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장사 명부전의 궁예.
안성 땅 죽산의 옛 마을은 이제 완전히 해체되어 있다. 경기도의 가장 남쪽으로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수도권 난개발로 인해 전통적인 마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미륵불만이 버려진 오지를 지키고 있는 형국이다. 미륵불이 널려 있지만 안성 땅이 미륵불이 예언하는 선택의 땅인지에 대해선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매산리 미륵불을 옆에 끼고 5분 거리에는 죽산리 석불입상(경기도 유형문화재 97호)이 자리하고 있다. 매산리 석불보다는 마모가 심해 보기가 안쓰럽지만 그래도 온화한 얼굴로 중생을 내려다본다.
여기서 또 5분 거리인 기솔리에도 커다란 돌기둥 같은 미륵불(기솔리 석불입상)이 남북으로 놓여 있다. 높이가 6m 가까이 되어 길어 보이는 인상의 쌍둥이 미륵불은 자연석을 둥글게 가공해 만들었다고 한다. 두터운 입, 짧은 귀 등 균형은 맞지 않지만 목에는 번뇌, 업, 고난을 상징하는 삼도가 선명하다.

칠장사 명부전의 임꺽정.
안성 땅에는 미륵불뿐만 아니라 미륵사상도 널리 퍼져 있다. 이렇게 된 이유가 뭘까. 궁예의 거처라는 주장 외에 여러 가설이 있다. 그 중심에 칠장사가 있다. 칠장사는 임꺽정(?~1562)과 인연이 많은 절이다. 성호 이익은 저서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 장길산, 임꺽정을 꼽는다. 임꺽정은 황해도를 본거지로 삼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은 안성 칠장사가 그의 생애에 중요한 대목으로 등장한다.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따르면 임꺽정의 스승인 갖바치 출신 병해대사가 칠장사 스님이었다. 그래서 칠장사의 건물 요소요소에 임꺽정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사찰 안 홍제관에는 임꺽정이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는 ‘꺽정불상’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비록 의적으로 불리긴 하지만 지배계층의 눈으로 보면 도둑과 다름없던 임꺽정의 절에 비극의 주인공인 인목대비의 친필 칠언시가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아들 영창대군의 비참한 죽음을 접한 인목대비는 아들을 잃고 무장해제된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고백한다.
“늙은 소는 힘을 다한 지 이미 여러 해, 목이 찢기고 가죽은 뚫려 단지 잠만 자고 싶구나. 쟁기질, 써래질도 끝나고 봄비도 흡족한데 주인은 무엇이 괴로워 또 채찍을 가하는가.”
세월이 흘러 1623년 인조반정 이후 광해군이 폐위되고 자신과 영창의 신원이 복원되자 영창을 모신 칠장사에 크게 사례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후세 사가들 중엔 인조반정이 조선의 국운을 끊은 최악의 정변이라고 평가하는 이도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힘없는 백성들만 시들어가는 격이다.
지나간 것은 그리움이 된다
한반도에는 유난히 미륵불이 많다. 미륵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이 고달프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륵불 신앙은 한반도에서는 희망의 신앙으로 수용되어 폭넓게 전승됐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뒤 56억7000만 년이 지나면 이 사바 세계에 출현하는 부처님이고 그때의 세계는 이상적인 국토가 되어 꽃과 향으로 뒤덮인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야 좋겠지만.
이 땅의 사람들은 늘 절대자를 기대하며 산다. 모든 것이 풍부한 현대에도 삶은 여전히 고달프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며 행복한 미래를 소망했던 푸슈킨조차 아내와의 염문에 격분한 나머지 한 사내에게 결투를 신청했다가 오히려 상대의 총구 앞에서 38세의 나이에 요절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오늘, ‘모든 것은 사라지나 지나간 것은 그리움이 된다’는 푸슈킨의 시 한 구절을 통해 오히려 미륵불의 역설을 듣는다. 미륵은 없다. 이 땅의 미륵사상은 어쩌면 과거완료형일지도 모른다.

노인대학에 가시는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