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으로, 기꺼이 다락으로 숨어들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언니와 싸웠을 때, 무슨 일엔가 동생과 다툼을 벌이거나 할머니, 또는 어머니로부터 애꿎은 야단을 맞았을 때의 피난장소 역시 다락이었다.
어른들 앞에서는 차마 하지 못한 불평을 궁시렁거리면서 저 혼자 서러워서 훌쩍거리다가도 묵은 종이들을 뒤적이노라면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다 어느 결에 그 속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옥희처럼 다락에 숨었다 잠든 경험도 물론 있었지만 그럴 경우에도 누군가 나를 찾아냈던 기억은 없다. 그곳에서는 마음이, 머리가, 가슴이 열려 차분한 나른함에 빠지기 일쑤였지만, 두 개의 귀 또한 평소보다 예민해졌으므로 잠들었을 때조차 나는 바깥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다.
다락 한쪽, 손수건만한 창으로 들어오던 빛이 사위어가고, 누군가 나를 찾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아냈다. 옷가지나 사전 따위의 책, 달랑 사과 한 알 손에 들고는 방금 올라온 듯 다락을 내려오면, 어머니는 ‘그래봤자 다 안다’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셨다.
서울로 전학을 오고 그 집을 떠나면서 내게서 다락의 존재 또한 사라졌지만 나는 어디서나 그를 대체할 장소를 발견해내곤 했다. 집장수들이 한꺼번에 지은 똑같은 지붕과 똑같은 시멘트 마당이 있던 망원동 집에서는 부엌 뒤편이었고, 중학교 때 잠깐 살았던 신당동의 2층 양옥에서는 등나무 뒤쪽의 움푹 들어간 그늘진 장소였으며, 서교동 집에서는 2층 베란다 한쪽 구석이었으며, 동교동에서는 김장독이 묻혀 있던 뒤란이었다.
그 장소들은 모두 어둡고 다소 음습하고 조용했다. 집안 곳곳에 부는 바람도 그곳에서는 슬쩍 방향을 틀어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안아줬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 생각하고 생각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살아갈수록 그런 일이 늘어만 간다는 것, 그럼에도 열심히 생각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그 그늘에 앉아, 혹은 기대서서 그런 것들에 대해 고민하고 익숙해지면서 나는 자라고 나이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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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것을 하고, 아파트에 살게 된 후 가장 당혹스러웠던 것은 아래, 위, 옆집에서 똑같은 공간으로 분할된, 똑같은 모양의 방에서, 누군가가 나와 똑같은 방향으로 이부자리를 깔고, 똑같은 모양으로 잠들어 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잠을 설친 밤, 현관 밖 복도로 나오면 판박이 같은 철문이 나란히 나를 바라보던 광경…. 당연한 그 풍경이 나는 너무도 거북하고 이물스러웠다. 비로소 다락방이 내게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게서 소설 쓰기란 다락방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과 다름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락 따위는 전혀 알지 못하는, 그런 기억에 대해서는 본 바도 들은 바도 없을 내 아이들, 저 아이들의 숨바꼭질에 대해 생각한다. 밝고 쾌적한 공간, 어느 방이나 똑같은 공기가 흐르는 집안, 스위치만 올리면 환히 드러나는 아파트에서 자라나는 아이들. 다락이 사라지고 그 다락의 기억이 사라지고 몸을, 마음을 숨길 곳을 잃은 아이들을 생각한다. 버려진 곳이나 또한 보배로운 장소인 그 어떤 곳, 감추고 드러내고 알 수 있고 또한 없는 어떤 일들을, 스스로를 다독이고 삶의 이치를 깨닫게 해줄, 다락을 대신할 그곳이 어디일는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