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극우 세력을 든든한 정치적 기반으로 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도 숙명의 정적이 있으니, 바로 동갑내기이자 같은 해 국회에 입성한 시이 가즈오(志位和夫·60) 일본공산당 위원장이다. 2005년 TV 토론회에서 시이 위원장이 아베 총리를 상대로 역사관 문제 등에 대해 맹공을 퍼부은 일은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 시이 위원장은 지난 3월 고노담화를 부정하는 극우 세력과 그에 편승하려는 아베 정권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글 ‘고노담화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발표했다.
- ‘신동아’는 시이 위원장의 허락을 얻어 이 글을 요약해 싣는다.
- 이 글은 최근 발간된 그의 저서 ‘새로운 약진의 시대를 지향하며’(미래를소유한사람들 刊)에 전문이 실려 있다. 시이 위원장은 10월 27일 서울 고려대 백주년기념관에서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말한다’는 주제로 강연할 예정이다. <편집자 >
2월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온 일본유신회 소속 한 의원의 주장을 필두로 고노담화가 일본 내부는 물론 한국, 중국 등 동북아의 중대한 초점이 되고 있다. 일본 내 일부 세력은 1993년 8월 3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견해를 밝힌 고노 요헤이 관방장관 담화를 공격하면서 “새로운 관방장관 담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고노담화의 당사자인 일본 정부가 이런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당시 일을 검증해보고 싶다” “학술적 관점에서 새로운 검토를 거듭할 필요가 있다” 등 기회주의적 대응으로 일관하는가 하면, 급기야 2월 28일 “정부 내에 ‘고노담화 검증팀’을 설치하겠다”고까지 했다. 아베 총리가 “유신회 의원의 발언에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고노담화 재검토론은 역사를 위조해 중대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일이나 다름없다. 나는 고노담화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반박하고, 동시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밝히고자 한다.
고노담화가 인정한 5가지 사실
고노담화는 1991년 12월부터 실시된 정부 조사의 결론으로 다음과 같은 5가지 사실을 인정한다.
첫째, 장기간,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됐고,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던 것이 인정된다.
둘째, 위안소는 군 당국의 요청에 따라 설치됐고, 위안소 설치·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 등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셋째, 위안부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들이 주도했으며 감언(甘言), 강압 등 본인 의사에 반해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경우에 따라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기도 했다.
넷째,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 상황하에서 참혹한 것이었다.
다섯째, 전쟁터로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반도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당시 한반도는 일본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모집·이송·관리 등은 감언·강압에 의한 것 등 대체로 본인 의사에 반해 이뤄졌다.
고노담화는 이 같은 사실들을 인정하며 ‘본 건은 당시 군(軍) 관여하에 많은 여성의 명예와 존엄성에 큰 상처를 주었던 문제다. 정부는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수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치유하기 힘든 상처를 입은 모든 분께 진심으로 사죄와 반성의 말씀을 전한다’고 표명했다.
고노담화 재검토파가 부정하려는 것은 고노담화가 인정하는 5가지 사실 중 세 번째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이 있었다’는 부분이다. 이들은 △위안부 강제연행을 입증할 증거가 없고 △위안부 증언을 뒷받침할 근거가 없다면서 마치 고노담화 전체가 신빙성이 없는 것인 양 공격한다.
먼저 이러한 공격 수법 자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지극히 일방적인 것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위안부로 동원될 때 본인 의사가 반영됐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일단 여성이 일본군위안소에 들어가면 감금된 채 강제사역을 당했다. 자유 없는 생활을 강요당하며 강제로 병사의 성노리개가 됐다는 사실은 다수의 피해자 증언과 일본군의 공문서 등을 보더라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고노담화 재검토파는 이 점에 대해서는 입을 닫는다. 그러나 이 점이야말로 국제사회에서 엄중한 비판을 받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가장 큰 문제임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이 있었다는 고노담화의 사실 인정이 근거 없는 것’이라는 공격이 어떻게 등장할 수 있었을까.
위안부 첫 실명 증언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중대한 정치·외교적 문제로 부상한 것은 1990년이었다. 그해 5월 당시 노태우 한국 대통령의 일본 방문을 앞두고 한국의 여성단체들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당국의 사죄와 보상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군이나 관헌의 위안소 관여를 부정하고 위안부 실태조사 또한 거부했다(1990년 6월). 이에 같은 해 10월 한국의 37개 주요 여성단체가 또다시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다음 6개 항목을 요구했다.
1. 일본 정부는 조선 여성들을 위안부로 끌고 간 사실을 인정하라.
2. 이 일에 대해 공식 사과하라.
3. 만행의 전모를 스스로 밝혀라.
4.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위령비를 건립하라.
5. 생존자와 유족에게 보상하라.
6.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역사 교육을 통해 이 사실을 전하라.
이듬해인 1991년 8월에는 위안부였던 김학순 씨가 “일본 정부는 정신대(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분노를 느낀다”고 처음으로 실명으로 증언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김씨를 포함한 전(前) 위안부 3명(후에는 9명)이 “조직적, 강제적으로 끌려가 도망갈 수 없는 전장에서 일본군을 상대했다”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보상 요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일본 국내에서도 시민단체 및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진상규명 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본 정부는 1991년 12월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갔다.
5월 29일 아베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회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시이 위원장이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이렇게 가토담화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군)의 관여를 인정했다. 위안소 경영·감독과 관련한 공문에 ‘위안소 규정’이 포함돼 있으며, 위안소에서의 위안부 생활이 자유가 없는 강제적인 것, 즉 강제사역이었다는 것 또한 이 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그러나 가토 장관이 ‘조선 여성의 강제징용을 증명하는 자료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모집 방법에 관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대답한 것이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부정했다’고 보도되는 바람에 가토담화는 강한 비판을 받게 됐다.
따라서 국내외에서는 가토담화의 조사가 미흡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한국 정부는 “전모를 밝히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다”며 “한국 정부가 독자적인 조사보고서를 발표하겠다”고 표명했다. 그리해 1992년 7월 한국 정부는 위안부 청취조사 등을 거쳐 200쪽이 넘는 보고서 ‘일제하의 군대위안부 실태조사 중간보고서’를 발표했고, 일본 정부 차원의 위안부 모집 방법 등에 대한 추가 조사를 요구했다.
이상의 사태를 계기로 일본 정부는 ‘본인 의사에 반해 위안부가 됐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공문을 찾는 것에 초점을 맞춰 국내뿐 아니라 해외까지 포함해 조사를 진행하게 됐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재조사를 했음에도 그러한 문서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한다. 이는 고노 전 관방장관이 담화에서 “여성을 강제로 징용하라던가 본인의 의사 여하를 막론하고 데려오라는 명령서는 적어도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았다”고 밝힌 것이나, 담화를 정리하는 사무 관련 책임자였던 이시하라 노부오 전 관방부 장관이 “통달이나 지령 등 여러 자료를 수집했지만, 강제성을 입증하는 문서는 나오지 않았다”고 증언한 바에서 나타난다.
강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본 측 공문을 찾지 못한 것은 신기하게도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납치나 유괴 등은 당시 국내법과 국제법에 비추어보더라도 명명백백한 범죄 행위다. 범죄 행위를 지시하는 공문 등을 정부나 군이 작성할 리가 없지 않은가.
설령 그런 내용을 시사하는 문서가 있었다 하더라도 패전한 뒤 다른 전쟁범죄와 관련된 자료들과 함께 처분됐을 것이 분명하다. 고노 전 장관도 “군 인사들은 그런 명령을 했다는 내용이 담긴 자료를 가능한 한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자료는 거의 다 폐기됐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강제성을 증명하는 일본 측 문건을 찾지 못한 것을 근거로 강제적으로 위안부가 됐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전혀 성립될 수 없는 논리다.
“지어낸 얘기일 수 없다”
문서가 발견되지 않은 상황에서 강제성 여부를 최종 판단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사상 처음으로 위안부에 대한 청취조사 실시를 결정, 조사단을 한국으로 파견했다.
위안부 생존자 16명의 증언을 들어본 결과, 일본 정부는 위안소에서 강제사역은 물론이고 위안부가 되는 과정에서도 강제성이 있었다는 판단을 하게 됐다. 이와 관련해 고노 및 이시하라 두 사람은 다음과 같은 증언했다.
“이야기를 듣다보면 분명 심각한 상황에 처했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상황 설명이 줄줄이 나왔다. 그 증언들은 신빙성 있고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고 깨닫게 됐다.”(고노 전 관방장관)
“보고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히 본인의 뜻에 반해 끌려간 사람, 속은 사람, 보통의 여성노동자 모집에 참여했다가 위안소로 끌려간 사람, 그리고 싫었음에도 조선총독부 순사가 와서 자기 앞으로 몇 명이 할당됐다고 위협 또는 압력을 가하는 바람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었다는 사람 등이 분명히 있었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때 명백히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위안부가 된 사람이 16명 가운데 분명히 존재한다는 보고를 조사단으로부터 받았다. 총리도, 관방장관도 함께 이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우리는 통달이나 지령과 같은 문서적인 것, 강제성을 입증할 수 있는 물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제 강제로 위안부가 됐다는 증언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고노담화를 작성했다.”(이시하라 노부오 전 관방부장관)
이렇게 해서 일본 정부는 고노담화를 통해 ‘한반도에서 (위안부의) 모집, 이송, 관리 등이 감언, 강압에 의한 것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이뤄졌다’는 것을 명기함으로써 위안부가 되는 과정에 강제성이 있었다고 인정하게 됐다. 또한 다른 증언 기록과 자료를 참조해 전체적으로 ‘위안부 모집은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들이 주도했는데 여기에도 감언, 강압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이 이뤄진 사례가 많다. 심지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고 명기했다.
고노담화 재검토파는 위안부 생존자들의 증언에 대해 “증언을 뒷받침하는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새삼스레 트집을 잡는데, 이는 청취조사의 목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 하겠다. 앞서도 말했지만, 청취조사의 목적은 여성들이 위안부가 되는 과정에 강제성이 있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추어 진상을 규명하는 데 있었다. 이는 형사재판에서의 증언과 같이 개별·구체적인 범죄 행위를 특정해 심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또한 민사재판의 증언처럼 개별적인 피해 사실을 인정하고 배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도 않는다.
16명의 위안부 청취조사는 직접 증언을 들어봄으로써 ‘본인 의사에 반해 위안부가 됐다’는 호소에 진실성이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점에 대해 충분히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증언을 얻었으니 그 외의 조사는 당연히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위안부 청취조사에 대해 ‘오류가 있다’ ‘신빙성에 의문이 있다’ 등의 비판이 나온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런 비판에 대해 고노 전 장관은 이미 1997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반세기가 더 지난 일이다보니 장소나 상황에 대한 기억 차이가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한 여자의 인생에 그토록 큰 상처를 남긴 일에 대해 기억 자체가 틀렸다고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청취조사의 증언을 읽어보면 피해자가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경험임을 알 수 있다.”
“명확한 사실은 당시의 사회 정세 속에서 군이 매우 압도적인 권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이른바 종군위안부였다는 분들의 증언이 피해자 아니면 말할 수 없는 것들로 느껴졌다는 점 등을 종합해 판단해보면 그러한 것(강제성)이 없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저는 판단했다.”
日 사법부도 강제성 인정
고노담화 재검토파의 공격이 가진 두 번째 문제점은 담화 발표 이후 20년 남짓 사이 담화의 진실성을 뒷받침해주는 무수한 증거가 줄줄이 밝혀졌음에도, 이를 깡그리 무시한다는 사실이다. 증거는 피해자 증언, 가해자 측 증언과 기록, 여타 공문서 등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중에서도 가해국인 일본의 사법부가 사실을 인정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세계 각국의 위안부들이 일본 정부를 피고로 해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한 재판으로는 다음 10건을 꼽을 수 있다.
1. 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보상 청구소송(1991년, 원고 9명)
2.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과 등 청구소송(1992년, 원고 3명)
3. 필리핀 종군위안부 국가 보상 청구소송(1993년, 원고 46명)
4. 재일한국인 전 종군위안부 사과·보상 청구소송(1993년, 원고 1명)
5. 네덜란드인 전 포로·민간 억류자 손해배상 청구소송(1994년, 원고 1명)
6. 중국인 위안부 손해배상 청구소송(제1차)(1995년, 원고 4명)
7. 중국인 위안부 손해배상 청구소송(제2차)(1996년, 원고 2명)
8. 산시성 성폭력 피해자 손해배상 등 청구소송(1998년, 원고 10명)
9. 대만인 전 위안부 사과 청구·손해배상 소송(1999년, 원고 9명)
10. 하이난 섬 전투 당시 성폭력 피해 배상 청구소송(2001년, 원고 8명)
이 재판들은 하나같이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지만, 10건 중 8건(3번과 9번 제외)에 대한 판결은 모두 위안부의 피해와 그 실태를 사실로 인정했다. 위안소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 위안부가 되는 과정에서의 강제성, 위안소 안에서의 강제사역 등을 전면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일례로 1번 재판에 대한 도쿄고등재판소의 판결(2003년 7월)을 보자.
본 건의 배경 사정 중 전시에 있었던 사실과 증거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인정된다.
가. 일본군에는 쇼와(昭和) 7년(1932년)의 상해사변 이후부터 매춘업을 목적으로 군사위안소(이하 위안소라 함)가 설치됐고, 그 무렵부터 종전 당시까지 장기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고 수많은 군위안부가 배치됐다.
나. 군 위안부 모집은 일본군 당국의 요청을 받은 경영자의 의뢰에 따라 알선업자가 주도했지만, 전쟁의 확대와 함께 군위안부 확보의 필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업체들은 감언, 사기, 협박 등으로 군위안부를 모집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당국이 이에 가담하는 등의 사례도 나타났다. 전쟁터로 이송된 군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한반도 출신자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다. 일본군은 업자와 군위안부의 수송에 특별히 군속에 준하는 도항(渡航) 허가를 부여했으며, 일본 정부는 군위안부에게 신분증까지 발급했다.
라. 위안소의 대부분은 일본군의 개설 허가하에 민간업체에 의해 경영됐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일본군이 직접 경영하는 사례도 있었다. 민간업체의 경영과 관련해서는 일본군이 위안소 시설을 정비하거나 위안소 이용시간, 이용요금, 이용할 때의 주의사항 등을 정한 위안소 규정을 만들고 군의관을 통해 위생관리를 하는 등 전반적인 위안소의 설치, 운영, 유지 및 관리 등에 직접 관여했다. 또한 군 위안부는 전쟁터에서 늘 일본군의 관리를 받으며 일본군과 함께 행동했다.
이렇듯 일본 사법부의 판결문은 고노담화가 인정한 5가지 사실에 대해 거의 모두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나치 만행에 준하는 인권침해
8개 재판의 판결을 통해 피해 사실을 인정받은 여성은 35명에 이른다(한국인 10명, 중국인 24명, 네덜란드인 1명). 이중 10대 미성년자였던 여성이 26명이나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의 피해 사실은 끝까지 읽기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잔인하고 비참하고 생생하다. 그 일부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귀가하던 중 부산역 근처 골목에서 일본인과 조선인 남성 2명이 불러 세웠다. ‘구라시키(倉敷)의 군복공장에 돈 벌러 가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듣고 승낙도 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배에 태워져 라바울로 끌려갔다.”
“‘일본인이 소개한 좋은 일자리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갔다가 일본인과 조선인 등에 의해 부강(芙江)에서 경성, 톈진을 거쳐 (중국 각지의 위안소로) 끌려다녔다.”
“일본인과 조선인이 와서 ‘일본 공장에 일하러 가서 1년만 지내면 시집갈 밑천을 벌 수 있다’는 말을 하기에 거절했지만, 강제로 랭군에 끌려가 위안소에 감금됐다.”
“일본인과 조선인 청년으로부터 ‘돈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 따라오라’는 꼬임을 받고 따라갔다가 부산에서 배에 태워져 기차로 상하이까지 끌려가 창문 없는 30개 정도의 작은 방이 늘어서 있는 ‘육군부대위안소’라는 간판의 연립주택에 감금됐다.”
“일본군 병사에 의해 집에서 일본군의 주둔지가 있던 진구이(進圭) 마을로 납치·연행돼 영내의 야오동(바위산의 토굴을 이용한 주거지)에 감금됐다.”
“3명의 중국인과 3명의 무장한 일본군 병사들에 의해 집에서 납치돼 개머리판으로 왼쪽 어깨를 강타당하고 등 뒤로 손이 묶인 채 진구이 마을에 있는 일본군 주둔지에 연행된 후 야오동에 감금됐다.”
“일본군이 덮치더니 개머리판으로 왼팔을 때리고 손을 뒤로 묶은 후 진구이 마을로 끌고 가 민가에 감금했다.”
“일본군 병사에 의해 강제로 진구이 마을의 일본군 주둔지로 납치·연행돼 일본군 병사로부터 ‘남편의 거처를 대라’는 심문과 함께 몇 번이나 구타를 당하다 결국 야오동에 감금됐다.”
일제의 군 위안소. 중국의 가정집을 개조해 방마다 번호를 붙였고, 일본군들은 길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왼쪽). 오른쪽은 8월 20일 서울 종로구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정기 수요집회.
감언, 강압 등에 의해 본인 의사에 반해 위안소로 연행하고, 일본군의 위안소에 대한 직·간접적 관여하에 정책적·제도적으로 군인들과의 성행위를 강요받았던 것으로, 이는 20세기 중반이라는 당시의 문명적 수준에 비춰보더라도 매우 반인륜적이고 추악한 행위임이 명백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일류 국가를 표방했던 제국(帝國)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가담할 만한 행위가 아니었다. 종군위안부 제도는 이른바 나치의 만행에 준하는 중대한 인권침해이며, 이를 통해 위안부가 된 수많은 여성이 입은 손해를 방치하는 것은 재차 중대한 인권침해를 일으키는….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과 등 청구소송, 야마구치지방법원 시모노세키지부 판결, 1998년 4월 27일
원고들에게 가해진 일본군에 의한 강간 등과 같은 소행은 그것이 중일전쟁이라는 전시상황에서 일어난 것이라 할지라도 현저히 상도(常道)를 벗어난 비열한 만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피해 할머니들이 입은 정신적 피해는 막대하며, 원고들의 주장대로 참기 어려운 것이었음이 추론하기 어렵지 않고, 또 그런 피해를 계기로 동포들로부터 까닭 없는 모멸, 차별 등을 받았던 것에 대해서도 국적, 민족의 차이를 초월, 본 법원에서도 충분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산시성 성폭력 피해자 손해배상 청구소송, 도쿄지방법원 판결, 2003년 4월 24일
고노담화 재검토파가 “강제연행을 시사하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할 때 그 근거로 많이 이용하는 것이 바로 제1차 아베 정권이 각의를 통해 결정한 2007년 3월 16일 정부 답변서(쓰지모토 기요미 중의원 의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서)다. 이 정부 답변서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이날(고노담화를 발표한 1993년 8월 4일)까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시사하는 기술이 없었다.
하지만 이 정부 답변서는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고노담화 발표 시점에 강제적으로 위안부가 됐음을 입증하는 외국의 공문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2개의 공문서, 세마랑 사건과 구이린 강제연행 사건과 관련한 문건에 대해 일본 정부는 틀림없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세마랑 사건이란 당시 일본의 점령하에 있던 네덜란드령 동인도(현 인도네시아)의 세마랑에서 군이 위안소를 개설하고 억류돼 있던 네덜란드인 여성을 강제로 연행해 위안부로 만들었던 일이다. 전후(戰後) 네덜란드에 의한 B·C급 전범재판(바타비아 임시군법 회의)에서 중장, 대령, 소령 등 일본군인 7명과 군위안소 경영자 4명이 사형 및 금고 15년 등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재판 문서에는 ‘판결 사실의 개요’로서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돼 있다.
여성의 전원 또는 대부분이 강제하지 않고는 성매매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음에도 감독을 게을리했던 사실 및 위안소에서 여성을 위협해 성매매를 강요하는 군인 또는 민간인이 그런 전쟁범죄 행위를 하는 것을 알거나 알면서도 묵인했던 일.
-사형당한 일본군 소좌
부하들과 민간인 등이 여성들을 성매매를 목적으로 위안소로 연행, 숙박시키고 위협해 성매매를 강요하는 등의 전쟁범죄 행위를 저질렀던 사실에 대해 알고 나서도 묵인했던 일.
-유기형 10년을 받은 일본군 소좌
위의 내용은 고노담화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각 정부 부처에 제출된 문서의 일부로 법무성이 ‘종군 위안부 문제에 관련된 전쟁범죄 재판에 대한 조사결과 보고’라는 제목으로 정리한 문서에서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기술돼 있다. 한편 지난해에는 도합 530장에 달하는 세마랑 재판 자료가 공개됐는데, 거기에도 강제연행 사실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증거 자료가 다수 포함돼 있다.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일본 점령군 당국은 상기의 여자로부터 자유를 빼앗아 완전한 종속상태에 두고 그녀들의 부양, 보호에 대한 책임까지 장악했다. 그것도 모자라 이 무원(無援), 부당한 종속 관계를 남용, 폭력 또는 협박에 의해 몇 명의 부녀자를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선택하고 억류소로부터 연행했다.
두 번째 극동국제군사재판소(도쿄재판)의 판결에 명기된 중국 남부 구이린에서의 강제연행 사례를 보자. 판결 내용 중에는 ‘구이린을 점령한 동안 일본군은 강간, 약탈 등 온갖 잔학행위를 저질렀다. 공장을 설립한다는 핑계로 여공을 모집했고, 그렇게 모집한 부녀자들에게 일본 군대를 위한 매춘을 강요했다’고 기술돼 있다. 일본은 1952년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따라 도쿄재판과 B·C급 전범재판의 결과를 모두 수용했다. 따라서 이 내용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가 B·C급 전범재판과 도쿄재판의 공개 문서에 명기된 강제연행 사실을 몰랐다고 우기는 것은 결코 통용될 수 없는 말이다. 이에 일본공산당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데 활용되는 2007년 3월 16일 정부 답변서 철회를 강력히 요구하는 바다.
역사는 고쳐 쓸 수 없다
최근 국제사회는 여성에 대한 조직적인 성폭력-강간, 성노예, 강제 성매매, 강제임신·불임 등을 시효가 없는 ‘반인도적 범죄’로 규정하고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으로 채택(1998년)하는 등 여성에 대한 인권보장을 크게 발전시켜왔다. 따라서 국제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된 일본의 태도가 끊임없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 정부와 군에 의한 성노예제였다는 사실을 명확하고 애매함 없는 형태로 공식 인정해야 한다. 위안부 제도의 강제성을 부인하는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명확하게 반박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본 정부를 향한 세계의 목소리다. 아베 정권이 고노담화 재검토론에 대해 기회주의적인 태도로만 일관한다면 인권과 인간의 존엄에 관련한 일본 정부의 국제적 신뢰는 크게 훼손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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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역사를 은폐하고 조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세력에게는 결코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일본공산당은 일본 정부가 고노담화를 통해 밝힌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진실을 정면에서 인정하고, 역사를 위조하는 주장에 대해 단호히 반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역사는 고쳐 쓸 수 없다. 그러나 마주 볼 수는 있다. 역사의 진실에 정면으로 마주해 성실하고 진지하게 잘못을 시인하며 미래의 교훈으로 삼는 태도를 취할 때, 일본은 비로소 아시아와 세계로부터 신뢰와 존경 을 받는 나라가 될 수 있다.
● 일본공산당
1922년 창립한 일본공산당은 현재 일본 정당 중 역사가 가장 길다. 태평양 전쟁 이전부터 침략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반대해왔으며, 비정상적인 대미종속과 대기업·재계의 횡포 타파,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서의 민주적 개혁 등을 강령의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다. 현재 일본 국회에서 중의원 의원 8명, 참의원 의원 11명을 확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