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호

민주유공자 예우법? 친구들아, 이제 그만하자 [민경우 586칼럼②]

“586은 민주화 역할 과장 말라…공정·상식의 민주주의 위해 싸울 것”

  • 민경우 민경우수학교육연구소 소장 mkw1972@hanmail.net

    입력2020-10-13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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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이던 나도 예우법 대상

    • 1997년 안기부 연행…고문 걱정에 혀 깨무는 연습

    • 실제는 증거 입각한 수사, 민주주의 충분히 발전

    • ‘검찰이 흉계 꾸민다’는 운동권 동료들의 궤변

    • ‘민주화’ 명분으로 자행되는 불의와 싸울 것!

    * 586세대 NL(민족해방 계열) 이론가이자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사무처장 출신인 필자가 문재인 시대에 표하는 유감.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 7월 3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학생과 시민 등 1만5000여 명이 참석한 시국대토론회가 열렸다. [동아DB]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 7월 3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학생과 시민 등 1만5000여 명이 참석한 시국대토론회가 열렸다. [동아DB]

    9월 23일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했다. 이 법안이 통과하면 공기업·사기업 취업 시 유공자 본인 혹은 민주화운동 중 사망한 자의 자녀는 10%, 민주화운동 중 부상당한 자의 자녀는 5%의 가산점을 받는다. 동점이면 법안 대상자가 우선 합격된다. 유공자나 가족은 중·고교와 대학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다. 법이 정한 교육기관은 입학 정원에서 일정 비율로 이들을 선발해야 한다. 의료비 감면 혜택도 있다. 상환 기한이 20년인 주택담보대출도 받을 수 있다. 공공·민영주택도 우선 공급받는다. 

    법안에는 20명의 의원이 공동 발의자로 참여했다. 공동 발의자에는 민주당의 박홍근, 신정훈, 우상호, 정청래, 윤미향 의원 등이 이름을 올렸다. 어쩌면 나도 민주유공자 예우법의 대상자일지 모른다. 지금부터 나와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나는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당시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이었다. 1984~85년 즈음부터 1980년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저항이 시작됐다. 우리는 수업을 작파(作破)하고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강의실 밖으로 나섰다. 1987년 대통령선거를 직선제로 치러야 한다며 권력에 날을 세웠다.

    우리의 역할 과장하지 말자

    9월 23일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과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같은 당 우상호 의원. 사진은 두 사람이 2017년 5월 16일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 뒤 악수하는 모습.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9월 23일 ‘민주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대표 발의한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과 공동발의자로 이름을 올린 같은 당 우상호 의원. 사진은 두 사람이 2017년 5월 16일 민주당 원내대표 경선 뒤 악수하는 모습. [최혁중 동아일보 기자]

    우리는 간혹 또는 자주 경찰에게 맞았다. 구속도 피할 수 없었다. 더 끔찍한 일도 있었다. 1986년 하반기~1987년 상반기 민주화운동의 변곡점에서 김근태와 문용식, 권인숙, 박종철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박종철(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은 친구였다. 당시 우리는 가명을 썼다. 박종철의 영정(影幀)을 보고서야 그가 나와 함께 수업을 듣던 친구임을 알았다. 



    민주화운동이 정점으로 치닫던 1987년 6월 중순의 어느 날. 나는 내가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시위가 한창이던 서울 어느 거리에서 나는 (또는 우리는) 죽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고 결심했다. 돌이켜 보면 용감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 거리에서 내가 586 당신들과 함께였음을 자랑스럽게 기억한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에서 우리가 한 역할을 과장하지 말자. 연이어 대통령이 되는 김영삼·김대중 ‘양김’ 씨의 공로가 컸고, 교정을 넘어서면 우리의 시위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성과를 공정히 평가하고 그들과 나눠야 한다.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지나치게 오래 반복적으로 기억되고 있다. 우리 다음 세대에 대한 배려는 사라졌다. 그들 중 상당수는 1987년 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것이 ‘586만의 리그’를 구축하기 위함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이제 민주화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주객이 전도되고 스토리가 과장됐다. 그 틈을 비집고 민주화와 별 상관이 없는 너무 많은 사람이 끼어들었다. 이제 그만해라.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이 끝난 뒤 많은 사람이 제도권에 진입했다. 현재 범여권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법 제정을 주장하는 사람 대부분이 그에 속한다. 몇몇 사람은 제도권에 가기를 거부하고 혁명과 통일을 위해 1987년 이후에도 학생 시절처럼 살았다. 나는 그중 한 사람이다. 


    시간 있을 때마다 혀 깨무는 연습

    1985년 8월 15일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실에서 열린 ‘광복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영삼(왼쪽), 김대중 전 대통령.

    1985년 8월 15일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실에서 열린 ‘광복 4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김영삼(왼쪽), 김대중 전 대통령.

    1997년.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이던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 연행됐다. 법원에서 징역 3년 6월을 선고받고 2년을 복역한 뒤 사면복권으로 출소했다. 안기부에 연행됐을 때 고문을 염려했다. 시간 있을 때마다 혀 깨무는 연습을 하곤 했다. 1985~86년 김근태와 박종철에게 가해진 고문의 기억 때문이다. 

    안기부에서의 20일은 다소 허무하게 끝났다. 안기부는 내가 쓴 문건, 내가 한 발언과 통화 등을 확인하는 데 주력했다. 안기부 수사의 핵심은 팩트(fact)였다. 그들은 나에게서 무언가를 캐내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자신들이 수집한 자료와 나의 발언을 대조하는 데 주된 관심을 뒀다.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안기부에서 20일을 보낸 뒤 서울구치소로 향할 때 본 강남의 밤거리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고문과 폭정의 화신’ 안기부는 내 마음속에서 그렇게 한 시대를 마감했다. 팩트와 증거에 입각한 수사와 재판, 내가 하지도 않은 일까지 책임지지 않아도 될 자유, 어쩌면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의 핵심이었다. 나는 넓고 깊게 발전한 한국 민주주의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검찰 조사 과정도 유사했다. 나는 동일 사건으로 2003년 구속돼 총 2번에 걸쳐 60일간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 조사는 사무적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수사기관으로부터 넘겨받은 자료를 검증하는 것이 전부였다. 얼마간 미진하거나 내가 적극적으로 부인하면 논쟁을 벌이기보다 그것을 공소장에서 제외했다. 그들 또한 그냥 팩트를 보려 애썼을 뿐이었다. 

    1987년을 기점으로 1998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는 시점까지 한국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 그 1차 무대가 공안기관이었다. 나는 1997년, 2003년 이른바 ‘시국사범’이 사라진 시대에 공안기관의 변화를 경험한 특이한 사례였다. 

    조국 사태로 이런저런 논란이 일었다. 같이 운동했던 동료들도 검찰이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둥의 이야기를 했다. 적어도 내가 경험한 바로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다. 조사-공소-재판 과정 전체를 좌우하는 핵심은 팩트다. 그 과정의 골간을 이루는 검찰 공소장에서 팩트가 흔들리면 모든 게 무너진다. 검찰 공소장 내용은 거의 팩트 그대로다. 외려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검찰이 아닌 정치인들이다. 

    조국 사태에 이어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둘러싼 논란을 겪으며 한국 민주주의가 확보했던 건강성은 송두리째 사라졌다. 검찰 공소장이 정치적 영향을 받지 않은 팩트 그대로의 문서라는 믿음은 증발했다. 나는 다시 1987년 6월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왔다.

    ‘높은 사람 모르냐’ 묻던 청년

    2010년경 어느 날 아는 청년에게서 전화가 왔다. 녀석은 내게 “민주화운동 했으니 높은 사람 중 아는 사람 없느냐” 물었다. 그러고는 푸념처럼 군대를 빼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학원을 하면서 종종 그런 일을 겪는다. 심지어 남자 고등학생들이 벌써부터 군 입대 걱정을 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본다. 

    586도 직장을 갖고 아이를 낳았다. 40~50대가 되면서 누구는 돈을 많이 벌고 또 다른 누구는 어려운 일도 당했다. 개중에는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 모두가 공유한 신념은 있었다. “군대는 누구나 가야 하고 진학은 공정해야 한다.” 민주화 세대가 사회의 주역이 되면 이 원칙만은 흔들리지 않으리라 봤다. 

    청년은 서울대를 나온 내 주변에 군대를 빼줄만한 고위층 지인이 있지 않을까 싶었을지 모른다. 그런 청년도 또 나도 실제 군대를 뺄 수 있다 생각하진 않았다. 단지 넋두리처럼 대화했을 뿐이다. 나와 청년 모두 한국 민주주의가 특권과 편법을 허용하지 않는 수준까지 발전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결국 청년은 군대에 갔고 무사히 전역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나는 믿기지 않는 장면을 목도했다. 누군가의 아들은 정말 군대를 뺄 수 있고, 또 다른 누군가의 아들은 카카오톡으로 휴가를 연장할 수 있었다. 

    586 당신들은 납득이 되는가? 문서를 위조하고 공금을 횡령하고 지위를 악용해 성추행을 했다는 의혹에 휩싸인 게 용납이 되는가? 조국, 윤미향, 박원순을 둘러싼 논란이 이해가 되는가? 국회 대정부질문에 임하는 추미애의 행태가 정말 마음속으로 이해가 되는가? 여전히 당신들의 마음속에서 아직도 윤미향이 동지란 말인가? 

    나는 아직 1987년 6월의 거리 위에 있다. 꽃다운 청년들이 아름답게 싸웠던 그 거리에 다시 서서 나는 민주화를 기념한다는 명분하에 자행되는 불의와 협잡에 반대한다. 민주와 정의를 외치는 자들이 민주주의를 더럽히는 일을 지켜보지 않을 것이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 싸우겠다.


    민경우
    ● 1965년 출생
    ●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 서울대 인문대 학생회장
    ● 조국통일범민족연합 사무처장·진보연대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 저서 : ‘수학 공부의 재구성’ ‘새로운 보수의 아이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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