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호

‘향수’를 버려야 미래가 있다

수교 50년 한일관계 해법

  • 심규선 | 동아일보 대기자 ksshim@donga.com

    입력2014-12-19 09: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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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은 예전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향수를 버려야 한다.
    • 이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그런 허약한 나라가 아니다.
    • 좀 더 당당해져야 한다.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영토 역사 문제 등은 끝까지 추궁하되, 일본이 결정할 수 있는 헌법 개정이나 집단자위권 확보 등은 인정해야 한다.
    ‘향수’를 버려야 미래가 있다

    2014년 11월 13일 미얀마 네피도 미얀마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3(한중일) 정상회담 참석자들. 왼쪽 두 번째부터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박근혜 대통령, 테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 리커창 중국 총리.

    한일관계가 매우 안 좋다.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1973년 8월 김대중 씨 납치사건 이래로 최악이라고 말하는 전문가가 많다. 그러나 그때와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돌발사건이었고, 한국 측이 일방적으로 일본의 주권을 침해한 것이어서 한국의 사과 수위만이 문제였다. 실제로 이 사건은 한국이 사과하고 일본이 더 문제를 삼지 않으면서 미봉됐다.

    지금은 어떤가. 양국의 불편한 관계는 돌발사건이 아니라 고착 상태로 접어들었고, 어느 일방의 잘못이라고 하기 어려운 데다, 해결 방안도 찾기 힘들다는 점에서 문제가 더 심각하다. 2015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앞두고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한일 간의 교착상태를 어떻게 풀지를 놓고 이런저런 심포지엄이나 토론회 등을 열지만 뾰족한 해법을 찾지 못한다. 정치가 얼어붙으니 정부 레벨에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한일관계를 어떻게 풀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언급해둬야 할 것이 있다. 한국에서는 ‘한일관계를 푼다’는 의미를 일본의 양보를 통해 예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일은 힘들 것이다. 최근 학계에서는 현재의 한일관계를 ‘복합골절상태’로 진단하고, 치유한다 하더라도 예전 같은 관계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한국 학자들도 현재의 갈등관계를 ‘관리’라는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 즉 비정상처럼 보이는 지금이 사실은 정상이라는 시각이다.

    양자관계에서 다자관계로

    한일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크게 바뀐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역내 역학관계의 변화다. 변화의 중심에 중국의 대두가 있다. 중국의 급격한 부상은 외교 안보 경제 군사 등 전 영역에서 글로벌 쟁점이다. 중국의 대두는 필연적으로 일본과의 마찰을 야기했다. 더욱이 두 나라는 과거에 전쟁까지 벌인 사이다.



    초조한 일본의 선수(先手)가 2012년 9월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국유화다. 중국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양국 정상회담은 중단됐다. 2014년 11월 10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가까스로 만나 위기국면을 봉합했으나 양국관계가 언제 어떻게 다시 덧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일본의 최대 관심사가 중국으로 바뀐 지금 한국의 위상이 약화하면서 한국과 일본은 양자관계가 아니라 다자관계의 틀 속으로 들어간 느낌이다. 미국이 들고 나온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와 ‘아시아 재균형(Asia Rebalancing)’ 전략도 양국관계의 새로운 변수다.

    중국의 부상과 관련해 일본이 한국을 부정적으로 보게 된 중요한 요인이 또 하나 있다. 한국이 너무 중국 쪽으로 기운다는, 이른바 한국의 중국 시프트(중국 경도)에 대한 강한 불만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관례를 깨고 일본보다 중국을 먼저 방문하고, 여러 차례의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 중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중국과 한국이 역사문제를 매개로 일본에 대해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다.

    배신감이 들었다고 하는 일본인도 많다.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원(EAI)과 일본 시민단체 ‘언론 NPO’의 2014년 5, 6월 공동조사(7월 발표)에 따르면 ‘자국의 장래를 생각할 때 한일, 한중관계 중 어느 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에 한국인은 4%가 한일, 43.8%가 한중, 47%가 양쪽 모두 중요하다고 답했다. 일본인은 12.4%가 한일, 15.6%가 중일, 47%가 양쪽 모두 중요하다고 답해 중국을 보는 한국과 일본의 시각에 큰 차이가 있음을 보여줬다.

    일본 국내 문제도 있다. ‘잃어버린 20년’이라는 말에서 보듯 일본은 오랜 기간 침체의 길을 걸어왔다. 최근 아베노믹스라는 수혈주사를 맞고 있지만 회복 여부는 불투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은 한국의 계속된 문제제기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젠 지쳤으니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다. 여유가 사라지면서 생긴 이른바 ‘사과피로증후군’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일본에 대해 ‘망각피로증후군’을 느낀다. 최근 일본에서 혐한(嫌韓)서적이 붐을 이루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혐한은 요즘 한술 더 떠 증한(憎韓)으로 바뀌었다는 말도 들린다. 혐한반중(嫌韓反中)이 증한혐중(憎韓嫌中)으로 더 고약해졌다는 것이다. 일본 내각부 조사에 따르면 일본 국민이 한국에 대해 ‘친밀감을 느낀다’가 ‘느끼지 않는다’를 확실하게 앞서기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다. 이 추세는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간 63.1%, 61.8%, 62.2%까지 올라가 정점을 이뤘다. 그런데 그게 다음 해인 2012년 39.2%, 2013년 40.7%로 급전직하했다. 1년 만에 최고에서 최저로 떨어진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이 결정적인 이유다.

    한국인 83% ‘일본 못 믿겠다’

    한국도 많이 바뀌었다. 한국은 그동안 일본의 역사 인식에는 비판적이었지만, 일본은 한국보다 선진국이며 경제발전에 도움을 준 나라, 아직도 배울 것이 있는 나라라는 인식을 가졌다. 그런데 한국의 국력이 신장되고, 국제적 위상이 올라가면서 일본을 무시하는 태도가 생겨났다.

    더불어 일본의 역사인식에 대해서도 국제적 추세와 인류보편적 인권 개념의 프리즘을 통해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국민 정서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재팬 패싱(Japan passing)과, 역사 문제에서 일본을 제재하자는 재팬 배싱(Japan bashsing)이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2014년 5월 한국일보와 요미우리신문 조사(6월 7일 보도)에 따르면 한국인 중 32%가 ‘일본을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51%는 ‘별로 신뢰할 수 없다’고 답했다. 83%가 일본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인 문제 말고도 최근 2년여 동안 한일관계는 크고 작은 갈등으로 더욱 냉랭해졌다. 요즘 한일 갈등의 양상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예전에 없던 현상이다.

    첫째, 문제가 한꺼번에 발생한다. 여러 문제가 동시에 일어나는 바람에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다.

    둘째, 작은 문제가 큰 문제로 부각돼 독립화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일제 징용자 문제가 대표적이다. 2011년 12월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의 교토회담이 이 문제 때문에 최악의 회담으로 끝나고, 박근혜 대통령도 이 문제를 강조하면서 위안부 문제는 양국의 최대 현안이 됐다. 2012년 5월 일제 징용자에게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우리 대법원 판결도 대형 시한폭탄이다.

    셋째, 사법(司法)의 문제가 갈등의 요인으로 부상했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한일협정에서 규정한 절차에 따라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지 않는 정부의 부작위(不作爲)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단(2011년 8월), 야스쿠니신사 방화범을 일본이 아니라 중국으로 보내도록 한 서울고법 판결(2013년 1월), 쓰시마에서 훔쳐온 불상을 안 돌려줘도 된다고 한 대전지법 판결(2013년 2월), 앞서 언급한 일제 징용자에 대한 대법원 판결(2012년 5월) 등이 일본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들 판결에 대해 일본은 “한국은 경기 도중 골대를 옮기는 나라”라는 불만을 표시했다. 2014년 11월 쓰시마에서 또다시 불상을 훔친 혐의로 한국인 5명이 체포된 것도 악재다.

    갈등의 국제화

    넷째, 갈등의 무대가 국제화한다. 미국에서 벌어진 위안부 소녀상(像) 건립을 둘러싼 갈등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주로 재미동포들이 활동하는 데 비해 일본은 정부까지 뛰어들어 뉴스를 키운다. 2014년 1월 프랑스 앙굴렘 만화페스티벌에서는 위안부 만화 전시를 둘러싸고 양국이 갈등을 빚었다. 일본이 메이지 시대의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에 등록하려는 시도에 대해 한국이 한국인 징용자가 그곳에서 강제 노역을 당한 사실을 들어 공개적, 집단적으로 반대한 것이다.

    다섯째, 갈등의 최전선에 양국 지도자가 있다. 매우 안 좋은 구도다. 한국은 아베 총리를 대표적인 초강경 우익, 또는 역사 수정자로 보면서 강력히 비판하고, 그가 자리에서 물러나면 갈등이 완화될 것으로 기대한다.

    일본 정부, 언론, 일반인 사이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확산된다. 취임 초기의 기대감은 사라졌다. 박 대통령이 해외에 나가 예외 없이 일본을 비판하는 데 대해 ‘고자질 외교’라는 말로 불쾌감을 표시한다. 양국 지도자가 전면에 나서는 바람에 타협을 이끌어내야 할 공무원들마저 설 땅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큰 문제다.

    여섯째, 최근에는 양국 언론의 보도태도도 도마에 올랐다. 양국 언론이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자국의 내셔널리즘을 부추긴다는 비판이다. 냉정한 심판이 되어야 하는데 선수로 뛰려는 유혹을 느낀다는 것이다.

    비공식 라인도 막혀

    문제 해결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전에는 양국 간에 문제가 생기면 공식, 비공식 라인이 모두 움직여서 어떻게든 풀려고 애썼다. 그러나 지금은 양쪽 모두 작동 불능 상태다. 공식 라인이라고 하면 역시 고위관리의 정기 회담과 궁극적으로는 정상회담을 의미한다. 그러나 2011년 12월 이명박 대통령과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의 교토 회담 이후 정상회담은 끊겼다. 2014년 3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주선으로 한미일 3자 정상이 만난 적이 있으나 효과는 없었다. 2012년 12월 아베 정권, 2013년 2월 박근혜 정권이 출범한 이래 정상회담이 없었다. 박 대통령이 2014년 11월 미얀마 네피도에서 열린 동남아시아국가연합+3회의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을 제안했지만, 언제 실현될지는 불투명하다. 일본에서는 일중 갈등은 풀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데, 일한 갈등에는 열의를 갖고 해결에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말한다.

    비공식 라인은 원로들의 막후 조정을 뜻한다. 그러나 한국에서 김종필 씨가 정계에서 은퇴하고 박태준, 김윤환 씨 등이 별세하면서 막후 라인이 힘을 잃었다. 일본에도 후쿠다 야스오, 모리 요시히로 전 총리 정도가 남아 있으나 일본의 악화한 대한(對韓) 정서와 한국의 파트너 소멸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동안 그 나름대로 역할을 했던 한일의원연맹이나 한일협력위원회 등도 힘이 많이 빠졌다.

    ‘향수’를 버려야 미래가 있다

    2014년 8월 16일 미국 미시간 주 사우스필드 시에서 열린 위안부 소녀상 제막식. 소녀상을 제작한 김운성 김서경 부부(왼쪽에서 첫 번째, 네 번째) 등 한인 인사들과 시드니 랜츠 시의원(가운데)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한일관계가 악화하면서 예전 성과를 다시 살펴보자는 움직임도 있다. 예전 성과라 함은 역대 한일 정부가 합의해 발표한 선언이나 역대 일본 총리의 담화를 말한다.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때 발표한 한일협정(한일기본협약)은 차치하고라도 한일 간, 또는 일본이 발표한 문건 중에는 중요한 것들이 꽤 있다.

    두 나라가 합의해 발표한 선언 중 대표적인 것이 1998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위한 공동선언’(한일 뉴파트너십 선언)이다. 최근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선언이 저평가돼온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시하고, 지금이라도 이 선언의 정신을 살리도록 양국이 노력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한다.

    일본이 발표한 것으로는 종전(終戰) 50년인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발표한 무라야마 담화, 종전 60년인 2005년 8월 15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발표한 고이즈미 담화,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2010년 8월 10일 간 나오토 총리가 발표한 간 담화가 있다. 그 밖에 위안부의 강제동원을 인정한 고노 담화(1993년 8월)와 교과서를 만들 때 근린제국(近隣諸國)을 배려해야 한다고 규정한 미야자와 담화(1982년 8월) 등이 있다.

    이들 문건에 담긴 정신을 제대로 살렸다면 한일관계가 지금처럼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문건에 대해 양국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은 별로 중요하게 평가하지 않았고, 일본은 내세우기는 했으되 지키려는 마음이 부족했다. 고노 담화를 예로 들자면 한국은 그 중요성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으면서도 일본이 수정한다고 하니까 발끈하는 양상이고, 일본은 자국의 양심과 양식을 보여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문건 중 하나인데도 그 의미를 망각하고 그나마 없애버리고 싶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문제는 종전 70년을 맞아 아베 총리가 2015년 8월 내놓을 것으로 예상되는 아베 담화다. 만약 아베 담화가 기존 담화의 취지를 계승하지 않거나, 이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는다면 한일관계는 더욱 악화할 것이 틀림없다.

    日 국가책임 인정이 열쇠

    이처럼 꼬일 대로 꼬인 한일관계를 어떻게 풀 것인가. 단기적, 장기적 접근 방법이 있다. 단기의 최대 현안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푸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도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관계 정상화는 없다는 뜻을 여러 번 밝혔다. 일본은 국교 정상화 때 이미 해결된 문제로 더 내놓을 것이 없다고 버틴다.

    이 문제의 가장 큰 쟁점은 일본의 국가책임 인정 여부다. 2012년 3월 민주당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 시절 사사에 겐이치로 외무성 차관이 제시한 이른바 ‘사사에 3점 세트’라는 것도 있고, 그해 10월 말 사이토 쓰요시 관방 부장관과 이동관 전 대통령홍보수석이 논의한 안도 있으나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 사사에 3점 세트는 일본 총리의 공식 사죄,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인도주의적 배상, 주한 일본대사의 피해자 방문 및 총리의 사죄문 낭독과 배상금 전달이 기둥이다. 진일보한 제안이었지만, 일본의 국가책임 인정이 들어있지 않아 결렬됐다.

    양국 정상 만나 연극이라도…

    사이토-이동관 안(案)은 일본 정부가 각의 결정으로 국고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1인당 300만 엔을 사죄금으로 지급하고, 일본 총리가 할머니들에게 ‘일본 정부의 책임을 통감한다’는 표현이 들어간 사죄 편지를 쓰며, 주한 일본대사가 할머니들을 만나 총리의 편지를 낭독한 뒤 사죄금을 전달하고, 제3차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동 연구한다는 내용이었다고 한다(2014년 11월 22일 동아일보 한기흥 논설위원 칼럼).

    이 안은 노다 총리가 그다음 달인 11월 중의원을 해산하면서 빛을 보지 못했다. 민주당 정권 시절 나온 이런 안들은 현재 실현성이 더 줄어들었다. 한일관계를 중시했던 민주당이 정권을 빼앗기고 지금은 한일문제에 상대적으로 강경한 자민당이 정권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자리에서 자민당 유력 의원들에게 민주당안의 실현 가능성을 물어보자 한결같이 “어림도 없는 분위기”라고 답했다.

    어쨌든 필자는 오래전부터 ‘양국 정상이 만나 연극을 하라’고 제안해왔다. 해결을 전제로 만날 것이 아니라 해결을 위한 로드맵을 합의하는 것을 전제로 만나고, 그 성과를 양국은 자국에 유리하게 설명하며, 그 설명에 대해 상대방은 이의를 달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실무자들이 만나 꼼꼼하게 시나리오를 짜야 할 것이다. 정상회담에 ‘연극’이라는 말을 쓰는 데 대해 거부감이 들 수도 있으나, 현재로는 돌파구를 열 방법이 전혀 없기에 그런 말까지 동원한 것이다.

    이런 방법이 과연 가능한가. 2014년 11월 10일 중일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냉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일관했고, 한국 언론은 아베 총리가 홀대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중국 언론도 일본이 원해서 만난 회담이라고 깎아내렸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시 주석의 태도는 중국 국내용 제스처라고 치부하고, 아베 총리가 냉대를 받았다는 사실은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그 대신 회담을 통해 우발적인 센카쿠 충돌을 피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강조했다. 합의문 중에 표현이 모호한 대목을 양국은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했지만 서로 문제 삼지 않았다. 지금 한일관계도 그런 전략적 선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돌파구를 열고 그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가능하면 2015년 초까지는 만나야 한다. 그래야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의 긍정적인 무드를 조성할 수 있다. 정상회담이 성사된다면 민간과 정부, 연구자들 레벨에서 각종 문화 행사와 교류 이벤트, 토론회, 심포지엄 등을 열어 미래지향적인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투 트랙 전략

    하지만 그전에 한국과 일본은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를 분명히 해둬야 한다. 서로에게 득이 안 된다면 우호라는 것도 공허하기 때문이다.

    일본을 버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일본은 여전히 세계 3위의 경제 대국으로 한일 양국은 경제 분야를 비롯한 여러 영역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한국과 일본 모두 미국의 중요한 동맹이며, 중국이 일탈할 경우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한일동맹, 또는 한미일 3국 동맹밖에 현실적인 대안이 없다.

    또한 박근혜 정부의 3대 외교정책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동북아 평화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라는 것도 일본의 도움 없이는 제대로 굴러가기 힘들고, 미래 통일한국에 실제로 주머니를 열고 도와줄 국가 중의 큰손이 일본이라는 것도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으로서는 감정에 치우쳐 쓸 수 있는 카드를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이는 일본도 다르지 않다. 즉 두 나라는 갈등을 풀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가진 셈이다.

    다만 앞서도 지적했듯 한일관계는 이제 조정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불가능한 예전의 관계를 꿈꿀 것이 아니라, 현 상태를 유지하거나 더 악화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쪽으로 방향과 수준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점에 합의한다면 양국의 갈등을 키우지 않을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이 눈에 들어온다. 즉 역사 문제와 그 외의 문제를 분리 대응하는 투 트랙 전략을 견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과 대학생, 지방자치단체 등 풀뿌리 교류를 확대하고, 해외에서의 한일협력관계를 강화하며, 양국 언론은 상대방을 불필요하게 자극하지 않도록 하고, 한국과 일본에 똑같이 영향력을 가진 미국을 완충역으로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추궁하되 인정하라

    또 하나, 꼭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다. 양국 지도자의 결단에 관한 것이다. 한일관계는 그냥 국민에게만 맡겨두면 갈등이 증폭되기 쉽다. 지도자는 국민과 국익 중에서 국민에 편승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국민을 설득하고 결단을 내리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모두 ‘향수’를 버려야 그나마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일본은 과거에 대한 향수를 버려야 한다. 일본의 자랑은 제2차 세계대전 전(前) 제국주의 시절이 아니다. 종전 이후의 눈부신 성장과 국제적 기여를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러면 과거에 대한 사죄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국은 예전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향수를 버려야 한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좋아하지 않는 건 당연하다. 그렇다고 일본의 모든 것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한국도 이제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던 그런 허약한 나라가 아니다. 좀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영토 역사 문제 등은 끝까지 추궁하되, 일본이 결정할 수 있는 헌법 개정이나 집단자위권 확보 등은 인정해줘야 한다.

    한일관계는 예전에 가깝고도 멀다고 했다. 그걸 지금까지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만들려고 무진 애를 써왔으나 어렵다는 게 드러났다. 이제는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나라를 지향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필자는 동아일보 도쿄특파원과 게이오대 방문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한일포럼 운영위원, 일제강제동원피해자 지원재단 이사, 한일축제한마당 실행위원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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