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호

20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밤

  • 입력2006-07-21 1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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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밤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아직 존재하는 한

    내 영혼 속에 완전히 꺼지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렇게도 진심으로 그렇게도 나지막이



    언젠가 신이 당신에게 다른 사랑을 준다 해도…

    러시아의 대문호 푸슈킨의 시에 곡을 붙인 러시아 로망스의 노랫말이다. 떠나간 사랑에 대한 한없는 기다림을 절절하게 담아낸 간절한 연가(戀歌)로, 러시아인의 사랑이 가슴 깊숙이 아픔으로 밀려온다. 흔히 러시아 음악은 우리 정서와 비슷한 한(恨)을 담고 있다고 한다. 모진 자연환경을 감내하며 대륙을 일구어온 그들의 인내는 음악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글린카로부터 시작해 러시아 5인조, 차이코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에 이르는 위대한 작곡가 그룹이 세계 음악계의 한 축을 형성하게 했다.

    러시아의 예술가곡을 ‘로망스’라고 한다. 작품에 기본적으로 낭만과 애환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로망스의 가사는 대부분 이루지 못한 사랑과 연인과의 슬픈 이별을 읊는다. 그리고 그 사랑은 베토벤의 가곡 ‘당신을 사랑해’와 같은 현재 진행형도 아니고 희망적인 미래형도 아닌, 빛바랜 과거형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여전히 서로를 축복하며 찬연히 빛난다. 이러한 면은 기악곡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잘 드러나는데,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과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에서, 심지어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했다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에서조차 러시아의 서정성이 교묘하게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일찍이 푸슈킨이 ‘유럽을 향해 열린 창’이라고 칭송한 ‘성스러운 돌의 도시’다. 러시아의 북쪽, 발틱해와 인접한 핀란드 만에 위치한, 구소련 시절 레닌그라드로 불리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광대한 러시아, 그중에서도 유럽의 문화와 양식에 익숙한 도시다. 러시아 황제 표트르 1세가 스웨덴의 침입을 막고자 1700년부터 요새를 건설하면서 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전쟁에서 승리한 표트르 대제는 1712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기고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했다. 이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200년 동안 러시아 정치,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다.

    ‘영웅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시의 또 다른 이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사한 2500만명 가운데 1000만명 이상이 희생된 곳이 바로 러시아다. 그 중심에 독일군에게 900일간 포위되어 100만명의 목숨과 맞바꾸며 사수한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다. 도시 입구에 조성된 전몰용사 기념비 위로 솟구친 오벨리스크는 당당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2006년 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진정한 이름은 ‘문화의 도시’, 그중에서도 ‘음악의 도시’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자작나무, 하얀 자작나무 숲이 생각납니다. 카메라에 다 담을 수 없이 광활한 숲, 하늘을 찌를 듯이 자란 나무들, 여기에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자작나무 잎은 왁자지껄 소리를 내고 소란스레 웃는 것만 같았습니다. 펄럭이는 자작나무의 잎사귀 사이에 파랗게 질려 있는 하늘과 숲의 광활함과 평안함이 이루는 이국적 분위기에 보는 이는 숨이 막혀버릴 지경입니다.”

    언젠가 러시아 영화 ‘차이코프스키’의 첫 장면을 배경으로 감명 깊게 읽은 단상이다. 자작나무는 옆으로 엷게 벗겨진 흰색 나무껍질이 애처로운 러시아의 국목(國木)이다. 보기에 아름다울 뿐 아니라 목재는 가구용으로, 껍질과 수액은 약재로 쓰여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이 러시아인의 삶 속에 깊이 녹아 있는 ‘효자목’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천마총의 ‘천마도’와 팔만대장경에 자작나무가 쓰이는 등 귀히 여겨왔다.

    20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밤
    2003년 6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대로변. 드문드문 자작나무숲 사이로 파아란 하늘이 녹아 있다. 하늘을 찔러 올라간 자작나무의 끝엔 조각구름이 그림처럼 걸려 있다. 혹한의 1월, 같은 길에서 보았던 자작나무숲보다는 오히려 덜 처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10여 회 방문길이 되어버린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작나무숲은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고 이방인을 맞았다.

    백야(白夜)! 글자 그대로 하얀 밤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빛! 북위 60。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6월은 빛의 앙금으로 인해 과도하게 늘어난 시간이 사람들을 밖으로 밖으로 내몬다. 낮과 밤의 경계는 모호해지고 현지인이나 이방인이나 몽유병 환자처럼 거리를 배회한다. 그 종착지는 러시아인의 어머니강 ‘네바’다. 새벽 1시, 피터대제의 겨울궁전 에르미타주에서 바실레프스키 섬 입구의 삼각주에 등대처럼 보이는 해전 기념 원주로 이어지는 궁전다리가 위로 들리고 그 사이를 유람선이 유유히 드나든다. 이때야말로 네바 강변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시각이다. 불꽃놀이가 쉴 새 없이 펼쳐지고 홍조를 띠는 가로등 밑에서는 연인들의 밀어가 멜랑콜리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백야의 중심에는 마린스키 극장이 주도하는 ‘백야축제(Stars of White Nights)’가 있다. 1993년부터 시작된 백야축제의 중심에는 세계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마린스키 극장의 수장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있다. 여타의 다른 축제와는 달리 백야축제는 엄청난 무대 장치가 소요되는 러시아 오페라를 거의 매일 무대에 올리며 이밖에 러시아의 자랑인 발레와 심포니 콘서트도 병행한다.

    오페라와 발레를 낮 시간과 저녁 시간에 동시에 한 무대에 올릴 수 있는 극장은 세계에서도 마린스키 극장이 유일하다. 마린스키가 아니면 시도할 수 없는 200년에 이르는 독특한 극장 운영이 뒷받침되기 때문이다. 백야축제는 단숨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름 음악축제인 잘츠부르크, 아스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세계적 음악축제로 자리잡았다.

    올해 세계 음악계의 화두는 단연 탄생 250주년을 맞은 모차르트, 서거 100주기의 슈만, 그리고 탄생 100년이 된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다. 필자가 모스크바를 방문할 때마다 어김없이 먼저 찾는 곳이 바로 노보데비치 수도원이다. 이곳은 크렘린의 출정식이 열렸던 곳으로 러시아인의 기상과 기백이 스며 있는 러시아 정신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한데, 러시아혁명 후인 1922년에 박물관으로 지정됐고, 1934년 이래 국립역사박물관의 분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래서 이곳에는 러시아를 움직인 예술가와 흐루시초프를 비롯한 정치가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헤아리면 2000기 남짓 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차이코프스키, 러시아 5인조, 도스토예프스키가 잠들어 있는 네프스키 수도원 묘역이 있다면 모스크바에는 러시아의 예술혼(魂)이 잠들어 있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역이 있다.

    2003년 6월16일 노보데비치 수도원은 짙은 녹음이 푸른 물을 쏟아내는 듯 싱그럽기 그지없다. 이방인이 수천기가 넘는 묘지에서 그 주인을 가려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인 피아니스트 페투호프와 클리코바의 안내로 위대한 거장들의 마지막 자취를 하나씩 더듬어갔다. 구묘역 동쪽에 스탈린 정권과 평생 애증관계에 있으면서 자신의 예술세계를 지켰던 쇼스타코비치의 묘지가 단아하게 누워 있다. 말년에 병마와 싸우면서도 작곡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대작곡가의 음성이 귓가를 스치는 듯하다.

    지난 2월1일, 모스크바 브뤼소프 거리에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자택에서 만난 그의 부인 이리나 여사가 전해준 고인의 말년에 대한 회고가 생생히 떠올랐다.

    “남편은 자신이 1인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물론 자신의 가치를 인정했지만 동료들을 더 값지게 여겼죠. 브리튼의 음악을 사랑했고 프로코피예프를 존경했으며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이해하고 흥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시대 음악가들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음악을 위한 인생을 영위하고자 노력했지요. 흔히 스타들이 갖는 교만은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아내의 증언대로 겸손하고 인간적인 작곡가의 묘비 위에 이름 모를 참배객이 놓고 간 꽃바구니가 정겨워 보였다. 순간 쇼스타코비치의 아파트 거실에 걸린, 화가 보리스 쿠스토디예프가 그린 13세 어린시절 작곡가의 초상화와 겹쳐진다. 목탄과 붉은 크레용으로 그려진 그 그림은 파란만장했던 천재의 삶을 예고라도 하듯이 대단히 강인한 인상으로 다가왔다. 묘비에 어린 쇼스타코비치의 얼굴이 서린다.

    1934년 열린 제1회 작가회의에서 소련 공산당은 소련 예술의 존재 의의,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우선 간결해야 할 것, 형식은 민족주의적이고 내용은 사회주의적이어야 할 것’ 이라고 정의했다. 1936년 소련 당국은 마침내 그 첫 희생자로 쇼스타코비치를 지목해 통렬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해 1월28일 아르항겔스크의 정거장에서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의 세 번째 페이지에 사설로 실린 자신의 오페라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직접 읽은 작곡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 와중에 쇼스타코비치는 죽음 직전까지 가는 심각한 갈등을 겪었고 자신만의 음악어법으로 그들의 비판을 비켜갔다. 그래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겉으로 드러나는 면보다는 훨씬 깊고 심오한, 사회주의 체제를 겪어낸 예술가의 고뇌와 인간적인 아픔이 배어 있다. 어쩌면 그의 작품은 러시아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에 희생된 자들을 위한 ‘레퀴엠’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20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밤
    兪赫濬

    1968년 대구 출생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졸업

    경인방송 FM PD, 러시아 음악계 10회 현지 취재

    現 음악평론가



    지난 5월10일 개막해 7월19일까지 이어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의 제14회 백야축제. 올해 페스티벌 프로그램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작곡가는 쇼스타코비치다. 특히 올해는 마린스키 극장의 콘서트홀이 새롭게 개관돼 그 의미를 더하는데, 5월30일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이 게르기예프의 지휘로 연주되며 첫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6월 내내 대작곡가의 아들 막심 쇼스타코비치, 마리스 얀손스, 크리스토프 에센바흐 등 세계 최고의 지휘자들이 번갈아가며 쇼스타코비치의 15개 교향곡 전곡을 연주할 예정이다. 쇼스타코비치를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해변으로 가자, 우리들의 밤에는

    파도가 입맞춤할 것이며

    수심에 가득 찬 별들이

    우리들 위에서 빛나리라

    프레시케이코프의 시에 차이코프스키가 곡을 붙인 6월 ‘뱃노래’는 그의 작품 ‘사계’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곡이다. 백야의 절정인 6월, 지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쇼스타코비치, 차이코프스키를 만나며 음악의 밤을 지새우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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