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호

명사에세이

너의 모습 그대로 괜찮아

  • 김수련 소설가

    입력2018-12-16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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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알게 된 한 지인이 그림을 보내줬다. 맨발의 집시 소녀가 들판에 서 있는 그림이었다. 일전에 내 어릴 때 사진을 보고 부그로의 그림 ‘Pastorale’이 떠올랐다고 한다. 지인은 내게 물었다.

    “언제부터 이 모습을 잃어버린 거예요?”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대답 대신 물었다.

    “이 모습이 어떤 건데요?”

    “온전하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모습.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오롯이 자기 자신에 집중해 있고, 얼굴에는 호기심이 그득해서 생기가 넘치는 모습. 맨발로 세상을 들판 삼아 맘껏 뛰어다니며 상처 난 발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모습. 하지만 지금은 세상에 잘 길든(tame) 모습을 하고 있어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작년 가을에는 수십 년 지기인 친구가 사진이 담긴 액자를 내게 선물했다. 베트남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사진에는 작은 배에 앉은 맨발의 한 젊은 여자가 노를 저어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이 사진을 선물해준 이유가 궁금했다. 책장에 세워놓은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친구에게 물었다.

    “혹시, 원시림의 맨발인 여자처럼 본연의 모습을 찾으라는 뜻?”

    친구는 내 질문에 아무런 대답 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그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접했을 때도, 지인의 말을 들었을 때도 나는 어떤 부정도 할 수가 없었다. 알고 있었다.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는 것을. 그들에게 받은 그림과 사진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언제부터 내 모습을 잃은 걸까. 그리고 그래서였을까? 살면서 늘 안 맞는 옷을 입은 불편함을 느껴야 했던 것이. 그 옷을 입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나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한탄했지만, 실은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려고 선택했기에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에고는 그런 부대낌 속에서 점점 강해져 과잉됐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세상이 내게 원하는 것을 하려고 애쓰다 보니 결국 지치고 주저앉으면서 짙은 패배감에 괴로워하는 일이 반복됐다.

    언제부터였을까. 왜 그랬을까.

    작년 가을 그 친구의 의미심장한 미소를 본 이후로 1년여 동안 내게서 떠나지 않는 질문을 부그로의 그림을 받고 다시 던져본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마찰음만 들리는 깊은 밤이다.


    다르다(different)와 틀리다(wrong)

    3년 전 쓴 위의 일기를 다시 읽다가 더는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된 질문이었고, 이 일기를 쓴 이후로도 의식의 표면 아래에서 질문이 끊임없이 꿈틀대고 있었다. 부그로의 집시 소녀 그림과 책장에 있는 사진을 번갈아 본다. 그들에게는 흐트러진 머리, 맨발, 그리고 어린 여자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과 사진을 선물해준 이들이 내가 맨발로 산발을 하고 자연 속을 뛰어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그림과 사진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른이 돼서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크자 기질과 성향이 나와 비슷한 아이를 보며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이 이름)은 좋겠다. 엄마가 이해해줄 테니까. 나는 너를 키울 때 이해하지 못해서 너를 참 힘들게 했는데.”

    어머니의 이런 고백은 부정당한 내 어린 시절이 뒤늦게라도 이해받는 느낌이었기에 무척 감동적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그런 것이었다. 사랑은 듬뿍 받지만, 이해는 받지 못하는 느낌. 내가 좋아하고, 원하고, 하고 싶은 일이 번번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전혜린의 표현을 빌자면 ‘오식 활자처럼 세상에 거꾸로 있는 느낌’을 늘 느끼며 살았다. 다르다는 것이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고, 종내에는 다르기 때문에 잘못됐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것이다(우리는 얼마나 자주 ‘다르다(different)’를 ‘틀리다(wrong)’라는 단어로 대체해 쓰고 있는가). 다른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강요당하면서 어느 순간 지쳐 스스로 잘못된 거라고 인정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다르지(wrong) 않기 위해 삶의 방향을 전환한다. 내 인생에서 나는 더는 주체가 아닌 객체가 돼버렸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과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이 원하는 것을 한다. 그들에게 이해받고 인정받고 칭찬받을 수 있는 일이 행위의 지향점이 됐다. 자존감은 약해지고, 자존심만 강해지는 것이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세상은 나를 인정하고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봐달라고 강요하는 셈이다.


    Answer : Love Myself

    고등학교 때 나와 갈등을 겪은 친구가 마흔이 되던 해에 말했다.

    “고등학교 때는 너를 정말 이해하지 못했어. 네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네가 무척 용기 있었던 거 같아.”

    좌충우돌하던 그때가 흔히들 말하는 질풍노도를 겪는 방황의 시기였다고 여기면서 줄곧 부끄러워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 이후가 방황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주어를 다시 ‘나’로 바꾸려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느 무엇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결핍을 채우기 위한 열정은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을 터이다. 자신이 본인 삶의 주어가 되지 않으면, 그 삶은 타인의 기준과 시선에 종속되고 만다. 때로는 그것이 배려와 친절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배려와 친절, 타인에 대한 이해는 각각의 주체들이 만났을 때야 가능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Mann muss noch Chaos in sich haben, um einen tanzenden stern gebaeren zu koennen(춤추는 별을 낳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는 혼돈을 지녀야 한다).

    역으로 말하면 자신의 혼돈을 인정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그리고 그 모습 그대로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일 때 진정한 자유로움을 얻고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다. 그 혼돈을 부정하면서 들키지 않으려 애쓰게 된다면 타인에게 종속돼 잘 길들여질 수밖에 없다.

    몇 해 전 예전에 쓰던 필명으로 ‘너의 모습 그대로 괜찮아’라는 제목의 동화책을 번역한 적이 있다. 독일어 원제는 ‘꼬마 당나귀가 이렇게 컸어요’. 제목을 바꿔 붙이고 싶었다. 한 농장에 멋진 울음소리를 내는 말들과 산등성을 잘 올라가는 산양들, 그리고 당나귀 한 마리가 있다. 이 꼬마 당나귀는 말의 근사한 울음소리를 흉내 내보려고 했지만 이상한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산양처럼 산등성을 올라가려 하지만 매번 굴러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런 꼬마 당나귀는 농장에서 놀림거리가 됐다. 하지만 당나귀가 말처럼 멋진 울음소리를 내지 않아도, 산양처럼 산등성을 잘 올라가지 않아도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면서 자신의 가치를 찾아가는 내용이었다. 동화였지만, 어른인 내게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다가와 선뜻 번역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제목을 ‘너의 모습 그대로 괜찮아’라고 붙였다. 그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내게도 “너의 모습 그대로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괜찮다.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너의 모습 그대로 괜찮았어.”

    그리고 나의 아이와 세상 모든 친구에게도 말해주고 싶다.

    “너의 모습 그대로 괜찮아.”

    * BTS의 ‘Wing’ 앨범에 수록된 노래인 ‘피·땀·눈물’ 뮤직비디오에도 이 구절이 나온다. BTS는 ‘Love Yourself’ 앨범을 시리즈로 냈는데, 그 마지막 앨범에 ‘Answer: Love Myself’가 수록돼 있다.


    김수련
    ● 1971년 경북 상주 출생
    ● 연세대 철학과
    ● 베를린자유대 철학과·교육학과 마이스터 과정 수학
    ● 소설가, 칼럼니스트
    ● 소설 ‘호텔 캘리포니아’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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