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美 카터 정부 홀부르크의 ‘박정희 제거론’과 10·26
- 노태우 북방정책·전작권 환수 추진은 시대 흐름 순응
- YS가 하나회 척결 안 했다면 노무현 때 일 났을 수도
- 現 야당 집권하려면 DJ의 연대전략 배워야
- MB는 싱거운 사람… 철학이 없었다
- 참모들이 받아 적기만 하는 건 만화 같은 일
동아시아가 요동한다. 오바마의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 시진핑의 중국몽(中國夢)이 충돌한다. 정경유착 자본주의를 뒷배로 삼은 러시아 푸틴의 동진(東進)도 요란하다. 아베의 일본도 편 가르기 연대, 셈법 외교에 혈안이다. 북한의 3대 세습 독재집단은 넋 나간 이념을 손에 쥐고 도발을 일삼는다.
그렇다고 한국 정부가 기민한 것도 아니다. 주변 정세가 급변하는데도 “통일은 대박”이라는 식의 설익은 수사만 난무할 뿐 국가미래전략에 대한 논의가 빈약하다. ‘신동아’와 미래전략연구원이 2015년 연중기획으로 ‘국가미래전략을 묻는다’를 시작한 까닭이다.
국가미래전략을 올바르게 세우려면 현대사를 이끌어온 역대 대통령의 공과(功過)와 관련한 역사적 교훈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한다. 첫 순서로 남재희 전 장관을 선정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11월 26일, 12월 4일 서울 중구 관훈클럽에서 그를 두 차례 만났다.
이승만과 김구의 엇갈린 행보
▼ 역대 대통령의 공적과 허물 중 교사(敎師)로 삼을 것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을 것을 국가미래전략과 연관해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관련한 것부터 여쭤보겠습니다. 현대사의 대표적인 가정적 질문입니다만,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백범 김구 선생이 협력해 대한민국을 건국했다면 친일파 문제와 관련한 논란 등을 극복해 지금보다 더욱 통합적인 사회가 구성됐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현대사의 거인인 두 인물이 합작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또한 두 분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신동아’ 편집장을 지낸 손세일 전 국회의원이 내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쓴 ‘이승만과 김구’라는 책이 10권 넘는 시리즈로 나와 있습니다. 손 전 의원이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의 일거수일투족을 철두철미하게 연구했습니다. 팩트 조사를 철저하게 했는데, 해석은 다른 문제입니다.
두 인물을 평가할 때 광복 후 미군이 남한에 진주했다는 팩트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김구 선생은 ‘국부 중국’에서 활동했어요. 젊은이들은 잘 모를 텐데 ‘장제스(蔣介石) 중국’을 국부 중국이라고 합니다. 국부 중국은 ‘마오쩌둥(毛澤東) 중국’과 내전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미군이 38도선 이남에 진주하면서 모든 게 결정된 겁니다. 진주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상 점령한 것이지요. 이 박사와 김구 선생의 라이벌전은 그날로 끝난 겁니다.”
▼ 그렇더라도 두 분이 힘을 모았다면….
“그게 현실적으로 어려웠어요. 두 분 다 훌륭하다는 데 이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인호 KBS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은 김구 선생이 대한민국의 공로자가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더군요. 독립운동만 했지 대한민국과는 무관하다? 그건 궤변입니다. 김구 선생도 이승만 박사처럼 신탁통치를 반대했습니다. 반공, 반탁을 한 겁니다. 두 사람은 ‘남한만 선거하는 게 옳으냐’ ‘북한과 대화 노력을 해본 후 선거하는 게 옳으냐’는 절차적 문제를 놓고 다툰 것입니다. 김구 선생이 어떻게 대한민국의 뿌리가 아닐 수 있습니까.”
美 뉴딜러가 주도한 토지개혁
▼ 이승만 전 대통령을 강조해 현대사를 해석하는 이들은 김구 선생을 깎아내리는 반면 김구 선생을 강조하는 이들은 이 전 대통령을 폄하합니다. 두 진영의 다툼이 지금껏 현실 정치와 국민 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거듭 말했듯 두 분 다 훌륭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논의해야 합니다. 그런 편파적인 논법을 지양해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성과 중 하나가 조선공산당 출신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발탁해 농지개혁을 시행한 것입니다. 농지개혁 덕분에 공산화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평가가 적지 않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가 미국 대통령으로는 전무후무하게 4선을 했습니다. 네 번째 임기 때 사망했는데, 대공황 때 뉴딜정책은 아주 개혁적이었습니다. 루스벨트의 이 정책을 뒷받침한 관료, 지식인을 ‘뉴딜러’라고 일컫습니다. 일본을 점령하고 남한에 진주하면서 뉴딜러들이 함께 왔어요.
일본의 농지개혁은 우리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일본의 전후 개혁은 뉴딜러 철학에 따라 진행됐습니다. 뉴딜러들은 우선 일본의 재벌을 해체했고, 이어 노동조합을 육성했어요. 민주주의를 하려면 노조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게 농지개혁입니다.
요컨대 한국의 농지개혁은 뉴딜러들의 프레임에 따라 집행된 거예요. 또한 해방 공간은 혁명적 분위기였습니다. 뉴딜러들이 요구하지 않았더라도 토지개혁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승만 박사는 토지개혁과 관련한 미국의 방침을 잘 알았고요. 공산당 출신인 조봉암이 보상 비율을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농림부 장관을 시킨 겁니다. 이 박사의 선견지명이라느니, 조봉암이 역할을 했다느니 하는 식으로 보는 것은 좁은 소견입니다.”
▼ 이승만 전 대통령의 의지로 1953년 10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습니다. 한국이 산업화, 민주화를 성취하는 데 이 조약이 도움이 됐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잘 유도했습니다. 6·25전쟁 중 작전권을 미군에 넘긴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이 박사가 반공 포로를 석방하는 강수를 두자 미국에서 특사가 옵니다. 복잡한 상황을 잘 정리해 상호방위조약으로 나아갔으니 외교를 아주 잘한 거죠. 이 대목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전시작전통제권을 지금껏 미군에 맡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거의 60만에 달하는 대군을 가졌으며 막대한 예산을 쓰는 국군이 전작권을 맡지 못한다는 것은 시대착오적 사고입니다. 이 박사와 관련해 하고 싶은 얘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권력을 대중에게 넘기다
▼ 말씀하십시오.
“이승만 박사가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던 제도를 부산 정치파동을 거치면서 직선제로 바꿉니다. 그것을 두고 이 박사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합니다. 직선제로 바꾼 것은 제도로서 좋은 겁니다. 계엄령을 선포해 국회의원들을 반(半)구속 상태로 만들어놓고 통과시킨 탓에 독재 수법이라는 식으로 매도만 당하는데 나는 견해가 다릅니다. 이승만 박사가 자유당을 창당할 때 처음엔 당명을 노동당으로 지으려고 했습니다. 자유당 정강정책을 보면 무지하게 진보적입니다. 부산 정치파동 때 깡패짓 한 것만 빼놓으면 직선제로 바꾼 것은 한국 정치사의 진일보 중 하나입니다. 부산 정치파동은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절차적 문제를 일으켰으나 미래를 생각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 권력을 봉건귀족으로부터 대중에게 넘긴 거예요. 물론 직선제를 해야 대통령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겠지만요. 이 박사에게 독재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요. 별도의 표현을 써야 할 것 같아요. 독재보다는 ‘도약하는 전제(專制)’라고나 할까요. 박정희 대통령을 dictator(독재자)라고 규정한다면 이 박사는 authoritarian(독재적 권위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이 박사 양아들 쫓아내는 시위를 주모한 게 나예요. 선봉에 서서 쫓아내버렸습니다. 이 박사를 별로 안 좋아하지만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안 맞습니다. 분단은 어쩔 수 없었던 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 박사가 자기 좋으려고 분단의 길로 매진했다? 그건 아니란 말입니다. 대한민국 수립은 미소 냉전 탓에 불가피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 와중에도 단념하지 않고 민족 통합에 몸을 던진 것이고요.”
▼ 박정희 정권으로 화제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사상계’ 1961년 6월호 권두언에서 “5·16군사혁명은 누란의 위기에서 민주적 활로를 타개하려는 최후의 수단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평가했습니다. 1960년대 지식인 사회에서 5·16군사정변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어떠했는지요.
“1963년 대통령선거가 끝난 후 사상계에서 투표 결과를 총괄하는 논문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제목을 ‘미지수 민주주의’라고 달았는데, 사상계에서도 그 제목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미지수 민주주의라고 명명한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뜻이었습니다. 제목을 참 잘 단 것 같아요. 4·19 때 활약한 진보적 정치인 일부가 오판했어요. 장준하 씨 역시 그런 맥락에서 지지한 것이고요. 널리 알려졌듯 미국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사상을 의심하지 않았습니까.”
김종인 ‘경제민주화’의 속내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업화의 기획자, 주도자로 평가할 수 있을 듯합니다. 1970년대 중화학공업 진흥정책과 재벌을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은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으나 우리가 누리는 번영의 엔진 구실을 했습니다. 이 같은 정책을 두고 당대에는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건 복잡한 얘기인데, 경제개발계획의 생성과정을 먼저 살펴봅시다. 첫째, 박정희 대통령이 쿠데타를 했단 말이에요.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겁니다. 민주주의를 깨버렸잖아요. 그건 다른 것으로 보상해줘야 인정받을 수 있는 겁니다. 둘째, 장면 내각이 쿠데타 이전에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해놓은 게 있었습니다. 셋째, 박 대통령이 만주군 장교로 근무할 때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 경제계획의 총책임자였어요. 만주국을 단순히 괴뢰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는 게, 그 나름대로 새로운 국가 건설 이상이 있었습니다. 조선족, 만주족, 한족, 몽골족, 일본족의 5족이 새로운 이상향을 건설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주국 건설의 총책임자가 기시였고요. 박 대통령은 만주국에서 국가 건설 과정을 봤습니다.
이 세 요소가 결합해 경제개발이 시작된 겁니다.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면서 이병철, 정주영 씨 같은 사람을 거점으로 키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문제는 박 대통령이 재벌이 적당히 큰 다음에 체크 앤드 밸런스(check · balance)를 할 장치를 안 만들어놓은 상태에서 10·26을 맞았다는 겁니다. 평생 집권할 줄 알았으니 서두르지 않았겠죠. 김종인 전 의원(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나한테 밤낮 하는 얘기가 그겁니다. 지난 대선 때 김종인이 얘기한 경제민주화라는 게 체크 앤드 밸런스를 하겠다는 거였어요.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박 전 대통령이 마무리하지 못한 걸 하고 싶었던 겁니다.”
남 전 장관은 이 대목에서 “오늘 내가 그간 안 나온 얘기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라면서 웃었다.
“우리 핵무기가 어디를 향하겠소?”
▼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에만 20년 가까이 언론인으로 살다 1979년 집권당인 공화당에 참여했습니다. 핵무기 개발 시도 등으로 한미 간 갈등이 첨예하던 때입니다. 당시 한미 갈등과 그것이 박 전 대통령 시해 사건으로 이르는 과정 등과 관련한 생생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공화당에 참여한 게 아니라 징발된 겁니다. 신문사에 가만히 있는데 낙하산으로 공천을 받았어요. 지금은 널리 알려졌지만 핵무기를 개발하려 한 것은 틀림없는 얘기입니다.
육군 참모총장을 지내고 국회 국방위원장을 한 민기식이 1970년대 후반 일본 기자 댓 명하고 술을 마시는데, 기자들이 취기가 오르자 핵과 관련한 것만 계속 물었다고 해요. 파장할 즈음 민기식이 ‘당신네들이 우리가 핵무기 개발하는 것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데 그래, 핵무기 개발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 핵무기가 어디를 향하겠소? 미쳤다고 같은 동포인 평양을 향하겠소? 핵무기를 개발하면 도쿄나 베이징으로 향할 거요’라고 말하니 일본 애들이 혼비백산했다고 해요.
어쨌거나 핵무기 개발 탓에 미국과의 관계가 아주 시리어스(serious)했습니다. 나는 1979년 10월 26일의 슈팅(shooting)은 미국과 관계가 있다고 봐요.”
▼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뉴욕타임스가 일요일판에 뉴욕타임스매거진이라고 주간지 형태로 된 별도의 잡지를 냅니다. 뉴욕타임스매거진은 수준이 아주 높은 매체예요. 언론인 겸 외교관인 리처드 홀부르크가 이 매거진에 논문을 기고합니다. 1976년 미국 대선 때 카터 선거운동본부에서 일한 인물입니다. 글을 아주 잘 써요. 홀부르크는 카터가 대통령에 취임(1977년 1월)하기 직전 “나도 ‘박정희 제거론’에 동의한다”는 내용이 담긴 논문을 뉴욕타임스매거진에 투고합니다. ‘한국 사태를 해결하려면 박정희를 제거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미국 학자의 주장에 맞장구를 친 것입니다.
홀부르크가 나중에 카터 정권에서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되는데, 그 직책을 맡을지 모르고 글을 그렇게 강하게 쓴 것 같아요. 중앙정보부 해외 파트에서 홀부르크의 글을 체크했겠죠.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장)는 미국이 박 대통령을 제거하고 싶어 한다고 여겼을 겁니다.
홀부르크가, 박 대통령 살아 있을 때는 한국에 오지 않더니 10·26 이후에는 뻔질나게 들락거렸습니다. 박 대통령이 그렇게 된 직후에도 한국을 방문했는데, 미국대사관에서 국회의원, 언론인 등을 초청해 대대적인 축하 파티를 열었어요. 나도 초청받았습니다. 파티장에서 홀부르크한테 ‘박 대통령 제거에 동의한다는 글을 썼던데, 박 대통령이 이렇게 되니 기분이 어때요?’라고 물었더니 자리를 피해버리더군요.”
▼ 박근혜 대통령이 10·26을 겪은 후 미국과 관련해 어떤 의심을 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건 내가 알 수 없지.아무튼 무슨 귀신이 들렸는지, 용케 뉴욕타임스매거진을 읽은 거야, 내가.”
‘서울의 봄’과 이원집정부제
▼ 신군부가 1980년 ‘서울의 봄’ 때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비상시의 통상적 진압군이 아닌 공수부대를 투입해 무리한 진압작전 끝에 많은 시민을 희생시킨 것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군인들에 의해 기획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정치권이 왜 이 같은 흐름을 저지하지 못했을까요.
“그때 3김이 서로 싸우느라 정신없었잖아요. 김종필(JP) 씨가 군 출신이란 말이에요. JP는 당시 대통령 직선에만 일로매진했어요. 중앙정보부를 만들었고, 육사 8기의 대표선수였고, 하나회의 존재도 알았을 텐데, 흐름을 잘못 읽은 것 같아요. 김종필 씨가 워치도그(Watch Dog) 노릇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정승화 세력이 딴마음을 먹은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최규하-정승화- 신현확 라인이 김종필 씨를 아웃시킨 겁니다. 신현확이 TK(대구·경북)의 대부 아닙니까. 정승화 군부와 신현확이 김종필은 안 된다 여긴 겁니다. 그런데 정승화가 전두환이한테 나가자빠진 거지. 김종필도, 정승화도 신군부의 동향을 체크했어야 하는데 못한 겁니다. YS(김영삼 전 대통령),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군을 잘 몰랐고요.”
▼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나하고 친했는데, 글라이스틴이 죄스러워했어요. 변명하고 다녔습니다. 저녁식사를 여러 번 했는데, 계속 사과하는 거야. 자기는 박준병의 20사단만 병력 이동을 승인했다는 겁니다. 글라이스틴 얘기가, 공수부대 투입은 승인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박준병은 젠틀하고 사람 자체가 괜찮아요. 5·18 재판 때도 박준병만 무죄를 선고받았습니다.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해 기소된 사람 중 유일하게 무죄예요.”
▼ 3김이 힘을 합쳤으면 쿠데타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좋은 말씀인데, 합쳐도 어려웠을 거예요. 앞서 말했듯 신현확, 정승화가 딴마음을 먹었어요. 그리고 최규하 씨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은근슬쩍 거기에 발을 담근 것 같아요. 신현확 씨가 이원집정부제를 하려고 모사를 꾸미다가 일이 안 된 겁니다. 최규하 씨는 이원집정부제를 하면 대통령을 자기가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요.”
이원집정부제는 얼마 전에도 정치권에서 이슈가 됐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014년 10월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언급한 것.
12월 4일 서울 중구 관훈클럽에서 대담하는 남재희(왼쪽) 전 노동부 장관과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원장.
▼ 1980년대 학생운동이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발전합니다. 일부에서는, 역설이지만 전두환 정권의 역사적 기여가 이른바 486세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도 합니다. 당시 두 따님이 학생운동에 참여해 여당 국회의원으로서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이기도 했는데, 한국 사회에서 486세대의 역사적 의미와 긍정적·부정적 측면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어려운 주제인데, 그 사람들이 지금 정치권에서 문제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친구들이 야당에서 역할도 제대로 못하면서 밤낮 문제 되는 거잖아요. 정치적 주도권은 못 잡고 끝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리더가 안 나올 것 같습니다. 김부겸, 김영춘이 젊은 축 중에선 제일 나은 것 같은데…. 인기는 충남지사(안희정)가 많은 것 같아요. 만나는 사람마다 제일 낫다더군요.
아무튼 국가 지도자는 하나의 시대를 만드는 사람인데, 그들 중에선 그런 사람이 안 나올 것으로 보여요. 한숨 나오는 사람이 많아. 야당의 몇몇 운동권 출신 의원을 보면 한심해요. 제주지사(원희룡)와 경기지사(남경필)도 대선주자로 거론되던데, 지사만 하면 대권후보가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 따님이 구속됐을 때 심경은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둘 다 구속됐어요. 지금은 박사학위 받고 둘 다 교수예요. 하나는 미국에서, 하나는 이화여대에서. 데모꾼들이 머리가 좋아요. 이건 여담인데, 둘 다 그렇게 됐을 때 탈당하고 투사가 돼 한번 붙어보려고도 했어요. 애매한 사안으로 잡아넣은 겁니다. 성추행 저지른 전직 국회의원이 당시 둘째딸 담당검사였는데, 평범한 것을 아주 그냥 흉악한 범죄자로 만들어버립디다. 서울대 법대 새카만 후배인데 나한테도 안면을 바꾸고 훈계를 하더군요.”
▼ 노태우 정부 때이던 1990년 민정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해 민자당을 창당합니다. 3당 합당은 한국 정치사에서 영남 산업화 보수세력과 영남 민주화 세력의 연합이라는 독특한 성격을 지녔지만 지역주의를 심화한 원흉으로도 평가받습니다.
“호남만 싹 빼버렸지.”
▼ 여당 국회의원으로서 3당 합당에 참여했습니다.
“김정례(전 국회의원) 씨가 도사인 것 같아요. 인사동에 ‘향정’이라고 밥집이 있어요. 3당 합당이 이뤄진 날 김정례가 나, 이종찬(전 국정원장), 이기택(전 민주평통 부의장), 김상현(전 의원) 이렇게 저녁을 먹자는 겁니다. 공교롭게도 저녁 약속 직전 3당 합당이 발표됐습니다. 김정례가 모르고 약속을 그렇게 잡은 거였어요. 3당 합당이 자연스레 화제가 됐습니다. 호남 고립인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얘기가 나왔어요. 이기택 씨는 중간에 4·19 동지들이 찾는다면서 빠졌고요. 그쪽도 대책회의에 들어간 거죠.
김정례는 여자니까 집에 가고, 나, 이종찬, 김상현 셋이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내가 언젠가 그날의 일을 글로 쓴 적이 있어요. ‘일생일대의 결단을 내릴 순간에 결심하지 못했다’고요. 이종찬, 김상현, 나, 이기택이라도 호남 고립은 불가하다는 명분으로 독립 부대를 형성했으면 정치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북방정책? 변화에 순응한 것”
▼ 노태우 정부가 한 일 가운데 보수·진보 양측으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는 것으로 북방정책이 있습니다. 이 정책은 옛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붕괴라는 세계사적 대변혁기의 객관적 조건에 의해서 추진됐다는 견해도 있고, 박철언 전 의원 등이 전두환 정권 때부터 국가안전기획부에 특별 팀을 꾸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등장 이후 사회주의권의 변화를 분석하면서 준비해오다 노태우 정부 때 권력 핵심으로 등장하면서 적극적으로 추진했기에 가능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세계사적 변화에 순응한 겁니다.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따른 거예요.”
▼ 정책이라는 게 객관적 배경도 중요하지만, 주체적 노력을 투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주체적인 것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국제 정세의 큰 흐름에 거역하지 않고 순응한 겁니다. 돌대가리들은 역행할 수도 있어요. 박철언만 머리 좋은 게 아니라 주미대사, 유엔대사를 지낸 현홍주가 두뇌가 아주 스마트합니다. 당시에 국제 정세 흐름을 탄 것은 아주 잘한 겁니다.
일례로 중국이 부상하는 상황에서 주한미군에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가 배치되는 것은 역으로 가는 겁니다. 노태우 씨의 북방정책과 비교해보면 전작권 전환을 연기한 것도 역행하는 겁니다. 노태우 씨는 흐름에 순조롭게 따라갔습니다. 약았다고 할 수 있어요. 노무현 씨처럼 미국에 어깃장 놓고 말썽부리면 안 되지만,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아는 듯 모르는 듯 흐름을 타야 합니다.”
그는 YS 정권의 가장 큰 공적으로 하나회 숙정을 꼽았다
“YS가 하나회를 제거하지 않았다면 보수적인 YS 정권에서는 별일이 없었을 테지만, DJ나 노무현 정권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릅니다. 쿠데타 위험이 존재하면 통치가 제대로 되기 어렵습니다.”
▼ 말씀하신 대로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나회’ 척결을 통해 쿠데타의 가능성을 없앴다고 평가받습니다. 남북통일 과정에서 군사적 문제가 발생하거나 중국, 일본 간 갈등 등으로 인해 군의 역할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쿠데타가 일어날 소지가 전혀 없다고 봅니까.
“장기적으로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분단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정세라는 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망각합니다. 하나회가 숙정된 게 겨우 20여 년 전 얘기입니다. 노무현 정부 때 어떤 극우 언론인이 군이 왜 가만히 있느냐고 쿠데타를 부추기는 듯한 언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치가 심각한 혼란에 빠지면 어떤 일도 배제할 수 없어요.”
“IMF 잔학상이 논쟁 핵심 돼야”
▼ 김영삼 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YS 정부의 가장 큰 상처는 외환위기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환란(換亂)과 관련한 YS 정부의 책임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경제 분야는 내가 자세하게 모릅니다. YS도 실패의 한 축이지만 경제 관료들이 구멍 낸 것 아닌가요? 관료들이 펀더멘털(Fundamental·경제기초)이 튼튼하다고 헛소리하다 곳간이 비는 것을 몰랐단 말이에요. 지금 하고 싶은 말은 IMF(국제통화기금)가 우리나라를 지나치게 가혹하게 다뤘다는 점입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상황과 비교해보세요. IMF의 잔학상이 논쟁의 주제가 돼야 할 겁니다.
DJ는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매크로한 것을 잘 몰랐거든요. 마이크로한 것은 시시콜콜 잘 아는데 큰 그림의 경제는 잘 몰랐다는 말이에요. DJ에게도 잘못이 많아요. IMF 처방대로 막 팔아먹었어요. YS는 복잡한 상황을 단순화해 돌파하는 능력이 뛰어난 반면 DJ는 1960년대부터 증권시장까지 빠삭할 만큼 디테일에 강했습니다. 건설업자를 만나도 시시콜콜 질문하며 공부합니다. 디테일이 축적돼 있었으나 경제철학까지 형성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진보진영에 속했으나 집권을 위해 보수주의자인 JP와 연대했습니다. 또한 이른바 신자유주의적 개혁도 수용하는 등 유연한 정치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DJ의 그런 행보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김영삼 씨는 어느 곳에 위치하든 늘 주류에 섰습니다. 낙천적인 데다 영남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다수파이기도 했고요. 김대중 씨는 타고난 소수파예요. 소수파가 살아남으려면 연대를 통해 세를 불릴 수밖에 없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공히 YS는 별로 안 건드렸어요. 같은 영남 출신이라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DJ가 당을 여러 번 만드는데 그때마다 무슨 파, 무슨 파를 보태잖아요. 7~8회 세를 불렸을 겁니다. 마지막에 울며 겨자 먹기로 JP와 손잡은 거죠. 대단한 사람입니다. 현재의 야당이 집권하려면 DJ의 전략을 배워야 합니다.”
순진한 노무현, 싱거운 이명박
▼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보수·진보진영의 평가는 크게 엇갈립니다. 진보진영에서는 한반도 평화의 메이커로서 높게 평가하는 반면 보수진영에서는 북한 핵무기 개발비용을 지원해준 책임을 묻기도 합니다.
“1964년, 1965년께 김대중 씨하고 단둘이 밥을 먹으면서 장시간 얘기한 적이 있어요. 좋은 말을 하고 헤어져야 할 것 같아 ‘김 의원은 내가 보기엔 한국의 빌리 브란트가 되셔야겠습니다. 한국의 빌리 브란트가 되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2 공화국 장면 내각 때 DJ가 국회의원도 아니면서 집권당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원외가 대변인이 된 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어요. 그만큼 머리가 좋았던 거죠. 그즈음 DJ가 취재를 마친 내게 흰 봉투를 하나 건네더군요. ‘대변인, 살림이 궁하지 않습니다. 필요 없습니다’라고 답했어요. 얼굴이 하얗게 되더군요. 원외라고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표정이었습니다. 30년 후 어느 상가에서 DJ를 만났는데, ‘남 의원, 그때 내가 준 촌지 안 받았지?’ 이러는 거예요. DJ가 기억력이 그 정도였어요.
DJ에게 ‘빌리 브란트가 되십시오’라고 말한 사람이니, 내 평가는 뻔한 거지. 김대중 씨의 대북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대박’은 솔직하게 말하면 1층은 안 짓고 2층만 짓겠다는 거예요. 박 대통령이 지어야 할 1층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 완화 아닙니까. 그것을 안 하고 통일대박을 얘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은 기득권 개혁의 상징 같은 이미지를 갖고 등장했습니다. 재벌개혁을 외쳤으나 거꾸로 재벌에 포획됐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또한 “진보는 무능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시각도 있고요.
“개혁을 못했지. 측근이 대기업과 엮여서…. 노무현 대통령과 국회 노동위원회에 함께 있었는데, 자기주장을 하다 비위에 안 맞으면 서류를 팍 팽개치고 욕하면서 나가곤 그랬습니다. 성격이 아주 당돌한 데가 있었어요. 강원용 목사가 개최한 한 세미나에서 대통령 후보이던 노무현 씨에게 ‘반미면 어떠냐고 했던데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손오공이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입니다. 점진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노 대통령과 김정일의 대화록을 보면 말이에요, 참 순진해. 민족 정기도 있고, 자주성도 다 좋은데, 나이브해요. 인권·노동변호사로 일할 때 급진사상이 머리에 잘못 입력돼버린 겁니다. 진정성은 있었어요. 그거 하나는 높이 살만한 사람입니다.”
▼ 이명박 정부는 범(汎)보수정권이라고 봐야 하는데….
“싱거운 사람이야, 그 사람은.”
▼ 이명박 전 대통령은 샐러리맨 신화, 청계천 성공 등을 배경으로 신보수의 심벌로 등장했으나 측근 비리 등으로 인해 보수의 도덕성 및 부패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아주 싱거운 사람이에요. 신보수의 힘으로 대통령이 됐는데, 결과적으로는 4대강, 자원외교, 측근 비리로 형편없게 됐습니다. 철학 없는 장사꾼이라고나 할까.”
매저스티 없는 지도자
▼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대박론을 내놓으면서 북한 문제 해결에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앞선 어느 정부보다도 중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면서 중국의 역할을 통해 북핵 문제, 북한 문제 해결을 도모합니다.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통일대박론은 앞뒤가 안 맞는 소리예요. 한중관계가 좋다는 것도 현상일 뿐입니다. 본질은 그렇지 않아요. 11월 말 주중대사를 지낸 정종욱(통일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씨가 강연하는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정종욱 씨가 똑똑한 사람이에요. 강연의 95%를 통일준비위원회 구성 등 별 볼일 없거나 문제 될 게 없는 얘기만 합디다.
그런데 강의 막판에 중요한 얘기를 하나 했어요. 중국 고위직에 오른 인사가 부국장급일 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한 적이 있다면서 그 고위 인사가 한 말을 소개하는 겁니다. 첫째, 남북통일 반대 안 한다. 둘째, 북한만 앞세우지 않는다. 셋째, 통일한국이 중국에 군사적 위협이 되면 안 된다…. 셋째가 핵심이에요. 한마디로 주한미군이 존재하는 한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정종욱 씨가 학자적 양심을 가진 터라 남의 얘기를 빌려오는 형식으로, 진실을 약은 방식으로 얘기한 겁니다.”
▼ 차기 지도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요.
“노태우 씨는 참모들이 써준 것만 5년 내내 읽었어요. 한번도 본인 생각을 얘기한 적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육성이 없는 대통령이었던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도 주로 누군가 써준 것을 읽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대통령이 말하는 대로 참모들이 받아 적기만 하는 것은 만화 같은 일입니다.
월터 리프먼(미국 언론인· 1889~1974)의 ‘퍼블릭 필로소피’(public philosophy·공공철학, 민중도덕)가 괜찮은 책입니다. 지금은 그 책이 나왔을 때와 시대가 다르기는 하지만 리프먼은 대통령에게 매저스티(majesty·위풍당당함)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매저스티를 가지려면 도덕적 권위를 갖춰야 한다는 겁니다.
이명박 씨에겐 도덕적 권위가 없었습니다. 정윤회 문건 사건과 관련해 박근혜 대통령도 그런 처지고요. 국민, 서민이 요즘 벌어지는 일과 관련해 어떻게 얘기할까요. 매저스티가 없는 겁니다. 도덕적 권위에 기반을 둔 매저스티가 있는 지도자가 등장해야 합니다.”
그는 대담을 마치면서 “지금껏 길게 얘기했는데, 어떤 대통령을 가장 높게 평가한 것 같아요?”라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