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은 전향해도 극단적이라고?
여전히 남아 있는 ‘선각자 의식’
‘사회 주도 세력’이라는 자아도취
전향에도 다양한 ‘스펙트럼’ 있어
아집·적대감, 좌파 사상이 사회에 미친 惡영향
8월 18일 김순호 행정안전부 경찰국장이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행정안전위 회의에 참석했다. [뉴스1]
어느 청년 정치인이 필자에게 한 질문이다. 1990년대 초반 태생으로 과거 운동권 이념이나 계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다. 사실 그런 부분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이 인물은 “지금 내 시각엔 ‘오른쪽 끝’에 있는 사람인데, 전력을 살펴보니 예전에 극성 운동권이었다는 이력이 있어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며 ‘운동권 출신’인 필자를 마주하자 임자를 만났다는 듯 대뜸 물은 것이다. 그의 질문을 각색 없이 옮기자면 이랬다. “좌파들은 왜 전향해도 하나같이 꼴×이 됩니까?”
일단 ‘팩트 체크’부터 하자면 이렇다. 운동권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1980~1990년대에 스스로 운동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던 사람만 족히 수십만 명이다. 이들은 정말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왼쪽 끝’에 매달린 사람이 있을 것이고, 대다수는 왼쪽과 중간 어디쯤에 있을 것이며, 지극히 당연하게 오른쪽은 물론 오른쪽 끝에 위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가운데 극단적 사례를 부각해 ‘운동권 전향자들은 다들 왜 그런가’라고 전제·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측면이 있지 않을까.
이른바 ‘전향’이라는 것도 그렇다. 사전적 의미로 전향이란 ‘종래의 사상이나 이념을 바꿈’이다. 물론 아직도 주체사상이나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버리지 못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압도적 다수는 사상과 이념을 바꿨다. 무장 혁명을 여전히 꿈꾸는 몽상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들 모두가 ‘전향자’인 셈이다. 다만 “나는 생각을 바꿨소”라고 굳이 드러내지 않은 채 각자 조용한 전향 방식을 따랐을 따름이고, 사회의 일원으로서 묵묵히 살아가고 있다.
사상적 나르시시즘
그렇다고 필자에게 질문을 건넨 청년을 타박하려는 것은 아니다. 질문의 속뜻을 충분히 가늠한다. 왼쪽에 있다 중간쯤으로 가는 것은 이해되는데, 오른쪽 끝까지 간 사람들까지는 쉬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뜻 아니겠는가. 특히 지금 오른쪽 끝에 있는 그들의 행동이 왼쪽 끝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지적하는 것이리라. 이른바 전향 인사 가운데 일부가 언행이 좀 거칠고 도드라진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왜 그럴까.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다. 다양성만큼 숱한 고민과 전환의 계기가 있었을 테니 그들을 뭉뚱그려 어떻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타인의 생각과 삶의 궤적에 대한 난폭한 접근이니까. 다만 ‘나 자신’의 경험에 비춰 반성적으로 돌아볼 수는 있을 것이다.
고백하자면 운동권 입문 초기에 필자의 뇌리에 가득 찬 의문은 ‘세상은 왜 이리 무식할까’였다. 당시 읽은 책들은 대개 ‘철학 에세이’나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같은 서적이었다. 그런 책을 읽을 때마다 생각했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세상은 왜 모르는 걸까?’ 셋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사람이 지적으로 게으르거나, 알면서도 타협하며 살고 있거나, 누군가가 진리를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거나. 물론 ‘셋 다’라고 결론 내렸다. 그래서 우매하고 비겁한 대중을 깨우쳐야 한다고 다짐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치달은 사람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닐까. 여전히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고, ‘나는 벌써 깨우쳤는데 당신들은 그 모양인가’라고 비웃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물론 ‘이런 좋은 것을 나만 알고 있기에는 미안하다’는 생각에 자꾸 전파하려는 선한 의지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은 오늘도 ‘운동권’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이쪽 운동권에서 저쪽 운동권으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선각자 의식’이 있어 보이지만 그런 의지마저 나무랄 생각은 없다. 각자의 선택이니까. 특별히 해악을 끼치지 않는 한, 홀로 단꿈에 빠진 사람을 구태여 흔들어 깨울 필요까진 없지 않을까. 물론 역시, ‘그냥 홀로’ 그러고 있지 않으니 문제이지만.
혁명에서 다른 혁명으로?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자면 필자는 과거 ‘종북 주사파’로 지하조직 활동을 하다 전향해 북한민주화운동을 했다. 주사파로 7년, 북한민주화운동가로 8년 정도 살았다. 이를 두고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달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평가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북한민주화운동은 꼭 필요하다 판단했을 따름이지 ‘극단’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북한 정권에 회의감을 느끼고 전향하면서 사실 ‘앞으로는 그냥 평범한 사회인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3개월 정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굳이’ 최종적으로 북한민주화운동을 선택한 이유는 ‘지난날의 죄를 씻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주사파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북한민주화운동을 했을 가능성은 낮았을 것 같다. 주사파 운동을 하면서 그만큼 북한에 관심이 많아졌다. 북한의 끔찍한 인권 실태를 더욱 자세히 알게 되면서 이를 그냥 지나치고 모른 척하며 평범하게 사는 것은 또 다른 죄를 짓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절해고도의 암벽에도 혁명의 꽃은 피는 법이니 동토의 북한에도 분명 ‘꽁꽁 숨은’ 민주화운동가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떻게든 그들과 연대해 북한 스스로 민주주의를 쟁취하도록 돕는 것이 북한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할이라고 여겼다. ‘몽상’이라고 치부해도 좋다. 어쨌거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라고 각오했을 따름이다.
이를 두고 “한 혁명(남한 혁명)에서 다른 혁명(북한 혁명)으로 옮겨갔을 뿐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고 평가한 사람이 있었다. ‘혁명놀음’이라고 표현하며 비웃는 사람도. 아무렴 좋다. 나 역시 ‘혁명의 관성’ 때문에 북한민주화운동을 택했던 것이 아닌지 돌아본 적이 있으니. 하지만 그렇진 않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혁명에 회의감을 느껴 택할 수 있던 가장 좋은 선택지는 일체 혁명을 포기하고 안락을 추구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다른 혁명’으로 옮겨 고생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 스스로 ‘체게바라’를 자임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북한민주화운동가들도 대체로 그랬을 것이다.
‘오묘한’ 경찰국장 김순호
9월 7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김순호 경찰국장 파면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순호 국장은 과거 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인노회) 소속 당시 ‘프락치’였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뉴스1]
임명 소식을 듣고 조금 의아했다. 경장 특채라는 것이다. ‘경정’ 특채의 오기(誤記)인 줄 알았다. 학벌을 따지거나 경찰 직급을 차별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성균관대 출신인 김 국장이, 굳이 그 시절에, 경장으로 특채된 것이 좀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신임 순경 상당수가 고졸이나 전문대졸 출신이었다. 서울 주요 대학 출신이라면 간부 시험을 치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입시에 비유하자면 김 국장은 굉장한 ‘하향 지원’을 해서 경찰에 입직한 셈이다.
김 국장의 ‘대공 수사통’이라는 이력도 꽤 놀라웠다. 간첩이나 공안 사범을 다루는 수사에서 경찰은 늘 검찰이나 국정원 등에 ‘대형 사건’을 뺏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경찰 내부적으로 대공 수사통은 일종의 ‘비주류’로 취급된다. 게다가 기수별로 똘똘 뭉치는 경찰대와 간부후보 출신, 역시 기수를 따지는 일반 순경 출신과 달리 경장 특채인 김 국장은 경찰 내부에 특별한 동기(同期)도 없는 ‘나홀로’였을 것이다. 출발도 비주류, 보직도 줄곧 비주류, 그러면서도 차근차근 진급 계단을 올라 ‘경찰의 꽃’이라고 불리는 총경을 거쳐 경무관, 치안감까지 다다라 화제의 초대 경찰국장이 됐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든 김순호 국장은 대단히 입지전적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뚝심’으로 상징되는 윤석열 정부에서 초대 경찰국장으로 참 오묘한 인물을 발탁한 셈이다.
오묘함은 계속된다. 김 국장 임명 소식이 발표된 후 언론에는 그가 과거에 학생운동권이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성균관대 81학번인 김 국장은 학생운동을 하다 1983년 3월 군대에 강제 징집당했다.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이른바 ‘녹화사업(머릿속에 든 붉은 사상을 파랗게 바꾼다고 해 녹화(綠化)사업이라고 칭했다)’ 대상자가 됐다. 여기까지는 당시 상당수 운동권 학생이 겪은 과정과 크게 다를 바 없으니 그리 문제 될 것 없다.
문제는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에 투신한 후, 인천·부천 민주노동자회(인노회)라는 주사파 지하조직을 만들어 활동한 데에 있다. 더구나 부천 지역을 담당하는 위원장으로 조직의 ‘넘버 2’였다는 후문도 전해진다. 여기까지도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전향하지 않은 채 운동권 활동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안기관에 허위로 전향 의사를 밝힌 후 지하조직 활동을 지속한 사례가 있었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오묘함’의 결정판은 따로 있다. 1989년 1월부터 인노회의 조직원이 줄줄이 체포되기 시작했다. 김 국장은 그해 3~5월 행방이 묘연했고, 9월에는 대공 ‘경력’을 인정받아 경찰에 특채됐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고 의심하면 지나친 것일까.
운동권의 ‘프락치 판타지’
추리소설을 읽는 듯 가늠해 보자. 김 국장은 과연 언제 전향했을까. 대공 수사관이 됐으니 일단 1989년 9월에 전향한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정말 그때 전향했을까. 인노회를 겨냥한 수사망이 좁혀오니 신변에 위협을 느꼈거나 사상적 회의감이 들어 3~5월 잠행 시에 전향했고, 이때를 전후해 ‘지난날의 죄를 씻는다’는 생각으로 경찰행(行)을 결심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인노회가 적발되는 것과 자신은 상관없다고 여기며 말이다. 김 국장은 대체로 그런 가닥으로 자신의 행보를 설명한다.김 국장과 같이 활동한 과거 운동권 동료들은 다르게 주장한다. “체포되고 보니 김 국장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사실을 경찰이 다 알고 있더라”면서 1989년 1월 이전에 김 국장이 이미 전향(혹은 배신)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심지어 1983년 김 국장이 녹화사업 대상자로 교육받았을 때 벌써 전향했으며, 제대 후 복학해 활동한 것도 모두 ‘프락치’로서의 활동이었고, 대학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고 지하조직을 만든 것 또한 모두 ‘위장’이었다는 주장까지 한다. 이런저런 나름의 증거를 내놓으면서.
진실은 때로 상상 너머에 있다. 지나친 추론은 금물이다. 완전한 진실은 오직 김 국장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의 상자에 숨겨져 있다. 운동권 출신들은 대개 ‘김 국장 프락치설(說)’에 동조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운동권 출신으로서 필자는 ‘과연 그럴까’ 하는 의혹이 있다.
대체로 운동권 출신에겐 프락치에 대한, 일종의 ‘환상’ 같은 것이 있다. 공안기관에서 운동권 내부에 무수한 프락치를 심어놓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돌아보건대, 운동권 시절에 프락치라고 잡아 신문(?)해 보면, 단순한 정보원이나 감시원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화 ‘영웅본색’처럼 상대 조직을 와해시키기 위해 고급 밀정을 소싯적부터 파견하고, 내부에서 지도자급으로 성장하게 만들면서 장기간에 걸쳐 파괴·암약 공작을 진행했으리라는 것은 지나친 상상 아닐까. 물론 그런 시도가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냉정히 돌아보면 ‘투입 대비 효과’ 측면에서 공안기관이 특별히 그럴 이유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1980년대 학생운동이 군사정권에 다소 골칫거리이기는 했으나 굳이 공작을 하면서까지 와해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구태여 그러지 않아도 정보는 줄줄 샜고, 어쩌면 서로에게 필요악이었는데 말이다.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그런 상상까지 한 것은 자신들이 뭔가 대단한 ‘사회 주요 세력’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발상 아니었을까. 일종의 자아도취라고 할 만하다.
다시 ‘김 국장’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녹화사업을 계기로 정보기관원과 김 국장이 지속적으로 관계를 유지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지만 운동권 지하조직은 많고 많다. 공안기관이 굳이 별도의 ‘조직 사건’을 양산하기 위해, 김 국장과 같은 사람을 프락치로 투입해서 수년에 걸쳐 일부러 조직을 키웠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김 국장이 군대를 제대하고 운동권에 다시 투신한 것, 인노회라는 지하조직을 만든 것까지는 자발적 행위로 보는 시각이 오히려 더 합리적이다.
설령 프락치였다고 해도 활동의 대가로 외국 유학을 간 것도 아니고, 대기업에 자리를 얻은 것도 아니고, 경찰 간부가 된 것도 아니고, ‘경장’ 특채라니. 어쩌면 인생을 바친 희생에 대한 대가치고는 지나치게 값싸지 않은가. 그가 정말 고급 프락치이고 경찰의 숙련된 공작원이었다면 고작 그 정도 보상만 받고 그쳤을까. 덧붙이자면 김 국장의 경찰 입직과 이번 경찰국장 임명까지 연결해 거대한 음모론을 끌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소설을 봐도 너무 많이 봤다’고 말해 주는 수밖에 없다. 세상은 대체로 상식의 범주 안에서 움직인다.
누가 동지들을 위태롭게 했는가
2020년 7월 ‘주사파 대부’ 김영환 씨가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동아DB]
한 가지 밝히자면 필자가 전향 의사를 천명하고 얼마 뒤 함께 조직 활동을 했던 동료가 찾아온 적이 있다. 나더러 “조직과 동지를 팔아먹은 놈”이라고 비난해 의아했다. 딱 한 마디만 했다. “내가 정말로 조직과 동지를 팔아먹었으면 네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그 말의 속뜻이 무엇인지 알아 그 친구는 입을 다물었다. SNS를 보니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이자 두 아이의 아빠로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1980~1990년대를 통틀어 가장 드라마틱한 전향이 있다면 ‘주사파 대부’ 김영환이 아닐까 싶다. 당시 적잖은 운동권 출신이 “김영환이 동지들을 팔아먹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김영환은 한국 내 최대 주사파 지하조직인 민족민주혁명당의 당수로서 지하조직원 수백 명의 이름과 활동 내역을 소상히 알고 있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동지들을 ‘팔아먹었다’면 그들이 과연 온전할 수 있었을까. 그가 무언가를 ‘팔아먹었다’고 비난한 사람들은 현재 대체로 정치권에 있는 반면, 정작 김씨는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살고 있다. 이익을 좇아 변절한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김영환의 전향은 여러모로 모범 사례라고 할 만하다. 사실 그는 지하조직을 만든 후 북한에 잠수정을 타고 다녀오자마자 북한 정권에 실망해 전향할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자신만 홀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올바른 전향이 아니라고 판단해 ‘조직적 전향’을 택한 것이다. 조직원들의 사상 편향을 바꾸기 위해 장시간 노력했고, 중앙위원회 결의를 거쳐 조직을 완전 해산했다. 나중에 발생한 ‘민혁당 사건’은 조직 해체에 반대한 ‘잔당’들이 북한 정권과 자꾸 접선을 시도하려다 꼬투리가 잡혀 발생한 사건이다. 결과적으로 조직원들을 위태롭게 만든 사람들은 오히려 김영환을 “동지들을 팔았다”고 비난한 자들이었다. 더 나중에 발생한 이석기의 내란음모 관련 사건 역시 민혁당 해체에 반대했던 잔당들이 무리하게 양지(陽地)로 나왔다가 지하조직이 드러난 사례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모두 전향자다. 김순호 경찰국장도 그 숱한 전향자 가운데 한 사람일 것이다. 전향은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남는다. 전향을 결심하고 홀로 조용히 떨어져 나온 사람도 있지만 과거의 동지들을 어떻게든 바꿔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전자를 지독한 개인주의자라고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후자를 “그냥 조용히 살지 뭐 하러?”라고 무작정 비난할 수도 없는 일이다. 자기 나름의 책임감의 발로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과거의 동지들을 사상적으로 온전히 돌려세울 생각을 않고 그들을 ‘잡아들일’ 생각을 했던 것을 그 무슨 책임감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넓은 의미에서 그것도 전향의 숱한 스펙트럼 가운데 하나로 봐줄 일이다.
우리는 전향에 실패했다
1989년 5월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운동권 학생들이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반정부 투쟁을 벌이고 있다. [동아DB]
긍정적 측면은 무슨 일을 하든 자신 있게 덤벼드는 기풍을 갖췄다는 점이고, 부정적 측면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인식이 과도하다는 점이다. 세상은 운동권에 그리 관심이 없음에도 우리는 그렇게 인식했고, 외부 세력이 우리 내부에 불순한 이물질을 주입하려 한다는 경계와 의심을 끊임없이 거듭했다. 과거 운동권이 애먼 사람을 프락치라고 붙잡아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한 것은 이런 과분한 세계관이 불러온 참극이라고 할 것이다.
프락치는 사실 많지 않았다. 이른바 ‘조직 사건’은 알고 보면 운동권 내부의 사소한 실수가 쌓이고 쌓여 발생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운동권은 그것을 줄곧 ‘프락치의 탓’이라고 핑계를 대면서, 혹은 자위하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과도하게 부풀려진 자의식과 적대감은 지금 사회 곳곳에 스펙트럼으로 퍼져 순혈과 혼혈, 순결과 불결,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시금석이 되고 있다. 그들은 아직도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자신이 정통이라고 믿으며, 순혈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르면 이단으로 취급하는 ‘감별사’의 지위를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 그러한 아집과 패권욕을 버리지 않은 이상, 그들이 사상의 오른쪽 끝에 있든 왼쪽 끝에 있든, 그들은 전향했어도 전향하지 않은 셈이다.
좌파 사상이 한국 사회에 끼친 해악은 기실 이런 것 아닐까. 극단이 자신을 극단이라 말하는 경우는 없고, 그것은 지금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전향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신동아 10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