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노(盧)의 남자’ 김병준 교육부총리 내정자

집념의 ‘전면전’ 인생, ‘동시다발 개혁’에 방향 잃다

  • 박성원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parker49@donga.com

    입력2006-08-08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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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창시절부터 ‘실족(失足)은 안 된다’ 강박감
    • 그림 좋아하고, 인연 중시하는 독실한 불교신자
    • ‘위계(位階)를 갖지 않고 동등한 자유를 누린다’
    • 따뜻한 선배, 다정한 스승, 청렴한 활동가
    • “밑그림만 짰지 실천의지가 없다”
    • “정책실장 영전 후 방향감각 잃었다”
    • ‘개혁 동반자’들에게 포위?
    ‘노(盧)의 남자’ 김병준 교육부총리 내정자
    음주가무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김병준(金秉準·52) 교육부총리 내정자가 ‘의식적인 활동’을 멈춘 채 무아경에 빠지는 시간이 있다. 그림을 감상할 때다. 청와대 참모들도, 그의 국민대 제자들도, 동료 교수들도 그가 그림에 상당한 조예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김 전 실장은 올 3월 공직자 재산변동 명세서에 서울대 김병종 교수의 한국화 연작 ‘생명의 노래’ 2점 등 그림 8점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김병종 교수의 그림은 청와대 본관에도 4점이 전시돼 있다. 가나아트센터 김미라 수석큐레이터는 김 교수의 그림을 이렇게 풀이한다.

    “생명의 노래 시리즈에 등장하는 대상은 새, 물고기, 꽃, 나비, 말, 아이 등이다. 이들은 현실적 위계(位階)를 갖지 않고 화폭 위에서 동등한 삶의 가치 속에 자유를 누린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넉넉한 화가의 붓질에 의해 뭉클한 생명의 환희로 피어오른다. 이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잊게 하는 평온함과 자유의 세계를 음미할 수 있다.”

    빡빡한 일정에서 한동안 ‘평온함과 자유의 세계를 음미’하고픈 김 내정자의 소망이 담긴 그림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더욱 시선을 끄는 것은 ‘위계를 갖지 않고 동등한 가치 속에 자유를 누린다’는 표현이다. 이를 통해 그가 어떤 삶을 추구하는지 살짝 엿볼 수 있지 않을까.

    2004년 6월 청와대 정책실장에 오르기 전까지 김 내정자의 인생을 상징하는 키워드는 ‘지방분권’이었다. 그는 1980년대 후반부터 학계에서조차 낯선 ‘지방분권’을 주장해온 대표적 학자였다. 그는 이 소신을 위해 헌신했다. 미국 델라웨어대 동창이자 경제실천시민연합회에서 함께 활동한 김익식 경기대 교수(행정학)는 “그는 지방분권 시스템을 갖춰야 한국이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고했다”고 말한다. 중앙과 지방이 ‘위계’ 없이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 속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 이것이 김 내정자가 추구해온 학문의 목표이자 존재 이유였다.



    이 목표는 노무현 대통령과 만나는 인연의 고리가 된다. 노 대통령은 국회의원이던 1993년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개설한다. 지방자치 시대가 열리면서 지방에서 정치를 할 인재를 발굴하고 이들을 묶어 정치세력화한다는 것이 창립 목적이었다. 이듬해 연구소장을 물색하던 노 의원은 서갑원 비서(현 열린우리당 의원)로부터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소개받았다. 국민대 출신인 서 의원은 학창 시절 김 교수의 강의를 들어 지방자치에 대한 그의 열정을 익히 알고 있던 터. 이렇게 시작된 인연이 대통령과 교육부총리 내정자 관계로까지 이어졌으니 보통 인연은 아닌 듯싶다.

    김 내정자가 바라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 시절, 그는 한 강연회에서 이런 일화를 소개한 바 있다.

    “영국 특파원을 지낸 기자로부터 들은 얘깁니다. 하루는 경찰관이 문을 두드리길래 나가봤더니 ‘혹시 당신 집 앞에서 파란색 자동차를 본 적이 있냐’고 묻더랍니다. 모른다고 했더니 경찰관은 ‘알았다’며 옆집으로 갔습니다. 호기심이 발동한 특파원이 경찰관을 따라갔대요. 옆집 남자는 경찰관의 질문에 ‘어떻게 생긴 차였고, 얼마 동안 주차돼 있다가 언제 나갔다’고 하더랍니다. 경찰관은 또 그 옆집으로 갔습니다. 그 집 주인은 아예 메모지를 들고 나와 차번호까지 경찰관에게 알려줬답니다. 런던 인근의 조용한 마을인데, 주민들이 마을에서 일어난 일에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겨울에 눈 오면 스스로 치우는 주민 있습니까? 사람 냄새나는 공동체를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정부가 노력하겠습니다.”

    이를 정제된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중앙정부에 의한 획일화된 통제로는 세계화와 지식정보사회의 전개라는 시대적 변화에 대응할 수 없다. 보다 분권적이고 민주적인 질서를 통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창의적인 정신이 분출되도록 해야 한다. 지방자치단체간의 경쟁을 통해 지역사회의 잠재된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

    (1999년 논문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의 대립과 협력’, 김병준 국민대 교수)

    교수 시절 그는 지방자치에 대한 강연 요청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2000년 경실련의 지방자치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을 때 함께 일했던 윤순철 경실련 시민감시국장은 “김 교수는 몸이 아파도 지방자치 관련 강연 약속은 취소하지 않았다”고 했다. 윤 국장이 기억하는 김병준은 ‘집념의 사나이’다. 다음은 그가 들려준 얘기.

    “국회가 자치단체 부단체장을 중앙정부가 임명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한 적이 있다. 이는 지자체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부단체장은 자치단체장이 임명케 해야 했다. 김병준 교수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관련 토론회와 집회에 거의 모두 참석했다. 결국 국회 법안은 부결됐다.”

    ‘집념의 사나이’

    목표한 것은 꼭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그의 집요함은 요즘 언론이 그려내고 있는 ‘강성의 이미지’ 그대로다. 지난해 7월 김 내정자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가볍게 여겨지는 현상이 있다”며 “그러나 과장해서 얘기하면, 헌법을 바꾸는 정도로 힘들이지 않으면 바뀌지 않을 정책으로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타협을 모르는 불도저 같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이 같은 강경한 발언으로 김 전 실장은 ‘좌파’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가 비록 ‘세금폭탄’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세상은 그가 부자들에 대해 적개심을 갖고 있다고 수군거렸다.

    이에 대해 청와대 관계자는 “김 전 실장은 원칙에 충실할 뿐 좌파가 아니다”며 “부동산에 실거래 가격으로 과세하는 것은 이전 정부에서도 다 검토했던 사안”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과거 정부가 하지 못한 이유는 정권 지지율이 떨어질까 두려워서였다며 장기적으로는 부동산 세제를 정상화하는 노력이라고 말했다.

    그를 두고 강경파라고 하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경호 국민대 교수(행정학)는 김 내정자의 실제 면모가 ‘강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조 교수는 김 내정자가 국민대 교수협의회장을 맡았을 때 교수들과 재단의 이해관계를 순조롭게 조정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는 강경파보다는 조정자에 가깝다. 당시 그는 교수가 주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기보다 재단과 총장의 처지까지 고려해 절충안을 내놓는 데 주력했다. 하루는 몇몇 교수가 재단에 바라는 사항을 적어 김 실장에게 전달했다. 김 실장은 이것을 재단에 전달하기 전에 전체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얼마나 많은 교수가 이들의 생각에 공감하는지 재단에 알려주려는 의도였다. 의견을 제시한 교수들에게 전체 교수사회의 생각을 알려주려는 생각도 있었다. 이처럼 세심한 가교 역할 덕분에 재단과 교수들은 충돌하지 않았다. 재단이 일방적으로 대학총장을 임명하는 관행을 없앤 것도 그가 교수협의회장일 때다. 교수들이 총장 후보를 추천하고 재단에선 이를 근거로 총장을 임명했다. 이는 우리 대학의 중요한 변화였다.”

    오랫동안 김 내정자를 지켜본 정부의 한 관계자도 그를 ‘탁월한 조정자’라고 평했다. 논쟁을 좋아하는 노무현 대통령과도 갈등을 빚은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노 대통령과 궁합이 잘 맞아서도 그랬겠지만, 상대의 생각을 읽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얘기다. 청와대 관계자는 “정책실장은 안보와 경제 부분을 뺀 모든 정책을 총괄했고, 그중에서도 교육정책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그가 교육부총리로 가도 문제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여러 사람의 다양한 의견을 경청하고 합의점을 도출하는 능력이 출중해 말 많고 탈 많은 교육부에서도 능력을 발휘하리라는 것.

    결벽에 가까운 청렴성

    김 내정자가 교육부총리가 되면 교육인적자원부는 ‘인적자원’에 상대적으로 무게를 더 실을 것으로 보인다. 김 내정자의 한 측근은 그를 대신해 “대학은 산업이 원하는 인력을 양성해내고, 저소득층의 지식격차를 해소하며, 일터에서도 대학 학점을 받아 다양한 인재들이 사회로 쏟아져 나오도록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노(盧)의 남자’ 김병준 교육부총리 내정자
    노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내세운 ‘방과후 학교’도 계속 추진할 방침이다. 방과후 학교는 지역공동체와 학교를 연결하는 것이다. 예컨대 대학생들이 저소득층 자녀들의 학습을 도와주고 이를 학점으로 인정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학교가 지역 공동체의 리더로 성장하도록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그가 교육부총리로 내정된 데에는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청렴한 성격도 작용한 것 같다. 국민대 교수 시절, 특수대학원에 다니던 한 사업가가 흰 봉투를 들고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대학원 논문 심사 전이라, 그가 방문한 목적은 뻔했다. 봉투를 내밀자 김 교수는 그를 일단 소파에 앉혔다. 그러면서 “마음은 고마운데, 선생과 제자가 이런 것을 주고받을 수는 없다”며 “오늘은 그냥 돌아가시고, 나중에 내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탁하겠다”며 정중하게 돌려보냈다.

    당시 박사과정 학생으로 연구실에서 이 광경을 지켜본 소순창씨(현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는 “상대방이 무안하지 않게 거절하는 것을 보고 느끼는 게 많았다”고 술회했다. 소 교수는 “김 내정자는 ‘교수가 돈을 받으면 사회 문제를 논할 때 힘을 잃게 된다’며 늘 경계할 것을 당부했다”고 말한다. 김 내정자는 지방자치 강연을 요청한 곳에서도 강연료를 거의 받지 않았다고 한다.

    청와대 정책실에서 그와 함께 일했던 한 직원은 “김 내정자가 정책실장을 그만두고 나서 사무실에 갔더니 그가 1500권의 책을 그냥 놔두고 몸만 빠져나갔더라”며 “정책실장 직함으로 사거나 받은 책이니 두고 간다고 했다더라”고 전했다.

    꿈은 이루어졌는데…

    김 내정자는 경북 고령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방 한 칸에 부모와 여러 형제가 함께 살았다.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대학(영남대 정치학과)에 진학한 것은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가능했다고 한다. 나아가 서울(한국외국어대)로, 미국(델라웨어대)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던 것도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한 덕분이다.

    그가 지금도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것은 행여 작은 실수로 몸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실낱같이 키워오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한 현실감이 체화됐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한 측근은 “그에게 인생은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전면전”이었다고 말한다. ‘실족(失足)하면 끝’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강박관념처럼 그를 따라다닌 듯하다.

    이렇듯 가난했지만 마음씨는 후덕했다고 한다. 미국 유학 시절, 서울에서 후배가 찾아와 “나도 델라웨어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싶은데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달라”고 부탁했다. 난감했다. 그 후배에게 장학금이 돌아가면 자신이 장학금을 받지 못할 처지였다. 그렇게 되면 2년 남짓 남은 유학생활이 무척이나 힘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부인과 상의한 끝에 후배에게 장학금을 양보했다.

    지방분권에 대한 남다른 집념, 원만한 대인관계, 청렴한 생활 등 장점을 두루 갖춘 그가 청와대에 입성하자 뜻을 같이했던 동료 교수들과 선후배들은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1년2개월 동안 맡은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을 떠나 정책실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들과 사이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실천 의지가 없다”

    그는 정부혁신위원장으로 있으면서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2003년부터 제주도 특별자치도 특별법을 만들기 위해 숱한 사람을 만나 설득한 끝에 지난해 법안이 통과됐다. 과학기술부 장관이 부총리로 승격한 것도 그가 위원장으로 재임할 때의 일이다. 그는 “정부의 거시경제 정책수단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연구개발(R·D) 분야를 체계화하겠다”며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과기부 등에 흩어진 연구개발 분야를 통합, 과학기술과 관련한 기획, 조정, 평가 기능을 과기부에 부여하겠다”고 했다.

    특히 2004년 지방분권특별법을 제정하고, 지방분권 5개년 종합실행계획을 확정한 것은 지방자치 시대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것이었다. 자유주의연대 신지호 대표는 “분열과 반목을 심화시킨 과거사 정리나 양극화 소동 등에 비하면 이런 것들은 매우 생산적이고 유익한 의제 설정”이었다고 평가했다.

    지방분권특별법은 교육자치제 개선, 자치경찰제 도입, 지방재정 확충, 지방의회 활성화, 주민참여 확대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2003년 말 마침내 이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김 내정자는 감격에 겨웠다. 이 법안엔 그가 대학과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줄기차게 주장해온 내용들이 대부분 포함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구체적인 실천이 따르지 않았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실현되는 것이 없자 지난해 6월, 전국 16개 시도지사들이 제주도에 모였다. 이들은 “중앙정부가 지방분권화 논의를 독점해 분권의 주체인 지방이 논의에서 배제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며 특별법의 조속한 시행을 촉구했다. 또한 지방정부의 자치입법권 확대, 자치사무 확충을 통한 지방정부의 권한과 책임 일치, 실권을 가진 자치경찰제 도입, 교육자치제 개선 방안 마련 등을 요구했다.

    어찌된 일일까. 밑그림은 그려놓고 실행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자치경찰제 도입은 노무현 대통령도 가장 혁신적인 사례라고 격찬한 바 있다. 자치경찰은 지방자치단체별로 자체 경찰력을 두고 지역 특성에 맞는 치안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국민의 호응이 높았다. 예정대로라면 오는 10월부터 전국 17개 기초단체에서 자치경찰제를 시범 실시하고, 내년에 전면적으로 시행해야 한다. 울산시 울주군의 경우 자치경찰대 규모를 60명으로 하고, 실무준비단을 구성해 운영하기로 했지만, 자치경찰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아 계속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지방분권특별법 초안 작성에 관여한 한 교수는 “얼마 전 윤성식 정부혁신위원장과 김병준 정책실장이 갈등을 겪은 것은 이렇듯 하기로 한 것을 적극적으로 시행하지 않고 미뤘기 때문”이라며 “개혁안을 올려도 대통령에게 보고되지 않아 결국 윤 위원장이 사표를 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김 내정자가 대통령과 윤 위원장 사이를 가로막았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관계자는 “자치경찰제 등의 도입은 시기상조라는 판단 때문에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지방정부와 교육청의 연계를 강화하는 교육자치제 개선도 지지부진하긴 마찬가지다. 교육과 행정을 통합하자는 주장은 김 내정자가 1999년 작성한 논문 ‘교육행정조직체계의 문제점과 개선방향’에서도 나온 얘기다. 최근 교육부총리로 내정된 그를 두고 ‘교육부문의 비(非)전문가’라는 비난이 일자 그가 교육에 관련된 논문을 쓴 적도 있다며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 논문에서 “현 구도로는 교육정책이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고, 교육감은 정치적 상징성이 부족한 직책이라 책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며 “시도지사나 시장, 군수 등 정치적 상징성이 큰 인물에게 교육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대로라면 교육과 행정의 통합은 필수다.

    교육과 행정 통합법은 현재 국회에 상정돼 있다. 통합법의 밑그림을 그린 이기우 인하대 교수는 “이 법안을 사립학교법, 로스쿨법과 연동해 일괄처리하다 보니 통과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또 다른 교수는 “정부나 여당에서 의지가 있다면 왜 통과되지 않았겠냐”며 “이는 기본적으로 의지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통령의 뜻” “공부하겠다”

    김 내정자를 겨냥한 비난은 정부혁신위원장에서 정책실장으로 옮겨가면서부터 불거지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남자’라는 비아냥도 이 무렵부터 나왔다. 한껏 기대를 모았던 그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정책실장을 맡고 나서 그는 “대통령의 뜻” “공부하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 참모에서 측근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지난해 4월25일 김 내정자는 연합뉴스 인터뷰에서 ‘동북아의 평화를 위한 바른역사정립기획단’ 단장을 맡은 소감을 피력했다. 그는 ‘기획단 기능이 국가안보회의 등 다른 기관 기능과 중첩된다’는 기자의 지적에 이렇게 답했다.

    “청와대 정책실장이라면 상당히 바쁜 사람인데 기획단까지 맡느냐는 소리도 듣는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하면 이는 대통령의 관심이다. 이 문제만큼은 정말로 대통령께서 직접 챙기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정책실장이 맡아야 일을 빨리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7월4일 ‘문화일보’ 인터뷰 중 ‘교육정책에 대한 소신을 밝혀달라’는 질문에는 엉뚱하게도 이렇게 답했다.

    “정책실장 하면서 다뤄보지 않은 문제가 없지만, 앞으로 현황을 파악하고 공부를 더 해보겠다.”

    이렇듯 대통령의 뜻에 따라 여러 가지 일을 맡다 보니 김 내정자에게 커다란 기대를 걸었던 이들의 실망도 커졌다. 그와 함께 지방분권 운동을 했던 김익식 경기대 교수는 “김 내정자가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에도 교육부총리로서 업무를 잘 처리하기 바란다”고 덕담을 전하면서 이렇게 지적했다.

    “그가 방향감각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것 같다. 정책실장으로 들어가서 부동산 정책 등 온갖 일을 다 맡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는 정부혁신위원장으로 가면서 지방분권만큼은 확실하게 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는지 모른다. 우리도 기대를 많이 했다.

    그러나 지금은 기대난망이다. 이 정부의 핵심이 참여와 분권 아닌가. 그 중심에 김 전 실장이 서 있지만, 이뤄진 것은 없다. 이런 점에서 학계와 시민단체들은 그에게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인간관계 지향적’

    참여와 분권은 김 교수의 지적처럼 노무현 정권의 핵심 중 핵심이다. 그렇지만 참여 문제에 대해서도 비난의 목소리는 높다. 정부가 시민의 참여를 독려하지는 못할망정 빼앗다시피 한 일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김 내정자의 고향과도 같은 경실련 관계자의 지적이다. 그도 “김 내정자에 대한 애정은 변하지 않았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털어놓았다.

    “경실련은 2001년부터 행정자치부와 공동으로 ‘지방자치단체 개혁박람회’를 개최했다. 지방자치가 어느 정도 실현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김 내정자가 1회 행사를 도맡아 했다. 기대 이상으로 호응이 뜨거웠다. 거의 모든 지자체에서 보고서를 제출했고, 행사 당일에는 수만명이 몰려들어 우리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2002년 2회 때도 분위기는 좋았다.

    그런데 2003년부터 행자부가 경실련에 예산을 줄 수 없다며 빠졌다. 그러더니 2004년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 주최로 정부혁신국제박람회가 열렸다. 김 내정자가 청와대로 들어간 뒤에 벌어진 일이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행사비는 얼마 되지도 않는다. 이걸 꼭 시민단체를 배제하고 정부 단독으로 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공무원 개혁을 공무원의 눈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시민단체에서 주최해야 지자체가 의욕을 갖고 자발적으로 참여한다. 정부가 나서면 행사는 의무적인 것으로 변질된다. 지자체가 제출한 사례를 정부가 심사한다고 하면 공정성에도 의문이 생기지 않겠나. 혁신의 성과를 지속하려면 외부의 시각에서 문제점을 봐야 한다.”

    경실련 관계자는 이처럼 김 내정자가 과거와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이 “공무원을 개혁의 동반자로 봤다가 결과적으로 공무원 사회에 포위됐기 때문인 듯하다”고 분석했다. ‘평생직장’에 근무하는 공무원들은 스스로 개혁하기가 힘들다는 점을 그가 간과한 것은 아닌지 의문스럽다는 것.

    김 내정자는 주위사람들에게 종종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고 말한다. 그는 독실한 불교신자다. 스쳐가는 만남에도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불자다. 지금까지 그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와 맺은 인연은 소중할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가르치는 학과 출신도 아닌 학생이 국회의원을 소개하고 결국 그 인연으로 교육부총리에까지 내정 된 것도 예사롭지 않다. 그의 동료 교수들은 그가 ‘인간관계 지향적’이라고 한다. 이 때문일까.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일보다 사람인 것 같다.

    김 내정자가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 시절 그와 논쟁을 벌인 한 시민단체 간사는 이런 얘기를 들려줬다.

    “참여정부 초기에 정부혁신위원회와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두고 말이 많았다. 중복되는 부분이 많은 두 기구가 왜 분리돼 있냐는 것이었다. 위원회 출범 초기에 김 내정자도 지방을 순회하면서 그런 얘기를 자주 들었다. 나는 그에게 두 위원회를 합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성경륭 국가균형발전위원장과 친하니 조정해보겠다’고 했다. 좀 이상했다. 문제의 핵심을 비껴나가는 듯했다. 문제를 그냥 놔둔 채 어떻게 해결하겠다고 하는 것인지….”

    정부혁신위원장으로 남았더라면…

    김 전 실장은 노무현 정권의 핵심 멤버다. 주요 요직을 거쳤고, 이제 교육부총리 인준을 앞두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중간평가 의미를 지닌 5·31 지방선거가 참패로 끝나자 그는 “결과가 좋지 않은 것에 자책하고 있다”며 “더 큰 책임을 적극적으로 지기 위해 입각(교육부총리)을 결심했다”고 측근을 통해 심경을 밝혔다.

    1년4개월 남짓 남은 노 정권에서 김 전 실장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를 애정과 걱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료들은 이렇게 조언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가 정부혁신위원장으로 계속 재직했더라면 큰 것(법안 통과) 몇 개는 건졌을 것이다. 안타깝다. 하지만 아직 시간은 있다. 참여정부가 끝나기 전까지 지방분권에 관한 법안이라도 처리했으면 좋겠다. 교육부총리로서 교육자치 문제도 해결해주기 바란다. 더 무엇을 바라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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