본인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였으므로 일본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행위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다. 하지만 일본이 우리의 우방으로 활동한 점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이 다시 무력을 동원해 한국을 침공한다면 어떻게 될까. 과거와 달리 지금은 재래식 병력에서 남북 간 격차가 엄청나지만, 북한에는 핵이 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는 평택 미군기지가 속해 있는 중부지역만을 커버할 뿐이다. 대한민국의 인구, 첨단 산업, 국력이 집중돼 있는 수도권은 핵을 비롯한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공격 앞에 상대적으로 허술하게 노출돼 있다. 다행히 몇 기의 미사일을 막아내거나 무력화한다 해도, 단 한 발이라도 떨어진다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한국의 우세, 북한의 열세’는 현실이 아니게 될 수 있다.
일제에 ‘이왕(李王)’ 작위 받은 조선왕실
안보와 국방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대비해야 마땅하다. 여야의 입장이 달라서는 안 될 일이다. 야당 당대표는 대통령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잠재적 미래 권력이며 국가 지도자 중 하나다. 북한이 핵보유국이 돼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서, ‘일본의 도움 없이 한미동맹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는 주장을 하며 여론을 선동하는 국가 지도자가 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필자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남은 평생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하지만 만약 북한이 우리를 다시 공격한다면, 주일미군뿐 아니라 일본 자위대, 더 나아가 일본 민간 영역의 힘을 빌어서라도 우리는 싸워야 한다. 북한과의 전쟁 상황에서 ‘극단적 친일’ 운운하며 일본의 도움을 뿌리치는 것이야말로 국가적 차원의 ‘극단적 선택’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아닐 것 같다.
문제는 국민의힘의 대응이다. 일본이라는 ‘절대악’이 조선이라는 ‘선한 약자’를 침탈했다는 관점만큼이나, 조선은 ‘망할만한 나라’ ‘망해도 싼 나라’였기 때문에 망했다는 주장 또한 역사적 현실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수 진영과 친화성을 지니는 ‘조선망국론’만큼이나, 진보 진영에 친숙한 ‘조선피해자론’ 역시, 당시를 살았던 조선인들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세계를 도외시하고 있다. 서로 갈등하고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관점 모두 잘못된 관점이다. 오직 국가만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조선피해자론’의 문제부터 살펴보자. 지금까지 확인된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조선 왕실은 조선이라는 국가 그 자체를 지키려 하지 않았다. 왕실의 안위와 풍요에만 관심이 있었다. 중국(청나라), 러시아, 일본 등 여러 외세를 놓고 줄타기를 하며 자신들의 곳간을 불려나갔을 뿐 근본적인 개혁과 부국강병 따위는 그리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고종은 역사적 소명의식을 지니고 부국강병을 꾀한 비운의 개혁군주와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 아들인 순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비롯한 조선의 왕실 후예들은 일본으로부터 천황가(家) 다음이자, 다른 귀족과도 구분되는 ‘이왕(李王)’의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런 사실만을 근거로 ‘조선은 저항 없이 망한 나라’라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조선의 왕실과 고위직, 양반들이 나라가 망하건 말건 자신들의 안위와 이익을 챙길 때, 외세의 국권 침탈에 맞서 싸우는 쪽을 택한 이들이 존재하는 것 또한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1907년 8월부터 1910년까지 일본군과 의병의 전투를 보면, 2852회의 전투로 인해 1만7779명의 조선인이 전사했다. 이것은 일본 측의 기록으로 확인 가능하다. 단순 소요나 치안 불안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가히 내전 상황이었다는 얘기다.
역사는 평범한 사람이 이끌어 간다
여기서 우리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이어진 한반도 역사의 모순을 목격할 수 있다. 아무리 잘 싸운다 한들 일본의 힘을 이길 수 없으며 경제적, 사회적 보상을 받으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지방의 유생과 잔반, 평민들은 일본과 게릴라전을 벌이며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의병들이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왕실과 그 측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바빴으며 일본으로부터 돈과 작위를 챙기기 위한 이면의 협상을 계속해 나갔다. 조선은 절대악에 의해 멸망한 선량한 약자인가, 아니면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망해버린 부패한 봉건 국가였을 뿐인가.정답은 둘 다 맞고 둘 다 틀렸다는 것이다. 조선은 왕조국가였으나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하는 백성들의 힘으로 지탱되고 있는 나라이기도 했다. 왕조는 무능하고 비겁했으나 백성들은 외세 앞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을 핑계로 거리에 나온 조선인들이 왕조의 복원이 아닌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지향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까닭은 그런 이유 때문 아니었을까. 역사를 이끌어 가는 힘은 결국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