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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과 커피의 ‘마리아주’

브람스 음악 들으며 예가체프 원두 볶아 ‘감동의 선물질’

음악과 커피의 ‘마리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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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줄라이홀’의 주인장에겐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세 가지가 있다. 오디오, 음반, 커피. 요즘 그는 음반을 수북이 쌓아놓고 차례로 틀어대며 커피콩을 고른다. ‘핸드픽’ 무아지경에 빠져 내일 우리나라에 다시 IMF가 찾아와도 자기는 오늘 한줌의 콩을 고르겠단다. 그렇게 혼자 시간을 보내며 정성스레 만든 원두커피를, 삶의 환희를 사람들에게 선물한다.
의식이 있고 무의식의 세계가 있다. 무의식 속에는 우리의 열등한 자아가 숨어 있다. 그것을 그림자라고 부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림자를 타자에게 투사한다. 분노, 질시, 원한, 공포, 회한…. 마음속에 담겨 있는 온갖 어두운 충동은 바로 무의식 속의 그림자가 의식의 표면으로 튀어나오는 현상이다.

분석심리학의 노대가(老大家) 이부영 교수와 한 시간 대담을 하는 동안 뇌리에 남은 그의 말들이다. 구스타프 융이 말한 마음속의 그림자. 의식의 골짜기 아래 저 깊은 심연 속에 숨어 있는 열등한 자아가 그림자라는 것이다. 혹시 실체와 그림자가 뒤바뀐 채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까. 그런 처소는 없을까.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 마음의 고통. 그림자가 안겨주는 마음의 고통. 고통의 이유와 레퍼토리는 세월 따라 나이 따라 끊임없이 변해가건만 단 하나 변함이 없는 것은 고통스럽다는 사실이다. 열등한 자아로 한세상 살아가게 만들어진 종자의 태생적 불우. 거리의 행인들을 하나하나 붙들고 다짜고짜 물어보고 싶다. 당신은 삶이, 존재가, 영혼이 그리고 이 세상이 고통스럽지 않으십니까?

소비에트연방, 중화인민공화국, 동구권 국가들이 생겨나기 전에 사회주의적 이상을 품었던 사람들은 행복했을 것이다. 혁명을 성공시켜 이성의 원칙이 통제하는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면 수천년 이어져온 인류의 고통이 해소될 것으로 믿었을 테니까. 호메이니가 건설하고 탈레반이 이룩한 신정(神政)국가 역시 그러한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아니, 프란시스 베이컨 식의 유토피아, 그러니까 기술과학 문명이 최고조에 달하면 진정한 복락세상이 찾아온다는 그 예언의 땅이 바로 지금 미국에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 이상의 영토들은 너무 짜릿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상사회의 구성원들은 전기충격이라도 받은 듯 끝끝내 쇼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사회주의적 단세포성 표준인간형을 견딜 수 없어 했고, 탈레반 신정사회의 난폭한 도덕주의에 아프간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는 젊은 청춘을 버려야 했다. 미국이라는 풍요 속으로 망명했던 솔제니친은 절망의 아메리카를 기록해야만 했고.

‘걱정의 마술램프’



지하 작업실의 눅눅한 공기 속에서 어젯밤은 너무 길었다. 계속 이어지는 밤의 시간이건만 지상에서는 지금을 아침이라고 부른다. 밤에 생겨나는 증세에 걸맞은 병명이 마침 떠오른다.

음악과 커피의 ‘마리아주’

줄라이홀의 그윽한 향을 만들어내는 커피 로스터.

램프 증후군; 그것은 ‘걱정의 마술램프’. 근심 걱정이라는 거인을 스스로 불러놓고 명령한다. ‘자 나를 불행의 세계로 인도해다오’ ‘지금 고통을 이리로 데려오렴.’ 걱정이라는 환영을 붙들고 그저 처분만 기다리며 괴로워하는 현상.

고통을 말할 때 흔히 그 이유를 찾으려고 애쓴다.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발굴되고 창조된다. 그러나 문제는 고통의 뿌리다. 모든 나무뿌리는 지표면을 향해 가능한 한 넓게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각 지류마다 헤아릴 수 없는 잔털이 나 있다. 그것으로 생명의 원천을 빨아들인다. 고통은 삶의 전방위를 향해 뻗어 있고 닿는 곳마다 강력한 힘으로 빨아들인다. 미세한 잔털들이 무엇을 빨아들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빨아들인 모든 것을 괴로움의 성분으로 분해하니까. 내 고통의 뿌리가 가닿는 곳은 어디일까.

나의 음악실 ‘줄라이홀’이 늘 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찾아온다. 원고를 청탁하러 오기도 하고 방송관련 회의가 벌어지기도 하며 그냥 덧없이 들르는 심심파적도 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말한다.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중요함과 사소함 사이를 넘나들며 말이 말을 낳는다. 낄낄거리고 후후거리고 두런두런한다. 아, 때로는 소스라치듯이 벌떡 일어나 외치고 싶다.

“왜 사람들은 친해져야만 하는가!”

내게도 일생의 친구들이 있다. 두 명의 친구는 암으로 일찍 떠났고 나머지 나까지 여덟 명의 고교 문예반 동기들과 일생의 경조사를 함께해간다. 돌이켜 보니 열여섯 살 적부터 시작된 삼십몇 년의 인연이다. 지나간 내 누추한 행적들 가운데 녀석들이 모르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 자들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한 나는 도저히 다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가 없다.

사귀었던, 기억 속의,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여인들도 있다. 인간에 대한 예의상 차마 그 이름들을 나열할 수는 없다. 다만 다시 만날 수 없는 그들을 한날한시에 전부 다 모아놓고 공공칠빵 놀이 같은 것을 해봤으면 좋겠다. 자리 배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만난 시기 순으로 할까 아니면 중요도 순으로 서열을 매겨야 하나. 어쨌든 그녀들을 다시 만난다면 심각한 얘기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옷도 벗지 않을 것이다. 다만 공공칠빵!

‘김갑수와 아름다운 사람들’

그러나 지나간 여인들은 절대로 뒤돌아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점이 문제다. 실제로 약혼식까지 올렸던 지난날의 그녀에게 전화를 했던 비밀이 있다. 무어라 쩔쩔매며 더듬거리는 내 말허리를 자르며 대학교수인 그녀는 내뱉었다. “에구구, 우리 애아빠가 밖에서 저러고 다니면 어쩌누.” 지나간 여인에게 죽어도 다시 연락할 수 없게 된 참담한 기억이다. 에라이, 공공칠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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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수 시인, 문화평론가 dylan@unitel.co.kr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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