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구름이 몰려드는 도솔봉.
택리지를 집필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던 시절 이중환은 몰락한 사대부였다. 이중환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했던지 후세의 사가(史家)는 그의 귀양지마저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단지 택리지의 발문에 나오는 ‘떠돌아다니면서 살 집도 없어서’라는 문구를 통해 그의 말년이 ‘동가숙서가식’의 연속이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놀랍게도 그토록 비참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택리지는 완결성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사대부에 대한 유별난 자부심과 특정지역에 대한 지독스런 편견을 걸러낼 수만 있다면, 택리지는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조명될 만한 인문학 텍스트로서 손색이 없다.
짐승도 인간의 길로 다닌다
김정호의 생애는 더욱 초라했다. 평생 가난하고 신분마저 미천했던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당대의 실학자 최한기와 가까웠다는 사실 정도다. 다만 대동여지도의 치밀함으로 미루어 그가 한반도 구석구석을 수차례 답사했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야사에는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천기를 누설했다는 이유로 김정호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얘기도 전해지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태어나 무려 30년 동안이나 지도제작에 나섰던 고산자의 힘은 무엇일까?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한반도 남쪽의 고을을 바라볼 때마다 김정호의 열정에 고개를 숙이곤 한다.
6월19일 새벽. 충북 단양엔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단양역 대합실에 앉아서 잠시 유로2004 축구경기 중계방송을 보다가 택시를 잡아탔다. 기다린다고 그칠 비가 아니었던 탓이다. 세찬 빗줄기를 뚫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자니 택시기사는 꽤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몇 번이나 차를 세우고 방향을 살폈다. 그러고는 필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날도 좋지 않은데 단양유황온천에서 몸이나 푸는 게 어떠십니까?”
택시에서 내려 산길로 들어섰다. 거센 빗줄기에 밀려 나무와 풀이 등산로 쪽으로 비스듬히 누웠고, 덕분(?)에 필자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흥건히 젖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새벽길은 뭔가 신비로우면서도 두려운 느낌을 준다. 특히 비 내리는 새벽길은 묘한 긴장감까지 더해진다. 옥수수 잎을 타고 흐르는 굵은 물방울이 랜턴 불빛에 반짝이고, 돌덩이를 타고 넘치는 계곡물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빗물이 적신 자리에 차츰 땀이 흘러들어 빗물인지 땀방울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질 무렵 백두대간 주능선에 솟은 싸리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묘적봉(1148m)으로 가는 길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도솔봉(1314m)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적당한 곳에 앉아 구름이 이동하면서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절경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빗줄기가 워낙 세서 한곳에 오래 머물기가 힘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도솔봉 정상은 난코스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나무계단이 설치돼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도솔봉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의 경계인데, 백두대간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휘어져 나간다.
필자는 이곳에서 또다시 길을 잃었다. 지도가 빗물에 젖을까봐 갈림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느 정도 가다가 되돌아올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도솔봉 못미친 지점에서 필자를 지나쳐간 등산객이 저만치 앞에서 길을 열었고, 이따금 백두대간 표지가 나타났던 것. 필자는 그가 선택한 길이 맞겠거니 생각하고 천천히 그 뒤를 밟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에 새겨두었던 지도와는 다른 그림이 펼쳐졌다. 없던 계곡이 등장하고 한참 전에 지나친 도솔봉을 안내하는 표지판까지 서있다. ‘이 길이 아니구나’ 하고 발길을 되돌릴 무렵 먼저 내려간 등산객이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도솔봉에서 백두대간 주능선이 아닌 비상탈출로를 타고 하산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