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복지에 따른 근로의욕 상실로 하락을 거듭하던 경제활동참가율이 1985년을 기점으로 반등하면서 경제성장 잠재력도 상승세로 돌아섰다. 선진국 대부분이 고령화로 잠재성장률이 하락하는 가운데 네덜란드는 1980년대 초 1%대에서 1990년대 3%까지 상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유럽 평균인 1.1%를 크게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노동시장 개선은 내수 확대에도 기여했다. 취업자 수 확대로 소득 기반이 높아지고, 시간제 근로 확산으로 근로시간이 줄어들면서 소비할 수 있는 여가시간이 늘어났다. 또한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육아 서비스 등 가사 관련 서비스 수요가 급증했다. 의료, 사회 서비스 등 여성 근로자 비중이 높은 산업이 발달하면서 전체 취업자 중 서비스업 종사자 비중은 1980년대 초 50% 수준에서 1996년에는 74%로 확대됐고, 서비스업의 활성화는 내수경기 회복을 촉진했다.
확대일로를 걷던 공공지출로 통제불능 상태에 빠진 국가 재정도 개선되기 시작했다. 실업자 수 감소에 따른 실업급여 축소, 경기 회복에 따른 세수 증대 효과 등에 따라 1980년대 초 GDP의 7.2%에 달하던 정부 재정적자는 1990년대 중반 2.2%로 줄어들었다.
노사정이 힘을 합친 개혁의 성공으로 1990년대 유럽연합(EU) 전체 연평균 성장률이 2.1%에 그친 동안 네덜란드는 3.1% 성장했고, 유럽의 강소국으로 변모한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병’ 대신 ‘네덜란드의 기적’이라는 평을 받게 된다.
Social Partner
네덜란드가 ‘컨센서스 경제’로 불리는 이유는 노사 간의 협약이 정책 수립에 중요한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바세나르 협약은 네덜란드의 컨센서스 경제가 부활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바세나르 협약은 임금 안정과 근로시간 단축을 추진한다는 원칙을 천명한 1장 남짓한 문서에 불과하지만, 이를 기반으로 이후 노사 간의 임금 안정과 고용 창출에 관한 사회협약이 지속적으로 수립됨으로써 컨센서스 경제를 이룰 수 있는 노사 합의의 기반이 갖춰졌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수 있었던 이유로 첫째, 노사정 간의 긴밀한 협조체제(Consensus Process)가 잘 갖춰져 있었다는 점. 둘째, 노사정 간의 관계가 동등한 파트너십에 근거했다는 점. 셋째, 노사 간 협약과 권고사항이 정책에 수용되고 실행에 옮겨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한편 노사가 임금 및 유연근로와 같은 이슈에 대한 합의에 이르도록 압력을 넣은 정부의 리더십을 꼽을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나라의 재건은 한 집단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고용주와 근로자 그룹 간 긴밀한 파트너십이 필요하다’는 사회적 인식이 퍼졌다. 이 시기에 컨센서스 프로세스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두 기관이 설립됐다.
1945년 설립된 노동재단과 1950년 설립된 사회경제평의회는 주요 고용주연합회와 노동조합이 중요한 사회 경제정책의 이슈를 논의하고 정부에 권고사항을 제공하는 플랫폼을 제공해왔다. 두 기관의 구성 멤버인 고용주연합회와 노동조합은 경제 발전에 동등한 위치를 가진다는 점에서 ‘사회적 파트너(Social Partner)’로 불린다.
네덜란드의 컨센서스 경제에서 노동재단과 사회경제평의회의 기능은 매우 중요하다. 두 기관에서 제안한 견해와 권고사항은 사회적 파트너 간의 통합적인 분석과 논의 끝에 나온 결론이기 때문에 만장일치가 대부분이고, 이는 사회경제 정책 논의 과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부는 두 기관이 제시한 견해를 사회경제 정책 입안 때 대부분 수용한다. 어떠한 정책이라도 컨센서스에 기반을 두는 것이 중요하며, 정책이 성공하려면 사회 전체적으로 폭넓은 지지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바세나르 협약을 비롯해 사회적 파트너들이 준비하고 서명한 모든 사회적 협약이 사실은 이 두 기관 내에서 사전 논의가 이뤄진 것이었다.
노동재단이나 사회경제평의회와 같은 기구가 네덜란드에만 있는 독특한 조직은 아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우 경제정책 결정 과정의 각 단계에서 노사정 3자가 집합적으로 관여하는 수준이 상당히 높으며, 이것이 네덜란드 컨센서스 경제가 작동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980년대 경기침체를 극복한 네덜란드 국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