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1월호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칠피공예가 박성규

  • 글·한경심 │한국문화평론가 사진·박해윤 기자

    입력2014-10-21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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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 돼지와 양가죽은 물론이고 다루기 어려운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해 기물을 만드는 칠피는 우리나라에만 있지만 일찍이 그 전통이 끊어졌다. 가죽에 칠하는 옻 배합 비율을 알아내는 데 평생을 바친 박성규(朴成圭·62)는 조선시대 중기 이후 사라진 칠피공예를 혼자 힘으로 되살려냈다.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박성규가 나타나기 전까지 사람들은 가죽에 옻칠하는 기술을 알지 못했다.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서 그가 진한 밤색으로 옻칠한 소가죽을 씌운 사각함을 출품했을 때, 사람들은 이런 기술이 있었던가, 하고 깜짝 놀랐다. 가죽 표면은 음각한 다음 검정에 가까운 짙은 색으로 연꽃당초문을 상감해 넣고, 가장자리는 붉은 색 실선을 둘러 품위를 더한 이 작품은 현대적인 멋까지 풍긴다. 처음 낸 작품이지만 문화부장관상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긴 역사를 자랑하는 옻칠은 동양에서 애용해온 도료다. 전통 목재 기물에 발라왔으니 가죽에 바른다고 뭐 별다른가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가죽에 옻칠하는 기법은 의외로 까다롭다고 한다.

    “가죽은 질기고 가볍지만 열과 습기에 약합니다. 열에 터지고 물 한 방울이 닿아도 얼룩이 지지요. 가죽에 옻칠을 해주면 열과 습기에 강해지고 곰팡이도 피지 않아 오래 보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옻칠을 잘못하면 오히려 가죽이 터지고 갈라집니다. 가죽에만 맞는 옻 배합 방식이 따로 있답니다.”

    옻은 물과 불, 공기를 빼고 세상 어느 물질에도 다 칠할 수 있다는 만능 도료지만 가죽에 옻이 잘 스며들도록 칠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그렇게 까다롭기 때문인지 가죽에 옻칠해 만드는 칠피공예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대 유물 외에는 남은 게 없고,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유물이 남아 있을 만큼 칠피공예가 발전한 흔적이 있으나 그것도 조선시대 중기에서 멈추고 만다.

    칠피공예의 맥이 이렇듯 일찍 끊어져버리면서 가죽에 바르는 옻의 배합 비율 역시 알 수 없게 된 것인데, 박성규의 한평생은 한마디로 그 배합 비율을 찾는 여정이었다. 마치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과제에 몰두하듯 그는 수수께끼로 남은 옻 배합의 비밀을 풀기 위해 가죽과 옻에 매달렸고, 마침내 그 비법을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나전칠기 상감 기술이 바탕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주칠한 철갑상어의 돌기가 돋보이는 옥새함. 철갑상어 가죽은 붙이기가 어렵다.

    1952년 전북 익산시 함라면에서 태어난 그는 그 연배 장인들처럼 10대 중반에 처음 공예의 길로 들어섰다. 고향에서 가까운 도시 이리(현 익산시)까지 통학하며 중학교를 마쳤지만 직장을 못 구한 그에게 한동네 사는 아주머니가 일자리를 소개했다.

    “아주머니를 따라간 곳은 장롱 짜는 ‘농방’이었습니다. 기술도 배우고 용돈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갔는데, 용돈은커녕 집에 갈 차비조차 없어서 농방에서 먹고 잤지요.”

    기술도 처음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공방의 도제식 교육이 그렇듯 처음 한동안은 연탄불 갈고 청소하는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혼수용 장롱이 잘 팔리던 때라 농방은 규모가 꽤 커서 가구 형태를 짜는 백골반과 농에 붙일 자개를 자르고 붙이는 나전반, 칠반이 따로 있었다. 그는 나전반 소속이었다. 지금 그가 가죽에 자개를 상감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데는 이때 배운 기술이 바탕이 됐다.

    우리 나전칠기 상감법은 그냥 기물 표면을 파서 자개를 박아 넣는 중국의 상감법과 달리 상감한 위에 옻칠을 새로 한 다음 표면을 곱게 갈아낸다. 그가 가죽 작품에 자개를 상감할 때도 나전칠기와 마찬가지로 가죽을 파서 자개를 새겨 넣고 옻칠한 다음 갈아낸다. 그래서 언뜻 보면 나전칠기와 구별하기 힘들다. 다만 나전칠기처럼 번쩍거리지 않고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

    자신의 기술에 대해서는 언제나 ‘재능보다 노력’을 내세우는 그이지만 이리 농방에서는 최고 솜씨로 여기저기 오라는 데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스무 살이 가까워올 때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와서 몸담은 곳은 상패를 제작하는 공방이 많이 모여 있던 종로통의 한 공방이었다.

    “서울에 오니 솜씨 좋은 친구가 수두룩하더군요. 제가 일한 곳에서는 완성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문양대로 자개를 오려 붙여주는 일만 했어요. 주로 글씨를 오려 붙이는 일이었지요.”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주칠한 소가죽에 통영 자연산 전복 껍데기를 상감한 이층농. 자개 빛이 신비할 정도로 은은하고 아름답다.



    그런데 1년 정도 일을 해보니 그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글씨를 오려 붙이는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는 것이 그의 탐구심과 창의력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곧 농방거리로 유명한 삼양동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뒤로도 여러 농방을 거치면서 나전은 물론이고 옻칠까지 하게 됐다.

    “서울에서는 월급도 받고 휴일도 있으니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할 여유가 있었지요. 저는 지금도 전문 분야인 공예품뿐 아니라 모든 것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길 좋아해요.”

    타고난 호기심과 관찰력이 그의 가장 큰 자산이라 할 수 있는데, 호기심은 그가 가죽 옻칠 배합 비율을 알아내는 일에 도전하게 만들었고, 관찰력은 유물을 몇 번 보고 똑같이 재현하는 눈썰미를 갖추게 했다. 그의 자산은 또 있다. 바로 끈기다. 한 기술을 완전히 알아낼 때까지 가난과 무명의 설움조차 밀어낼 수 있는 고집과 집중력, 끝없이 시험하고 시도하게 하는 힘.

    그는 휴일이면 박물관이나 인사동 등을 돌아다니며 많은 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물건을 만난다.

    “큰 007가방 같은 모양인데,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고 아마 옛날 평민들이 썼던 것 같아요. 오래돼 가죽이 딱딱하게 굳어 오므라들고 모서리는 뒤틀린 것이었습니다. 칠도 제대로 안 된 것이었지요.”

    비록 뛰어난 작품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이런 가죽 작품을 오늘날에도 만드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알아보게 됐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스스로 해볼 수밖에.

    “가죽에 옻칠을 하면 속에서부터 먹어들어 서서히 빛깔이 나와야 하는데, 잘 먹질 않더군요. 나무에 하듯 해보면 가죽이 갈라지고요. 나중에는 구두공장에 가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어요. 구두에 옻칠을 하면 방수가 되니 좋을 것 같아 해봤더니, 접히는 부분이 꺾어지고 갈라지더군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시중에서 거래되는 가죽은 부패를 막기 위해 어마어마한 양의 화학약품으로 처리하고 방수효과를 높이기 위해 코팅제까지 발라놓아 옻이 흡수도 안 될 뿐 아니라 코팅제가 산성이어서 알칼리성인 옻을 칠하면 색깔이 칙칙하게 변하고 만다. 이런 시행착오를 거치긴 했지만 구두공장에서 얻은 수확은 있었다. 붓통 같은 상품을 디자인해서 만들어보았고, 무엇보다 가죽을 어디서 구하는지 알게 되어 가죽의 기름기를 빼는 데 화학 처리를 하지 않은 가죽을 주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철갑상어 가죽의 ‘성질’을 바꾸다

    “가죽의 기름을 빼지 않으면 장구나 북 가죽처럼 딱딱해집니다. 악기에 쓰는 가죽은 큰 지방만 긁어내고 기름기는 그대로 두어야 공기가 차단돼 좋지만 공예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름기를 제거해야 하는데, 저는 가죽공장에 특별히 천연잿물로 빼달라고 주문하지요.”

    큰 통에 가죽을 몇 천 장씩 넣고 기름기를 제거하는 공장으로서는 기껏해야 몇 백 장을, 그것도 천연잿물로 해달라는 그의 요구가 반가울 리 없다. 하지만 오랫동안 거래해온 인연으로 공장에서는 그의 주문대로 좋은 가죽을 대준다고 한다. 기름기를 제거하는 또 다른 전통 방식으로는 닭똥과 석회질, 잿물 등을 섞은 혼합물에 며칠씩 담가 지방질을 제거하고 쌀겨를 묻혀 부드럽게 말리는 법도 있다. 2007년 국새함을 제작할 때 철갑상어 가죽 기름은 이 번거로운 방법으로 뺐다고 한다.

    온 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각 분야의 장인 스물아홉 명이 참여한 국새 제작 때 그가 맡은 일은 국새를 담는 함(뒤웅이 모양)에 철갑상어 가죽을 입히는 것이었다. 40년 넘게 가죽과 씨름하며 이제 웬만한 가죽은 다 수월하게 다루게 된 그도 아직 철갑상어 가죽만큼은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고 고백한다.

    “철갑상어 가죽에는 작은 돌기가 오돌토돌 나 있는데, 단단하기가 철판 같습니다. 열에도 강하고 칼로 때려도 끄떡없고 화살도 뚫지 못해요. 그런데 가죽 자체는 기름기가 있어 수축력이 매우 강해 백골(칠을 하지 않은 뼈대 상태의 목기)에 붙이면 백골인 나무가 뒤틀리거나 가죽이 터지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그래서 붙이기가 매우 어렵지요.”

    짐승 가죽은 칠하기가 어렵고 어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철갑상어 가죽은 붙이기가 어렵다. 가죽을 백골에 붙일 때는 옻과 찹쌀 풀을 섞어 발라 붙이는데, 이 역시 매우 강력한 접착제다. 얌전한 소가죽은 한번 붙으면 떨어지는 법이 없지만, 철갑상어 가죽은 나무를 물고 오므라들어 나무가 뒤집힐 정도라고 한다. 단단한 접착제와 수축력 강한 가죽 사이에서 결국 나무가 결딴나고 마는 것이다. 국새함을 만들 때 큰 고생을 한 그는 이후로도 연구를 계속해 지금은 훨씬 수월하게 붙일 수 있는 ‘비결’을 터득했다고 귀띔한다. 비결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예 가죽의 성질을 바꾸었다”고 대답한다. 자세한 비법은 공개를 꺼리지만 지방을 잘 빼내고 두들겨서 부드럽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소가죽 황칠문서함(함부르크박물관 소장)을 재현한 작품. 연당초 문양과 어우러진 색감이 무척 아름답다.

    철갑상어 가죽을 쓸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튀어나온 돌기를 그대로 살려 쓰기도 하고 돌기를 사포로 깎아내 표면을 평평하게 만들고 대신 동그란 무늬를 얻기도 한다. 흔히 안경집에 쓰는 어피가 바로 돌기를 깎아낸 철갑상어 가죽이다. 국새함을 만들 때는 돌기를 그대로 살려 썼는데, 거기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강한 돌기는 함을 보호하는 힘이 있고, 또한 보기에도 웅장한 맛이 납니다. 그런데 함 전체를 가죽 한 장으로 둘러쌀 만큼 큰 가죽을 구하기가 참 힘들어요. 다행히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가죽을 대주는 이에게 부탁해 길이 1m가 좀 넘는 것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만든 국새함(22×22×27cm)은 아니지만 유물을 복원한 옥새함을 보니 주칠(붉은 옻칠)까지 더해져 돌기가 더욱 돋보여 강렬한 힘이 느껴진다. 돌기를 깎아낸 철갑상어 가죽은 예부터 안경집이나 퇴침, 서류함, 칼 손잡이 등에 많이 썼는데, 예전에는 우리나라에서 1m20cm짜리 철갑상어가 잡혔다는 기록이 있지만 요즘엔 기껏해야 45cm짜리밖에 안 나온다고 한다. 철갑상어라면 어쩐지 우리나라보다는 러시아 같은 외국산이 제격일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써온 어피는 다 우리나라 산인 데다, 수입품이라고 더 크고 괜찮은 것은 없다고 한다.

    ‘최고 재료’ 고집…황칠나무 발견하기도

    뚝심의 장인답게 박성규는 재료 하나에도 철저하다. 꼭 국산이나 유명한 것을 주장한다기보다 좋은 것, 순수한 것을 고르는 것 같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무슨 재료든 어디서 생산되고 어떻게 유통되는지 속속들이 꿰고 있다는 사실. 그의 탐구심은 이런 데서도 발휘되는 모양이다. 그의 집 거실에 있는 붉은빛 소가죽을 씌운 이층농에 박은 자개가 오색영롱한 여느 자개장과 달리 은은하면서 하도 신비한 색깔을 내기에 무슨 자개냐고 물었더니 통영 바닷가 전복 껍데기를 썼다고 한다.

    “요즘은 자연산 대신 양식 전복을 많이들 쓰지요. 하지만 해녀가 딴 자연산 전복 빛깔이 제일 좋아요. 그런데 자연산은 바다가 오염된 탓인지 구멍이 많이 나 있어요. 또 우리 공예인이 쓸 전복은 좀 자란 것이 크고 빛깔도 좋은데, 사람들은 연한 어린 전복을 자라기도 전에 즐겨 먹어 큰 걸 구하기 힘듭니다.”

    통영에는 그를 위해 좋은 자연산 전복 껍데기만 골라 모아놓는 사람이 있다. 좋은 것은 가격이 세 배 이상 비싸지만 그는 언제나 최고 좋은 재료만 고집한다. 어차피 작품을 팔아 생계를 꾸리는 게 아니므로 수지를 맞추기 위해 싼 재료를 찾을 필요는 없다. 옻 역시 마찬가지다. 옻 정제기술이 뛰어난 일본산 정제 옻은 소반이나 나전칠기의 목심(옻을 칠하는 대상 재료가 나무라는 뜻)에 칠하면 별 상관없지만 가죽에 칠하면 가죽이 다 갈라진다. 그는 언제나 국산 생옻으로 칠한다.

    “일본은 우리 옻을 사다 정제해서 우리에게 되팝니다. 우리 옻이 좋거든요. 요즘은 중국에서 옻을 싸게 사들이지만요. 우리 옻은 중부지방 위 것이 좋은데 남한에서는 강원도 원주, 북한에서는 평안북도 태천 옻을 알아줍니다. 옻은 복날에 채취해야 가장 좋은데, 그렇게 좋은 옻을 구해오다 최근 그곳에 조합이 생겨 모든 옻을 뒤섞어 팔고 있어요.”

    좋은 옻만 골라 팔면 결국 안 좋은 것만 남으니 조합에서 그러는 거라고 이해는 하지만 장인은 못내 서운한 눈치다. 그의 탐구심은 사라진 재료를 재발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공예에서 누런색을 내는 황칠 역시 재료조차 구할 수 없는 사라진 공예였는데, 1989년 정명호 동국대교수(고고미술사·현재는 퇴임)가 고서를 읽다가 우연히 우리나라에서도 귀해 잘 쓰지 못하고 중국 황실에 서 말씩 보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그 책에는 황칠 재료를 얻을 수 있는 나무가 남해 끝자락 섬 지방에서 자라는 상록수라며 이파리가 그려져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없었지요. 정 교수와 칠장인 홍동화(뒤에 서울시 무형문화재 황칠장이 됐다)와 그의 친구, 저 이렇게 넷이 이파리 그림만 가지고 완도와 보길도로 내려갔습니다.”

    섬사람들에게 이파리 그림을 보여주어도 아는 사람이 없어 결국 산을 헤매고 다녔는데, 입산 금지한 산에 들어가기 위해 도에 가서 통행증을 끊어 와야 했고, 길도 없고 온갖 수종이 뒤섞인 산에서 이파리 그림만 가지고 찾기가 어려워 다른 나무는 잎이 다 떨어진 겨울에 와 찾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그러기를 몇 계절, 보길도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그림 속 이파리와 똑같은 이파리를 가진 나무를 만났다. 그 나무 이름은 참 싱겁게도 ‘황칠나무’였다.

    “알고 보니 전남대 수목원에서 2000~3000그루를 꺾꽂이하더군요. 상록수니 가로수나 정원수로 쓸 요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들은 황칠이 뭔지 몰랐고, 공예 전문가들은 나무를 몰라 생긴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귀했던 황칠나무는 수액 가격이 작은 사진필름 통 하나 정도의 양에 10만 원 했는데, 최근엔 전남 전역에 널리 퍼질 정도로 인기가 많아 가격도 내려갔다. 이제 사람들이 황칠의 가치를 안 건가.

    “황칠나무가 간에 좋고 혈압도 떨어뜨린다는 정보가 퍼져 농부들이 너도나도 심게 된 거랍니다. 도에서도 보호수로 지정하고 나무 씨앗을 널리 보급해 이제는 황칠나무 수액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됐지요.”

    그렇게 힘들게 구한 황칠 수액으로 그는 함부르크 박물관에 소장된 아름다운 황칠문서함을 재현해냈다.

    일본 제안 거절한 까닭

    철갑상어 가죽에 옻칠하는 세계 유일 칠피(漆皮) 전문가

    상품으로 개발한 찻잔과 접시. 소가죽에 옻칠하면 속심을 넣지 않아도 단단하다. 옻칠한 가죽으로 주전자도 만들 수 있다.

    칠피에 관한 한 세계 유일의 전문가가 됐지만 그는 무형문화재가 되지 못했다. 무형문화재에 칠피 분야가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잘 문화재 복원이나 수리 일을 맡는데, 옛사람의 솜씨와 기법을 배울 수 있어 문화재 다루는 일을 무척 좋아한다.

    “옛 유물 가운데 지금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난 기술로 만든 것이 있습니다. 현대는 판매를 위해 재료도 단가에 맞추어 고르지만 나라에 소속된 기술자들은 그런 걱정 없이 오직 자기 솜씨를 최대한 발휘해서 그렇게 좋은 것을 만들어낸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에 피전(皮田)공방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우리나라 가죽공예의 역사는 무척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물로는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가 그려진 다래(장니·障泥, 말안장 아래 늘어뜨리는 진흙받이)를 들 수 있다. 자작나무로 만든 이 다래 가장자리를 두른 테가 바로 옻칠한 가죽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유물로는 임진왜란 때 활약한 최문병 의병장의 말안장이 있다. 보물로 지정된 이 안장은 다래가 걸리는 안장자리 역시 가죽으로 돼 있다. 소뼈로 매화문양을 아름답게 박아 넣은 이 안장은 조선시대 중기까지 가죽공예가 얼마나 섬세하게 발달해왔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후 칠피의 흔적은 안타깝게도 끊어지고 만다. 무형문화재에 칠피 분야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한번은 일본인이 배우겠다고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한국을 소개한 책자에 가죽에 옻칠하는 공예가 있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해서 저를 찾아왔다더군요. 하도 가르쳐달라고 사정하기에 제가 가르쳐준 적이 있어요.”

    한국 사람들은 오히려 배우겠다고 왔다가도 일주일을 채 넘기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제자를 받지 않는다. 대신 대학에서 문화재관리를 전공한 딸이 그의 뒤를 잇는다. 그의 솜씨를 일찍이 알아본 곳은 일본이다. 그래서 높은 보수를 줄 테니 일본에 와서 일해달라는 부탁도 받았지만 거절했단다.

    “아내는 딱 3년만 있다 오자고 했지만, 일본 공예를 보고 오면 아무래도 저의 감수성에 약간이라도 일본풍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거절했지요.”

    비록 아직은 무형문화재에 칠피 분야가 없지만 1999년 기능전수자가 됐으니 뒷날 문화재가 될 가능성도 크다. 2006년에는 칠피 명장이 됐고, 2007년 국새 제작에도 참여했을 정도로 그의 실력은 이미 공인된 바다. 문화재가 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그가 세상에 칠피를 알린 것이 너무 늦은 탓도 있다.

    “전승공예대전에 미리 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걸 몰랐습니다. 제가 좋아서 하는 일,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요. 그래서 저처럼 혼자서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공모전에 출품해 자신을 알리라고 열심히 충고합니다.”

    유성룡 가죽갑옷 재현 중

    예술가와 작품은 모름지기 세상 사람이 알아주어야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1992년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해 문화부장관상을 타고 이듬해는 적갈색으로 옻칠한 양가죽을 손으로 두들겨 문양을 내는 타출(打出)기법으로 연당초문을 돋을새김한 아주 세련된 문서함으로 문화재관리국장상, 그리고 이듬해는 일본 보물로 도쿄박물관에 소장된 고려경함을 가죽을 씌워 재현해내 문예진흥원장상까지 굵직한 상을 연이어 탔다. 이 고려경함은 황동선을 꼬아 테두리에 얇은 선을 두르고 자개와 얇은 황동판을 잘라 국화문을 상감한 것으로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는 지금도 내년 전승공예대전에 출품할 작품을 만드는 중이다.

    그가 또 하나 염두에 두는 것은 가죽갑옷이다. 서애 유성룡이 입었던 갑옷을 재현하는 중인데 옻칠한 소가죽 조각을 녹피(사슴가죽) 끈으로 엮은 이 갑옷은 완성하면 육군사관학교에서 사가겠다고 벼르는데, 지금 다른 일에 밀려 잠시 손을 놓았다.

    “하회마을 유성룡 선생 고택에서 이 갑옷을 봤는데 많이 손상돼 있어 제가 수리하겠다고 했더니 거절하시더군요. 그런데 그 뒤 다시 가봤더니 아예 보이질 않았습디다. 더 망가지지 않았는지 안타깝습니다.”

    이미 소가죽 조각을 크기대로 다 잘라서 임시로 엮어둔 이 갑옷은 미완성 상태인데도 아름답고 멋지다. 이 갑옷이 완성되는 날, 이 세상에 걸작이 또 하나 탄생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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