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당대회 조연 역할… 소멸 수순?
역사상 최전성기 누린 계파였거늘
이재명 ‘사법 리스크’ 커지면 친문도 꿈틀
8월 29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당 지도부와 경남 양산시 평산마을 문재인 전 대통령 사저를 방문해 마중 나온 문 전 대통령과 함께 지지자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뉴스1]
민주당으로서는 고육지책(苦肉之策)이다. 대선 패배와 지방선거 참패 이후 대안부재론에 시달려온 탓이다. 민주당의 ‘이재명 카드’ 선택은 불가항력적이다. 민주당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선거 패배로 흐트러진 당의 전열을 수습하고 윤석열 정부의 폭주를 견제할 최적의 선택지다.
의문은 남는다. 자타가 공인하던 민주당의 대주주는 누가 뭐래도 친문이다. 이번 전대를 거치며 친문이 완전히 실종됐다. 유력 출마 후보조자 없었고, 전대 결과도 완패에 가까웠다. 박완서의 소설 제목에 빗대면 “그 많던 친문은 다 어디로 갔을까”라고 되물어볼 수 있다.
한때 친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2016년 20대 총선 승리를 시작으로 19대 대선, 제7회 지방선거, 21대 총선을 압승으로 이끌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친문은 한국정치사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최전성기를 누렸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난공불락의 국정 장악력을 선보였다. 친문 이외의 계파는 사실상 존재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이제는 달라졌다. 민주당은 친문에서 친명으로 변신하고 있다. 계파는 차기주자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게 현실이다. 친문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반론도 있다. 친문의 소멸을 예단하기에는 정치 환경이 복잡다단하고 유동적이라는 점이다. 22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권력 지형은 요동칠 수밖에 없다. 친문은 친명과의 파열음을 감수하고 권토중래를 노릴 수 있을까.
DJ 뛰어넘은 ‘넘사벽’ 득표율
친문은 민주당의 8·28 전당대회에서 자취를 감췄다. 늘 민주당의 주인공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철저한 조연이었다. 이번 전대는 ‘이재명의, 이재명에 의한, 이재명을 위한 압승’이었다. 변방의 비주류로 온갖 설움을 당하던 이재명 대표는 확실한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대선 이후 리더십 공백을 해소하면서 윤석열 정부 견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민주당의 전대 결과는 놀라웠다. 77.77%의 득표율은 역대급이었다. 앞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문재인·추미애·이해찬·이낙연·송영길 전 대표가 승리할 때 볼 수 없던 경이적 스코어다. 이낙연 전 대표가 2020년 전대 당시 대세론 속에 낙승을 거뒀을 당시에도 득표율은 60.77% 수준이었다.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선후보 선출 당시 득표율 77.53%를 뛰어넘는다.
대의원·권리당원 투표와 국민·당원 여론조사에서 모두 완승이었다. 당내 정치 지형과 세력 판도가 친문에서 친명으로 180도 변화했다. 최고위원 선거 결과도 마찬가지다. 정청래·고민정·박찬대·서영교·장경태 등 5명의 의원이 지도부에 입성했지만 대통령비서실 대변인을 지낸 고민정 의원을 제외하면 모두 친명이다.
당직 인선에서도 탕평보다는 친명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소장은 “정치세력화의 3대 요소는 대권·당권·팬덤의 영향력이다. 이재명 대표는 모두 가지고 있다”며 “비명(非明)을 표방해 왔던 친문 정치인들도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친명화 과정을 밟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친문의 정치적 진로마저 불투명해졌다. 정권교체 이후 마땅한 차기 주자가 없는 게 최대 걸림돌이다. 이재명 대세론을 인정하고 친명 변신이 불가피한 수순이다. 마치 이명박 정부 시절 박근혜 전 대표의 막강 파워에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이 ‘낮에는 친이, 밤에는 친박’을 외쳤던 ‘주이야박(晝李夜朴)’과 비슷한 흐름이다.
반론도 없지 않다. 친문은 의도적으로 후보를 내지 않으면서 이번 전대를 사실상 패스했다. 출마를 저울질했던 친문 핵심 홍영표·전해철 의원은 이 대표의 동반 불출마를 압박하기 위해 전대 불출마를 선택한 바 있다. 다만 이마저도 ‘이재명 대세론’을 꺾을 수 없다는 전략적 계산이었다는 반박도 나온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겸임교수는 “이 대표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승리한 데다 윤석열 정부의 사정 수사로 당장은 친문·친명을 따질 계제도 아니고 싸울 명분도 없다”면서 “다만 친문은 발톱을 숨기고 있는 것이지 완전히 소멸한 건 아니다”라고 진단했다.
친문, 행정·의회·지방권력 장악까지
한국 정치에서 계파나 파벌은 부정적 뉘앙스로 소비된다. 과거 3김정치 시절 제왕적 총재 시절의 유산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계가 대표적이다. 정치1번지로 불린 여의도보다는 전직 대통령의 자택이 한국 정치의 중심일 정도였다.큰 폭의 변화는 2002년 대선을 전후로 나타났다. 지역주의 타파를 내건 노무현의 외침에 한국 정치사 최초의 팬클럽인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등장했다. 이후 ‘친노(親盧)’라는 정치세력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 뒤 여야 주요 계파는 유력 정치인의 성씨나 이름 앞에 한자 ‘친(親)’을 붙이는 게 대유행했다.
친노는 노무현 정부 시절 열린우리당의 주류였지만 대연정 파동 등을 거치며 비노(非盧) 및 반노(反盧)와 불화를 겪었다. 기묘한 동거는 2007년 대선 참패를 거치며 와해됐다. 폐족으로 전락했던 친노는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기적적으로 부활했다. 이어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정치 입문과 대선 도전을 계기로 ‘친노는 곧 친문’으로 이어졌다.
친문은 2000년대 이후 한국 정치사에서 독특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친노가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지지가 가능했다면 친문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특징은 순혈주의와 행동주의다.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비문(非文) 세력이 국민의당에 대거 합류하면서 친문 단일 색채가 강화됐다. 이후 더불어민주당에는 친문 이외에는 사실상 존재하기 어려웠다. ‘조금박해(조응천·금태섭·박용진·김해영)’라는 극소수 비주류가 있을 뿐이었다.
친문은 견제 세력 없이 모든 주도권을 행사했다. ‘문자폭탄’을 무기화한 친문 팬덤 역시 당원의 이름으로 현역의원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친문이 극강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문재인 정부는 행정·의회·지방권력을 장악하며 거침없이 질주했다. 친문의 정치적 영향력은 2012년 대선 국면 이후 10년 이상 장기 유지됐다. 같은 기간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으로 이어진 보수정당에서 친이·친박을 시작으로 친홍(親洪)·친황(親黃)을 거쳐 친윤(親尹)으로 주류 계파가 수시로 변화한 것과 뚜렷이 대비된다.
긴 이야기를 줄이면 친문의 저력은 여전하다. 민주당의 8·28 전대만으로 친문의 소멸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견이라는 점이다. 신율 명지대 교수는 “이 대표의 득표율보다 더 주목해야 할 점은 역대 전대 평균보다 낮은 투표율(37.09%)”이라면서 “사법 리스크로 상징되는 외부의 위기 앞에서 친문도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겠지만 이 대표의 대장동·백현동 의혹은 물론 변호사비 대납 의혹 등의 수사 결과가 심각하게 나온다면 단일대오는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친문이 서서히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친문의 독자 생존과 부활은 차기 주자 배출 여부에 달려 있다. 친문이 ‘제2의 노무현 또는 문재인’을 배출할 가능성을 보인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1987년 대선 이후 민주당 계열 정당의 승리 방정식은 ‘호남 몰표+영남 선전’이었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 2017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김 전 대통령의 경우 흔히 DJP(김대중+김종필) 연대를 승리 원동력으로 이야기하지만 이인제 후보의 독자 출마에 따른 영남표 분열이 결정적이었다. 호사가들은 친문의 대안으로 이낙연 전 대표나 김동연 경기지사를 언급하지만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다른 주자에 주목했다.
“22대 총선 지형을 고려할 때 국민의힘 전략가들은 이재명 단일체제의 민주당을 원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야권 분열을 부추길 가능성이 크다. 민주당 역시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는 단기간에 불식될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친문을 중심으로 대안 모색에 나설 가능성이 없지 않다. 전대 이후 친문이 조용하지만 노림수가 없다고 볼 수 없다. 사면복권이 전제돼야 하지만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향후 행보를 주목하는 이유다.”
8월 23일 ‘586·친문·이재명의 민주당을 넘어 국민의 민주당으로’ 토론회가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가운데 김종민(오른쪽 세 번째), 이원욱(가운데), 김영배(맨 오른쪽), 윤영찬(왼쪽 네 번째), 박용진(오른쪽 네 번째) 의원 등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22대 공천 국면 거사설
대선과 지방선거를 거치는 동안 친문과 친명 양측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친명 일각에서는 아쉬운 대선 패배를 놓고 문재인 전 대통령의 막판 지원사격이 부족했다는 비판마저 조심스럽게 나왔다. 친문 역시 이 대표의 과도한 욕심은 ‘이회창의 길’을 답습하는 것이라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반란의 성공 여부를 떠나 친문이 무기력하게 물러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날이 갈수록 확산되는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도 부담이다. 이 대표가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서 검찰의 기소 이후 법원에서 100만 원 이상의 벌금형을 확정받는다면 최악의 경우 피선거권 박탈로 차기 대선 출마가 불가능해진다. 민주당은 400억 원대 대선 보전비용도 선관위에 반환해야 한다.
22대 총선 공천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도 불씨다. 총선 공천 국면에서 친명의 친문 배제 움직임이 본격화하면 양측 간 파워게임도 불가피하다. 공천은 주요 정치세력 간 이해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맞붙는 지점이다. 친문 대 친명의 갈등은 최악의 경우 보수궤멸론의 출발점이었던 2007년 한나라당 대선 경선 당시 친이계 대 친박계의 사생결단식 혈투로 이어질 수 있다.
수세에 몰린 친문이 정치적 생존을 위해 22대 총선을 앞두고 거사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된다. 비록 현실 정치를 떠났지만 문재인 전 대통령의 정치적 파워는 막강하다. 친노·친문 진영의 적자로 불리는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내년 5월 만기출소 이후 행보도 관심사다. 현 정부의 복권이 전제돼야 하지만 민주당 안팎의 정치 지형을 뒤흔들 메가톤급 변수다.
반면 문 전 대통령과 이 대표가 전략적 연대를 고려할 때 친문·친명 간 물리적 결합에 나설 것이라는 소수의견도 나온다. 윤석열 정부가 적폐청산을 명목으로 가공할 사정 정국을 조성하면 공동의 이해 전선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현재 검경이 친문과 친명 양측을 정조준하는 지점은 한둘이 아니다.
친문의 향후 선택과 진로를 놓고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배종찬 소장은 “친문은 이제 역사적인 정치세력으로서의 의미 이상을 가지기 힘들다”며 “차기 총선과 대선으로 가는 과정에서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다. 시간이 지나면 상당수 친문이 자연스럽게 친명화되는 과정을 거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배 소장은 특히 “이 대표의 운명이 곧 민주당의 운명이다. 반대 세력이 목소리를 내기 힘든 구조”라면서 “22대 총선에서 민주당이 생존하려면 친명 이외에는 선택지가 없다. 친윤과 친명의 대결, 윤명대전이 가파르게 전개될 것”이라고 못 박았다.
신율 교수는 “윤석열 대통령은 언제부터 보수의 대안이었나? 정치는 생물이고 차기 대선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며 “전대 결과에 이어 당직 인선도 친명 일색이다. 친문 입장에서는 22대 총선 공천은 이보다 더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가질 수 있다. 여기에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커질 경우 친문도 꿈틀거릴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