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상과 달랐다. 출범 초기 과감한 대북접근을 선호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던 오바마 행정부는 출범 2년이 가까워오도록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다. 국내 정치 이슈와 중동 문제에 발목 잡힌 백악관의 처지가 가장 먼저 거론되지만 백악관과 국무부, 국방부에서 한반도 정책을 담당하는 이들의 면면과 성향, 정책결정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면 더욱 명확한 이유가 드러난다. 2년째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전문가가 들여다본 오바마 행정부 한반도 담당자들의 실체와 인식.
백악관의 아침 안보회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중심으로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왼쪽 두 번째)과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오른쪽 세 번째)이 보인다.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할 무렵 많은 전문가는 북핵 문제가 최소한 부시 행정부 시기보다는 진전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우선 대통령 본인이 후보 시절 북핵 문제 해결에 대해 적극적인 입장을 밝힌 바 있고, 민주당에는 과거 클린턴 행정부 시기 북핵 문제에 관여한 경험이 있는 인사가 다수 포진해 있기 때문이었다.
여건도 나쁘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는 임기 말인 2007년부터 북한과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해 ‘동결-불능화-폐기’의 3단계 핵 폐기 원칙에 합의하고 불능화 단계에서 임기를 마무리한 바 있다. 이는 클린턴 행정부가 1994년 제네바합의에서 이뤄냈던 ‘북핵 동결’보다 더욱 진전된 성과였다. 전임 공화당 정부가 동결을 넘어 불능화 단계까지 진입한 상태에서 바통을 넘겨주었으므로 오바마 행정부는 이를 이어받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지 2년이 가까워오는 현재까지 북핵 문제는 제자리걸음을 거듭했다.
백악관에서 북핵 문제를 총괄하는 베이더 보좌관이 북한에 제기했다고 언급한 ‘핵 협상안’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다만 최근 미국 정부 당국자들의 발언을 종합해 볼 때 백악관이 평양에 요구하는 사항은 크게 ▲미사일 발사나 핵실험 등의 위기고조 조치 금지 ▲2005년 9·19 성명에 따른 약속 이행과 핵 폐기에 대한 진정성 있는 조치 ▲남북관계 개선과 천안함 사건에 대한 책임 인정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북한이 먼저 이런 조치를 취할 경우 6자회담을 재개해 평화체제에 대해 논의할 수 있다는 게 최근 워싱턴 고위인사들이 밝힌 기본 입장이다. 전임 행정부 시기 북미 접촉과 6자회담에서 모아진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이라는 동시이행조치 원칙이 북한의 ‘선 행동’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변경된 셈이다.
이렇듯 디테일을 확인하고 나면 베이더 보좌관이나 루거 의원의 발언을 미국 측의 대북 유화 제스처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북한에 이전보다 더 높은 수위의 조건을 걸어놓고 이를 받아들이라고 압박하는 모양새에 가깝다. 특히 미국 측의 이러한 입장은 중간선거 이후 더욱 강화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새로 구성되는 하원에서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재지정 요구가 강력히 제기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하원 외교위원장으로 유력한 공화당의 일레나 로스-레티넌 의원은 쿠바 출신으로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지속적으로 촉구해온 당사자다.
네오콘의 그림자
예상과 달리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북미 간 교착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는 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결정하거나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물들의 성향과 관계가 깊다. 특히 주목할 것은 이들이 대부분 중국 문제에 정통하고 북핵 문제에는 강경하다는 사실이다. 뒤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러한 특징은 최근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대(對)중국 정책의 연장선 위에서 수립, 집행되는 결과를 낳은 근본배경에 해당한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만들고 조정해나가는 담당부서로는 크게 백악관 NSC와 국무부, 국방부를 들 수 있다. 현재 이들 관련부처의 동아시아 담당파트들은 오바마 행정부 출범 초기에 비해 대체로 호흡이 잘 맞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가장 핵심적인 인물로는 단연 제임스 스타인버그 국무부 부장관과 제프리 베이더 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이 꼽힌다. 이들은 모두 오바마 행정부 최고의 동아시아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북한 문제만을 떼놓고 보면 국무부 내에서는 스타인버그 부장관을 중심으로 커트 캠벨 동아태 차관보와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 성 김 6자회담 특사를 중심으로 정책의 수립과 집행이 이뤄진다. 여기에 로버트 아인혼 대북·대이란 제재 조정관이 경제제재를 중심으로 국무부의 정책운용을 뒷받침하는 구조다.
먼저 스타인버그 부장관은 유엔을 통한 대북제재를 적극적으로 주도해온 인물이다. 북한이 위협을 약화시키고 오바마 행정부의 개입정책에 호응할 때까지 대북정책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기본입장을 갖고 있는 그는, 역대 미국 정부의 대북정책이 많은 비용을 지급해야 하는 구두약속을 남발하는 것에 불과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사실상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실무적으로 지휘하는 그의 인식은 앞으로 북핵 문제의 향방이 녹록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자. 스타인버그 부장관은 그간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기 위해서는 평양이 먼저 진정한 핵 폐기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거듭 밝힌 바 있다. 대화를 위한 대화는 가치가 없으며, 북한이 먼저 핵 폐기 의무를 이행한다는 실질적인 징후를 내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워싱턴 조야에서는 그의 이러한 입장을 부시 행정부에서 네오콘의 대명사로 통했던 딕 체니 부통령이나 존 볼튼 전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의 견해와 흡사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부시 행정부 내에서 9·19 공동성명과 2·13 합의를 이끌었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와는 명확하게 대비된다. 이러한 스타인버그 부장관의 입장은 부시 행정부가 클린턴 시기와 차별화 정책을 펼친 것을 비꼬아 만들어진 용어 ‘ABC(Anything But Clinton)’에 비교해 오바마 행정부의 ABC(Any- thing But Christopher Hill)로 불리기도 한다. 부시 행정부 시절 힐 차관보의 노력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마련됐다고 지적하며 그의 경험을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 강경파들은 도리어 ‘또 다른 힐(Capitol Hill·의회)’의 주문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답해왔다. 정책결정 과정에서 북한에 대해 강경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의회의 입장을 더욱 존중해야 한다며 힐 전 차관보를 희화화하는 말이다.
저승사자 로버트 아인혼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왼쪽)와 로버트 아인혼 대북·대이란 제재 조정관.
스타인버그 부장관과 캠벨 차관보를 잇는 국무부 강경라인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인물로는 로버트 아인혼 대북·대이란 제재 조정관을 들 수 있다. 워싱턴 조야에서 ‘북한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그는 부시 행정부 시절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고문으로 일하면서 “미국의 대북금융조치가 북한에 6자회담에 복귀해야 하는 동기를 강하게 유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지론을 배경으로 그는 지난 8월30일 대북 금융제재를 직접 발표하는 등 압박의 선봉에 서고 있다.
이때 발표된 대북금융 제재는 국무부의 업무추진 일정에 따라 공개된 것이기는 하지만,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대북정책의 기조를 점검하기 위해 소집했던 고위급 평가회의 직후에 나온 조치라는 점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였다. 최근 워싱턴 일각에서는 클린턴 장관이 ‘또 다른 선택’을 거론한 것을 들어 국면전환을 점치는 목소리가 나오지만, 현재의 제재국면이 단시일 내에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훨씬 지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설 자리 없는 협상파
강경파에 맞서 북핵 문제의 조속한 해결에 무게를 싣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스티븐 보즈워스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있다. 대화론자인 그의 입장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4자회담이든 양자회담이든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북한과 평화체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북한과의 협상에 부정적인 기류가 지배적인 워싱턴 정계에서, 특히 강도 높은 제재국면이 지속되는 현재 상황에서 그의 영향력은 하루가 다르게 약화되고 있다. 원론적으로는 ‘기다리며 지켜본다(wait-and-see)’는 현재의 정책이 북한과의 대화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므로 언젠가는 그의 역할이 필요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남아 있을 뿐이다.
국무부 소속 6자회담 특사인 성 김은 보즈워스 특별대표를 제치고 사실상 북핵 관련 실무를 전담하며 국무부 한국과를 지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이슈가 오랜 기간 소강상태에 머무르면서 비상근인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위상이 약화되는 동안 관료 출신인 성 김 특사의 업무범위가 계속 확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난해 말 전임자인 커트 통이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담당 대사대리로 승진한 이후 공석이었던 한국과장 자리는 9월초 역시 관료 출신인 에드워드 케이건이 물려받았다. 통 대사대리는 현재 한미무역협정 등 경제현안에만 관여하고 있다.
오바마 정부의 한반도 정책 담당자 가운데 눈여겨볼 또 한 사람은 인권대사를 맡고 있는 로버트 킹이다. 고인이 된 톰 랜토스 전 하원 외교위원장의 보좌관 출신인 그는 클린턴 국무장관과도 개인적인 인연이 깊은데다 의회 경험도 풍부한 까닭에 한반도 문제에 있어 워싱턴의 마당발로 통한다. 7월말 6·15남측위원회 김상근 대표 등이 국무부를 방문했을 당시 성 김 특사와 함께 면담에 나섰던 그는 “미국 정부의 입장은 북한의 변화를 우선하는 것”이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지만 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2004년 랜토스 의원이 발의한 북한인권법을 주도적으로 입안하기도 했던 킹 대사는 스스로 한반도 문제에 정통하다는 자부심을 자주 피력하고 있다.
오바마 행정부 대북정책의 또 다른 핵심인 제프리 베이더 NSC 아시아담당 선임보좌관은 일벌레로 정평이 나 있다. 워싱턴 조야에서는 최근 한미관계가 오바마 행정부 출범 초기의 예상과는 달리 하루가 다르게 긴밀해지고 있는 것이 그의 조율에 따른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만에 하나 북한이 변화한다면 이는 제재가 효과를 거둔 덕분일 것’이라는 최근 미국 정계의 분위기는 상당부분 베이더 보좌관이 주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베이더 보좌관 휘하의 주요 스태프로는 부시 행정부 시절 빅터 차 현 조지타운대 교수가 맡았던 직책을 수행하고 있는 대니얼 러셀 아시아 담당국장을 꼽을 수 있다. 학자 출신의 강경 매파였던 빅터 차와 달리 러셀 국장은 외교경험이 풍부한 전문관료 출신이다. 국방부에서는 예비역 장성 출신의 월러스 그렉슨 아태 담당 차관보가 한반도 문제를 담당한다. 전임 행정부 시절 한미관계와 관련해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리처드 롤리스가 맡았던 그 직책이다. 그렉슨 차관보를 보좌하는 인물로는 데릭 미첼 수석 부차관보와 일본 전문가인 마이클 시퍼 부차관보가 있다. 시퍼 부차관보는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2009년 12월 평양 방문을 수행하기도 했다.
앞서 말했듯 의회에서도 강경한 목소리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사뭇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한반도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명하고 있는 존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은 7월27일 의사당에서 열린 한반도평화포럼에 배포한 자료를 통해 “평화적인 협상이 냉전의 굴레에 갇힌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법”이라며 “북한을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다뤄야만 한다”고 말한 바 있다.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인 ‘전략적 인내(Strategic Patience)’가 ‘전략적 무관심(Strategic Indiffe-rence)’으로 변질돼서는 안 된다는 강조였다.
대북전략 부재의 이유
2009년 9월 방한한 스티븐 보즈워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왼쪽)와 성 김 6자회담 특사.
지난해 12월8일 보즈워스 특별대표가 평양을 방문한 이후 북미 대화와 6자회담이 곧 동시에 재개될 것이라는 예상이 쏟아져 나온 적이 있다. 한국의 설날 혹은 중국의 춘절 휴가 시즌인 2월 중순을 앞두고 한 차례 추가 북미접촉을 거친 뒤 곧 6자회담이 재개될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이때의 순간적인 유화 분위기가 추가적인 조치 없이 사그라졌음은 주지의 사실. 이러한 혼선은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동아시아 팀 내부에 조율된 입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동아시아 정책의 핵심인 대(對)중국 전략과 대북 전략 사이의 관계 역시 정립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천안함 사건 이후 백악관은 대중국 전략의 일환으로 대북 전략을 구사하기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욱일승천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한반도 문제를 활용하자는 ‘북한 문제 가치의 재발견’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올해 초부터 미국과 중국은 위안화 환율과 보호무역, 달라이 라마, 대만에 대한 미국의 무기 판매, 구글 문제 등 다양한 이슈에서 사사건건 충돌해왔다. 클린턴 장관 역시 연초부터 “중국이 이란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으면 외교적 고립이 불가피하다”는 강성발언을 쏟아놓은 바 있다. ‘할 일은 한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의 입장으로 맞서고 있는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미국은 강경한 대북정책이라는 카드를 꺼내 든 모양새다.
이와 함께 워싱턴이 최근 북한의 핵 보유 의지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됐다는 점 역시 또 다른 배경으로 작용했다. 보즈워스 특별대표의 방북 이후 워싱턴 조야에서는 북한이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irreversible dismantlement)’를 선택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판단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미 국가정보국(DNI)은 11월2일 상원 정보위원회에 제출한 ‘연례안보위협보고서(Annual Threat Assess- ment)’에서 북한이 핵 보유국 지위 인정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DNI는 평양이 최근 펼치고 있는 대화공세에 대해서도 “핵과 미사일 능력으로 유리해진 협상 포지션을 활용하기 위한 의도”라고 풀이했다.
지난해 10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핵 보유국 지위를 유지한 채 협상해나가겠다는 취지로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갖고 있던 워싱턴 당국자들이 이 발언 이후 평양이 핵을 포기할 뜻이 없음을 확신하게 됐다는 게 미국 측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국가정보국 보고서가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게 된 배경이다.
논리의 완성
돌이켜 보면 천안함 사건 이전 오바마 행정부는 사뭇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평양이 계속해서 대화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보니 과거처럼 핵 확산을 막는 범위에서 북한에 대한 무시정책을 견지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그렇다고 북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기 전에 제재를 완화하는 것은 ‘잘못에 보상한다’는 국내의 비판여론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카드였다. 한마디로 진퇴양난이었던 셈이다. 혼선이 이어지는 동안 북한 문제는 백악관의 외교정책 결정 우선순위에서 끊임없이 뒤로 밀렸다.
천안함 사건은 미국이 이러한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북한이 한국의 함정을 공격해 침몰시켰지만 중국은 북한을 감싸고 있다”는 미국 내 여론이 확산되면서 중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 북한에 강경한 태도를 견지한다는 논리가 완성된 셈이다. 이후 미국은 중국을 외교적·도덕적으로 압박하는 카드로 천안함 사건을 활용하게 된다. 한국 정부의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 발표 이후 클린턴 장관이 국제사회의 대응을 강조한 것 역시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한걸음 더 나가자면 이러한 워싱턴의 대응에는, 북한이 위험한 나라라는 사실을 중국이 인정하도록 압력을 넣음으로써 북중 협력관계를 약화시키려는 의지도 포함돼 있었다. 로버트 게이츠 국방장관이 6월초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에서 “중국이 북한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그릇된 선례를 만드는 일”이라고 경고한 일은 이러한 의도를 시사한다. 이러한 행보는 결과적으로 중국이 의장국을 맡고 있는 6자회담에서 베이징의 외교력을 상당부분 약화시키는 효과도 거둘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형태의 ‘중국 힘 빼기’ 작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에 대한 압박은 외교적·도덕적 차원을 넘어 군사적인 차원에서도 진행돼왔다. 천안함 사건 이후 미국이 한반도 인근에서 실시한 한미합동군사훈련이 북한에 대한 대(對)잠수함 훈련을 넘어 중국에 대한 군사적 경고의 효과를 노리고 있음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 이외에도 미국의 대중 군사압박은 중국의 동남부 해상에서 다각도로 실시되는 군사훈련을 통해 현실화되고 있다. 한반도 동해와 서해에서 진행되는 한미군사훈련, 남중국해의 미-베트남 합동군사훈련, 센카쿠 열도 인근의 미일 군사훈련 등이 줄줄이 예정돼 있다. 특히 미일 군사훈련에는 미 해군 7함대 소속 항공모함 조지워싱턴 호가 참여한다. 중국 입장에서 보자면 전방위적인 해상봉쇄다.
변화의 가능성은?
이렇듯 당분간 워싱턴의 한반도 정책은 미국의 대(對)아시아 전략, 혹은 그 핵심인 대중국 전략과 긴밀하게 연동해 진행될 수밖에 없다. 11월 초 오바마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길에서 주요국 가운데 중국만 방문하지 않았던 것은 역설적으로 현재 백악관의 아시아 전략 핵심에 대중국 전략이 자리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고유의 중장기 전략에 따라 수립되기보다는 대중국 정책의 하위변수로 자리매김한 상황이다보니 앞으로 북한이 어떤 행보를 펼치든 워싱턴이 새로운 대북정책 수립에 나설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사실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담당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한 가지 특징은 프로세스를 중요시한다는 점이다. “프로세스가 곧 정책(The process is the policy)”이라는 이들의 강조는 한반도 정책을 갑자기 뒤집는 전임 행정부들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예를 들어 북한이 추가 핵실험을 감행한다고 해서 백악관의 대북정책이 적극적인 개입정책으로 갑작스레 전환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다. 도리어 추가 핵실험은 미국이 중국에 대북제재 동참을 더욱 강도 높게 촉구하는 명분으로 작동할 공산이 크다.
오히려 대중정책과 대북정책의 연동을 끊는 작업은 북한의 벼랑 끝 전술보다는 한국 정부와 여론의 향방에 따라 영향 받을 가능성이 더 크다. 미국의 대외전략에서 한반도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작다는 것은 거꾸로 한국의 의지에 따라 백악관의 대북정책이 바뀔 여지가 있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물론 대중국 전략과는 독립된 별개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워싱턴 내부에서 확산되려면 우선 남북대화의 재개가 필수적이다. 북한의 추가 핵실험이 없어야 함은 불문가지다. 동북아 정세가 꽁꽁 얼어붙은 2010년 겨울, 남북한 모두의 현명한 정책판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