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운동복 납품업체 13곳 중 통과 업체 全無
국방부 부적격 판정 후 “수의계약 없애겠다”
수의계약 사라지면 중증장애인시설 문 닫아야
국방부 설문 결과 여름 운동복 만족도 높은 편
8월 11일 서울 동작구 상도동 성대전통시장에서 육군 장병들이 폭우로 피해를 본 집기를 밖으로 내놓고 있다. 장병들이 입은 상의가 육군 여름 운동복이다. [동아DB]
중증장애인시설은 총 근무 인원의 50~77%를 중증장애인으로 고용한 업체다. 이 시설들은 주로 여름 운동복을 군에 납품해 왔다. 중증장애인시설을 대변하는 ㈔한국장애인중심기업협회(이하 장애인기업협회)는 “국방부가 일방적으로 여름 운동복 수의계약 물량을 감축하면 이를 납품하던 중증장애인을 고용한 시설은 대거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며 “중증장애인시설 수의계약 폐지 계획을 유보하고 정부가 이를 재논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정부품질보증 계획서 “운동복은 원단을 기준으로 성능 검사”
육군 여름 운동복. [동아DB]
국방부와 유관 기관이 직접 성능 검사를 요청한 것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는 납품하는 업체가 사용할 원단을 공인 검사기관에 보내 성능 검사를 의뢰했다. 검사기준을 통과하면 품질보증서를 받는다. 각 업체는 품질보증서를 받은 원단을 이용해 여름 운동복을 제작해 군에 납품해왔는데 2020년 12월 일부 업체가 이 품질보증서를 조작한 사실이 드러났다.(신동아 2021년 7월호 ‘“질 낮은 軍 운동복, 이유 있었다”… 보증서 조작 납품’ 제하 기사 참고.)
방사청은 이 같은 사태의 재발을 막고자 지난해 5월 새로운 품질평가 기준을 만들겠다고 밝혔으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는 대신 평가 대상을 원단에서 완제품으로 바꾸었다. 방사청은 공인 검사기관에 여름 운동복 완제품 성능 검사를 요청했다. 완제품 성능 검사기준은 원단과 같았다. 방사청과 기품원은 지난해 8월부터 원단 대신 각 업체가 납품한 여름 운동복을 공인 검사기관에 보냈다. 이 중에는 납품된 지 수개월이 지난 제품도 있었다.
국방기술품질원의 정부품질보증 계획서. 육군 하계 활동복의 성능 검사기준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한국장애인중심기업협회]
방사청이 원단 성능 검사 대신 완제품 검사를 진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과거 방사청은 군 천막 납품업체인 A사와 완제품 검사를 둘러싸고 소송전을 벌인 바 있다. 2018년 A사는 천막 원단에 대한 성능 검사를 마친 후 제품을 만들어 납품했다. 그런데 A사의 천막이 비가 샌다는 제보가 있었다. 방사청은 A사가 납품한 천막 완제품으로 다시 성능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 결과 원단과 완제품의 성능에 차이가 있었다. 방사청은 이 사건을 계기로 2019년 1월 A사를 국방품질경영체계에서 퇴출시켰다. 여기서 퇴출되면 더는 군에 천막을 납품할 수 없다.
수의계약 기간 끝나면 중증장애인시설 문 닫아야
A사는 같은 해 4월 퇴출 처분을 취소해 달라며 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4월 법원은 A사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고등법원 행정 9부(김시철 판사)는 “원단 검사에서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며 “천막 완제품에 대한 1회의 시험 결과만으로 A사가 하자가 있는 제품을 납품해 왔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섬유업계 한 관계자는 “원단에 봉제, 나염 공정을 거쳐 완제품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원단은 재단되고 고열에 노출되기도 한다”며 “원단과 완제품이 비슷한 성능을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중증장애인시설 관계자도 “방사청이 내건 여름 운동복 성능 기준을 통과하는 업체는 극소수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지난해 8월 방사청은 “새로운 성능 기준 검사에서 부적격 판정을 받지 않은 업체도 있다”며 “부적격 판정을 받은 일부 업체들이 모여 목소리를 내는 것일 뿐”이라며 맞섰다.
국방부 및 유관 기관은 한발 더 나갔다. 국방부는 지난해 10월 부적격한 여름 운동복을 납품한 업체가 많다는 이유로 2025년까지 여름 운동복 수의계약 물량을 없애고 경쟁입찰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중증장애인시설 관계자는 “수의계약을 없앤다는 이야기는 중증장애인시설의 문을 닫으라는 말과 같다”고 말했다. 그는 “근무 직원의 과반이 중증장애인인데 이들을 돌보며 일하다 보니 일반 기업만큼 높은 생산성을 보장하기 힘들다”며 “군은 경쟁입찰에 나서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라지만 생산성이 떨어지는 우리가 입찰을 따낼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고 말했다.
만족도 높은 운동복 업체, 장병 위해 바꾼다고
5개월의 시간이 흘러 올해 1월이 되자 나머지 10개 업체도 추가로 성능 기준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여름 운동복 납품업체 모두가 성능 기준 부적격 판정을 받으니 방사청의 성능 측정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중증장애인시설 관계자는 “이는 처음부터 방사청이 무리한 기준을 내걸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며 “지금이라도 완제품에 대한 새로운 성능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13개 업체 전체가 부적격 판정을 받은 것에 대해 방사청은 “기준에는 문제가 없다”며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 방사청 관계자는 “군 장병들이 피복류에 대해 가진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다소 높은 기준을 잡은 것은 사실”이라며 “그러나 높은 기준을 통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장병들이 조금이라도 좋은 피복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9년 국방부 피복 만족도 조사 결과 육군 하계 활동복은 54개 품목 중 만족도 5위를 기록했다. [국방부]
보건복지부 “국방부 설득 방안 고민 중”
국방부가 수의계약 물량을 없애는 일이 현행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조희태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는 “공공기관은 중증장애인시설의 생산품을 일정 비율 이상 의무적으로 구매해야 한다”며 “국방부가 수의계약을 없애는 방식으로 중증장애인시설 생산품을 받지 않으려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조 변호사의 말처럼 ‘중증장애인생산품 우선구매 특별법’에 따르면 각 공공기관은 총 구매액의 1% 이상을 중증장애인시설에서 구매해야 한다. 이 법 7조 7항에는 공공기관 구매 실적이 기준에 미달하는 경우 보건복지부 장관이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 중증장애인시설 관계자들은 이 조항을 근거로 보건복지부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보건복지부로부터는 “국방부는 지난해 기준 중증장애인시설 생산품 우선구매 금액 1위 기관”이라는 답변만 돌아왔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8월 19일 ‘신동아’의 질의에 대해 “국방부는 매해 전체 구매 내역의 1% 이상 중증장애인시설 생산품을 구매해 왔다”며 “향후 문제(중증장애인시설 생산품 구매 비율이 1% 미만으로 떨어졌을 때)가 발생해야 시정 요청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국방부가 수의계약으로 진행하던 구매 내역을 아예 없애겠다고 밝혔는데도 시정 요청이 어려우냐고 재차 묻자 보건복지부는 “추후 담당자를 통해 답변하겠다”고 밝혔다. 20일이 지난 9월 8일 보건복지부 관계자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국방부를 설득할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며 “국방부 및 유관 기관과 함께 군용 여름 운동복 수의계약 물량에 대해 논의할 자리를 마련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법원, 중증장애인시설 손 들어줘
국방부 및 유관 기관과 중증장애인시설은 법정다툼도 벌이고 있다. 올해 3월 방사청으로부터 일반물자 군수품(운동복, 베레모 등) 품질보증 업무를 이관받은 조달청이 중증장애인시설에 대한 제재에 나섰다. 중증장애인시설이 조달청에 수의계약으로 공급하기로 한 물량을 30% 줄이기로 했다. 성능 기준에 미달하는 여름 운동복을 납품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중증장애인시설은 이 같은 사실을 4월에 통보받았다.장애인기업협회는 조달청의 물량 감축 처분에 집행정지를 신청했다. 김현섭 장애인기업협회 대표는 “하루아침에 수의계약으로 이미 배정받은 물량을 대폭 축소하면 중증장애인 해고, 설비 가동 중단이 초래된다”며 “이는 공공기관의 횡포”라 주장했다.
법원은 중증장애인시설의 손을 들어줬다. 6월 17일 서울행정법원 행정8부(부장판사 이정희)는 집행정치 신청을 인용했다. 재판부는 업체들에 발생할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를 예방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또 “국가계약법상 중증장애인생산품 생산시설을 갖춘 사단법인 등에 대한 수의계약 제도의 취지와 의미 등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조달청은 법원 결정에 즉시 항고했다. 결과는 같았다. 서울고법 행정11부(부장판사 배준현)는 조달청의 즉시항고를 9월 1일 기각하고 원심의 인용 결정을 유지했다. 김 대표는 “군이 이렇게까지 수의계약을 줄이려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완제품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검사기준을 내놓으면 납품단가를 올려서라도 그것에 맞추려 노력해 볼 텐데, 단 1곳도 통과하지 못한 기준을 고수하고 있으니 어떻게 대처할지 막막하기만 하다”고 밝혔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1989년 서울 출생. 2016년부터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 4년 간 주간동아팀에서 세대 갈등, 젠더 갈등, 노동, 환경, IT, 스타트업, 블록체인 등 다양한 분야를 취재했습니다. 2020년 7월부터는 신동아팀 기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90년대 생은 아니지만, 그들에 가장 가까운 80년대 생으로 청년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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