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혼, 남의 집 송사인 줄로만 알았는데…

• 기업인과 정치인 가문, 결혼 득 될 게 없어 ‘반대’

• “태원이가 하겠다는 데 어쩌겠냐”던 선대회장

• SK 역사 만든 한 사람…지금 상황이 답답할 뿐

• ‘유공’ 인수와 이동통신 사업권, 특혜는커녕 불이익만

• 압도적 1위로 딴 제2 이통, 대선 시작되니 반납하라니

• 모바일 시대 예견, CDMA 상용화 자부심 뭉개버려

• 최종현 회장, 靑 30억 놓고 온 뒤 “사돈이면 안 받을 줄 알았거든”

• 선경 억울함 증명하는 증서 ‘이동통신 사업권 반납 요청서’

• 김옥숙 메모 ‘선경 300억’, 이원조가 요구한 대통령 생활비

• 태평양증권 인수에 노태우 비자금 유입 없어

• 대한텔레콤 주식 매수는 내가 주도한 승계 작업

• 오늘의 SK 일군 임직원들과 함께한 것은 행운

“최태원 회장으로부터 이혼 재판에서 오래전에 있었던 그룹의 사건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그 내용들이 제가 관여하였던 일에 관한 것이라고 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아는 내용을 좀 설명해 달라고 연락을 받았습니다. 남의 집안 송사이고 또 세상이 시끄러운 이혼 송사라서 관여하고 싶지 않아 몇 차례 사양을 했는데, 최근에 들어보니 제가 직접 관여했던 일에 대하여 사실과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 진실처럼 나오고 있다고 해서, 그룹과 재계의 역사가 다르게 왜곡되는 것을 그냥 두는 것은 아니다 싶어 이 진술서를 통해 사실을 밝히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2024년 3월 27일 진술인 손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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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길승 전 SK그룹 회장은 무거운 마음으로 재판부에 제출할 진술서에 서명했다. 2004년 회장직에서 물러난 뒤 경영에서 손을 뗀 지 오래지만, 기업의 역사에서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83세 노구를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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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원(64) SK그룹 회장과 노소영(63)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300억 원이 SK에 유입됐느냐 아니냐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노 관장 측은 김옥숙 여사의 ‘선경 300억’ 자필 메모와 1992년 선경건설 명의로 발행된 약속어음 300억 원을 증거로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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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회장 측은 이 모든 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손 전 회장의 진술과 SK가 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낸 것이 특혜가 아니었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할 문서(노태우 대통령 당시 정해창 비서실장 명의로 작성된 ‘이동통신 사업권 반납 요구’ 문서)를 제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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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0일 항소심 판결에서 위자료 20억 원, 재산분할 1조3800억 원이 선고되자 손 전 회장은 그동안 좀처럼 응하지 않았던 인터뷰를 했다. 그는 6월 11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특혜를 받아서 사업을 했다는 건 몰라도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라며 “기업인들은 태생적으로 정치인에게 돈을 주기는 했어도 받는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7월 15일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도 “내가 평생 ‘SK맨’인데 이런 사태가 오지 않도록 막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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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고에 대한 제 소회를 얘기한다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혼소송에서 왜 후광이니 하면서 기업 경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가. 특히 통신사업은 노태우 대통령의 후광에 의해서 된 것이 절대 아닙니다. SK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훼손되고 있는 점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둘째 ‘통치자금’ 문제가 왜 거기서 거론되는지도 묻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기업의 주식값이라는 게 어느 한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모든 임직원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기업가치가 반영되는 건데, 단지 부부관계였다는 이유만으로 재산분할 대상이 될 수 있는가. 덧붙이자면 1998년까지는 최종현 회장님이 총수였고, 2003년은 내가 회장이었으니까 (재산분할에서는) 그 이후 부분만 가지고 주식 가치를 계산하는 게 옳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SK의 역사를 만든 한 사람으로서 지금 상황이 답답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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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남의 집안 송사’일 뿐이라면 왜 지금 손길승은 이토록 답답하고 참담하고 안타까울까.

“당신이 들어와 회사를 키워봐”

“1965년 12월 선경에 대졸 신입사원 2명이 정식으로 입사했다. 대졸 신입사원 특채는 선경 창업 이래 최초의 일이었다. 이는 미래를 향한 원대한 포석이기도 했다. 당시 최종현 선대회장은 폴리에스터 원사공장 건설을 구상하고 있었고, 이를 담당할 유능한 인재가 필요했다. 두 주인공은 서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ROTC 경리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손길승과 이순석이었다. 두 사람은 중소기업에 지나지 않았던 선경직물에 입사, 훗날 선경의 성장과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SK 60년사’ 제1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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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는 2013년 창립 60주년을 맞아 4권의 책을 펴냈다. 그중 1953년부터 2013년까지 기업 성장사를 담은 제1권 ‘변화와 혁신으로 성장한 60년의 비상’ 편에서 선경 창업 이래 첫 대졸 신입사원 손길승이 처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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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여 쪽에 달하는 ‘SK 60년사’ 1권에서 손길승의 이름은 스물여덟 번 등장한다. 최종건(1926~1973) 창업회장과 최종현(1929~1998) 선대회장, 최태원 현 회장 등 대주주 일가를 빼고 손길승만큼 잦은 등장인물은 없다. SK그룹에서는 1953년 선경직물을 세운 최종건 1대 회장을 창업회장으로, 최종건 회장의 동생이자 현 최태원 회장의 부친인 최종현 2대 회장을 선대회장으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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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생인 손길승은 진주고를 나와 1959년 서울대 상학과(경영학과와 통합)에 진학했다. 1963년 학군사관(ROTC) 1기생으로 임관해 군복무를 마친 뒤 대학 동기이자 ROTC 동기인 이순석(전 ㈜선경 부회장)의 권유로 선경직물에 입사했다. 이순석은 최종현 회장과 동향이자 대학 선후배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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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선경은 중소기업이어서 서울대 상대 나온 사람들이 선호할 만한 회사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가 세 번이나 찾아와 권유하기에 수원 평동에 있는 선경직물을 찾아갔죠.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인상파 배우처럼 덩치 큰 분이 들어오더니 대뜸 ‘중소기업에 오면 뭘 하고 싶으냐’고 물어요. 최종현 당시 선경직물 부사장이었어요. 내가 ‘기획 부문을 맡고 싶다’고 했더니 ‘우리 회사가 자그마해서 기획부가 없으니 당신이 들어와 회사를 키우고 기획부를 만들라’고 하더군요. 회사를 만들어보라니까 얼마나 좋던지 그 말에 매료돼 입사를 결심했는데 실제 가보니까 아무것도 없더라고.”(손길승 SK그룹 3대 회장)

스물네 살 평사원에서 SK그룹 회장까지

SK그룹은 1953년 4월 8일 최종건 창립회장이 선경직물 공장부지를 매입한 날을 창립일로 기념하고 있다. 선경직물은 귀속재산(대한민국에 이양된 일제강점기 일본인 재산)을 매수해 설립한 회사로 1955년 열린 ‘해방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 출품한 ‘닭표 인조견’이 최우수상인 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국내 안감 시장을 석권했다. 이어 1958년 출시한 ‘봉황새 이불감’이 대히트를 하면서 직원 수만 1000명에 이르는 중견기업 반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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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말 미국 유학을 마친 최종현이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형제 경영’이 시작됐다. 최 부사장이 회사의 재무구조 개선과 신제품 개발에 주력하자 선경직물은 날개를 달았다. 1964년 크레퐁, 앙고라 등 개발하는 상품마다 빅히트를 했고 수출길도 활짝 열렸다. 1965년 말 조제트(일명 깔깔이) 원단용 가연사 개발에 성공하면서 선경은 또 한 번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 무렵 손길승과 이순석이 입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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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선 물건을 만들어 팔기는 하는데 도대체 이렇게 팔아서 남는 건지 밑지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물건 원가가 얼마인지도 모르니 이제부터 당신들이 계산해 보라는 거예요. 이순석과 내가 처음 한 일이 원가 계산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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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네 살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청년은 2004년 SK그룹 회장직을 끝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39년간 오로지 SK맨으로 살았다. 입사 때의 희망대로 1974년 회장 직속의 경영기획실을 만들어 1978년부터 1998년까지 20년간 기획실장을 맡았다. 유공해운(현 SK해운) 사장, 대한텔레콤(현 SK(주)) 사장,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부회장, SK구조조정추진본부장, 그리고 1998년 전문경영인 최초로 5대 그룹 총수에 올랐다. 2003년 전국경제인연합회 28대 회장을 지냈다.

최종현 회장의 사업 동지, 파트너, 그리고 분신

기업의 명운을 건 도전 때마다 회장 곁에는 그가 있었다. 원래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는 최종건 1대 회장의 꿈이었다. 창업회장은 울산에 출장을 갈 때마다 대한석유공사(유공) 굴뚝을 보며 “언젠가 저 굴뚝은 우리의 것”이라며 인수 의지를 다졌다고 한다. 그러나 1973년 48세로 타계하면서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것은 2대 회장의 몫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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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최종현 회장은 ‘제2의 창업 선언’이라 불리는 신년사를 발표했다. “우리의 섬유산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석유화학공업에의 진출이 불가피한 것이며 더 나아가 석유정제사업까지도 성취시켜야 한다”는 목표를 발표함과 동시에 “자본력, 전문지식과 기술 못지않게 국제적 기준의 경영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9년 정립된 SK의 경영철학 SKMS(SK Management System)와 SKMS의 효율적인 실천 방법론으로 1989년 도입된 SUPEX(Super Excellent의 합성 조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수준을 가리킴) 추구법은 이 신년사에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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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회장님은 선경을 한국에서 제일가는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얘기하며 우리 같은 신입사원들까지 토론에 끼워줬으니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아쉽게도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1973년 다시 로드맵을 짜야 했죠.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로 산업구조를 바꾼 다음 사람을 관리하는 시스템을 정립해야 한다고 해서 나온 것이 SKMS예요. 최종현 회장님과 토론하면서 만들어낸 거란 말이지. SKMS라는 작명도 제가 했어요. 1979년 SKMS를 완성한 뒤 드디어 1980년 유공을 인수하게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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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최종현 회장은 손길승에 대해 “부하가 아니라 사업 동지” “동업자”라는 표현을 자주 했다. 세간에서는 이런 손길승을 가리켜 “최종현의 분신”이라고 불렀다. 1979년 8월 마침내 대한석유공사(유공) 인수를 결심한 뒤 최종현 회장은 딱 두 사람을 회장실로 불렀다. 손길승 경영기획실장과 김항덕 상무. 이후 세 사람이 얼마나 은밀하게 인수 작전을 짰는지 회사 내에서도 이 사실을 아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1980년 선경그룹이 유공 인수에 성공하자 “새우가 고래를 삼켰다”며 특혜 시비가 일기도 했다. 이 이야기만 나오면 손 회장의 목소리 톤이 올라간다.

10년 공들인 유공 인수 작전과 석유파동

“유공 인수는 어느 날 갑자기 된 게 아니고 우리가 10년을 공들인 사업이란 말입니다. 선경은 1973년 박정희 대통령 때 경남 울주군에 15만 배럴 규모의 정유공장 설립을 추진했는데 중동전쟁(1차 석유파동)으로 무산됐어요. 그런데 1978년 유공의 지분 50%와 경영권을 갖고 있던 걸프가 이를 양도하고 나가겠다고 한 거죠. 걸프가 나가려면 누군가 돈을 줘야 하잖아요. 그 무렵 2차 석유파동이 났어요. 석유수출국기구(OPEC)에서 아랍의 적대국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이유로 한국을 ‘엠바고(석유 수출 금지)’ 국가로 분류해 석유 공급을 끊겠다고 하니 난리가 났죠. 박정희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온 최종현 회장에게 ‘당신이 가서 좀 해결하라’고 해요 김종필 총리를 대표로 비공식 사절단을 꾸려 사우디로 날아가서 직접 국왕을 만났어요. 여담이지만 국왕을 만나기 전 우리에게 석유가 꼭 필요하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 알아봤더니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서는 필요하다’고 절실하게 얘기하라는 거예요. 김종필 총리에게도 귀띔을 했는데 이분이 정작 사우디 국왕을 만나서는 계속 딴소리만 하는 거예요. 오죽했으면 사우디 국왕이 먼저 ‘당신들이 공산주의자들과 싸운다며’라고 운을 떼니까 그제야 김 총리가 ‘석유가 없습니다’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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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유국의 금수조치를 풀고 석유를 들여오는 데 성공한 무용담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번엔 사우디 측에서 ‘커미션’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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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선 이자 대신 ‘커미션’을 요구하는 게 관행이에요. 그게 50만 달러야. 당시로는 우리가 감당하기 큰돈이어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말씀드렸더니 부총리에게 내주라고 지시했어요. 그런데 부총리가 ‘영수증 없는 돈은 못 준다’고 거절하는 겁니다. 커미션에 영수증을 써줄 수 있겠습니까. 고민하던 박 대통령이 ‘그 건은 선경이 좀 맡아줘’라고 미루니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외환은행에서 50만 달러를 빌려 전달했지요. 이것이 전화위복이 됐어요. 야마니 석유상을 비롯해 사우디 사람들이 선경은 정부 대신 끝까지 책임지는 기업이라는 신뢰가 생긴 거죠. 이후 선경이라면 언제든지 석유를 줄 테니까 필요하면 얘기하라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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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신군부가 들어섰을 때 또 한 번 ‘엠바고’가 났다. 이번엔 손 회장이 직접 쓴 보고서를 들고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전달하며 선경에 계약을 맡겨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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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력자원부 장관이 가도 야마니 석유상이 만나주지 않을 때니까 정부 기획예산처조차 선경이 거짓말한다고 했어요. 그러다 1980년 6월 29일 우리 앞바다에 유조선이 딱 나타나니까 아무 말도 못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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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12월 정부가 유공 인수자로 선경을 선정한 이유 중에는 “산유국과의 친분 관계도 두터워 오일머니 유치 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는 부분이 포함돼 있었다.

대통령 사돈 기업, 특혜는커녕 불이익

1992년 선경이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확보했다가 특혜 의혹에 밀려 사업권을 반납한 사건은 그해 10대 뉴스가 될 만큼 파장이 컸다. 노태우 대통령 임기 말이었고, 차기 대통령선거를 의식한 집권당의 김영삼(YS) 대표가 ‘제2이동통신 사업권 선경 불가론’을 집요하게 펼쳤다. 당시 김영삼 대표의 비서실장이었던 김덕룡에 따르면 “YS는 내가 봐도 선경이 선정되는 게 합리적이지만 노태우 사돈에게 이를 준다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킬 게 뻔하다. 내가 집권한 뒤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지금은 주지 말라”는 입장이었다. 김덕룡은 자신이 직접 SK의 이순석, 손길승을 만나 반납하도록 담판을 지었다고 최근 한 인터뷰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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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8월 27일 손길승 대한텔레콤 사장(선경그룹 경영기획실장 겸임)은 제2이동통신 사업권 반납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그로부터 20개월 뒤 선경은 1994년 체신부의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해 경영권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손 회장은 이번 이혼소송 과정에서 또다시 특혜 시비가 불거지자 전문경영인들의 자부심을 뭉개버리는 일이라고 개탄했다.

32년 동안 비밀로 한 문서, ‘이동통신 사업권 반납 요청서’

이번 이혼소송 판결에서 SK가 이동통신 사업을 하는 데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직간접적인 도움을 받았다는 취지로 인용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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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 점이 답답하다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가 압도적 실력 차로 당당히 1등을 했어요. 그런데 사업권을 획득한 지 얼마 안 돼 대통령선거전이 시작되니까 집권당 김영삼 후보 측으로부터 사업권을 반납하라고 압력이 오는 거예요. 우리가 1989년부터 준비해 온 사업인데 선뜻 내놓을 수 있겠어요? 우리는 유공 인수 뒤 SK를 키워나갈 미래 신산업이 무엇이냐로 토론을 했는데, 그때 ‘반도체’와 ‘라이프사이언스’가 중요하니 준비를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런데 반도체는 삼성이 이미 하고 있고, 가전도 LG·삼성이 하는데 지금 우리가 들어가 봤자 경쟁에서 이길 방법이 없었죠. 우회할 방법을 찾은 게 ‘통신’입니다. 통신은 유선과 모바일이 있는데 다른 나라들을 조사해 보니 유선은 국가가 관리하고, 모바일은 민간에게 줘서 경쟁을 시켜요. 통신산업이 발전하려면 모바일 사업은 민영화가 필요하겠구나 해서 정책 입안을 요청하고 그사이 우리는 미국에 가서 통신 기술을 습득했죠. 그렇게 대한텔레콤을 만들고 그룹 경영기획실장인 제가 사장을 맡았어요. 톱다운 방식이 아니라 최초로 전문경영인이 건의해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한 겁니다. 그만큼 우리는 목숨 걸고 성공시켜야 했어요. 그때도 최종현 회장이 걱정을 하더라고. 지금이 기회인 건 맞는데 틀림없이 노태우 대통령이 문제가 될 것 같다고. 제가 ‘그래도 이번에 안 하면 기회를 놓칩니다. (특혜 시비 없도록) 우리가 만점을 받겠습니다’라고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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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후보 측에서 세게 압박하고 정부와 대통령실까지 나서서 반납을 종용하니 최종현 회장도 반납하라고 했는데 회장 지시를 어기며 끝까지 버티신 이유는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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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회장은 심성이 고운 분이라 억울한 ‘특혜설’도 묻고 감수하자는 생각이었던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업권을 자진 반납하게 되면 선경 스스로 ‘특혜’를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만약 대통령실에서 우리가 자진해서 반납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의 요구로 반납한다는 내용이 담긴 공문을 보내주면 반납하겠다고 버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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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정해창 비서실장 명의로 작성된 ‘이동통신 사업권 반납 요청서’군요. 이번에 처음으로 그 문서의 존재가 알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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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현 회장은 그런 거 받지 말라고 야단을 쳤지만 제가 고집했어요. 우리가 사업권을 반납하게 된 ‘역사의 증명’이니까 받아놓아야 한다고. 청와대 사람들도 이 문건을 써주면서 ‘혹시 손길승이 이걸 터뜨려서 정권에 타격을 주는 건 아닌가’ 걱정했을 겁니다. 저는 그런 정치적 목적 없이 ‘선경의 억울함’만 증명하는 증표로 생각했으니 공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또 문서가 오간 때는 최태원 회장이 경영에 본격 참여하지 않았던 시기라 지금까지 이 문건의 내용을 공유하지 않았으나, 올 초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제게 진술 요청이 왔고, 그 과정에서 문건의 존재를 전하게 됐습니다. 이번 재판이 마치 SK그룹의 재판처럼 흘러가는 상황에서 기업의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 항소심 재판부에 문건을 공개한 것입니다. 대법원 재판 과정에서도 증거로서는 공개할 생각입니다.”

두 배 이상 비싸게 주고 산 한국이동통신

김영삼 정부에서 공개경쟁입찰로 한국이동통신 인수에 성공했으니 그 문서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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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민정부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과 한국이동통신 민영화를 ‘투 트랙’으로 추진했는데, 사업자 선정을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에 위임하는 바람에 우리가 더 곤란해졌습니다. 당시 최종현 회장이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죠. 결국 최 회장은 대승적으로 제2이동통신 사업권 신청을 포기하고 한국이동통신 인수로 계획을 변경했습니다. 한국이통 공개경쟁입찰에 참여하는데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거예요. 내부 회의에서 유찰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는데 제가 따로 회장님을 만나 ‘유찰시키면 안 됩니다. 기회를 또 놓칠 수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비싸게 써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원래 정부랑 거래할 때에는 비싸게 써야 되는 거야. 싸게 쓰면 말이 많아’라고 하시더군요. ‘가격은 제가 알아서 쓰고 회장님께는 알려드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했죠. 그때 공정거래법에 따른 우리 기업의 출자한도액이 4300억 원이었어요. 손을 달달달 떨며 거의 한도액을 채워 4271억 원이라고 쓴 뒤 밀봉해서 직원에게 줬어요. 나중에 보니 2000억 원이면 충분할 것을 두 배 이상 쓴 거죠. 이 정도라면 특혜가 아니라 불이익이죠. 막상 이동통신을 인수해서 운영해 보니까 아날로그 시스템이 자꾸 고장을 일으키는 겁니다. 당신 믿고 가입했는데 통화도 제대로 안 되고 사기 쳤다는 지인들 말에 화가 나서 미국으로 달려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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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10년 이내에 통신은 디지털 시스템으로 대체될 것을 예견하고 SK는 기술 투자를 해서 1996년 1월 1일 세계 최초로 CDMA 상용화에 성공한다. “우리나라에 통신 산업혁명을 일으킨 것이 SK텔레콤이고 그 주모자가 바로 나요.”

태평양증권 인수 자금 300억 원의 출처

1991년 태평양증권 인수에 노태우 비자금이 흘러들어갔다는 소문도 여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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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는 제조업 전문이라 금융을 잘 모르는데 1990년을 전후로 금융산업이 대세였어요. 우리도 금융을 해보자 해서 기업을 물색하는데 최 회장님이 태평양증권으로부터 인수 제안이 왔다고 해요. 당시 금융기관 여신관리규정상 선경이 직접 매수할 수 없고 개인 자격으로만 매수할 수 있었는데 선대회장이 가진 돈으로는 조달이 어려웠어요. 그래서 선경, 유공해운, 유공가스 등으로부터 한 달에 걸쳐 수십억 원씩 사채시장과 증권사를 통해 비자금을 충당했죠. 제가 직접 10만 원권 수표 1만 장을 만들어서 태평양증권 서성환 회장님께 전달했고 그 자리에서 일일이 세어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자금은 근거를 남기면 화가 될 게 뻔한데 누가 근거를 남기겠습니까. 태평양증권 인수 자금이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조성됐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노태우 비자금은 유입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노 측 비자금이 유입됐다는 증거는 김옥숙 여사의 자필 메모 ‘선경 300억’이 전부인데, 그 돈이 선경에 들어왔다면 자금 실체와 흐름을 규명해야 해요. 그것도 비자금이라 규명이 안 됐다면, 왜 그것은 인정하고, 선경의 부외자금은 인정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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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재산분할에서 최태원 회장이 대한텔레콤 주식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2억8000만 원의 출처가 논란이 됐습니다. 최태원 회장 측은 선대회장 보유의 현금이 여러 단계를 거쳐 증여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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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텔레콤 인수 건은 선대회장에서 최태원 회장으로 경영권 승계가 달려 있는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제가 직접 최종현 회장과 오래 논의하고 허락을 받아 진행한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선대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아 유공 계좌로 입금이 늦어진 이유는 대한텔레콤이 휴면법인이라 주식 평가를 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언론보도를 접하니 만 원 단위 금액이 달랐고 모은행 서울 석관동 지점에서 인출한 돈을 광교지점으로 이체시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억 단위 금액이 오가는데 만 원 단위 금액은 이자, 수수료 등의 사유로 차이가 날 수 있는 돈입니다. 그리고 당시 대기업 회장의 자금은 돈의 흐름이 드러나지 않도록 복잡한 단계를 거치는 게 관행이었습니다. 대한텔레콤 지분 인수 대금은 그룹 경영권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국세청 조사를 받고 증여세를 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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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숙 여사의 메모 속 ‘선경 300억’이 SK 측이 향후 주겠다고 약속한 금액이라면, 노태우 대통령의 다른 사돈 기업 신동방 측에 비자금 230억 원이 흘러간 사실과 배치됩니다. SK만 한 푼도 받지 않았다는 게 설득력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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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선경은 자산 8조6000억 원의 기업이었습니다. 300억 원이 없어서 경영이 어려운 기업이 아니었다는 거죠. 오히려 당시 노태우 대통령 측 이원조 씨(경제비서관)가 대통령이 퇴임 후 품위 유지를 위한 대책을 세워달라고 했어요. 결국 생활비를 달라는 얘기 아니겠어요. 사돈끼리인데 우리가 생활비를 책임질 테니 걱정 말라고 해도 자꾸 증표를 달라는 겁니다. 노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선대회장에게 30억 원을 들고 가서 책상 위에 놓고 오시라고 했어요. 그 뒤 선대회장이 ‘사돈이라고 안 받을 줄 알았거든’ 하시는 겁니다. ‘돈이 필요하구나, 주자’고 했습니다. 제가 선경건설에 얘기해서 50억 원짜리 약속어음 6장(300억 원)을 만들라고 했어요. 선경건설 측에는 앞으로 돈을 주겠다는 약속일 뿐 절대 교환은 안 돌아온다고 설명하고 받은 약속어음 6장을 봉투에 넣은 뒤 제가 직접 이원조 씨에게 전달했어요. 그게 전부요. 이원조의 자금 요구가 집요했고, 각 기업들로부터 돈을 모았다는 것 또한 세간의 소식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공 때 일해재단 모금으로 홍역을 치렀는데 대놓고 정치자금을 줄 수는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비상장사였던 선경건설을 통해 어음을 전달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자금 300억 원을 받았다고? 노태우 비자금 사건 터졌을 때 이미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어요. 우리가 비자금 300억을 받았으면 그때 들통이 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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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약속한 금액이 왜 300억 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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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얼마를 써야 할지 몰라서 이원조 씨에게 물어봤어요. 그도 난감해하더니 그동안 다른 기업들이 낸 통치 자금 액수를 감안하라는 거예요. 그게 300억 원인 거죠.”

기업인과 정치인 가문의 결혼, 지금도 말리지 못한 게 후회

지금이라도 되돌리고 싶은, 후회스러운 일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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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최태원 회장의 결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 제가 선대회장께 앞장서 반대했습니다. 기업인 가문과 정치인 가문의 결혼은 결코 득 될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선대회장께서 ‘태원이가 하겠다는데 어쩌겠나’고 하셨기에 받아들였지만, 오늘의 상황을 예견하는 능력이 있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설득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이동통신 진출 과정에서 세간의 억측을 풀지 못한 것입니다. 실력으로 딴 사업권을 정치권 압력으로 반납한 것도 억울한데 이후 공개입찰로 비싸게 인수한 한국이동통신마저 같이 묶여서 지금까지도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10년 넘게 치열하게 준비해 정보통신사업에 진출했던 동료들, 그리고 체신부 공무원들, 치열한 경쟁을 뚫고 CDMA, LTE, 5G까지 글로벌 표준을 선도하고 있는 후배들 볼 낯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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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맨으로 보낸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장 보람 있었던 순간은 언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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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작은 기업이었던 선경이 정유, 화학, 이동통신을 거쳐 SK로 커가던 과정을 함께한 순간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유공 인수, 한국이동통신 인수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의 SK 40년 동안 함께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헌신을 생각하면 그들의 패기와 열정이 오늘의 SK를 이룩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과 함께 일한 건 행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