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여파로 미각이 흐리멍덩해졌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무뎌진 미각은 음식의 맛이 덜 느껴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식욕까지 바닥으로 끌어내린다. 미각을 돋우는 식재료의 바다로 뛰어들어 보자
검붉은 색의 발사믹식초는 고기 요리와도 잘 어울린다. [Gettyimage]
예수의 십자가 수난 닮은 과일 ‘패션프루트’
패션프루트로 만든 빙수. [Gettyimage]
패션프루트의 속은 복잡·미묘하다. 석류와 무화과와 토마토를 이리저리 섞어놓은 것 같다고 할까. 젤리처럼 무르고 진득한 샛노란 과육이 작은 타원형의 씨앗을 잔뜩 품고 있다. 우리의 경험에 비춰보면 올챙이 알 같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더 놀라운 건 향이다. ‘백향과’ 즉, 100가지 향이 난다는 이름이 있을 정도. 향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미각으로 가는 통로인 후각을 자극하는 데는 성공이다. 맛은 새콤함과 달콤함을 동시에 갖고 있다. 완숙할수록 단맛이 강해진다. 덜 익으면 신맛이 아주 강한데 망고, 파인애플, 복숭아처럼 달콤한 과일과 함께 먹거나 주스를 만든다면 기분 좋게 즐길 만하다.
패션프루트를 즐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달콤하면서도 무른 과육과 톡톡 터지는 씨앗을 숟가락으로 쏙쏙 파먹는 것이다. 속을 파내 유리병에 담고 설탕이나 꿀을 섞어 하루 정도 재워두었다가 다른 과일과 함께 갈아 주스로 마시거나, 진하게 우린 홍차나 녹차, 박하차 등에 섞어 즐겨도 좋다. 달게 재운 패션프루트는 빙수나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섞어 먹기에도 그만이다. 간혹 탱탱한 상태의 패션프루트를 손질해 먹었다면 그 껍질도 설탕에 재워놓자. 설탕이 모두 녹을 때까지 재워두었다가 뜨거운 물에 넣고 한소끔 끓여 차처럼 마시면 향이 아주 좋다.
패션프루트는 우리 몸에 들어가 강력한 항산화 및 항균 작용을 한다. 풍부한 식이섬유와 각종 무기질, 비타민을 함유하고 있으며 숙면과 다이어트에 도움이 된다. 미각만 깨우는 게 아니라 몸의 열정(passion)도 살며시 눈뜰 것 같다.
다양한 형태로 미각 돋우는 식초
발사믹식초로 드레싱한 샐러드. [Gettyimage]
고창 복분자식초는 다양한 형태로 생산돼 풍미를 재미있게 즐길 수 있다. [농업회사법인유한회사 제이엔푸드]
블록식초는 삼각형으로 두툼하게 잘라 파는 치즈를 꼭 닮았다. 딱딱하지 않고 탄력이 있으며 쫀쫀하고, 밀도가 촘촘해 묵직하다. 마치 두껍고 부드러운 고무덩어리 같아 갈거나 필요한 두께로 저미기가 무척 수월하다. 탱글탱글 투명한 젤리처럼 생긴 구슬식초는 표면이 반투명하고 윤기와 빛이 나는 보라색 알갱이다. 음식이나 음료 토핑으로 제격이다.
액체식초, 블록식초, 구슬식초는 모두 4% 산도로 생산됐다. 그런데 입에서 느껴지는 맛은 저마다 달라 재밌다. 구슬식초는 알갱이가 톡톡 터지는 순간 새콤한 맛과 향이 함께 팡팡 터진다. 신맛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음식이나 음료, 디저트에 곁들여 올리면, 탄성을 자아내기에 제격인 식재료다. 블록식초는 쫀득한 질감 덕분인지 맛이며 향이 훨씬 녹진하고 은근하게 다가온다. 요리 재료로 쓰는 것도 좋지만 조각조각 잘라 간식으로 꼭꼭 씹어 먹고 싶다. 차진 식감과 맛이 일품이다. 새콤한 맛이 도드라지지 않아, 식초인가 싶을 수도 있다. 액체식초는 달콤한 맛이 조금 더 진하게 나는 것이 영락없는 과일식초의 면모다. 이 식초 삼형제는 모두 고창에서 자라는 복분자로 만든다. 식초를 만들어 고유한 초항아리에서 2년 자연 발효한 후 숙성 시간을 갖는다. 그 다음 복분자 발효액과 섞어 맛과 향의 균형을 잡아 완성된다.
농익은, 값비싼 발사믹식초를 즐겨 쓰는 이유는 강렬한 풍미를 얻기 위해서지만 진득한 점성이 좋아서이기도 했다. 요리에 뿌리면 온데간데없이 그릇 바닥으로 주르륵 흘러가는 대신 여러 식재료에 꼭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덩어리로, 알갱이로 쓸 수 있는 식초가 있다니 미각뿐 아니라 오감이 눈을 반짝 뜨겠다.
허브와 향신료의 집성체 ‘카레’
카레가루에는 다양한 향신료와 허브가 들어 있다(왼쪽). 카레가루를 섞은 튀김옷. 카레가 들어간 요리는 색다른 맛이 난다. [Gettyimage]
허브와 향신료는 대체로 약용으로 쓰이는 식물의 일부다. 허브는 잎과 줄기, 향신료는 뿌리·껍질·꽃·열매·씨앗 등을 일컫는다. 카레의 고향 인도에서는 허브와 향신료를 섞어 집집이 다른 카레를 만들어 먹는다. 이런 혼합 향신료를 통틀어 마살라(Marsala)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들어본 것이 카레 그리고 가람마살라 정도다.
카레를 즐긴다면 매운맛이 강한 빈달루, 버터를 넣는 마크니, 시금치와 생치즈가 들어가는 팔락 파니르 등을 맛보거나 들어봤을 테다. 이외에도 카레의 종류는 무궁무진하며 스리랑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에는 저마다 고유한 ‘국가적 카레 스타일’도 있다. 우리가 된장과 고추장에 이런저런 부재료를 넣어 ‘나만의 쌈장’을 만드는 것과 별다를 게 없지만 배합이 더 복잡하고 미묘한 셈이다.
우리는 고체형, 가루형, 반조리형의 인스턴트 카레가루를 쉽게 구할 수 있고, 다양하게 요리해 볼 수 있다. 인스턴트 가루에 파프리카 파우더나 혹은 고춧가루, 좋아하는 드라이 허브를 곁들여 나만의 카레를 만들 수도 있다. 볶음밥에 카레가루를 뿌리면 색은 물론 향에도 먹음직스러움이 더해진다. 참치와 옥수수, 삶은 마카로니 등을 버무릴 마요네즈에 카레가루를 넉넉히 섞으면 기름진 풍미를 줄일 수 있고 물이 쉽게 생기지 않아 좋다.
파스타를 삶아 차가운 샐러드를 만들 거라면 올리브유 드레싱에 카레가루를 넣어 정성껏 풀어 섞는다. 그다음 오이, 양파, 파프리카 정도만 넣고 버무리면 꽤 근사한 한 끼가 완성된다. 생선이나 고기를 굽거나, 돈가스를 튀길 때에도 카레가루를 재료 표면에 톡톡 두드려 묻힌다. 굽고 튀긴 따뜻한 생선 혹은 고기를 먹는 순간 은근한 향이 입맛을 돋운다. 가지, 호박(주키니면 더 좋다), 콜리플라워, 감자, 단호박, 양파 등을 굵직하게 썰어 오일, 소금, 후추, 카레가루에 대강 버무려 오븐에 구워 먹는 방법도 있다. 연근, 우엉, 고구마에 카레가루를 묻혀 튀겨 먹어도 일품이다.
카레는 절대로 재료를 가리지 않는다. 카레가 품고 있는 수많은 허브와 향신료는 어떤 재료를 만나더라도 어떻게든 멋진 풍미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힘이 있다. 인도에서 태어나 전 세계인의 미각을 사로잡고도 모자라 나라마다 토착화된 카레가 아닌가. 여름 끝물에 다다라 지치고 무뎌진 입맛을 다양하게 깨워줄 친구로는 이만한 게 없지 싶다.
매운맛은 스트레스 해소에 직방
매운맛은 43℃가 넘는 어떤 것이 혀에 닿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한다. 물을 마시러 다급히 뛰어간 이슬이의 행동으로 보아 맵다는 것은 감각 중에도 참기 어려운 통증의 한 종류가 맞나보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은 그 고통을 즐긴다. 즐기는 걸 넘어 완전히 사로잡혀 있다. 전 세계인으로 평균을 내면 1년 동안 1인당 고추를 5㎏ 먹는다(인덱스박스, 2018). 고추 개수로 치면 한 사람당 250개를 먹는 것인데, 아예 먹지 않는 지역과 우리나라, 터키, 멕시코처럼 아주 많이 먹는 지역으로 나뉘니 우리는 훨씬 많은 고추를 먹는 셈이다. 색다른 시각으로 음식과 조리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내는 요리사 사민 노스랏(Samin Nosrat)이 쓴 책 ‘소금 지방 산 열’에는 다섯 대륙을 식문화가 비슷한 26개 국가 스타일로 분류한 다음 주로 먹는 양념 재료를 써놓은 표가 있다. 그중 15군데에서 자주 사용하는 양념으로 고추(칠리)가 등장한다. 나머지 9군데에서는 고추 하나 달랑 빠지는 대신 엄청난 종류의 향신료가 길게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 표를 보고 있자면 고추는 수많은 허브와 향신료를 대신할 만한 힘이 있는 것처럼 해석된다.고추의 매운맛은 캡사이신(capsaicin)이라는 식물 영양소가 낸다. 캡사이신은 교감신경을 활성화해 신진대사를 좋게 하고, 혈액순환을 도우며, 땀을 빼 체온을 떨어뜨린다. 게다가 매움이라는 통증을 우리 뇌에 선사하므로 스트레스를 줄여주는 엔도르핀까지 분비하게 만든다. 하지만 내가 고추는 물론 고추로 만든 다양한 양념을 즐겨 먹는 이유는 교감신경이나 엔도르핀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고대의 사람들처럼 매운 음식은 쉽게 상하지 않기 때문에 먹는 것도 아니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매움은 속도와 스릴이 있다. 게다가 ‘맛’이 아니라고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을 만큼 맛있다.
고추는 매운맛도 있지만 단맛도 가지고 있고 이 두 가지가 만나면 어디선가 구수함과 감칠맛이 비집고 나온다. 가지에 매달려 익어가고, 햇볕과 바람에 말라가는 정도에 따라 변하는 풍요로운 향도 지녔다. 색깔은 또 얼마나 예쁜가. 싱그러운 초록부터 숨겨진 매움을 과시하듯 짙은 검붉음까지. 고추는 매움이라는 감각의 주머니 안에 다채로운 맛과 향, 색을 꽉 채워 넣고 있다. 씨앗처럼 가득 차 있던 풍미와 색은 다양한 문화와 요리법을 만나 ‘통증’이라는 옷을 벗어던지고 ‘맛’의 지배자로 나선다.
고추는 싱싱한 그대로, 바싹 말려서, 조금 덜 말려서, 기름에 담가서, 짜고 달고 신 것에 절여서, 삭혀서, 곱게 갈아서, 빻아서, 끓여서, 쪄서, 씨도 껍질도 심지어 이파리도 먹는다. 고추의 매움은 감각이라 그런지 어떤 요리 안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가 시리게 차도, 펄펄 끓게 뜨거워도, 아무리 기름져도 매운맛은 살아 있다. 극한의 단맛도, 오만상을 짓게 하는 짠맛 가운데서도, 코를 틀어막고 싶은 강한 향 속에도, 심지어 알코올에 담가도 짜릿한 날이 그대로 서 있다. 이런 특징이 매움에 매료된 이들의 혓바닥을 더욱 자극한다. 한식의 드넓은 매움 계보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에서 건너온 다채로운 매운 요리들, 동남아시아의 산뜻하면서도 짜릿하게 매운 것들, 매움이 슬쩍 다녀간 듯 부드러운 자극을 주는 유럽 스타일의 맛은 어디서나 쉽게 만날 수 있다. 간혹 맛을 넘어 자신과의 싸움처럼 매움이라는 통증과 맞서는 이들이 있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대신 색다른 매운맛을 찾아 늘 두리번거리기는 한다.
브라질 국민고추의 기름진 매움
말라게타 오일과 소스. [가토에즈노비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