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호

윈슬렛은 먹고, 디카프리오는 못 먹은 그 치즈

[김민경 ‘맛 이야기’] 아는 만큼 맛있는 고르곤졸라

  • 김민경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22-10-03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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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르곤졸라 치즈의 누르스름한 표면에는 부정맥처럼 푸릇푸릇한 곰팡이가 끼어 있다. [Gettyimage]

    고르곤졸라 치즈의 누르스름한 표면에는 부정맥처럼 푸릇푸릇한 곰팡이가 끼어 있다. [Gettyimage]

    역사상 가장 크고 호화로운 여객선이 1912년 4월 10일 영국 사우스햄프턴에서 출항했다. 미국 뉴욕으로 향하던 이 배는 채 5일도 항해하지 못하고 그 여정이 끝났다. 4월 14일 밤 11시 40분 빙산과 충돌 후 3시간 뒤 침몰해 북대서양에 가라앉았다. 1997년 12월 미국에서 개봉한 후 1998년 전 세계로 뻗어나가 엄청난 인기몰이를 한 영화의 제목이자 실재한 타이타닉 호의 이야기이다. 나도 친구들과 함께 극장에 조르르 앉아 영화 ‘타이타닉’을 보았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나라, 시대적 상황 그리고 흥미로운 이야기, 눈 뗄 수 없이 아름다운 장면, 가슴 벅찬 사운드트랙까지 모든 것이 새롭고 감격스러웠다.

    영화를 본 후 딱 3년 뒤인 2001년 나는 타이타닉에 탑승한 사람들이 먹은 치즈에 대해 공부했다. 푸른곰팡이가 군데군데 피어 있는 블루치즈로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도, 맛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그 이름은 ‘고르곤졸라(Gorgonzola)’ 한국어 외래어 표기법으로는 ‘고르곤촐라(잘못된 발음이다)’, 태생은 이탈리아 북부라고 할 수 있다. 고릿한 냄새와 진득한 질감의 이 낯선 치즈 한 조각을 맛보는 순간 나는 1912년 타이타닉의 한 부분을 함께한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당시는 이탈리아라는 곳에 머물다보면 수백 년, 수천 년 전과 수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모르던 때였다.

    스트라키노 치즈와 곰팡이의 운명적 만남

    고르곤졸라는 이탈리아가 20세기 초 연간 1만t 넘게 수출하던 치즈다. 그러니 1912년 타이타닉 호에 탑승했고, 오로지 1등석 승객의 점심 메뉴에만 올랐다. 호화스런 1등석 메뉴에 고르곤졸라만 있던 것은 아니다. 영국의 체셔, 스틸턴, 세인트 아이벨, 체더, 네덜란드의 에담, 프랑스의 카망베르, 로크포르 치즈도 함께였다.

    고르곤졸라 치즈 역시 탄생과 관련해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이탈리아 북부 레코(Lecoo)라는 지역에 있던 산속 자연 동굴에서 9세기부터 만들고 먹어 온 치즈에서 유래했다는 것. 이 동굴은 평균 온도가 1년 내내 6~12℃로 유지돼 아주 오래전부터 마을 사람들과 유목민의 천연 저장소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실제 지역인 파스투로(Pasturo) 산의 발사시나(Valsassina) 계곡은 지금도 ‘치즈의 계곡’으로 불리며 현재까지도 여러 치즈 생산자들이 이용하고 있다.

    또 다른 유래는, 밀라노 근처 고르곤졸라 마을에 있던 어느 집에서 무심코 내버려두었던 소젖 치즈에 푸른곰팡이가 피어났다는 것이다. 집을 관리하는 여인이 사랑에 빠지면서 살림에 소홀해졌고, 결국 치즈 근처에 두었던 오물통을 비우지 않은데서 고르곤졸라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마지막 이야기도 내용이 비슷하다. 어느 여관 주인이 저장고의 치즈를 제대로 돌보지 않아 푸른곰팡이가 생겼고, 버리기가 아까워 신선한 치즈와 섞어 두었더니 맛좋은 치즈가 돼버렸다는 것이다.



    고르곤졸라가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이탈리아 사람들도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니 이 모든 이야기가 다 맞을 수도 있다. 그중에도 확실한 사실은 고르곤졸라는 스트라키노(Stracchino)라는 치즈에 곰팡이가 피어서 생겨났다는 것이다. 스트라키노는 여름 내내 목초지를 돌아다니다가 목장으로 돌아온 소의 젖을 짜서 만들었던 이탈리아 북부 지방의 치즈다. ‘스트라케(Stracche)’라는 단어는 지역 방언으로 ‘매우 지쳤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스트라키노는 지친 소로부터 얻은 젖으로 만든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희고 크림처럼 부드러우며 짧게 숙성해 신선한 맛이 나는 치즈다. 이 치즈가 바로 고르곤졸라를 낳았다.

    샐러드‧피자와 잘 어울리는 진득한 구수함

    고르곤졸라 치즈를 듬뿍 얹어 만든 피자. [Gettyimage]

    고르곤졸라 치즈를 듬뿍 얹어 만든 피자. [Gettyimage]

    고르곤졸라가 알려지기 시작할 때의 풀네임은 ‘스트라키노 디 고르곤졸라’ 또는 ‘스트라키노 베르데(초록 스트라키노)’였다. 이후 원산지를 보호받고,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고르곤졸라라는 단독 이름으로 유명해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수많은 수식어가 붙는다. 고르곤졸라는 두 종류로 나뉘는데 숙성기간이 50~150일 정도로 짧은 것에는 돌체(dolce, 달콤한), 숙성기간이 80~270일 정도로 긴 것은 피칸테(piccante, 매콤한)가 붙는다. 그렇다고 치즈 맛이 달고 맵지는 않다. 부드러움과 강렬함의 차이라고 보면 낫겠다. 더불어 피칸테라는 말 대신 나투랄레(Naturale, 자연의), 몬타냐(Montagna, 산), 델 논노(del nonno, 할아버지의), 안티코(Antico, 오래된) 등의 단어를 붙여 부르기도 한다.

    누르스름하고 진득한 표면에 부정맥처럼 푸릇푸릇 곰팡이가 낀 고르곤졸라는 맛있다. 고릿한 향은 잠깐이고 입에 넣으면 부드럽고 진득하며 구수하고 짭짤하다. 감칠맛 가운데에 달착지근함이 배어나고 새콤새콤 짜릿한 순간이 잠깐씩 찾아온다. 샐러드에 후두둑 떨궈 먹고, 피자에 올려 짭조름하게 즐기고, 꿀을 뿌려 조각조각 먹는다. 그때마다 타이타닉 호를 한 번씩 떠올려주면 좋겠다.

    영화 ‘타이타닉’은 2023년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에 맞춰 리마스터 버전을 개봉할 예정이란다. 다시 극장에 가면 케이트 윈슬렛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들을 유심히 살펴봐야겠다. 물론 그 시절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모습도 숨죽여 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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