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는 반년 동안 달라지지 않았다
무책임할 뿐 아니라 위험천만한
‘유동성 시대’는 이미 끝났거늘…
英 트러스 내각의 황당무계 실험
기본소득 100만 원? 휴지조각 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9월 2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본회의에서 교섭단체 대표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9월 2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꺼낸 말이다. 보궐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하고 곧장 당대표 자리에 오른 그의 첫 공식 연설인 만큼 ‘이재명 체제’가 된 민주당의 새로운 당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연설에 많은 이들이 기대감을 품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권심판 여론이 높았던 지난 대선에서 이재명은 석패했다. 표 차이가 근소하긴 하지만 패배는 패배다. ‘대선후보 이재명’이 가지고 있던 약점이 무엇인지 스스로 파악하고 극복해 ‘당대표 이재명’은 다른 그림을 제시해야 마땅한 일이다. 이재명과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이재명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리라는 기대는 누구나 품었음직하다는 소리다.
뚜껑을 열고 보니 내용물은 실망스러웠다. 대선 이후 반년 동안 이재명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대선을 치르며 들고 나왔던 의제를 단지 용어만 몇 개 바꿔 그대로 사용했다. 앞서 인용한 ‘기본사회’만 해도 그렇다. 이재명의 핵심 의제였던 ‘기본소득’을 버리거나 수정하기는커녕 더욱 강화한 것이다. 문재인 정권의 실패한 대북정책인 ‘한반도 평화경제체제’를 언급한 건 용감해서인지 게을러서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다.
국회의원소환제에 대한 강조는 더 큰 인상을 주었다. 이른바 ‘개딸’이라고 불리는 팬클럽을 동원해 반대자들을 억누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는 건 누구나 알법한 일. 그런데 그가 ‘국회의원도 잘못하면 소환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자 놀랍게도 국민의힘 의원들로부터 박수와 갈채가 쏟아졌다. 대장동, 선거법 위반, 쌍방울그룹 건을 비롯한 여러 사법 리스크를 짊어지고 있는 이재명 본인부터가 ‘소환될 수 있어야 할 국회의원’이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의 현 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차마 웃을 수 없는 희비극적 풍경인 셈이다.
이 글에서 이재명의 교섭단체 대표연설에 담긴 이 모든 논점을 다 짚을 수는 없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사항, 가장 문제적인 사항을 논하는 것만으로도 지면이 부족하다. 필자는 이재명이 던진 여러 논점 가운데 ‘기본사회’로 함축되는 경제관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본소득, 기본사회 등의 발상은 단순히 무책임할 뿐 아니라 위험천만하다. 지난 대선 국면에서도 납득하기 어려웠지만 대내외적 요건이 크게 요동친 현재로서는 더더욱 원내 제1교섭단체의 대표가 가질 수 있는 경제관이 아니다.
美가 금리 올리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원·달러 환율이 13년 6개월여 만에 1400원을 돌파한 9월 22일 서울 중구 하나은행 위변조대응센터에서 직원이 달러화를 정리하고 있다. [송은석 동아일보 기자]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 보자. 연준이 기준금리를 높이면 미국의 시중 은행들도 그에 따라 금리를 인상한다. 미국의 은행에 돈을 맡기면 받을 수 있는 이자가 커진다는 소리다. 따라서 시중에 풀려 있던 돈은 소비되거나 투자되는 대신 더 높은 이자를 찾아 은행으로 들어간다. 유동성이 줄어들면서 경제의 활력도 낮아진다. 대신 인플레이션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것은 막을 수 있다.
복잡한 용어가 등장하지만 원리는 단순하다. 지속적으로 물이 새나가는 욕조가 있는데, 콸콸 틀었던 수도꼭지를 잠갔다고 생각해 보자. 욕조의 수위는 점점 낮아질 것이다. 욕탕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불만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물을 잠그면, 너무 물을 많이 틀어서 욕조 밖으로 물이 넘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렇듯 모든 나라의 중앙은행은 상황에 따라 의도적으로 경기 침체를 감수한다. 물가 상승이 적절한 수준을 넘어 경제 시스템을 파괴하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문제는 달러가 가진 힘이 너무도 크다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이 알고 있다시피 달러는 세계의 기축통화다.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자국 통화의 가치를 달러와 비교해 계산한다. 거의 모든 국제 거래가 달러를 통해 이루어진다. 미국의 기준금리가 점점 더 올라간다는 것은 미국 내의 돈줄이 마른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국 외 다른 모든 나라들도 미국을 따라 기준금리를 올려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게 된다.
한국의 기준금리가 미국보다 낮다면 금융 시장에 들어와 있던 자본은 더 높은 이율을 찾아 떠난다. 원화를 팔고 달러를 사서 미국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원-달러 환율이 높아지면 해외에서 달러를 벌어오는 수출 대기업은 상대적 이득을 볼 수 있으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물가 상승의 고통을 겪게 된다. 우리는 석유를 비롯해 거의 모든 자원을 수입해야 하는 자원 빈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우리만 겪는 일이 아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돼온 ‘유동성의 시대’가 끝나고 ‘강한 달러’가 돌아오면서 전 세계가 인플레이션과 경기 침체의 압력을 동시에 받고 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다른 나라에 선택의 여지는 없다. 시기와 방법이 문제겠으나, 결국은 기준금리를 인상해야 한다. 시중에 풀린 유동성을 회수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도 모색해야 하며, 동시에 정부의 확장 재정 정책 역시 자제해야 한다. 달러가 턱없이 비싼 지금 원화를 풀어놓으면 우리 돈의 가치가 더욱 급격히 떨어지고, 그 부담은 물가 폭등으로 이어져 결국 고스란히 국민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지금 영국은 제정신이 아니다!”
9월 5일(현지시간) 신임 영국 총리 겸 집권 보수당 대표로 선출된 리즈 트러스 전 외교장관(왼쪽)이 당대표 경선 결과가 발표된 런던 ‘퀸엘리자베스2세’ 센터에서 남편 휴 오리어리의 축하를 받고 있다. [런던=AP 뉴시스]
9월 23일, 갓 출범한 영국 리즈 트러스 내각이 50년 만에 최대 폭의 감세 정책을 발표했다. 경기 침체가 문제이므로 소비를 진작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물가가 40년 만에 최고치로 치솟고 있었고, 미국 연준은 향후 기준금리를 얼마나 더 올려야 그나마 시장에 피해가 적을지 고심하던 무렵이었다. 소비 진작을 위한 감세 정책을 펴기에 이보다 부적절한 타이밍을 찾기는 어려울 지경이었다.
대중의 소비심리가 아니라 외환시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파운드화를 팔아치우는 딜러들의 주문으로 시장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쯤 되면 기존의 입장을 철회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영국 정부는 9월 25일 추가 감세 입장을 발표했다. 실수가 아니라 신념에 의한 감세 정책이라는 게 확실해진만큼 시장의 움직임도 분명해졌다. 파운드를 팔고 달러를 사는 것이다. 환율은 1파운드당 1.03달러까지 추락했고 이는 마거릿 대처가 총리직을 역임하던 1985년보다 낮은 수준이었다.
이 황당무계한 양적 완화 정책은 놀라운 효과를 불러왔다. 정치적 의견과 지지 정당이 다르고 서로 견제하던 경제학자 및 경제신문 사이에 의견이 일치했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미국 좌파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겸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폴 크루그먼과, 파이낸셜타임스의 칼럼니스트로 글로벌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마틴 울프가 입을 모아 외쳤다. 지금 영국은 제정신이 아니다!
비록 그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나 영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경제대국 중 하나다. 그런 영국조차 미국이 기준금리를 높이고 돈을 걷어낼 때 양적 완화 정책을 펴면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일각에서는 영국의 일부 연기금이 지급 불능 상태에 빠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금융권에서는 이러다 영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깊은 침체의 늪으로 이끌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싹트기 시작했다.
그런 우려가 현실이 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해법은 단순하지만 고통스럽다. 적절한 수준으로 금리를 인상하고 정부의 재정 지출을 줄여나가야 한다. 당연히 국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이런 위기 속에서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해지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긴축 재정과 고금리를 견디고 나면 더 나은 미래가 있다고 국민을 설득하고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
이제 독자 여러분은 이재명이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천명한 ‘기본사회’의 청사진이 왜 위험천만한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이 금리를 높이는 시점에 감세 정책을 펴기만 해도 영국 경제에는 치명적 타격이 온다. 하물며 기본소득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정부가 국민들에게 현금을 뿌린다면? 그 돈이 국민의 통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환율과 물가가 폭등하면서, 15만 원‧50만 원‧100만 원 수준의 기본소득은 말 그대로 휴지조각이 돼버릴 수도 있다. 다소 과장해 말하자면, 한국의 원화가 짐바브웨달러 꼴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다.
무책임한 몽상과 정책 사이
여기서 우리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야당이란 무엇인가. 지금 당장 어떤 이유로 정권이 바뀐다 해도 국정을 무리 없이 이끌어갈 수 있는 각오, 전문성, 준비 자세가 갖춰진 집단이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지금 당장 윤석열이 아니라 이재명이 대통령이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영국의 감세 정책은 우습게 보일 정도의 엄청난 양적 완화 및 재정 확대 정책을 펼칠 것이다. 감세 정책을 발표한 행위만으로 위기를 겪고 있는 영국을 보라. ‘이재명표 기본사회’가 공식적으로 추진된다면 대한민국은 제2의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미국이 달러를 움켜쥐고 있는 시점이라면 더욱 그렇다.물론 그런 일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없다. 대한민국은 정부가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더라도 스냅 선거로 여야가 뒤바뀔 수 있는 내각제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당이 여당의 임기 5년을 보장받는 만큼, 야당은 야당의 임기를 보장받는다. 당장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을 짊어지지 않은 채 현실성 없이 그럴듯한 이야기를 떠벌이고 무책임한 의혹 제기와 폭로 따위로 정국을 혼탁하게 만들 수 있다는 소리다.
국민은 수권 능력이 있는 대안 세력으로서의 야당을 원한다. 무턱대고 반대하며 무책임한 몽상을 정책이라고 들이미는 반정부세력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당이 ‘이재명의 민주당’을 넘어 ‘국민 모두의 민주당’으로 진화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신동아 10월호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