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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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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풍 ‘디앤무’가 발목을 잡더니 장마전선이 발걸음을 버겁게 했다. 내쳐 걸으려 했지만 이번엔 태풍 ‘민들레’가 앞길을 막아섰다. 3주 내내 ‘우중산행’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속엔 또 다른 세상이 있었다. 어느 순간 구름 위에 섰다가 어느 순간 구름 아래로 가라앉는 신비로운 체험, 정상에 펼쳐진 초원지대와 아고산 식생대의 이국적인 정취는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비구름이 몰려드는 도솔봉.

백두대간 종주를 시작하면서 새롭게 주목하게 된 자료가 있다. 바로 청암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와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대동여지도’로 둘 다 조선후기에 완성됐다. 성리학이 점차 쇠퇴하고 실사구시의 학풍이 유행하던 시절, 두 사람이 내놓은 책과 지도는 한국 지리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물론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점이 있지만 지리학이 학문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시대에 순전히 다리품과 땀방울로 이루어낸 두 작품은 첨단기술로 무장한 디지털시대의 후학들을 놀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택리지를 집필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던 시절 이중환은 몰락한 사대부였다. 이중환의 신세가 얼마나 처량했던지 후세의 사가(史家)는 그의 귀양지마저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단지 택리지의 발문에 나오는 ‘떠돌아다니면서 살 집도 없어서’라는 문구를 통해 그의 말년이 ‘동가숙서가식’의 연속이었음을 짐작할 뿐이다. 놀랍게도 그토록 비참한 환경 속에서 탄생한 택리지는 완결성이 높다고 평가받는다. 사대부에 대한 유별난 자부심과 특정지역에 대한 지독스런 편견을 걸러낼 수만 있다면, 택리지는 오늘날에도 다양하게 조명될 만한 인문학 텍스트로서 손색이 없다.

짐승도 인간의 길로 다닌다

김정호의 생애는 더욱 초라했다. 평생 가난하고 신분마저 미천했던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은 당대의 실학자 최한기와 가까웠다는 사실 정도다. 다만 대동여지도의 치밀함으로 미루어 그가 한반도 구석구석을 수차례 답사했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야사에는 대동여지도를 만들어 천기를 누설했다는 이유로 김정호가 감옥에서 죽었다는 얘기도 전해지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먹고 살기도 힘든 세상에 태어나 무려 30년 동안이나 지도제작에 나섰던 고산자의 힘은 무엇일까? 백두대간 마루금에서 한반도 남쪽의 고을을 바라볼 때마다 김정호의 열정에 고개를 숙이곤 한다.



6월19일 새벽. 충북 단양엔 장대비가 퍼붓고 있었다. 일기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단양역 대합실에 앉아서 잠시 유로2004 축구경기 중계방송을 보다가 택시를 잡아탔다. 기다린다고 그칠 비가 아니었던 탓이다. 세찬 빗줄기를 뚫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자니 택시기사는 꽤나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몇 번이나 차를 세우고 방향을 살폈다. 그러고는 필자에게 넌지시 물었다. “날도 좋지 않은데 단양유황온천에서 몸이나 푸는 게 어떠십니까?”

택시에서 내려 산길로 들어섰다. 거센 빗줄기에 밀려 나무와 풀이 등산로 쪽으로 비스듬히 누웠고, 덕분(?)에 필자의 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흥건히 젖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도 걸어가지 않은 새벽길은 뭔가 신비로우면서도 두려운 느낌을 준다. 특히 비 내리는 새벽길은 묘한 긴장감까지 더해진다. 옥수수 잎을 타고 흐르는 굵은 물방울이 랜턴 불빛에 반짝이고, 돌덩이를 타고 넘치는 계곡물이 발걸음을 재촉한다. 빗물이 적신 자리에 차츰 땀이 흘러들어 빗물인지 땀방울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질 무렵 백두대간 주능선에 솟은 싸리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고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
싸리재부터는 걷기에 편안한 오솔길이다. 어느새 어둠은 걷히고 아침이 찾아왔다. 산등성이 위로 구름덩어리가 이러저리 몰려다녔다. 한참 구름의 흐름을 눈으로 쫓으며 내달리는데 코앞에서 산토끼가 필자와 같은 방향으로 뛰었다. 잠시 후 산토끼가 등산로에서 벗어나 수풀 속으로 숨어들자마자 10여 마리의 꿩이 푸드덕거리며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아침의 고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궂은 날씨에 산을 타다 보면 이렇듯 짐승들을 괴롭힐 때가 종종 있다. 짐승들도 되도록 편한 이동로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간의 등산로를 자주 이용한다. 산속에서는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짐승의 배설물이 등산로 주변에 집중적으로 분포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묘적봉(1148m)으로 가는 길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때우고 도솔봉(1314m)으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적당한 곳에 앉아 구름이 이동하면서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절경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빗줄기가 워낙 세서 한곳에 오래 머물기가 힘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도솔봉 정상은 난코스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엔 나무계단이 설치돼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도솔봉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의 경계인데, 백두대간은 이곳에서 왼쪽으로 휘어져 나간다.

필자는 이곳에서 또다시 길을 잃었다. 지도가 빗물에 젖을까봐 갈림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어느 정도 가다가 되돌아올 수도 있었겠지만,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도솔봉 못미친 지점에서 필자를 지나쳐간 등산객이 저만치 앞에서 길을 열었고, 이따금 백두대간 표지가 나타났던 것. 필자는 그가 선택한 길이 맞겠거니 생각하고 천천히 그 뒤를 밟았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머릿속에 새겨두었던 지도와는 다른 그림이 펼쳐졌다. 없던 계곡이 등장하고 한참 전에 지나친 도솔봉을 안내하는 표지판까지 서있다. ‘이 길이 아니구나’ 하고 발길을 되돌릴 무렵 먼저 내려간 등산객이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우리는 도솔봉에서 백두대간 주능선이 아닌 비상탈출로를 타고 하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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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육성철 국가인권위원회 공보담당 사무관 sixman@humanright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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