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1월호

노무현 대통령은 ‘제2의 체임벌린’이 될 것인가

뒤통수 맞은 한국의 선택

  • 이정훈 동아일보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입력2006-11-06 1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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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햇볕정책이 북한의 핵개발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DJ의 궤변
    • 대북 전문가 이종석이 안보를 남북회담에 종속시켜
    • 바늘도둑, 소도둑에서 대형 인질범으로
    • 핵보다 활용도 큰 화학무기, 북한은 세계 3위의 화학무기 보유국
    • 히틀러와 김정일의 유사점. 그들은 사태반전을 노린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2의 체임벌린’이 될 것인가

    히틀러의 속셈을 잘못 파악해 2차 대전을 막지 못한 네빌 체임벌린 영국총리.

    10월9일 북한이 지하 핵실험으로 보이는 대형 폭발을 일으킨 후 대북(對北) 포용정책을 펼쳐온 정치인들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인상적인 장면은 10월11일 노무현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초청한 오찬장에서 벌어진 공박이었다. 오랫동안 정치판을 누벼온 정치 담당 기자들은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DJ의 카리스마는 대단하다. 누구도 그 앞에 서면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데 예외가 있다. YS를 만나면 반대 상황이 벌어진다. 많은 사람이 DJ는 똑똑하고 YS는 단순하다고 하는데, 둘이 맞붙으면 항상 YS가 이긴다. DJ의 똑똑함은 YS의 기백 앞에 맥을 추지 못한다.”

    김대중의 궤변

    그래서일까. 이 날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격 앞에 묵묵부답이었다. YS는 DJ와 노무현 대통령을 앞에 놓고 무려 1시간 20분 동안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의 공식 폐기를 선언해야 한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사업 등 대북사업은 전면 중단해야 한다. 정부는 대국민 공개 사과도 해야 한다”고 퍼부었다고 한다.

    DJ의 반론은 다음날 그의 정치적 고향인 광주에서 ‘겨우’ 나왔다. 10월12일 전남대 강연에 나선 DJ는 “요즘 아주 해괴한 이론이 돌아다닌다. 햇볕정책의 실패를 말하는데 기억을 더듬어봐도 햇볕정책 때문에 북한이 핵개발을 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 …햇볕정책은 성공했고, 더 성공할 수 있는데 북-미 관계 때문에 못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대북 포용정책이 긴장을 완화했지 긴장시켰느냐? 오늘 아침 노무현 대통령의 전화가 와서, 내가 ‘포용정책이 죄가 있는가?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고 토로했다.



    ‘햇볕정책 때문에 북한이 핵개발을 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는 DJ의 주장은 정말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가 말하는 대로 북한은 ‘미국의 압박 때문에 핵개발을 한다고는 주장했어도, 햇볕정책 때문에 핵개발을 했다’고 주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햇볕정책이 펼쳐지는 동안 한반도의 긴장은 외견상 완화된 듯 비쳤으므로, DJ의 말은 어느 정도는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태를 ‘똑바로 바라보면’ 전혀 다른 판단이 나온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을 편 목적은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북한의 핵개발을 중단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핵개발 완료를 선언해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됐으니 두 대통령이 펼친 정책은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난 셈이다.

    좋은 의도로 실행된 정책일지라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이 되고, 그 정책을 내놓은 사람은 ‘현실성 없는 정책을 내놓은 데’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에 대해 비난이 쏟아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북한은 DJ 재임 5년간의 햇볕정책과 노무현 대통령이 이끈 4년간의 포용정책이 펼쳐지는 틈을 이용해 핵개발을 했다. 이러한 북한의 속내도 모르고 이 정책을 펼친 이들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포용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어렵게 되었다”라며 일말의 솔직함을 보이다 태도를 바꾸었고, DJ는 처음부터 궤변(詭辯)을 늘어놓았다.

    이종석과의 논쟁

    2000년 6월13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나기 위해 평양에 갔다. 이때 세종연구소에 있던 이종석 현 통일부 장관도 함께 갔는데, 김 대통령이 평양으로 떠나기 직전 기자는 세종연구소에서 이 장관과 두어 시간 논쟁한 적이 있다. ‘차 한잔 마시자’는 가벼운 승낙을 받고 만난 자리였으나, 6·25전쟁과 남북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가 발생해 방북 준비로 바쁜 그는 만사를 작폐하고 기자와 말다툼에 가까운 논리 싸움을 벌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2의 체임벌린’이 될 것인가

    10월11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직 대통령 초청 오찬 자리에 모인 전·현직 대통령들. 이 자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DJ와 노무현 대통령에게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의 폐기를 강조했다.

    그날 이 장관은 “IMF 경제위기가 계속되는 지금 북한이 (1998년처럼) 미사일을 (동해 등으로) 발사한다면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는 한국경제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따라서 북한이 위험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기자는 “북한의 미사일 위협을 과대평가하지 말라. IMF 경제위기가 이어지던 1998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한국경제가 더 나빠진 것은 없다. 김정일은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무모한 인물이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이 장관은 “왜 김정일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보느냐. 북한이 한국을 향해 미사일을 쏘면 어렵게 붙잡아놓은 외국자본이 일거에 한국을 떠날 것이다.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과 유가는 폭등해 한국경제는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다”라고 공격했다. 이에 대한 기자는 이런 반론을 펼쳤다.

    “물론 김정일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북한이 한국을 향해 미사일을 쏠 것이라고 단언하지도 말라. 전쟁은 차곡차곡 준비하고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 비로소 펼치는 ‘의지의 투영’이다.

    승리하기 위한 준비와 계획, 그리고 적을 무너뜨리겠다는 공통된 적개심이 형성돼야 국민이 전쟁을 일으키려는 지도자를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클라우제비츠도 ‘전쟁은, 특히 선제공격에 의한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코너에 몰린 것은 우리가 아니라 북한이다. 김정일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매달리는 것은 정권을 지키기 위해서이지, 이 지역의 패권을 잡기 위해서가 아니다. 북한이 한국이나 일본을 향해 핵과 미사일을 발사한다면 김정일은 더 큰 위기에 봉착한다. 김정일이 왜 정권이 붕괴될 상황을 자초하겠는가.

    돌이켜보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기회는 지금보다 과거에 훨씬 더 많았다. 4·19혁명이 일어난 1960년, 1·21사태와 푸에블로함 납치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EC-121기 격추사건 등이 일어난 1968~69년, 베트남이 공산화된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1979년과 광주사태가 일어난 1980년이 전쟁을 감행하기엔 훨씬 좋았는데도, 북한은 전쟁을 일으키지 못했다.

    IMF 경제위기는 과거의 위기에 비하면 작은 것이다. 그런데도 북한이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펼쳐졌다고 속단하고 지레 머리를 숙이면, 북한은 오히려 자기에게 유리한 상황이 펼쳐진 것으로 오인하게 된다. 북한이 우리를 공격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현실을 토대로 한 인식이 아니라 머릿속으로만 그려본 망상이다. 어렵게 연명하는 김정일 정권을 도와주는 처사다.…”

    NSC 상대로 앓던 이 뽑은 북한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자 이종석씨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차장을 거쳐 통일부 장관이 되었다. 대통령국방보좌관을 하던 김희상씨가 비상기획위원장으로 밀려난 후 이종석씨가 사무차장으로 있던 NSC는 청와대에서 대북정책과 국방정책을 좌지우지하는 부서가 되었다.

    NSC는 대북 포용정책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구사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남북정상회담 4주년인 2004년 6월을 앞두고 이뤄진 서해 NLL(북방한계선)상의 남북 해군 함정간 교신 합의다. 이 합의를 도출하기 전 남북한군은 심리전 중단 결정에 합의했다.

    그때까지 한국군은 성능 좋은 마이크와 발달한 문화 덕분에 ‘밤이면 밤마다’ 북한군 병사의 눈과 귀를 잡아놓고 있었다. 신나는 댄스곡과 월드컵 축구경기 중계방송 등을 틀어준 것인데, 이것이 북한 병사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전광판은 북한군 병사들의 눈을 현혹했다. 전광판에 밤새 ‘내일은 비가 올 것이니 인민군 여러분 오늘은 빨래하지 마세요’라는 글귀가 번쩍인 다음에는, 어김없이 비가 쏟아지니 북한 병사들은 전광판 정보를 신뢰하게 되었다. 2004년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하고 돌아올 때 평북 용천역에서 큰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전광판에 기다렸다는 듯이 이 뉴스를 띄우자, 깜짝 놀란 북한군인들이 상부로 보고하는 것이 아군 감청망에 포착되었다. 북한군은 사실을 근거로 하는 한국군의 심리전에 단단히 걸려 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북한이 남북회담에서 성급하게 성과를 거두려고 하는 한국을 상대로 ‘앓던 이’를 뽑는 시도를 했다. 남북 심리전 중단을 요구한 것인데, NSC의 지시를 받은 한국군 대표는 이에 동의했다. 그 후 정부는 심리전을 중단하고 아울러 NLL상에서 남북 함정이 교신을 하게 됐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나, 예상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종로에서 뺨맞고 한강에서 눈 흘겨

    7월14일, 북한군 함정이 우리 함정의 답신은 듣지 않고 일방적인 송신만 한 후 NLL을 무단 침범한 것이다. 중국 어선을 추적하기 위해 NLL을 넘으려 한다면 우리와 교신해야 하는데, 애타게 부르는 우리의 교신 시도를 무시하고 밀고 내려오다 뒤늦게 “지금내려가는 것은 중국어선이다”라고 송신하고 NLL을 넘었다.

    한국 함정은 이러한 북한 경비정을 향해 경고사격을 했는데, 북한은 한국 함정이 교신 합의를 어기고 사격했다고 항의했다. ‘웃기는 것’은 우리 정부가 북한의 항의를 받고 조사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북한이 일방적인 송신만 하고 무단으로 NLL을 침범한 것이 확인되자 머쓱해져서 물러났다.

    노무현 정부는 엉뚱한 데다 대고 화풀이를 했다. 조사가 진행될 때 박승춘 정보본부장이 일부 언론에 정보를 흘려준 사실을 포착해 그를 자진 전역시킨 것이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분풀이 하는 형국이었다.

    이 시기 NSC는 우리 군사력과 북한 군사력을 정밀 비교하는 작업을 벌이고자 했다. 2004년 여름 NSC는 이 임무를 국방연구원에 맡겼다. 북한군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군령권을 가진 합참이 갖고 있다. 국방연구원이 자료 제공을 요구하자, 합참은 무슨 의도로 1, 2급 비밀자료 제출을 요구하느냐고 물었다. NSC의 지시로 남북한 군사력을 정밀 비교하려 한다는 답이 돌아오자, NSC의 의도를 알아챈 합참 장교들이 비협조적으로 돌아서면서 한동안 두 기관 사이에 한랭전선이 형성되었다.

    전차와 군함 전투기 등 남북한군이 모두 갖고 있는 전력의 양과 질을 비교한다면 한국군의 전력이 강한 편이다. 그러나 전쟁은 이러한 무기만 갖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NPT(핵확산금지조약)와 CWC(화학무기 제한협약) 가입 국가이기 때문에 핵무기와 화학무기는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북한은 두 조약에 가입하지 않았으므로 마음대로 만들어 보유할 수 있다.

    북한은 ‘가난한 나라의 핵무기’라고 하는 화학무기를 러시아, 미국 다음으로 많이 갖고 있다. 화학무기는 핵무기보다 훨씬 더 쉽게 사용결정을 내릴 수 있는데, 북한이 보유한 화학무기 추정량은 2000~5000t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핵무기에 대해서는 신경을 써도 화학무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핵과 화학무기 전력 배제한 군사력 비교

    합참은 핵과 화학무기를 빼고 재래식 전력만 놓고 남북한 전력을 비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방연구원은 이 분야를 빼고 남북한 전력비교 결과를 발표했다. 핵무기와 화생방무기 분야의 대비를 제외했다는 단서를 달았는데도, 남북한 군의 전력은 엇비슷하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NSC가 이러한 조사를 시킨 것은 북한의 군사력이 한국보다 떨어진다는 결론을 도출해 과도한 국방비 투자를 제어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의도와는 다른 결론이 나왔다.

    한국군을 ‘묶어놓자’는 NSC의 의도는 미국군을 묶어놓자는 데까지 나아갔다. 국민의 자주의식을 자극하는 형태로 추진된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조치가 그것이다. 이 조치의 이면에는 미국에 의한 일방적인 대북 군사제재를 제한하겠다는 속셈이 깔려 있다.

    미국이 북핵을 이유로 고의로 전시(戰時)를 만들어 한국군을 작전통제함으로써 한민족 전체를 위기에 몰아넣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이 갖고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해야 한다는 것이 이종석 장관의 생각이었다. 이 장관은 이러한 구상을 2000년에 출간한 ‘한반도 평화보고서’에 서술했고, 노 정부가 출범한 후로는 이러한 구상을 이른바 ‘평화와 번영정책’의 핵심 요소로 선정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잘못 인식한 데서 나온 잘못된 주장이다. 미국은 단독으로 한반도에서 전시상황을 만들 수 없다. 한미 양국 대통령이 전시체제로 전환하자는 데 합의하지 않으면 한미연합사는 한국군과 미국군에 대해 작전통제를 할 수 없다. 다시 말해 한국 대통령이 동의하지 않으면 미국 대통령은 미국 대장이 이끄는 한미연합사가 한미 양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는 전시체제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2의 체임벌린’이 될 것인가

    히틀러(왼쪽)와 김정일. 김정일은 히틀러와 유사한 길을 걷고 있다.

    이종석 장관은 북한 문제를 연구해온 학자이지, 국방 문제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다. 안보 문제 전문가들은 ‘노무현 정부의 NSC가 안고 있는 최대의 약점은 안보 전문가가 아닌 대북 전문가가 NSC를 이끌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NSC는 이름 그대로 국가 안보를 논의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노 정부의 NSC는 남북 문제, 그 가운데서도 회담에만 무게를 두는 사람(통일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음으로써 안보를 남북회담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장관은 유사시 한민족의 생존을 보장해줄 한미연합 체제를 제거하려 하고, 남북회담을 위해 북한군을 내부에서부터 붕괴시키는 심리전을 중단하도록 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부 이래 근 5조원에 달하는 물자를 제공함으로써 북한 주민을 상대로 인권탄압과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하고 있는 김정일 정권이 연명하는 정도를 넘어 오히려 우리를 위협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했다.

    통일부 〉국정원

    이종석씨는 정동영씨에 이어 통일부 장관에 올랐으나 정 장관과 달리 김정일 면담 등 남북 문제에 관한 가시적인 업적을 이뤄내지 못했다. 북한을 가장 잘 이해한다는 소리를 들어온 그는 오히려 북한에 시달렸다. 그가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북한은 미사일 무더기 발사와 핵실험이라는 초대형 사고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NLL선상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는 따위의 도발을 일삼던 북한이 급기야 한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고 갈 수 있는 대형 인질극을 펼친 것이다. 대량살상무기인 미사일 발사를 시도한 것. 북한이 바늘 도둑질을 할 때 ‘오냐’ 하던 노무현 정부는 북한이 소도둑질을 해도 ‘오냐’ 하는 전략으로 일관했다.

    북한의 무더기 미사일 발사(7월5일) 직후인 7월12일 부산에서 열린 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측 대표는 “선군(先軍)정치가 남측의 안전을 지켜준다”는 망언과 함께 쌀 50만t과 경공업 원자재를 지원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7월5일 깃대령에서 발사된 미사일은 한국을 겨냥하던 군사용 미사일이다. 북한은 포용정책을 비웃는 군사행동을 했으나 NSC는 포용정책을 버리지 않았다.

    7월31일 국가정보원은 필리핀 국적자로 꾸며 잠입한 북한 35호실 공작원 정경학(48)을 서울 보문동 소재 한 호텔에서 검거했다. 참여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북한 간첩을 생포한 것이다. 정경학은 암살이나 테러 등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잠입한 행동파 공작원이라기보다는 한국 상황을 예리하게 분석해온 분석관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은 북한의 해외 공작 사정에 정통하므로, 우리 측으로선 대어(大魚)을 낚은 것이 된다.

    노무현 정부가 한없는 포용정책을 펼치고 있는데 북한은 뭐가 두려워 노련한 분석관을 침투시킨 것일까. 정경학 사건은 노 정부가 어떤 정책을 펴도 북한은 이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증거인데 노 정부는 이것도 무시했다.

    노무현 정부 들어 바뀐 변화 가운데 하나는 남북문제에 관한 한 국정원보다는 통일부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는 점이다. 통일부가 국정원보다 우위에 섰다는 것은 남북대화를 남북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 중 가장 우위에 두겠다는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지난 9월초 기자는 대한민국 정부가 차관 형태로 지원한 쌀을 실은 화차를 북한 국경경비여단이 관리하고 있는 장면이 담긴 사진을 ‘주간동아’(9월12일자)와 ‘동아일보’(9월6일자)를 통해 보도한 적이 있다. 한국 정부가 보낸 쌀을 북한 군부가 가져갔다는 이야기는 숱하게 떠돌았지만, 사진을 통해 확인한 것은 이것이 최초였다(이 동영상은 일본 후지TV와 한국의 MBC 뉴스에도 방영되었다).

    그러나 이종석 통일부 장관은 기자 간담회에서 “북한에서는 군인과 경찰이 같은 색깔의 군복을 입는다. 우리 정부가 보낸 쌀을 관리하는 사람이 군복을 입고 있다고 해서, 군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 이들이 쌀을 관리하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이를 먹었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며 문제 삼지 않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김용갑 “이종석씨는 세작(細作)”

    북한 간첩을 잡아도, 대한민국 정부가 보낸 쌀을 북한 군부가 가져가도 문제시 하지 않겠다는 이 장관은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발표해도 포용정책 주장을 이어나갔다. 핵실험 다음날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 출석한 이 장관은 “대북 포용정책을 폐기하거나 전면 수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 때문에 추진하던 정책의 일정한 변화는 불가피하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이 장관을 가리켜 김용갑 한나라당 의원은 일찌감치 “세작(細作)이 아니냐”고 공격한 바 있다.

    오랫동안 대북 업무에 종사한 한 소식통은 이 장관의 태도를 위험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북한을 대화무대로 끌어내려는 이 장관의 노력은 이해한다. 그러나 북한이 어떠한 행동을 해도 모두 참아주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라며 이렇게 지적했다.

    “남북대화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이냐. 분단은 그대로 둔 채 남북 간의 긴장만 해소하려는 것이냐, 아니면 장차 한나라가 될 것을 염두에 둔 통일 노력이냐? 긴장 해소를 위한 대화만을 염두에 둔 남북관계 유지는 자칫 분단을 영구히 하는 전략이 될 수 있다. 즉 김정일 정권의 영속성을 보장해주는 것인데, 영속성이 보장되는 한 김정일 정권은 한국 등 주변국가에 위협을 가해 생존 물자를 확보하는 ‘위협정책’을 구사할 것이다.

    남북대화의 목표를 통일로 본다면, 대화는 궁극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이 경우 남북대화는 우리 체제와 철학을 북한에 이식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즉 북한을 상대로 북한이 해야 할 행동과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가르쳐가면서 회담해야 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알리면서 대화하는 것이 진짜 협상력이고 실력 있는 외교력이다.

    이러한 외교를 잘하는 나라가 중국이다. 중국은 미국 일본과 수교할 때 대만과의 단교를 전제로 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관철했다. 따라서 다른 나라와 수교할 때도 ‘하나의 중국’을 관철할 수 있었다. 상대국으로 하여금 중국-대만과 모두 외교 관계를 갖는 등거리 외교를 차단하는 성과를 얻은 것인데, 이는 중국 외교력의 일대 승리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북한이 국제사회로 나와야 한다면서 북한이 우리와 수교한 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것을 후원해주기까지 했다.

    한민족 통일이라고 하는 큰 명제를 놓고 봤을 때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오히려 퇴보를 가져왔다. 그들은 긴장 완화를 위해 유화정책을 폈다고 했지만 유화정책은 오히려 북한이 핵개발을 할 시간적 여유를 주었고 통일할 기회를 멀어지게 만들었다. 남북통일이라는 큰 명제를 놓고 본다면 김정일과 노무현 정부는 모두 부(負)의 역할을 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미-북 양자대화 열어준 김영삼

    북한이 핵실험 선언을 한 후 여당에서는 ‘미-북 양자대화를 하라’ ‘미국이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는 등의 주장이 터져나왔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남북대화에 노력한 결과 한반도의 긴장이 완화됐다고 주장하지만 대화는 그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대표적인 군사정권인 박정희-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도 남북대화에 나선 바 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정부의 남북대화에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다. 한반도 문제는 당사자인 남북이 풀어가자는 것이었다. 북한은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한국의 군사정권이 제의한 회담에 나왔다. 특히 동유럽과 소련의 공산정권이 무너진 직후에는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응해 북핵 포기(한반도 비핵화)를 약속한 기본합의서에 서명하기도 하였다.

    한반도 문제는 당사자인 남북한이 풀어야 한다는 중대한 원칙이 깨진 것은 DJ와 노무현 대통령 앞에서 “햇볕정책과 포용정책의 공식 폐기를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한 김영삼 대통령 때 일어났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처럼 포용정책을 추진했는데, 이는 상황을 크게 오판한 것이었다. YS 정부가 한반도 상황을 오판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경착륙과 연착륙’론이 거론된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이 동유럽처럼 곧 붕괴될 것으로 보고, 북한 정권을 부드럽게 무너지게 하느냐, 루마니아처럼 민중혁명으로 거칠게 붕괴하게 하느냐를 놓고 논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북한 재건을 위해서는 연착륙이 낫다는 쪽으로 기울어 포용정책을 펼쳤는데 이러한 결정은 현실과 동떨어진 아주 잘못된 판단이었다. 북한은 연착륙-경착륙 모델이 아닌, 일전불사의 문제를 들고 나와 일거에 상황을 바꿔버린 것이다.

    북한은 1993년 동해를 향한 노동미사일 시험발사를 시작으로 영변 연구용원자로에서 꺼낸 사용후핵연료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함으로써 한반도를 일전불사를 결심해야 하는 무대로 바꿔버렸다. 이에 대해 미국의 클린턴 정부가 군사적 행동을 결정하고 나섰다. 미국도 일전불사의 정책으로 나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꼬리를 내린 이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었다. 그는 일전불사를 결심한 클린턴 대통령을 결사적으로 말렸고, 그 결과 클린턴 정부는 카터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에 동의했다. 한반도에 몰아친 1차 북핵위기는 카터 전 미국대통령이 중재에 나섬으로써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위기를 모면한 대가는 적지 않았다. 한국은 남북 문제는 남북한이 풀어야 한다는 중대한 원칙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미-북 양자대화 주장하는 親盧세력

    이때부터 핵과 미사일 문제는 미국과 북한이 논의하고, 그보다 중요성이 떨어지는 여타 문제만 남북한이 대화하는 2중 구조가 만들어졌다. 뒤늦게 북한에 유리한 국면이 만들어졌음을 알아차린 김영삼 정부는 미-북 양자회담에 이의를 제기해, 남북한이 핵과 미사일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4자회담을 열자고 했다. 그러나 미-북 양자회담이 열리고 있었으므로 4자회담은 간판만 내걸고 영업은 하지 못하는 형국이 되었다.

    김대중 정부는 1차 북핵위기가 풀린 후 출범했기에, 핵과 미사일을 제외한 여타 문제를 풀기 위한 형태로 북한과 정상회담을 할 수 있었다. 한반도 재통일을 결정할 핵심 의제인 핵과 미사일 문제를 제외한 회담이었기에 김대중-김정일은 민족·자주·평화대단결을 핵심으로 하는 공동선언에 합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대대적으로 홍보해 DJ는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는 길은, 한번 열리면 넓어지는 경향이 있다. 김영삼 정권 때 열린 미-북 양자회담은 차관보급 회담이었다. 그런데 DJ가 남북정상회담을 하자 그 격이 상승했다. 조명록 북한군 총정치국장이 미국을 방문해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고,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이 김정일과 회담함으로써 미-북은 장관급 내지는 부총리급 회담을 하게 되었다.

    회담이 이어지면 미-북은 정상회담을 열어 향후 한반도 문제를 결정지을 큰 틀을 만들 수 있게 된다.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한반도에 살고 있는 한국을 배제한 채, 전쟁을 일으키고 북한 주민을 못살게 한 정권이 외세인 미국과 더불어 한반도 운명을 결정짓는 사태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미-북 양자대화를 거부하는 부시 정권이 출범함으로써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DJ와 노무현 정부의 핵심 세력은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고 하는 지금도 미-북 양자회담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히틀러의 고집

    의원내각제 국가인 독일은 여러 정당이 정치에 참여해 어느 한 정당이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 때문에 1위를 한 당이 다른 당과 연합해 연립정권을 세우는 것이 특징이 되었다. 중국이 대만을 고립시키기 위해 ‘하나의 중국’이라는 오만한 정책을 관철했다면, 독일의 히틀러는 나치만의 단독정부 결성을 주장하며 이를 관철한 정치가이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는 1930년 총선에서 18.3%를 득표해 사민당에 이어 2위를 기록했으나 ‘나치가 단독 정부를 세울 때를 기다리겠다’며 사민당이 중심이 된 연립내각 참여를 거부했다. 1932년 총선에서 나치는 37.8%를 득표해 1위를 기록했지만 같은 이유로 연립내각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면서 히틀러는 강력한 반(反)사회주의 정책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노동운동에 지친 자본가와 대지주에게 희망을 주었다.

    세계 제1차대전 패전과 1929년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고통받던 독일에서 자본가와 대지주가 히틀러를 적극 지지하기 시작하자 힌덴부르크 당시 대통령은 위기 타파를 위해 히틀러를 총리에 임명했다(1933년). 선명한 노선으로 자기주장을 관철하는 히틀러의 노련함은 총리라는 날개를 달자 더욱 빛을 발했다. 자본가의 지지를 얻은 그는 순식간에 나치 단독 정권을 만들어냈다. 일당독재체제를 갖춘 그는 이듬해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자 대통령 지위를 겸했는데, 대통령과 총리를 겸하게 된 그를 독일 언론은 ‘총통’으로 불렀다.

    총통은 독일 군인들을 대거 나치에 입당시켜, 독일군을 나치의 군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어 숱한 사회단체도 그 구성원을 나치에 가입시킴으로써 나치의 외곽 조직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나치의 일당독재체제를 굳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나치와 유사한 방법으로 군과 사회단체를 장악하는 것이 북한 체제이다. 북한군 간부는 대부분 노동당에 가입해 있기에 북한 군부는 노동당의 군대가 되었다. 실제로 북한 노동당 강령은 인민군을 ‘노동당의 혁명무력’으로 정의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 독일은 넓은 영토를 주변국들한테 빼앗겼다. 빠른 속도로 산업을 부흥시킨 히틀러는 실지(失地)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이에 패배감에 젖어 있던 독일국민은 크게 호응하기 시작했다.

    체임벌린과 뮌헨 회담

    1938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은 같은 게르만계인 오스트리아와 게르만인이 많이 사는 체코 주데텐 지역과의 합병을 요구했다. 그해 3월 독일은 오스트리아에 독일군을 진주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을 현실화하고 이어 주데텐 지역도 장악했다. 이로써 독일의 체코 침공 가능성이 높아지자 유럽의 강자인 영국이 독일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영국 총리는 네빌 체임벌린(1869~ 1940)이었는데, 그는 히틀러의 체코 침공을 막기 위해 독일로 날아갔다. 9월29일 히틀러를 만난 그는 히틀러로부터 “앞으로 전쟁을 하지 않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각서를 받는 데 성공했다.

    체임벌린이 이 각서를 들고 돌아왔을 때 영국 조야는 그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찬양했다. 그러나 처칠 의원만은 히틀러의 속셈을 잘못 보고 있다며 “히틀러는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외쳤다. 처칠의 주장은 사실이 되었다. 뮌헨 회담 직후 독일은 군대를 보내 체코를 합병하고 슬로바키아를 위성국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로 인해 체임벌린의 외교력이 심판대에 올라 실각하고 독일의 위협을 강조하던 처칠이 집권하게 되었다.

    1991년 북한은 남북총리급 회담에서 비핵화에 관한 합의문에 서명했다. 1994년 미국과의 제네바합의에서도 핵포기를 약속했고, 지난해 열린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에서도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는 대신 북한은 모든 핵을 포기한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북한은 이 모든 약속을 어기고 미사일을 무더기로 발사하고 마침내 핵실험을 강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북한을 상대로 대화만 고집하는 것은 히틀러의 ‘간’을 키워준 체임벌린의 우(愚)를 답습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노무현-이종석 식 평화와 번영정책은 과연 옳은 것일까.

    자기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펼친 벼랑끝 전술에 말려드는 것은 김정일을 히틀러로 키워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렇게 된다면 6·15정상회담은 제2의 뮌헨회담이 될 것이다. DJ는 정상회담으로 노벨상이라도 받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그러한 영예도 누리지 못다. 노무현은 김정일의 ‘간’을 키워줌으로써 제2의 체임벌린이 되는 길을 걸어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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