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6대 대도시에서 지금은 25위권 중소도시로 전락
- “선거 며칠만 늦게 했어도 도지사, 시장 다 역전됐을 것”
- “경상도에서 박근혜, 이명박 기대하듯 여기선 고건”
- 지역 발전 기대하고 노무현 지지…지난 3년간 실망
- 국무총리, 방송사 뉴스 메인 앵커 다수 배출한 까닭
- 경상도엔 소외감, 광주·전남엔 서운함
- 아파트 난립으로 이상 고온(高溫)
전북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광주·전남과 형제처럼 단단한 공조를 유지하던 지역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함께 탄생시켰다. 그런데 열린우리당이 분당(分黨)하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특히 2004년 탄핵 국면에서 치러진 17대 총선에선 지역구 11석을 모두 열린우리당에 몰아줬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 결과는 열린우리당에 충격적이다. 도지사는 당선됐지만 기초단체장의 경우 14개 시·군 중에서 겨우 4곳을 건졌을 뿐이다. 기초의원을 보면 민심(民心) 이반이 더 확연하다. 최후의 보루라고 믿던 전북마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과거 광주·전남의 ‘말 잘 듣는 동생’쯤으로 여겨지던 전북이 이렇듯 홀로 서기에 나선 까닭은 무엇인지, 그리고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일단 보류’한 이유가 궁금해 전주행 새마을호에 올랐다. 전주는 전북의 도청 소재지임에도 KTX가 지나가지 않는다.
기차에서 만난 진영기(52)씨는 전주가 고향이라고 했다. 선거 이야기가 나오자 “전북만 왕따 돼버린 기분”이라고 하더니 “하긴, 뭐 어떻게 되겠죠. 전북은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는 걸요”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전북만 왕따 된 기분”
전통한옥 형상의 전주역사는 전주가 ‘전통문화의 도시’임을 은연중 알리고 있다. 역 앞에 5∼6대의 택시가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택시도 적었지만 택시를 타려는 사람도 적었다. 역 자체가 한산했다. 아니, 거리 전체가 한산했다.
한담을 나누던 택시기사들에게 다가가 “전주는 그래도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높은 것 같다”고 말을 건네자 “안 그래요. 없어질 당인데요, 뭘” 하며 손사래를 친다. 옆에 있던 택시기사도 “전주에 해준 게 뭐 있간요. 걔네들 미워 일부러 투표하러 가서 민주당 찍었어요” 하며 거들었다.
“도지사고 전주시장이고 민주당 후보들이 조금만 더 일찍 선거운동을 시작했어도 다 뒤집어졌을 텐데, 너무 늦게 시작했어요. 촌사람들은 민주당 정균환 후보가 나온 줄도 몰랐다잖아요.”
전주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선거가 며칠만 늦게 치러졌어도 당락이 바뀌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전북의 이같은 민심 이반 원인에 대해 전북발전연구원 한영주(56) 원장은 ‘믿음에 대한 배신’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열린우리당을 지지한 것은 전북 발전에 대한 염원 때문이었어요. 더구나 정동영이 후계자니까 적어도 전북을 홀대하지는 않을 거라 믿고 지지했는데, 정부에서 전혀 협조를 안 해줬어요. 그래서 반감이 더욱 커진 거죠.”
정동영, 정세균, 강봉균 등 전북 출신이 당의장, 정책위의장 등 주요 직책을 모두 차지했으면서도 지역 발전을 위해 아무 힘을 발휘하지 못한 데 대한 분노의 표출인 셈이다.
전북의 대표적 시민단체인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 엄경형(39) 정책실장도 “전북의 노 대통령 지지는 전략적 선택이었다”고 단정했다. 그간의 정치적 경험에 비춰 한나라당이 전북에 뭘 해주지 않으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
“그런데 지난 3년 동안 무슨 발전이 있었나 하는 허탈감이 들었어요. 게다가 선거를 코앞에 두고 문재인이 ‘노무현 정권은 부산정권’이라고 하고, 김두관은 ‘정동영 떠나라’고 하니까 민주당의 ‘부산정권 타도’ 주장이 먹힌 거예요. 그나마 정동영이 있으니까 이 정도 성적이라도 거뒀다고 봐야죠.”
전주는 문화의 도시답게 축제가 자주 열린다. 전주국제영화제(위)는 긍정적 평가를 받는 반면, 풍남제 등 여타 행사는 전시행정으로 치우쳤다는 비난도 적지 않다.
“전북이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던 건 민주당보다 더 진보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지지를 철회한 것은 개혁의 의지와 그 성과를 보여주지 못해서였고요. 그렇지만 아직 완전히 철회한 건 아니라고 봐야죠.”
그는 “전북은 특정 정당에 대한 무조건적 몰표보다는 인물 중심의 투표 성향이 강하다”고 덧붙였다.
“부산에선 노무현을 무조건 떨어뜨렸지만 여기는 강현욱 전 지사가 과거 신한국당으로 나와 국회의원에 당선됐어요. 인물이 되면 밀어주지만 아니다 싶으면 아무리 전북당 후보라도 안 찍어요. 전북은 전국에서 열린우리당 당원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이지만, 기초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가 안 된 곳이 많아요.”
전주대 장세광(48) 교수도 “지난 총선에서 나타난 몰표는 ‘탄핵’이라는 특수성 때문이었을 뿐 전북은 기본적으로 인물 중심의 선거풍토가 강하다”며 “다음 총선에서 낙선할 의원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나라당 후보라도 인물이다 싶으면 찍어요. 이번에 문용주 도지사 후보도 기대 이상의 표를 얻었어요. 군산의 경우도 민주당 문동신 후보가 열린우리당 함운경 후보보다 경륜이 많아서 당선된 거예요. 군산 시민들 사이에 ‘함운경이 미국문화원 점거한 거말고 한 게 뭐 있냐’는 말이 많았어요. 전북은 정치의식이 높아 인물에 대한 평가가 냉혹해요.”
도지사에 당선된 김완주(60) 전 전주시장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는 대체로 긍정적이다. ‘동아일보’ 김광오 전북주재기자는 “김완주 시장 시절 그를 싫어하는 공무원이 있을 만큼 일을 많이 했다. 워커홀릭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시민단체에서도 비교적 긍정적이다. 엄경형 정책실장은 “추진력이 강하다. 무엇보다 독단적으로 정책을 결정하지 않고 관련단체들과 협의체를 만들어 의견수렴을 거쳐서 진행했다”고 말했다.
부정적인 의견도 있었다. 시장 재임 8년 동안 개발 위주의 정책을 펴는 바람에 지방채가 늘어나 전주 경제가 더욱 어려워졌고, 아파트값을 상승시킨 주범이라는 비판이다. 한 택시기사는 “경제 살리기보다는 차도 경계석, 자전거도로 등 전시행정에 예산을 많이 썼다. 그가 시장에 있는 동안 재정자립도가 크게 낮아졌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송하진 신임 전주시장에 대해선 기대반 우려 반의 목소리가 많았다. “김완주 전 시장의 뒤를 이어 일관성 있게 일을 추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경제 살리기가 공약 후순위에 있는 등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혹평도 적지 않다.
대구보다 적은데 무슨 전북 정권?
이번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다시 광주·전남과의 연대 고리가 맺어진 것이다. 민주당의 선전에 대해 시민들은 한결같이 ‘고건 때문’이라고 했다. 옛 도청 근처에서 슈퍼마켓을 하는 김상돈(65)씨도 고건 전 총리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표시했다.
“경상도에서는 박근혜나 이명박에게 기대를 걸겠지만 여기선 고건이에요.”
“왜 고건이냐”고 묻자 “무난하잖아요. 서울시장과 국무총리를 두 번씩이나 하면서 나쁜 소리 한번 안 들었던 사람이에요” 하고 호평했다.
민주당은 이번 선거에서 고 전 총리를 최대한 활용했다. 전북지역 민주당 후보들은 저마다 고건 전 총리와 찍은 사진을 선거에 적극 활용했다.
엄경형 정책실장은 고건 바람에 대해 “아직 대선주자로 확정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시민들 사이에서 말이 많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 이곳에선 강한 응집력이 생길 것”이라고 예상했다.
“여기서도 인물을 키워보자는 민심이 저변에 깔려 있어요. 정동영이 한때 전북의 기대주로 떠올랐는데 그동안 실책이 너무 많았어요. 우선 노 대통령처럼 말이 가벼워요. 고건이 뜨는 건 노무현 때문이기도 해요. 노무현이 가볍고 조령모개하는 데 비해 고건은 묵직하잖아요. 여기선 고건을 중심으로 열린우리당, 민주당, 국민중심당이 모이면 과거 DJP연합 같은 시너지 효과를 내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반면 김광오 기자는 고건에 대한 지지가 개인에 대한 지지는 아니라고 평가했다.
“고 전 총리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전북사람을 키워보자는 애향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게 고건일 수도 있고 정동영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거죠.”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해도 ‘다음엔 전북 출신 대통령 한번 만들어보자’는 심리가 도민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반론도 있다. 시청에서 만난 공무원은 “소지역주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북 정권’은 지역 정치인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일 뿐, 시민들 사이에서는 그리 강하지 않다”고 했다.
중노송동에 사는 최환(72)씨는 “대구시민만 250만명인데 전북 인구를 다 합쳐도 180만명이 안 된다. 지역구 국회의원도 원내 교섭단체조차 못 만드는 숫자다. 어떻게 전북 정권을 만들 수 있나”라며 전북 정권 주장에 대한 의구심을 표했다.
시민들은 열린우리당을 지지하건 민주당을 지지하건 대부분 두 당의 통합을 당연시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차기 정권을 한나라당에 빼앗길지 모른다는 우려가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것이 경상도에 대한 지역감정은 절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엄경형 정책실장은 “경상도 자체에 대한 반감은 많이 엷어졌지만 정치적으로 한나라당에 대한 반감은 더 커졌다”고 했다.
광주·전남에 대한 피해의식
전북은 경상도뿐 아니라 전남에 대해서도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북도를 상도, 남도를 하도라고 해서 북도 사람들이 남도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었어요. 경상도도 그렇지만 전라도 또한 그런 의식이 있었죠. 더욱이 전주는 조선시대 때 전북과 전남, 제주까지 아우르는 전라감영이 있던 곳이에요. 그런데 어느 순간 광주에 역전당했으니 마음이 상할 수밖에요.”
장명수(73) 전 전북대 총장은 전남에 대한 전북의 피해의식을 역사에서 찾았다.
“일제 때 전북은 구세력이 강하고 저항이 거세니까 대안으로 전남을 우대했어요. 그러면서 광주가 급격히 성장하기 시작한 거예요.”
하지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전남북이 함께 소외되면서 두 지역은 단결했다. 특히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탄압은 두 지역을 정치 공동체로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전북은 광주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통해 정권교체를 이뤄냈어요. 함께 발전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광주만 발전하고 여기는 그대로인 거예요. 상대적 소외감이 커지면서 광주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아졌죠.”
광주항쟁 이후 호남의 대표는 광주가 됐다. 정부에서 호남에 뭘 해준다고 하면 곧 광주에 해주는 것이었다. 관공서와 기업의 호남지역본부도 광주에만 몰렸다. 최근에도 전북이 받은 선물이라곤 무주태권도공원 1개뿐이다. 그나마 이것도 강원도 평창에 동계올림픽 유치권을 넘겨주고 보상 차원에서 받은 것이었다.
김광오 기자는 “광주에 대한 불만은 1990년대부터 있었지만, 그때는 DJ가 ‘못사는 형제끼리 도와야지, 누가 더 못사느냐를 따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설득한 게 먹혔다. 하지만 이젠 한계에 다다랐다”고 전북의 침체된 분위기를 전했다.
전주 토박이인 김병수(38) 전주한옥생활체험관 관장은 이런 전북민의 심리를 ‘지역 이기주의’로 폄훼해선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전국이 모두 불황이라고 하지만, 체감이 달라요. 개발독재 때는 물론이고 1980년대 3저(低) 호황 때도 여기만 소외됐어요. 농촌은 오히려 더욱 붕괴됐어요. 그러다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더 나빠졌고요. 경상도는 과거 경기가 좋았다가 나빠진 것이라면 전북은 단 한 번의 상승 없이 줄곧 하락한 셈이어서 지금 피로감이 극도에 달해 있어요. 경상도가 분노라면 여기는 절망이죠. 그 차이를 인정해야 합니다.”
전주는 난개발로 도심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반면 전주천(아래)은 자연형 하천으로 복원해 다른 시도의 모범사례로 꼽힌다.
전주의 옛 이름은 완산인데 ‘완(完)’과 ‘전(全)’은 모두 ‘온전하고 흠이 없다’ ‘뚜렷하고 갖추어져 있다’ ‘순수하고 티가 없다’ ‘모든 것을 어우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온순하고 평온한 곳이란 뜻이다.
전주는 다른 도시보다 살인, 성폭행 같은 강력범죄가 상대적으로 적다. 그만큼 사람들이 온순하고 유한 편이다. 이런 기질 때문인지 고건, 황인성, 진의종, 김상협 등 전북에선 유난히 2인자인 국무총리를 많이 배출했다.
전주 출신의 뉴스앵커가 많다는 점도 돋보인다. 김광오 기자에 따르면 정동영, 신경민, 김종진, 길종섭 등 지난 20년 동안 각 방송사 뉴스 메인 앵커의 절반 이상이 전주 출신이라고 한다.
“서울 사람은 깍쟁이 말투라 친근감이 적어요. 다른 지방 출신은 사투리를 고치기 힘들고요. (방송사에서) 전주 말씨를 선호하는 것은 서울 말씨로 쉽게 고칠 수 있으면서도 말투에 특유의 정감이 배어 있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전주는 반골 기질이 강한 곳이기도 하다. 장명수 전 총장은 전주에 ‘온순’과 ‘반골’이라는 상충되는 이미지가 양립하는 것은 역사적 지리적 특징 때문이라고 했다.
“왕건이 두어 번 죽을 위기를 넘겼을 정도로 후백제가 강했어요. 그래서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도 이곳 사람들이 모반하지 않을까 두려워해 ‘훈요10조’를 만든 것으로 보여요. 전주가 조선의 본향이라고 하지만 솔직히 이성계와 전주는 별 연고가 없어요. 1000년 동안 전주는 억압당하고 소외당해왔어요.”
곡창지대인 전북은 권력의 수탈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춘향전’은 이곳이 얼마나 수탈을 많이 당한 땅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정여립의 난, 동학혁명 등 민중봉기의 온상지인 반골의 땅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오랜 수탈과 억압, 정치적 소외로 ‘우린 안 된다’고 하는 부정적 정서가 있는 것도 사실이에요. 타 지역 사람들보다 자신감도 약한 편이고요.”
김병수 관장은 전주인의 특징을 이렇게 설명했다.
“변화에 늦어요. 주도적으로 치고 나가는 것도 없고요. 서로 눈치 보는 거죠. 하지만 부화뇌동하지는 않아요. 이심전심 합의가 이뤄졌다는 확신이 설 때야 움직이는데, 한번 일어서면 그야말로 들불처럼 번져 나가요. 동학혁명이 대표적이죠.”
오랜 수탈과 핍박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이 생겨서일까, 전주 사람들은 속내를 쉽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부산 사람들이 공공연히 “이번엔 한나라당”이라고 말하는 데 비해 전주 사람들은 웬만해선 정치 이야기를 아낀다.
민심을 들어보려고 택시기사에게 “요즘 선거 이야기 많이 하죠?” 물으면 십중팔구 “다들 먹고 살기 힘드니까 웬만해선 정치 이야기 안 해요” 하고는 입을 꾹 다문다. “요즘 경기가 어때요?” 하고 화제를 바꿔야 “언제 좋았던 적이 있간요. 김대중·노무현 정부 지지했지만 혜택이 없어요” 하고 입을 연다. “그럼 전북 발전 위해 전북 정권을 만들어야겠네요” 하고 맞장구를 치면 그제야 “고건이 연합을 한다고 하는데 어쩔랑가 모르겠어요”라며 속내를 슬쩍 내비친다.
“한미FTA 체결되면 전북 경제 붕괴”
도심을 지나다 보면 5층 이상의 건물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번화가라 하는 팔달로, 전북대 앞, 객사길, 서신동, 중화산동에서조차 10층 넘는 건물을 보기 힘들었다. 전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22층짜리인 전북은행 본점이라고 한다.
남부시장을 둘러봤다. 옷가게 주인에게 “장사가 잘되냐”고 묻자 “말해 무엇하냐”며 한숨을 지었다. 요즘은 하루 매상액을 정리하는 것조차 싫다고 한다. 이번엔 시청 근처에 있는 대형 할인마트 까르푸에 들렀다. 일요일인데도 주차요원이 눈에 띄지 않았다. 실내 또한 쇼핑객이 드문드문 눈에 띌 뿐 북적거림은 찾아볼 수 없었다.
덕진동에 있는 롯데백화점은 사정이 좀 나았지만 세일 기간치고는 한산했다. 그나마 사람이 붐비는 곳은 이마트였다. 아무래도 인근에 전주의 강남이라 하는 서신동과 중화산동 등 아파트단지가 몰려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농업이 성장동력이던 일제 강점기 때만 해도 전북은 만경평야가 있어 먹고 살 만한 곳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인선과 경부선을 따라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농촌지역이던 전북은 상대적으로 소외되고 낙후됐다. 전주는 1960년대만 해도 전국 6대 도시로 손꼽혔지만 지금은 25위권 규모의 군소도시로 전락했다.
한영주 원장은 “전북이 발전되지 않은 게 농촌지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정권의 지역차별 탓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60년대 도민 인구가 267만명이었는데 지금은 178만명이에요. 3분의 1이 줄어든 거죠. 먹고 살 게 없으니까 떠난 겁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경상도에서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왔는데 지금은 이곳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경상도로 떠나요. 인심도 많이 각박해졌어요.”
수치상으로 봐도 전북의 퇴락은 심각하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전북은 국토 면적의 8.1%를 차지한다. 인구비중은 1960년대에 8.8%로 국토면적비율보다 높았는데 지금은 3.8%다. 지역총생산성은 3.1%, 수출비중은 1.7%에 불과하다. 전주 인구 또한 2000년 이후 62만명 선에서 성장이 멈췄다. 연 주민소득도 떨어져 울산이 3만달러를 넘는 데 비해 전북은 3분의 1 수준인 1만1000달러다.
일자리를 찾아 젊은 인구가 떠나다 보니 출생률이 떨어지고 노령화가 가속화하는 건 필연적인 현상이다. 재정자립도도 갈수록 낮아져 전주의 경우 1998년 73.8%이던 것이 지난해는 43%, 올해는 37%대로 떨어졌다. 전북은 더 심각해 22%대로 16개 시·도 중에서 최하위권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전주가 전북의 구심점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이미 순창군 등 전북 남부는 광주생활권으로 넘어갔다. 환자가 생기면 전북대병원이 아니라 전남대병원으로 간다. 또한 진안, 무주 등 전북 북부는 대전생활권으로 편입됐다.
전북의 경제는 앞으로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장세광 교수는 한미FTA(자유무역협정)가 전북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농업개방이 되면 여기는 결정적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민심이 안 좋아요. 한미FTA 이후 농업생산 감소로 전북 농민이 입을 손해가 2158억원으로 추정되는데, 소득의 10% 이상이 감소하는 셈이에요. 거의 농촌 붕괴로 이어질 겁니다.”
전북지역에 큰 기업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쌍방울, 경성고무, 대한방직, 미원(현 대상그룹), 백양, 삼양사, 하이트(조선맥주), 전주제지 등 당시로서는 비교적 큰 기업이 여럿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부분 몰락했거나 과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울에서 제주보다 더 먼 도시?
장세광 교수는 “전북에 있던 기업들은 대부분 업종전환에 실패하면서 사양길에 들어섰다. 경영주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선 자본이 필요한데, 우리나라에서 자본을 끌어들이려면 정치력이 필수적이다. 정권으로부터 소외된 지역이라 도움을 얻기 힘들었다”고 했다.
“더 큰 문제는 과거 정부들이 전북에 도로, 항만 같은 인프라 투자에도 등한시했다는 거예요. 지금 새로운 산업이 들어오려 해도 인프라 기반이 너무 취약해 못 와요.”
2년여 전,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이 본사를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제주 서귀포와 전주를 후보지로 놓고 고심하다 결국 서귀포로 결정했다. 이유는 서울에서 전주보다 서귀포가 더 가깝다는 것. 거리로 보면 서귀포가 훨씬 멀지만 시간 개념으로는 더 가깝다. 서울에서 KTX나 비행기를 이용하면 부산, 목포, 제주에 가는 게 전주에 가는 것보다 더 빠르다. 그만큼 전주는 접근성에서 떨어진다.
한영주 원장도 인프라 구축의 미비가 과거 정부의 호남 차별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 국토개발을 계획할 때 우리나라 발전 동력은 크게 5개의 축으로 돼 있었어요. 세로축으로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있고, 가로축으로 영동고속도로(인천-서울-강원), 남해안 고속도로(광주-부산), 그리고 군산-전주-대구-포항을 잇는 고속도로가 있었어요. 그런데 전두환 정부 때 광주 눈치를 보느라 88고속도로(광주-대구-포항)로 바꿔버렸어요. 또한 김영삼 대통령 때 부산항과 광양항을 중점 개발했잖아요. 그래서 군산, 전주, 익산 등 전북지역의 물동량은 국도를 통해 광양까지 가야 해요. 이 길이 사고율 전국 1위예요. 이 길에 고속도로를 만들 계획인데 아직도 공사를 못해요. 그 예산을 김영삼 대통령이 자신의 고향 거제까지 이어지는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만드는 데 써버렸거든요.”
장 교수는 전북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인프라 구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공항도 필요해요. 수요가 없어 공항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거꾸로 공항이 없기 때문에 발전하지 않는 영역이 있어요. 전북에는 스키, 온천, 요리 등 즐길 게 많아 중국관광객이 많이 와요. 이들을 더 많이 유치하기 위해 군산항을 확장하고 김제공항을 만들어야 해요.”
택시를 타고 전주를 한 바퀴 돌아보았다. ‘생태도시’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깨끗하고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산업화과정에서 전주천 등 시내 하천은 시궁창이 되었다. 2000년부터 120억원을 들여 노력한 결과 지금은 쉬리가 발견될 정도로 수질이 회복됐다. 서울 청계천이 ‘커다란 어항 같다’는 비판을 받는 데 견주어 전주천은 자연형 하천의 특색을 그대로 살려 도심천 개발의 모범이 되고 있다.
전주의 특징 중 하나가 아파트 단지가 도시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한영주 원장은 전주가 외곽 넓히기에만 집중하면서 많은 문제점이 파생했다고 말한다.
“도심주거지역을 재개발하면 이윤이 적으니까 건설업자들이 외곽 빈터에만 아파트를 지었어요. 그러면서 전주의 도시 경관이 망가져버렸죠. 게다가 아파트는 느는데 인구는 늘지 않으니 어떻게 되겠어요. 도심 사람들이 아파트로 빠져나가면서 도심이 폐허처럼 돼버렸죠.”
문제는 또 있다. 언제부턴가 전주는 여름 낮 기온이, 전국에서 제일 덥다는 대구보다 더 높은 날이 많아졌다.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외곽을 둘러싼 아파트들이 바람 길을 막아 ‘열섬현상’이 생긴 것 같다”고 입을 모았다.
전주 길거리에서는 호프집, 커피숍, 레스토랑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 ‘가맥’이라는 글자가 붙은 구멍가게가 많다. ‘가맥’은 ‘가게맥주’의 줄임말로 여기선 맥주와 함께 간단하게 조리한 안주를 판다. 음식점 허가 없이는 조리한 음식을 팔 수 없으니 불법이지만, 일반 음식점보다 술값과 안주값이 저렴해 공무원, 직장인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아예 호프집처럼 ‘가맥광장’이란 간판을 내건 대형주점도 눈에 띈다.
막걸리 가게도 전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도시에서 사라진 막걸리가 외환위기 이후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삼천동에 있는 한 막걸리집에 들어가봤다. 술값은 한 주전자(막걸리 3통)에 1만원. 슈퍼마켓에서 한 통에 2500원 정도니 막걸리값 자체는 조금 비싼 편이지만 대신 안주가 공짜다. 한 주전자만 시켜도 족발, 두부김치, 삼계탕, 새우 등이 푸짐하게 나왔다. 손님들이 한 주전자만 먹고 가면 손해이고, 서너 주전자는 마셔야 이윤이 조금 남을 만큼 박리다매라고 한다.
술집 주인은 “전주는 물이 좋아서 막걸리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음식 맛도 좋아 서울에서 일부러 찾아오기도 한다”고 했다. 이런 막걸리 전문점이 삼천동과 서신동에 몰려 있고, 다른 주택가에도 한두 개씩은 성업중이다. ‘가맥’과 막걸리 모두 전주 시민들의 궁핍한 주머니 사정을 상징하는 듯하다.
경제 사정이 이러니 유흥산업이 번창할 리가 없다. 전주의 유흥가라고 하면 아중리, 중화산동, 시청골목, 전주역 근처 정도. 직접 둘러본 아중리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았다. 다른 곳은 더 작다고 한다.
아중리는 그야말로 모텔과 노래방 천지다. 물론 일반적인 노래방은 아니다. 도우미가 나오고 홀 안에서 ‘2차’도 가능한 변형된 룸살롱인 셈이다. 하지만 양주 1병 10만원, 맥주 1박스 10만원, 도우미 1시간당 2만원으로 룸살롱보다 훨씬 저렴하다. 택시기사에 따르면 아중리는 술값이 싼 데다 도우미가 대부분 20대라 주말이면 타 지역에서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반면 전주역 부근과 중화산동은 30∼40대 도우미가 많은데, 나이가 있어서인지 한마디로 질펀하게 놀 수 있다고.
그러나 밤 10시인데도 사람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호객행위를 하는 ‘삐끼’도 보이지 않았다. 인근 편의점 주인에 따르면 주말에나 조금 흥청거릴 뿐 평일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한다.
전주에서 향락산업이 발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전주제일고 교사 노병섭(42)씨는 “경제침체뿐 아니라 지역적 특색도 한몫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시민의 성향이 보수적인데다 인구가 많지 않아 세 사람만 건너면 다 알아요. 교사가 촌지 받으면 바로 소문이 돌 정도로 도시가 작아요. 그래서 어디를 출입했다 하면 금방 소문이 나요. 체면 때문에 함부로 뭘 못해요. 그래서 유흥문화도 덜 발달한 게 아닌가 싶어요.”
고등학교 증설 딜레마
지방도시가 안고 있는 교육 문제는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학의 경우 정원을 채우기 급급해 우석대는 신입생 정원을 2500명에서 1800명으로 줄였다. 일부 대학에서는 교수 월급이 밀리고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학생들은 졸업 후 취업이 힘들어 서울이나 부산 등지로 떠난다.
그래서 고등학생들은 취업하기에 조금 더 유리한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지만 워낙 낙후된 경제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전주여고 교사 전효연(40)씨는 “10년 전 익산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한 반에 15명 정도는 서울로 유학 갈 정도가 됐는데 지금 전주에서는 서울로 유학 가는 학생이 7∼8명밖에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교육도시답게 학부모의 교육열은 뜨겁다. 초등학교 교사 양성호(32)씨에 따르면 아파트단지 초등학생의 경우 평균 3과목에 월 15만원가량의 사교육비를 지출한다고 한다. 중학교의 경우 절반 이상의 학생이 학원에 다니거나 과외를 받으며 월 25만원 정도를 지출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서울 못지않게 사교육비가 들어가는 셈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게 노병섭 교사의 설명이다.
“지방에선 비싼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으니 학부모는 공교육이 사교육의 기능까지 맡아주길 바랍니다. 결국 교사가 새벽부터 밤 11시까지 학생을 책임져야 해요. 전교조에서는 보충수업 없는 학교를 만들라고 하지만 지방의 현실여건은 그렇지 못해요.”
전주만이 안고 있는 문제도 있다. 인구가 2000년까지 계속 늘었는데 학교 수는 그대로다. 따라서 반에서 20등 안에 못 드는 학생은 시내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지 못하고 인근 지역 학교로 배정받아 장거리 통학을 해야 한다.
“전주에 학교를 더 지으면 인근 지역 학교가 학생 부족으로 폐교를 당해요. 그러면 그 지역 학생들이 진학하기 위해 이사를 해야 하고, 그 지역은 인구가 더욱 줄게 되죠. 그래서 편법으로 그렇게 하는 건데, 풀기 어려운 문제예요.”
전북 교육계가 풀어야 할 문제는 또 있다. 전북에는 필리핀 등 외국에서 농촌으로 시집온 여성이 많은데, 내년부터 그 2세들이 본격적으로 취학하게 된다. 내년 취학연령 아동의 10%가 이들 2세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왕따 문제 등이 심각하게 제기될 수 있다는 게 양성호 교사의 걱정이다.
전북은 예부터 권력으로부터 소외됐지만 농업생산력이 풍부해 비교적 생활에 여유가 있었다. 자연히 서화, 판소리 등 문화가 발달했다. 김선태(40) 전북민예총 사무처장은 전주의 문화발달에 대해 색다른 이론을 내놓았다.
“전주는 ‘수원 백씨 아전의 땅’이라는 말이 있어요. 수원 백씨 집안이 대대로 아전을 많이 해서 붙은 별명인데, 이들이 음주가무를 즐겨 문화가 발달했다고 하더라고요.”
이유야 어떻든 전북엔 뛰어난 예술가가 많다. 우선 문학 쪽에선 ‘혼불’의 작가 최명희를 꼽을 수 있다. 그 위로는 채만식, 신석정, 이병기 등이 있고, 현재 활동하는 문인으로는 고은, 조정래, 김용택, 안도현 등이 있다. 최초의 가사문학 작품인 ‘상춘곡’이 태인에서 만들어졌으니 문학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다.
소리야말로 전북을 빼놓고는 이야기가 안 된다. ‘국악의 셰익스피어’로 불리는 신재효 선생이 고창 출신이다. 판소리는 흔히 동편제, 서편제로 나뉘는데 모두 전북에서 발달했다. 전주는 특히 서편제의 분파인 동초제가 강하다. 임방울과 쌍벽을 이룬 동초 김연수, 오정숙, 안숙선, 이일주, 김소희 등 수많은 명창이 전북 출신이다.
황병권(72) 전북예총 회장에 따르면 전주에 판소리가 발달한 것은, 조선 영조 무렵부터 전라감영과 전주부임의 통인(공무원)이 소리경연을 하고 놀던 대사습청이 있었던 데다, 만석꾼이 많아 소리꾼이 호구를 해결하러 이곳으로 많이 모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유일하게 지켜낸 선비의 고장답게 서화도 발달해 동양화의 거목 채정산과 나상묵, 서예의 거목 황욱과 여태명, 송성용을 배출했다. 강암 송성용 선생은 송하진 신임 전주시장의 부친이기도 하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전주는 시민의 문화수준이 높다고 한다. 김선태 사무처장은 “싸전다리, 덕진공원, 경기전 같은 곳에 가보면 풍물패를 자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누구나 소리 한 가락은 할 정도로 전통 문화에 익숙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또한 전통의 도시답게 한옥 등 전통문화가 곳곳에 산재한다. 전주시는 유·무형의 전통문화가 훌륭한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그동안 개발이 안 돼 남아 있던 유물들이 이젠 전주 발전의 기틀이 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재원(財源). 장명수 전 총장은 “근대에 발전한 도시인 광주광역시가 아시아 문화중심도시라며 2조원을 지원받는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전통문화를 잘 유지하고 있는 전주에 대해서는 지원이 거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주한옥마을을 둘러봤다. 상상했던 것과는 달리 원형이 보존돼 있지는 않았다. 대부분 한옥 형식으로 새로 지은 집이었고, 중간중간 한옥이 아닌 일제 강점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낡은 집도 있었다. 과연 안동 하회마을 같은 다른 전통마을에 비해 경쟁력이 있을까 싶었다. 이에 대해 김병수 관장의 생각은 달랐다.
“한옥이라는 개념을 다시 정리해야 합니다. 흔히 황토로 벽을 세우고 기와를 얹은 집을 한옥이라 말하는데 생각을 넓히면 한국인이 사는 집이 바로 한옥이에요. 이곳은 그동안 개발이 안 돼 조선 후기, 일제 강점기, 현대의 건축구조가 공존해요. 살아 있는 근·현대사 주거박물관이라 할 수 있어요.”
전주는 축제의 도시다. 5월초엔 풍남제, 전주대사습놀이 등 대형축제가 열리고 그밖에도 복숭아축제, 연꽃축제, 전주세계소리축제, 세계서예비엔날레, 전주한방체험축제 등 다양한 축제가 사시사철 열린다. 축제가 너무 많아 전시행정이라는 비판도 있다.
김선태 민예총 사무처장은 “지역문화 축제가 전주를 널리 알리고 문화예술 발전의 불을 지핀 것은 사실이지만 얼마만큼 성과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시민의 참여도가 그다지 높지 않다. 이유는 시민을 축제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시민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살아 꿈틀대는 축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주국제영화제다. 처음 전주영화제가 열렸을 때 ‘과연 계속 열릴까’ 하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시작할 때부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따랐다. 반면 전주국제영화제는 정부의 지원 없이 시 예산만으로 시작됐다. 지난해 문화관광부에서 지원한 금액도 각각 15억원과 5억원으로 차이가 크다. 기업 협찬도 13억원과 3억7000만원으로 비교가 안 된다. 총 규모도 차이가 크다.
하지만 지난 4월29일부터 9일 동안 열린 제7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유료관객만 5만9000명을 넘어서며 전국적인 영화축제의 면모를 보였다. 처음부터 상업영화제보다는 ‘대안영화, 디지털영화, 독립영화’로 차별화를 꾀한 덕분이다.
조시돈(46) 전주독립영화협회장은 전주국제영화제가 전주지역 영화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우선 전주대, 우석대, 한일장신대에 영화과가 생겼다. 스크린 수도 배 이상 늘었다. 현재 9개 영화관에 스크린 56개로 1만명당 스크린 수가 전국 1위다. 또한 전주시민미디어센터가 들어서고 디지털후반제작시설을 구축하는 등 영화산업 인프라도 착실히 다져지고 있다.
“무엇보다 독립영화의 뿌리가 내렸어요. 대표적인 독립영화 축제인 시민영화제엔 전주에서 해마다 새로 만들어진 독립영화가 40∼50편씩 상영돼요. 그외 디지털영상제, 꿈틀영상제(청소년영화제), 개인이 하는 골방영화제까지 다양한 독립영화제가 열리고 있어요. 머지않아 전주가 독립영화의 메카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맛의 고장’ 전주에서 비빔밥을 먹지 않으면 전주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아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식당에 들러 전주비빔밥을 시켰다. 주인은 전주비빔밥의 비밀 하나를 들려줬다.
“전주비빔밥은 전주만의 것이 아니에요. 김제의 쌀, 남원의 산나물, 전주의 콩나물, 순창의 고추장이 어우러져 제 맛을 내는 거예요. 그야말로 ‘전북 먹을거리 문화의 총화’인 셈이죠.”
각각의 재료가 제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어울려 새로운 맛을 내는 전주비빔밥. 그게 전북의 대표도시 전주의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