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영화감독 한 사람의 능력으로 영화가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감독의 역할은 모든 작업을 수행하는 만능 재주꾼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능력을 작품에 담아내는 조합과 총화의 기능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봤을 때 한국의 영화 현장에서 감독의 개념은 잘못 인식돼왔다. 이런 잘못된 인식은 감독이 신성화되고 권력화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과거 충무로에서는 예술적 비전이나 연출력과는 무관하게 현장을 장악하는 능력, 그 우월적인 지위에서 오는 맹목적인 권위로 감독을 수행하는 이들이 다수를 이루기도 했다. 이는 파시즘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최근 한국영화계에 등장한 감독(작가)들은 이런 왜곡된 인식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든 장인이든 혹은 철저하게 시스템의 의해 활용되는 고용인이든 감독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을 구분 짓는 것은 최종 결과물에 드러난 감독 자신의 비전이지, 외적인 모습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감독의 역할 또한 시대에 따라 변동을 겪었다. 감독은 한 편의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전과정에 관여해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는 유일한 사람이다. 시나리오 단계부터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와 호흡을 맞춰야 한다. 과거 충무로에는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써서 연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감독이 프로젝트에 따라 고용되는 경우가 많고, 별개의 직업작가군이 생겨나는 추세다. 따라서 작가와의 의견 조율은 감독이 수행해야 할 중요한 역할로 떠오르고 있다.
때로는 프로듀서의 마인드로 제작 전반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주어진 제작비, 조건 안에서 최고 완성도의 작품을 뽑아내는 것이 곧 감독의 능력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또한 감독은 사전제작 단계에서 캐스팅에 관여하고 시나리오를 어떻게 시각화할 것인가에 대해 담당 스태프들과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 이 시기에 감독은 촬영감독, 프로덕션 디자이너, CG를 담당하는 슈퍼바이저 등과 함께 촬영 장소 헌팅, 조명과 카메라의 운용, CG, 효과 등을 치밀하게 계획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배우들과의 작업이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감독은 배우들과 함께 작품 및 캐릭터 분석을 통해 작품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야 한다. 촬영은 경제적인 문제, 촬영 장소의 문제, 배우들의 일정 문제 등으로 인해 차질이 생길 때가 많으므로 감독은 늘 합리적인 스케줄을 짠 후 제작진들에게 전달해야 한다. 후반작업 단계에서는 편집기사와 편집을 함께한다. 편집과 색보정, 녹음, 음악 등 후반작업의 전공정에 감독은 최종적인 결정권자로서 관여해 작품을 완성한다.
상업영화는 예술영화의 토대
영화감독들이 각광받고 있지만 영화계 안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과도기다. 영화배우 한석규의 매니저이자 영화사 힘픽처스의 대표인 한선규씨는 “영화산업이 만개하기 위해서는 감독의 역할이 보다 분명하게 규정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한 대표는 “한국영화계에는 자기 색깔을 내려는 작가 지망생은 많은데 프로페셔널한 직업감독은 드물다”고 지적한다. 근사한 상업영화를 만드는 기능인에 가까운 감독들과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을 만드는 신인감독들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얘기다.
해외에서 각광받는 것은 작가들의 예술영화이지만 날로 비대해져가는 영화산업을 이끄는 것은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상품들이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닥터 봉’ 등을 제작한 황기성 사단의 황기성 대표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가 공존하는 토양을 만들어야 한다”며 “상업영화가 없으면 예술영화도 없다. 산업을 이끄는 영화들은 예술영화들의 든든한 토대가 된다”고 지적한다. 영화산업이 튼실해지고 제작이 활성화될 때 비주류 영화가 설 땅도 넓어진다는 논리다. 요즘 충무로의 감독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 이런 종류의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충무로에서 감독이 중요한 존재로 부각된 것은 언제일까? 1980년대에 시작된 일련의 뉴 웨이브 운동 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의 뉴 웨이브는 서양이나 일본에 비한다면 한참 늦었지만 변화의 속도는 놀랄 만큼 빨랐다. 1980년대 초반은 뉴 웨이브 운동의 단초를 제공했다. 이장호와 배창호가 당대 최고의 흥행사로 대변되는 이 시기는 대중영화의 부흥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전기가 됐다.
뉴 웨이브가 일으킨 혁신적 변화
그후 본격적인 뉴 웨이브가 태동한 것은 사회 정치적 격변기였던 1980년대 말부터다. 박광수, 장선우, 박철수, 정지영, 이명세 등 1980년대 말에 등장한 젊은 감독들은 충무로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영화계에서 부동의 일인자로 군림하고 있는 강우석 감독 역시 1988년 ‘달콤한 신부들’로 데뷔하며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사회파라 불린 이들 젊은 감독들은 당대의 정치적 이슈들과 관련된 이야기를 현대적인 영화 언어로 그려냄으로써 폭압적인 정치 상황 속에서 침체를 벗지 못했던 한국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 시기 정치 의식의 성숙, 영화적 자각은 1990년대 찾아올 변화들의 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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