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재임 당시 백악관 인턴사원이던 르윈스키와 부적절한 성관계로 탄핵 위기에 몰렸지만 ‘도덕적 문제가 있었지만 범죄행위라고 보기 어렵다’며 상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재선에도 성공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도 선거운동 때, 그리고 대통령이 된 후에도 과거 스캔들이 잇따라 폭로되며 전 세계 뉴스거리가 됐지만 탄핵되지는 않았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땠을까.
우리 사회에서 ‘미투’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그 양상을 보면 사생활과 그 사람의 능력이 구분되지 않고, 성적인 행동을 피해자와 가해자로만 나누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치 중세 시대 마녀사냥처럼 성적인 행동 하나를 과대 포장해 해석하고, 도덕적인 잣대만 들이대서 사회적으로 생매장시킨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선진국은 개인의 사생활과 그 사람의 능력을 구분해 판단한다. 외도를 하든, 이혼을 하든 그것은 그 사람의 사생활이다. 용서를 하든, 이해를 하든 그것은 그 사람 배우자의 몫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사생활로 그 사람의 능력까지 끌어내리는지 모르겠다.
대한민국에서는 ‘성’이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그 사람을 협박할 도구, 돈을 요구하는 도구, 직장에서 해고할 도구, 정치적으로 파멸시킬 도구, 드라마에서 중도하차하게 할 도구로 사용된다. ‘성’을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사람을 파괴시키는 도구로 사용한다. 이런 문화에서 남녀의 자유로운 연애 감정이 생길 수 있을까? 안 좋게 헤어지면 바로 도덕적인 잣대로 사회에서 생매장당하게 되는데, 남자가 여자에게 대시할 수 있을까? 안 주고 안 받는 관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테스토스테론이 왕성하게 분비되는 남녀가 그 호르몬을 억제하면 폭력, 일중독, 알코올중독, 히스테리, 분노조절장애 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또 어떻게 해결할까?
지금 대한민국은 성적 과도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선 유교 사회가 끝난 지 벌써 100년이 넘었다. 다른 나라들은 성적인 자율성을 인정하는 추세인데 왜 우리는 여전히 남녀 관계를 폭력, 범죄로만 생각할까? 모든 남녀의 행동을 범죄적 시각에서 도덕적인 잣대로만 재는 것은 결국 피해자와 가해자만 만드는 꼴이 된다.
물론 성관계에 폭력이 끼어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 권력을 남용해서도 더더욱 안 된다. 강간이나 성폭력은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합의가 된 모든 성적 행동을 도덕의 잣대로 재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어떤 목적에 따라 피해자, 가해자가 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 판단은 국민이나 법원, 기자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이 힘들면 다른 전문기관이 공정하게 판단해주면 된다. 이때도 두 사람의 신분이 노출돼선 안 된다. 일반인에게는 재미있는 가십거리겠지만 당사자, 특히 가정을 가진 사람이나 그 배우자, 자식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없는 치명적 상처가 되기 때문이다. 성은 인간에게 행복을 주고, 사람을 살리는 도구로 활용돼야 한다. 성의 자기결정권이 자유롭고 여유롭게 행사돼야 한다.
성도 배워야 한다
연인이 헤어지고, 부부가 이혼하는 이유 중에는 ‘성(性, 섹스)’이 안 맞아서인 경우가 적지 않다. 반대로 성이 잘 맞으면 다른 부분은 참고 살 수 있다. 이렇게 중요한 ‘성’을 본능에만 의존 하려는 이도 많다. 본능에만 의존해서는 상대방과 제대로 된 성 교감을 나누는 게 쉽지 않다. 영어나 테니스, 피아노처럼 ‘성’도 배워야 한다. 교육을 통해 그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다. 소녀경이나 카마수트라는 대표적인 성교육 책이다. 그렇게 예전에도 중국 황제나 인도 귀족은 성교육을 받았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걸을 수 없는 것처럼 처음부터 성을 아는 사람은 없다. 성 에티켓, 남녀가 소통하는 방법, 남자와 여자를 이해하는 방법,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 오르가슴을 얻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성은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활용할 수 있다. 한번 배우면 평생 써먹을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성’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제대로 가르쳐주는 곳을 찾기도 쉽지 않다. 필자가 15년 넘게 성을 연구하고 성교육에 천착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오르가슴을 느끼는 남녀는 느긋하고 여유로워진다. 남에게 관대하고 친절하고 화를 내지 않는다. 성을 억압하고 무시하고 죄악시하면 가정과 사회는 쉽게 화가 나고 신경질적이 되고 각박하고 여유가 없어진다. 우리 사회가 성을 처벌의 도구가 아닌 치유의 도구로 사용했으면 한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관대하다. 우리 사회는 자신의 사생활을 억압하기 때문에 남의 사생활에 관대하지 못하다. 신이 인간에게 성이라는 선물을 주었는데, 어떤 사회에서는 처벌의 도구로 쓰고, 어떤 사회에서는 치유의 도구로 사용한다. 우리의 문화도 성을 치유의 도구로 사용하기를 바란다.
박혜성
● 전남대 의대 졸업, 동 대학원 석·박사
● 경기도 동두천 해성산부인과 원장
● 대한성학회 이사
● (사)행복한 성 이사장
● 저서 : 우리가 잘 몰랐던 사랑의 기술, 굿바이 섹스리스
● 팟캐스트 ‘고수들의 성 아카데미’ ‘박혜성의 행복한 성’ ‘이색기저섹끼’ 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