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호

[영상] "정치는 나를 파는 것, 누구에게 파는지 생각하라"

‘개혁보수’ 정병국의 보수 회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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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준 기자

    mrfair30@donga.com

    입력2024-07-2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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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신 게을리한 보수, 정치 왜 하는지 망각

    • 차떼기, 노무현 탄핵, 그리고 남원정

    • 보수의 절실함, ‘천막 당사’ 기억하라

    • “김재섭이 ‘선배 말대로 하니 당선했다’ 하더라”

    • “朴 탄핵 때가 나아…지금은 ‘누구 편이냐’만 남아”

    • 청년 정치인들이여, 공부, 토론, 논의하라



    7월 9일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보수가 살길은 뼈를 깎는 고통을 동반한 ‘혁신’에 있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7월 9일 정병국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신동아’와 인터뷰하면서 “보수가 살길은 뼈를 깎는 고통을 동반한 ‘혁신’에 있다”고 말했다. [지호영 기자]

    “정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과거엔 ‘인물 중심 정당’이라고 비판받았는데, 이젠 인물 중심 정당조차 없고 ‘패거리 싸움’만 남았다. 정당이 지향해야 할 가치·철학을 국민에게 설명하고 납득시켜서 국민 마음을 얻는 데는 관심이 없고, 누가 ‘포스트 윤석열’이 될 것인지에만 골몰하고 있다.”



    7월 9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예술가의 집’에서 만난 정병국(66)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은 작심한 듯 쓴소리를 쏟아냈다. 21대 총선 불출마 이후 정치 현안에 대해선 말을 아껴온 그가 “현재 보수, 나아가 우리나라 정치가 이 지경에 이르는 걸 막지 못한 내 책임도 있다”며 침묵을 깼다. 그의 말에서 ‘소수파 집권 세력’으로 전락한 보수의 위기 상황에 더는 입을 닫고 있을 수 없다는 결기도 묻어났다.

    정 위원장은 상도동계 막내로, 1987년 대선에서 김영삼(YS)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를 도우며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2000년 초선(16대)을 시작으로 내리 5선(選)을 지냈다. 그에게 늘 따라다리는 꼬리표는 ‘남·원·정’이다. 남경필 전 경기지사,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과 함께 개혁 소장파로 늘 목소리를 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에선 탄핵에 찬성, 새누리당을 탈당해 바른정당을 창당하며 초대 당대표를 지냈지만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사실상 정계에서 물러났다. 지난해부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바른정당 시절 그와 김세연 전 의원 등이 의기투합해 만든 청년정치학교는 지금까지 청년 정치인들과 젊은 당원들을 양성하는 정치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정 위원장은 이 학교 교장으로 22대 총선에서 국민의힘 김재섭(37) 의원, 김용태(34) 의원이 여의도에 입성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일까. 정 위원장의 보수 회생의 키워드는 ‘혁신’과 ‘절실함’ ‘청년’이다.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것이 정치의 기본이며, 어려울수록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도(正道)”라는 그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지금 보수, 박근혜 탄핵 때보다 더 퇴보”

    보수가 소수파 집권 세력이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보수 정치인들이 자기혁신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다. 요즘 그들을 보면 ‘내가 왜 정치를 하는가’라는 기본적 생각조차 망각한 듯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을 겪으며 이를 반면교사 삼아 반성했어야 했는데 충분치 못했다. 4월 총선에서 새롭게 당선한 사람들도 대개 줄을 잘 서는 데 능한 사람들이다.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기보단 ‘생존’을 먼저 생각하는 자들이다. 상황이 무척 나쁘다.”

    현 상황을 박 전 대통령 탄핵 정국 때와 비교하면 어떤가.

    “더 악화했다. 적어도 탄핵 정국 땐 ‘이게 옳으냐, 저게 옳으냐’라며 ‘옳은 것’에 대한 논쟁이나마 있었다. 하지만 이젠 ‘넌 누구 편이냐’라는 말밖에 하지 않는다. 지리멸렬한 보수를 어떤 방향으로 만들겠다는 비전 역시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정 위원장은 ‘반성 없는 보수’가 민심에서 멀어졌고, 이것이 민심의 바로미터인 선거로 나타났다고 봤다. 특히 ‘캐스팅보트’ 지역으로 평가되는 수도권(서울·인천·경기)에서 21·22대 총선 모두 참패를 기록한 건 민심을 읽지 못했다는 방증이라고 평가했다. 21대 총선에서 보수는 수도권 121석 가운데 16석, 22대 총선에선 122석 가운데 19석을 얻는 데 그쳤다.


    4월 11일 서울 도봉구 선거사무소에서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당시 서울 도봉갑 후보)이 당선해 기뻐하고 있다. 김 의원은 이곳에서 21대 총선 때 낙선 후 두 번째 도전 만에 당선했다. [뉴스1]

    4월 11일 서울 도봉구 선거사무소에서 김재섭 국민의힘 의원(당시 서울 도봉갑 후보)이 당선해 기뻐하고 있다. 김 의원은 이곳에서 21대 총선 때 낙선 후 두 번째 도전 만에 당선했다. [뉴스1]

    ‌보수가 유독 수도권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가 뭘까.

    “민심을 보지 않고 편가르기로 일관한 게 문제다. 지역을 잘 알고, 지지를 받을 만한 인사가 아니라 당 지도부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고르다보니 진 거다. 그나마 적은 인재를 편에 따라 가르면 인물 경쟁력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나.”

    ‌22대 총선에서 조정훈(국민의힘), 김재섭, 이준석(개혁신당) 의원 등은 경합 지역인 서울 마포을, 서울 도봉갑, 경기 화성을에서 당선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중도·개혁 보수’ 인사로 평가되는데.

    “그렇다.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시사한다.”

    보수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라면…

    “결국 ‘누구를 바라보고 정치를 할 것인가’의 문제다. 조정훈·김재섭·이준석 의원 모두 ‘국민을 바라본 사람들’이고, 그래서 당선한 거다. 특히 김재섭 의원이 롤 모델이 될 만하다. 서울 도봉갑은 보수가 가장 약세를 나타내는 지역인데도 당선했다. 2020년 그가 첫 출마를 위해 선거사무소 개소식을 했을 때도 찾아가 함께 도봉갑 지역을 돌아본 적이 있다. 그때 지역구 관리법, 유권자를 대하는 법 등 나 나름의 비결을 전수했다. 이번에 당선되고 나서 전화를 해 ‘선배님이 하라던 대로 하니까 되네요’라고 하더라.”

    선배가 전수한 비결은 뭔가.

    “내가 알려준 건 사실 별 게 아니다. ‘정치는 결국 나를 파는 것인데, 누구에게 파는지 생각하라’는 것이다. 답은 국민, 즉 ‘유권자’ 아니겠나. 정치의 모든 것은 국민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염두에 두는 것이다.”



    “천막 당사 시절 절박함 찾아야”

    현재 여당은 어떻게 보나.

    “총선에서 참패했지만 여전히 보수가 국민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깝다. 국민이 108대 192라는 여소거야(與小巨野)를 선택했는데도 여당은 여전히 동등한 의석수를 가지고 있는 듯 행동한다. 여당은 대통령이라는 힘을 보유한 세력이다. 여당과 야당이 똑같이 잘못을 한다면 국민은 견제를 위해 야당에 힘을 실어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여당은 장외로 나가면 안 되고, 국회를 거부해선 안 된다. 깨질 땐 처절하게 깨지기도 하면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등 모든 수단을 써 어떻게든 야당과 협상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정치적 부담은 야당 몫이 된다. 국민은 항상 지켜보고 있고, 결국 모든 것을 알아준다.”

    그러면서 정 위원장은 “뼈를 깎는 수준의 개혁과 절실함이 필요하다”며 “모든 것을 버릴 각오로, 천막 당사를 쳤던 때를 기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2002~2003년 보수는 한나라당 불법 대선자금 전달 사건, 이른바 ‘차떼기 사건’과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위기를 맞았다. 이 당시 ‘남·원·정’ 중심 개혁파는 서울 여의도 당사를 처분하고 천막 당사를 차리는 등 쇄신을 단행했고, 2004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었다. 이에 대해 정 위원장은 “당시 50석도 얻지 못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관적인 상황이었다”며 “121석으로 ‘선방’하면서 당내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이를 통해 2007년 정권을 되찾을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지금 보수가 회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민심’을 얻어야 한다. 특히 ‘중도층’ 유권자를 끌어오는 것이 해법이다. 이미 보수, 진보 양측은 30~40%를 고정 지지층으로 확보하고 있다. 5~10%에 해당하는 중간 지대 민심이 어디로 향하는지에 따라 승패가 갈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여전히 극단적·고정적 지지층만을 보고 정치를 하고 있고, 극우 유튜버들이 이를 부추기고 있다.”

    2019년 4월 27일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운데 흰옷)와 참석자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 국정운영 규탄 2차 장외집회’를 마치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뉴스1]

    2019년 4월 27일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운데 흰옷)와 참석자들이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문재인 정권 국정운영 규탄 2차 장외집회’를 마치고 청와대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뉴스1]

    ‌‘집토끼’부터 잡는 전략 아닐까.

    “그러다 21대 총선에서 참패한 것 아닌가. 문재인 정권 때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는 삭발까지 해가며 대(對)정부 투쟁으로 일관했다. 총선 국면에서도 ‘태극기 부대’ 등 극단적 지지층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거리로 나갔다. 원내대표이던 나경원 의원도 마치 황 대표와 경쟁하듯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지지층 사이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지지율이 상승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됐다. 하지만 결국 30%, 고정 지지층 이상의 지지를 받는 데 실패했다. 당대표, 원내대표 등 당 지도부가 태극기 부대와 함께하는 모습을 본 중도 유권자들이 돌아선 것이다. 사실 현재 더불어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개딸’이라고 하는 이재명 대표 강성 지지층이 있고, 극성 유튜버가 이를 부추긴다. 보수가 이를 비난하면서 똑같이 따라 하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그들과는 달라야 차별화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청년 정치인은 세태 휩쓸리지 말고 공부하라”

    현 정치 구조상 당심에 가까워지면 민심에서 멀어지고, 민심에 가까워지면 당심에서 멀어지는 딜레마가 생기지 않나.

    “맞다. 참 어려운 문제다. 내가 정치를 그만둔 이유이기도 하다. 당을 바꾸려면 당대표가 되든 뭐든 ‘당권’을 잡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패거리 정치를 해야 하더라. 지역구 관리도 열심히 하고, 나 나름대로 노력해 5선까진 이뤘지만 패거리 정치를 안 하니 그 이상은 되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안건을 만들어 당 지도부에 제시하고 있는데,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결국 기득권을 못 내려놓는 거고, 이로 인해 문제가 반복되는 것이다. 청년 정치인들을 지도하며 ‘국민만 바라보라’고 가르치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잘 안다. 결국 나와 같은 선배 정치인들이 해결하지 못한 숙제이자 과오다.”

    다시 정계로 나서 역할을 할 의향은 없나.

    “이제 내가 직접 하는 정치는 하지 않을 것이다. 청년정치학교 일에 주력해서 후배 정치인을 양성하고, 그들이 내가 이루지 못한 정치개혁을 이루길 바라려 한다.”

    혹시 정 위원장의 뜻을 이뤄줄 거 같은 청년 정치인이 있나.

    “구체적으로 특정인을 언급하긴 곤란하고(웃음). 또 기대할 만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기성 정치권에 들어오니 눈치도 빠르고, 기민하게 줄도 잘 서서 오히려 더 빨리 적응하더라. 그래서 청년 정치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

    무엇인가.

    “16대 국회 ‘미래연대’, 17대 국회 ‘새정치수요모임’ 등 개혁파의 시작은 정치 공부 모임이었다. 같이 모여 공부하고 토론하고 논의하다 보니 의기투합하기에 이르렀고, 나아가 정치세력화를 이룰 수 있었다. 개혁을 이루고 싶다면 모여 함께 공부하길 바란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가치, 그 가치로 함께 나아갈 동료 의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면 힘이 모이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며, 그 과정에서 정치인으로서도 성장하게 된다. 부디 청년 정치인들이 세태에 휩쓸리지 말고 정치 공부에 성실히 임했으면 좋겠다.”

    신동아 8월호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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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준 기자

    이현준 기자

    대학에서 보건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2020년 동아일보 출판국에 입사했습니다. 여성동아를 거쳐 신동아로 왔습니다.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관심이 많습니다. 설령 많은 사람이 읽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겐 가치 있는 기사를 쓰길 원합니다. 펜의 무게가 주는 책임감을 잊지 않고 옳은 기사를 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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