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호

한국 안보의 ‘서그(thug·자객)’, 북·러 신조약 폐기 전략

[북-러 밀착, 격랑의 한반도] “감정적 대응 절제, 물밑 전략대화”

  • 백승주 전쟁기념사업회장·전 국회의원

    입력2024-08-05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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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러 신조약, 유엔안보리 결의안 정면으로 위배

    • 북핵 해결 암초, 동시에 매우 깨지기 쉬운 조약

    • 푸틴 이후 체제에서 조약 폐기 가능성 높아져

    • 한·러 관계 악화 상황 = 북한엔 복권

    6월 19일 북한 평양에서 만난 김정은(오른쪽) 북한 국무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뉴시스]

    6월 19일 북한 평양에서 만난 김정은(오른쪽) 북한 국무위원장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뉴시스]

    6월 19일 러시아와 북한이 23개 항의 새로운 군사협력조약을 체결했다. 북·러 신조약은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냉전 분위기가 잉태·출산한 사생아다. 23개 항 가운데 4항에 적시된 군사협력 내용은 ‘사실상 자동 개입’으로 해석되고 있다. 문서 내용을 보면 엄연히 5개의 조건이 전제된 ‘조건부 군사지원’이다. ‘①피침, ②유엔헌장 51조, ③러시아의 국내법 절차, ④북측의 국내법 절차, ⑤지체 없이’라는 엄격한 조건이 붙어 있지만 양국의 제왕적 지도자를 정점으로 하는 현 체제 성격을 고려할 때, 지도자의 결심만으로 전쟁 상황에 개입할 수 있다. 조건부지만 안보전문가 상당수가 사실상 자동 개입으로 해석하는 이유다.

    러시아와 북한은 신조약을 체결하면서 유엔헌장 51조를 적시했다. 핵심 내용은 침략을 받을 경우 개별적·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는 내용이다. ①항, ②항은 사실상 동일한 내용이다. 침략을 받아서 발생한 전쟁 상황, ‘피침’이라는 팩트 확인을 중요한 조건으로 중복 강조한 것이다.

    북·러 신조약이 유엔을 언급할 자격이 있는가. 없다. 왜냐하면 조약 내용 자체가 2006년 이후 유엔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채택한 11차례의 결의안, 3개의 결의안 추가 조치를 정면으로 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다. 러시아는 안보리 결의안를 저지할 거부권을 갖고 있다. 러시아의 동의, 지지가 있었기에 유엔안보리는 2006년부터 12년 동안 14차례에 걸쳐 대북제재 결의안을 채택할 수 있었다.

    북·러 신조약은 북한에 대한 촘촘한 결의안 그물을 공개적으로 한 방에 찢었다.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유엔안보리를 조롱하고 유엔의 권능을 본질적으로 뒤흔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의 안전판 역할을 해온 유엔 체제 자체를 뒤흔들었다. 6·25전쟁 발발 75주년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북·러 신조약이 유엔안보리 정신을 역주행했다”고 강력히 비판했다. 유엔 체제를 지키기 위한 목소리로 이해된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러, 北 핵 보유 공개 인정

    한국 안보의 단기 과제는 북핵 폐기, 장기 비전은 평화통일 여건을 만들어가는 데 있다. 2006년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한 이후 우리 외교는 국제공조, 남북 접촉을 통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북·러 신조약은 다음 몇 가지 차원에서 우리 안보를 위협하는 암살자객(thug·서그)이 됐다. 서그는 2020년 10월 22일 열린 트럼프와 바이든의 마지막 TV토론에서, 바이든이 북한을 지칭한 용어다.

    첫째,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북측의 핵 보유를 공개적으로 인정했다. 적어도 북한은 러시아의 조치를 국제사회가 핵보유국으로 인정한 변곡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9·11테러 직후 미국이 테러 주체인 탈레반을 응징하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파키스탄의 군사적 협력을 얻기 위해 파키스탄에 대해 대규모 경제 지원을 했다. 1998년 1차 핵실험을 한 이후 미국 등 서방의 제재를 받아오던 파키스탄은 미국의 경제 지원을 핵 보유 인정으로 인식했다. 9·11테러 이후 형성된 국제 정세, 탈레반 응징이라는 미국의 대외정책이 파키스탄 핵 인정이라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2012년 스웨덴에서 열린 안보 관련 학술회의에 북측 정부 관계자가 참가했다. 필자는 그 회의에서 “우리도 파키스탄처럼 제재 대신에 지원을 받으면서 핵보유국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라는 북측 관계자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은 적이 있다. 러시아가 북·러 신조약을 통해 북측을 핵보유국으로 간접적으로 인정한 사실은 북핵 해결에 엄청난 암초가 됐다.

    둘째, 북에 대해 진행된 14차례의 제재 그물이 완전히 찢어졌다. 북한이 안보리 제재에 굴복하거나 타협해 평화적으로 핵을 폐기할 가능성을 거의 제로 수준으로 만들어버렸다. 과거의 제재 그물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안보리의 새로운 대북제재는 검토도 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셋째, 평화통일 여건을 만드는 데도 상당 기간 ‘서그’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된다. 우리의 평화통일은 한반도 내부의 분위기 성숙과 외부의 협조 속에서 진행될 수 있다. 북·러 신조약은 이러한 여건 형성, 형성 의지를 막는 장벽이 됐다.

    그러나 우리 안보에 서그가 된 북·러 신조약 23개 항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러시아 외교의 길이 있다. 북·러 신조약을 효력이 지속되는 기준에 초점을 맞춰보면 경성(硬性)이 아닌 연성(軟性) 조약적 특징이 있다. 국제조약에서 연성과 경성을 구별하는 기준은 폐기 절차에 있다.

    일방이 통보하면 1년 뒤 폐기 = 연성(軟性) 조약

    북·러 신조약 제23조 23항은 “이 조약은 무기한 효력을 가진다. 쌍방 중 어느 일방이 이 조약의 효력을 중지하려는 경우 이에 대해 타방에게 서면으로 통지해야 한다. 조약의 효력은 타방이 서면 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1년 후 중지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23항을 확인하는 순간, 1995년 러시아가 ‘북한과 구소련 간의 군사동맹조약(북·소동맹조약)’을 파기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1995년 8월 7일 이고리 마트콥스키 러시아 외무부 부대변인은 “러시아 정부는 기존의 러·북 상호조약이 변화된 국제 정세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사문화되고 있어, 이를 새로운 조약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내용을 북측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측 통보로 1961년 7월 6일 체결된 ‘북·소 군사동맹조약’은 폐기됐다. 북측으로서는 참으로 낭패스러운 통보였다.

    1961년 7월 1주일 간격으로 북한은 두 개의 중요한 군사동맹조약을 체결했다. 구소련과는 7월 6일 7개 항으로, 중국과는 7월 11일 6개 항으로 합의했다. 합의 조항은 매우 유사하다. 가장 큰 차이는 폐기와 관련한 조항이다. 북·중 군사동맹조약에는 존속·효력이 양국의 합의가 없으면 반(半)영구적으로 발생하도록 돼 있다. 존속·효력을 일방이 폐기할 수 없게 한 것이다. 그러나 북·러 군사동맹조약은 10년간 유효하고 5년마다 갱신해야 하며 어느 일방이 통보하면 1년 이후 폐기되도록 돼 있었다. 북·중 군사동맹조약은 경성 조약, 북·소 군사동맹조약은 상대적으로 연성 조약이었던 셈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3항 폐기 관련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북측은 “무기한 효력을 가진다”는 부분에 무게를 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서면으로 통지하면 통지한 날로부터 1년 후에 중지된다”는 내용을 간과하지 않고 시대 여건에 따라 자국에 유리하게 활용할 것이다. 1995년의 외교적 추억을 떠올려보자. 구소련이 해체된 이후 러시아 옐친 정부는 다양한 회담을 통해 한국 정부에 북·러 군사동맹조약 폐기를 수차례 약속했다. 북한의 동의 없이 폐기할 수 있는 ‘10년 거치 5년 재갱신’ 조항을 근거로 한 것이다. 북·러 신조약에는 거치기간 없이 서면 통보만으로 1년 이후 폐기되도록 한, 매우 깨지기 쉬운 폐기 조항이 담겨 있다.

    푸틴 물러나면 북·러 신조약 폐기 가능성 높아

    신현실주의 이론가 케네스 월츠(Kenneth Waltz)는 “모든 군사조약은 유기체처럼 생로병사한다”고 했다. 북·소 군사동맹조약은 1961년 체결된 이후 35년 동안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쳤다. 1995년 8월 러시아 당국은 이 동맹의 소멸을 이끈 동인으로 ‘국제 정세와의 부합성’을 적시했다. 국제 정세와의 부합성은 2024년 출생한 북·러 신조약에도 적용될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측면에서 북·러 신조약은 이 조약을 출산한 푸틴 체제 지속 기간, 우크라이나 전쟁, 글로벌 차원의 신냉전 질서 등을 변수로 해서 강화, 사문화, 폐기되는 수순을 밟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북·러 신조약이 강화되는 경우다. 푸틴 체제가 유지되는 한 북·러 신조약의 세부 조항은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14조 양국의 공민 권리를 보호한다는 조항은 북측 군대나 노동자가 러시아 지역에 대규모로 유입되는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해 점령한 지역에 재건을 명분으로 노동자, 군인들을 유입할 가능성이 높다. 특히 건설 및 생산 현장에 군인을 대규모로 투입하는 북한의 관습을 고려할 때 노동자로 위장한 북측 군인이 러시아에 대규모로 유입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이 우크라이나에 유입될 경우 글로벌 차원의 신냉전은 더 격화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북·러 신조약이 신냉전을 공고하게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둘째, 북·러 신조약이 사문화하는 경우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조기에 종식되면 러시아에 대한 북한의 전략적 가치는 급격히 떨어질 것이다. 러시아는 더는 북한으로부터 재래식 무기 등을 수입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오히려 러시아는 자국에 필요한 양질의 공산품을 생산하는 한국과 전략적 협력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1990년대 초반처럼 러시아는 북·러 신조약이 실질적으로 사문화됐다고 인식할 것이다.

    셋째, 러시아가 북·러 신조약 폐기를 검토하는 상황이다. 푸틴 체제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푸틴 이후 체제에서는 언제든지 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푸틴 이후 체제가 합리적으로 선택한다면 세계사적으로 실패한 체제인 북측과의 군사동맹을 유지하기 위해 경제대국인 한국과의 전략적 협력을 러시아가 포기하게 두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공조·포괄적 협력·물밑 대화 必要

    우리 정부가 북·러 신조약을 야기한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글로벌 차원의 신냉전 양상을 주도적으로 바꿀 능력은 없다. 북·러 신조약을 시대착오적이라고 목소리 높여 비판할 수는 있지만 폐기시킬 수단은 없다. 그렇다면 장기적 안목으로 이 조약이 사문화되고 폐기되게 하기 위한 환경을 다음 몇 가지 방향으로 구축해 가야 한다.

    첫째, 단기적으로 북·러 신조약 강화를 상징할 북한 군대의 파병을 저지하기 위한 국제공조체제를 만들어가야 한다. 미국 등 서방 진영과 함께 우크라이나 전선에 북측 병력 파견을 레드라인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단기적으로 북측이 우크라이나 전선에 병력을 파견할 경우, 러시아가 상응한 군사적 대가를 치르도록 강요할 수 있는 미국, 나토, EU 등 서방과 대외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아울러 북측이 병력을 지원할 경우 북측에 대한 서방의 제재를 한층 강화할 것이라는 전략적 메시지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 당국이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 수출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도 현재 안보 상황을 관리하는 전략적 메시지 차원에서 이해된다.

    둘째, 북·러 신조약의 사문화를 위한 여건을 만들어가야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될 경우 진행할 러시아와의 포괄적 전략적 협력 리스트를 미리 만들어놓고 준비해 가야 한다. 탈냉전 이후 지금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해 온 러시아와의 협력 자산과 경험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필자는 2013년 10월 러시아의 안토노프 국방차관과 회담을 통해 ‘한-러시아 군사협력협정’을 조율한 바 있다. 1995년 이후 2010년 중반까지 러시아와 진행시킨 다수의 방산 협력도 오늘의 K방산 플랫폼을 만드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다.

    셋째, 러시아와 물밑 전략 대화를 유지해야 한다. 정부는 물론 기업과 민간단체도 러시아와 직·간접적으로 대화하고 접촉해야 한다. 감정적 대응은 절제해야 한다. 한·러 관계가 악화될수록 북측에는 복권이 되고, 우리 안보에는 서그가 된다는 마인드를 공유해야 한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을 생각하며

    사생아 출산은 가정의 평화를 뒤흔드는 경우가 많다. 북·러 신조약은 유엔 체제, 권능, 한반도 질서를 뒤흔들고 있다. 국제공조를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고, 차근차근 통일 준비를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답답하고 캄캄하다. 그러나 좌절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1910년 2월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안중근 의사는 “인무원려(人無遠慮), 난성대업(難成大業)”이라는 유묵을 남겼다. 당시 안 의사는 죽음을 앞두고 국제 정세 변화 방향을 통찰하고, 동양 평화라는 비전을 제시하려 했다. 북·러 신조약 앞에서 우리 안보와 외교는 안 의사가 남긴 유묵을 생각하면서 현안을 해결하고 장기 비전을 다듬어가야 할 때다. 절대 감정을 앞세워 상황을 악화하는 우를 범해선 안 된다. 광복 이후 러시아는 45년간 우리 안보를 압박했고, 20여 년간 협력자를 자청했다. 새로운 20년, 50년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 안보를 위협하는 서그가 된 북·러 신조약을 조기에 사문화, 폐기하는 원려외교(遠慮外交)에 집중해야 한다.

    백승주
    ‌● 1961년 출생
    ● 부산대 정외과 졸업, 경북대 대학원 정치학 박사
    ●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장
    ● 국방부 차관, 20대 국회의원
    ● 現 전쟁기념사업회 회장, 국민대 석좌교수, 한중안보평화포럼 회장
    ● 저서 : ‘백승주 박사의 외교이야기’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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