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시간 정도의 기도를 마치고 새벽담배를 피운다. 교회에서 내려와 점점 밝아오는 태양을 보면서,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새벽의 ‘본 모습’을 본다. 새벽은 내가 깨어야 할 나의 ‘자아’이며, 타인에 대한 ‘사랑’이고, 간절한 ‘기도’다. 그렇게 새벽은 깨어 있는 자들의 몫이다. 이제 아침이 오면 저 고요한 거리는 인파로 북적댈 것이다.
나는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면서 아침을 오게 하는 빛을 보았다. 그것은 예감이었고, 축복의 햇살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다른 공간에 살면서도 같은 시간을 품고 있으며, 그 시간의 경계선이 무너지는 곳에 가끔 가을날 감나무처럼 시가 서 있기도 하다. 새벽에서 아침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찰나다. 그 찰나에 정호승(鄭浩承·57) 시인은 서 있다.
슬픔을 위하여
슬픔을 이야기하지 말라.
오히려 슬픔의 새벽에 관하여 말하라.
첫아이를 사산한 그 여인에 대하여 기도하고
불빛 없는 창문을 두드리다 돌아간
그 청년의 애인을 위하여 기도하라
슬픔을 기다리며 사는 사람들의
새벽은 언제나 별들로 가득하다.
-시 ‘슬픔을 위하여’ 중에서
시인은 때론 간병으로 밤을 새우고 나와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는 여인의 모습으로, 우유 배달을 하기 위해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의 모습으로, 가끔은 청소부의 모습으로 새벽에 나타난다. 그를 본 적이 있는가? 독자는 어쩌면 그런 시인의 모습을 보고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정호승 시인은 기도한다.
기도하는 시인 정호승. 토요일 오후에 긴 이야기 자리를 벗어나 인사동 거리를 걸으면서 나는 정호승 시인을 ‘기도하는 인간’으로 보았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 나타났을 무렵엔, 분명 기도하는 인간들도 같은 땅 위에서 살았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이거나 혹은 우리가 분류해낼 수 없는 원시 인류로서 나는 ‘기도하는 인간’이 저 원시의 공간을 수만년 지배했을 것이라고 믿는다. 빙하기에 매머드나 주라기의 공룡과 같은 존재로서의 인류는 ‘기도하는 인간’인 거인이 지배했을 것이다. 선생의 단정하고 자그마한 체구, 그 몸 안에는 거인이 살고 있다. 큰 키에 대단한 몸을 가진 마음의 거인이 세상사의 자잘한 모습을 읽고 안타까워한다.
“선생님은 서정시인입니까?”
뜬금없이 서정시 이야기를 꺼냈다. 선생은 허허 웃으면서 서정이란 시의 본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면서, ‘나의 서정은 인간을 이야기하는 서정’이라고 부연 설명해주었다.
“꽃 하나를 보아도, 그 자연물 속에서 제가 보는 건 인간이지요. 저에게 다가오는 모든 상징이나 꽃과 별과 같은 자연물은 모두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매개물입니다. 시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고,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