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호

“똥물 수영” 조롱에도 시민 위해 ‘센강’서 수영 진행

[노정태의 뷰파인더] 파리 올림픽, 새 시도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난다

  •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jeongtaeroh@ries.or.kr

    입력2024-08-0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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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 조롱 의혹, 서툰 진행… 논란‧비판 쏟아져

    • 완벽하지 않아도 체제 선전‧경쟁 수단으로 쓰이던 과거보단…

    • 파리 올림픽, 미래 ‘스포츠’ 해답 구한 데 의미 있어

    • LA 올림픽은 실수‧실패 넘어 더 나은 평화의 장 되길

    7월 26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센강에서 각국 선수단을 태운 보트가 트로카데로 광장을 향해 수상 행진을 하고 있다. [뉴스1]

    7월 26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센강에서 각국 선수단을 태운 보트가 트로카데로 광장을 향해 수상 행진을 하고 있다. [뉴스1]

    “기독교를 조롱하는 장면이 담긴 개막식에 깊은 유감을 표명한다.”

    7월 26일(현지 시간) 파리 올림픽 개막식 직후 프랑스 주교회가 발표한 성명 가운데 일부다. 개막식 무대 후반부에 등장한 ‘드래그 쇼(Drag show‧성소수자 특히 여장남자들이 화려한 분장을 하고 등장하는 쇼)’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전후 맥락을 살펴보자. 드래그 쇼엔 프랑스의 유명 DJ 바버라 부치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꾸민 성소수자들이 나열한 가운데, 긴 식탁 한가운데에 고대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로 분장한 가수 필리프 카트린느가 등장했다. 벌거벗은 것처럼 보이는 전신 분장을 한 그는 마치 식탁에 서빙된 음식처럼 나타나 본인의 신곡인 ‘벌거벗은(Nu)’을 불렀다. 모든 사람이 벌거벗고 있다면 전쟁도 차별도 없을 것이라는 이상주의‧낭만주의적 내용이 담긴 곡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가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듯하다. 눈앞에 보이는 모습 자체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짐짓 장엄한 분위기 속, 긴 식탁의 가운데 위치한 주인공을 두고 연극적 태도로 주변 인물들이 나열해 있는 모습. 그러한 구도의 그림 가운데 전 세계 시청자들이 단번에 떠올릴 수 있는 작품은 사실상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뿐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그려진 성화(聖畵)를 성소수자들이 패러디하는 장면을 연출한 듯한 모습에 전 세계가 발칵 뒤집혔다. 유럽 각국에선 진지한 반론이 나왔다. 앞서 인용한 프랑스 주교회의 반응도 그렇거니와, 독일 주교회 역시 “‘퀴어(성소수자) 성찬식’은 최악의 장면이고, 완전히 불필요했다”는 비판을 내놓았다.

    7월 26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 개회식에서 열린프랑스 가수 필리프 카트린느가 공연하고 있다. 이 공연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희화화했다는 의혹을 사며 ‘기독교 조롱’ 논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2]

    7월 26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올림픽 개회식에서 열린프랑스 가수 필리프 카트린느가 공연하고 있다. 이 공연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희화화했다는 의혹을 사며 ‘기독교 조롱’ 논란을 일으켰다. [프랑스 2]

    ‌파리 올림픽 개막식을 향한 비판과 논란은 그뿐만이 아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투옥됐던 콩시에르주리 건물 창문에 참수된 앙투아네트로 분장한 합창단이 등장하고, 건물 창문 곳곳에서 피가 분출되는 듯한 연출 역시 적잖은 논란을 불러왔다. 프랑스의 역사를 예술적으로 묘사했다곤 하지만 평화로운 경쟁의 장인 올림픽 개막식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개막식은 마무리마저 실소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정점이라 할 수 있는 오륜기 계양식에서 깃발을 거꾸로 달아 올리는 실수가 벌어진 것이다. 예행 연습을 하긴 한 것인지 의심스러운 광경이 펼쳐진 가운데, 중계방송이 끝날 무렵 한국인은 더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한국 대표팀이 입장할 때 프랑스 현지의 장내 아나운서가 대한민국(Republic of Korea)을 북한(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으로 소개한 것. 이렇듯 파리 올림픽은 수많은 논란과 함께 시작됐다.

    어떤 시대든 올림픽 당대 맥락으로 이해해야

    올림픽이란 무엇일까. 올림픽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쭉 치러지고 있다.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아주 오래된 행사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4년에 한 번씩 그리스 엘리스(현 엘리아)에 위치한 ‘성소(聖所)’ 올림피아에 모여 벌인, 제우스 신을 위한 체육 축제다.

    고대 올림픽은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한 후에도 살아남았다. 기원후 349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상태에서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이교의 잔재라는 이유로 폐지하기까지 무려 1170년을 지속됐다. 만약 기독교로 인해 사라지지 않았다면 고대 올림픽은 중세를 넘어 현재까지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역사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고, 고대 올림픽은 오직 기록으로만 남은 행사가 됐다.

    올림픽은 근대 시대에 이르러 되살아났다. 르네상스 시대부터 시작돼 19세기 때 정점에 이른 고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서유럽 귀족 및 지식인들의 열광 때문이다. 그들은 열성적으로 그리스 고전을 공부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조각상을 비롯한 다양한 예술품을 수집했다. 독일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처럼 개인적으로 탐사대를 꾸려서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트로이아와 미케네 문명을 발굴해 내는 사람까지 등장했을 지경이다.

    프랑스의 남작 피에르 드 쿠베르탱이 고대 올림픽 경기를 근대에 부활시킨 사건은 바로 이 맥락을 전제해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독일 고고학자들이 올림피아 유적을 발굴하면서 기록으로만 전해지던 고대 올림픽이 현실이었음이 드러나 유럽 전체가 고무됐던 분위기가 선행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열렬한 스포츠 애호가이던 쿠베르탱 남작이 먼저 나선 것도, 1892년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해 1894년 국제 올림픽 위원회를 조직하고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1896년 첫 근대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돼야 한다.

    유럽의 19세기는 그런 시대였다. 유럽 바깥은 유럽의 식민지가 돼 신음했지만, 유럽인들 스스로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좋은 시절)’를 만끽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이 무한한 진보의 꿈을 꾸게 하는 가운데, 적어도 유럽인들끼리는 전쟁을 벌이지 않는 평화의 시대이기도 했다. 올림픽뿐 아니라 만국박람회 같은, 거대한 국제적 이벤트가 연이어 출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유럽의 정신을 지배하던 기독교의 지위 역시 19세기에 이르러 크게 흔들렸다. 찰스 다윈은 1859년 ‘종의 기원’을 펴내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인간의 절대적 존엄성을 뒤흔들었다. 그러한 탈(脫)기독교적 분위기는 프로이트가 1899년 ‘꿈의 해석’을 펴내면서 정점에 이른다. 인간이 꿈에서 보는 것은 신의 계시가 아니라 스스로의 무의식에 감춰진, 가장 추한 욕망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파리 올림픽, 특히 개막식을 둘러싼 논란을 언급하고 올림픽의 역사를 살핀 이유는 당연하지만 고대 올림픽이든, 근대 올림픽이든 오늘날의 올림픽이든 모두 당대의 역사적 맥락과 분위기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서다.

    올림픽, ‘평화의 장’ 된 건 불과 36년 전

    잘 알려져 있다시피 쿠베르탱은 펜싱, 수영, 승마, 사격, 육상 크로스컨트리로 이루어진 ‘근대5종’의 창시자다. 근대5종을 이루는 모든 종목은 사실상 군사 기술이다. 하지만 쿠베르탱은 그것들이 ‘스포츠’로 기능하기를 바랐을 뿐 그가 아끼는 운동선수들이 서로를 향해 전쟁을 벌이고 총부리를 겨누는 것을 원치 않던 평화주의자다.

    이러한 쿠베르탱의 꿈은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올림픽을 위해 훈련하던 청년들은 바로 그 기술을 가지고 서로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엔 곧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쿠베르탱의 이상주의는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한층 더 심하게 짓밟혔다.

    히틀러 본인은 성공한 예술가가 아니었지만 그에겐 예술적 재능을 지닌 이를 알아보고 전권을 쥐어주는 안목이 있었다. 탁월한 건축가인 알베르트 슈페어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아름답고 장엄한 경기장을 디자인했다. 경기장엔 어두운 하늘로 솟아오르는 강렬한 서치라이트가 빛의 열주(列柱)를 이뤘고, 세계 각지에서 온 선수들이 육체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힘의 제전’이 열렸다.

    오늘날에도 그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다.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천재적 예술가에 의해 당시의 경관이 영상에 담겼기 때문이다. 나치 정권의 홍보물로 제작된 최초의 스포츠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다. 결국 19세기적 이상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됐고, 올림픽은 체제 선전과 홍보의 장이 되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냉전이 시작된 후에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진영과 소련의 공산진영은 올림픽에서 운동선수들을 앞세워 일종의 ‘문명화된 전쟁’을 수행했다. 이러한 갈등은 점점 심화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자유진영의 여러 국가가, 1984년 LA 올림픽은 공산권의 여러 국가가 보이콧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비록 이상주의였다곤 하지만 고대 올림픽을 부활시켜 모든 나라가 평화롭게 축제의 장으로 삼자는 쿠베르탱의 이상은 갈수록 더 배신당하고 만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중요했던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거의 10여 년 만에 자유진영과 (북한을 제외한) 공산진영의 국가들이 거의 모두 출전해 ‘세계 평화의 축제’로서 그 위상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이 또한 시대적 분위기의 반영이다. 소련은 서서히 종말을 향하고 있었다. 1980년대 말에 이르면 더 이상 예전처럼 미국과 대립할 수도, 위성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도 없었다. 서울 하늘에 오륜기가 펄럭인 지 불과 1년 후인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그로부터 2년 후인 1991년 12월 26일 소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새 시도 만으로도 의미 있지 않은가

    7월 31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알렉상드르 3세 다리에서 트라이애슬론 여자 개인 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뉴스1]

    7월 31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알렉상드르 3세 다리에서 트라이애슬론 여자 개인 경기가 펼쳐지고 있다. [뉴스1]

    시대도, 맥락도 바뀌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오늘날의 올림픽은 오늘날의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349년 폐지된 고대 올림픽이 고대 로마를 반영했고, 1896년 부활한 근대 올림픽이 그 무렵의 유럽 상류 사회를 반영했듯, 올해 파리 올림픽은 프랑스를 넘어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전체의 반영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이 관점에서 파리 올림픽과 개막식을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떨까. 1924년 이후 100년 만에 파리에서 다시 개최된 이번 올림픽은 그동안 축적돼온 상식을 모두 파괴하고 있다. 거대한 주경기장과 부대시설을 짓는 대신 원래 존재하는 도시의 지형지물과 명소를 십분 활용하는 생활밀착형 올림픽이다.

    프랑스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걸까. 반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올림픽은 개최국의 국력을 뽐내는 무대였다.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의 경기장을 건설하는 것은 그 자체가 도전 과제이자 홍보 수단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건축 기술은 전 세계가 고루 상향 평준화됐다. 건물이나 복합 단지를 짓는 것만으론 세상을 놀라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올림픽을 위한 대규모 개발‧건축이 개최국에 경제적 부담을 준다는 비판이 제기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스포츠는 살아있으며 인류는 진보해야 한다면, 앞으로의 올림픽은 어떻게 치러져야 할까.

    올해 파리 올림픽은 비록 완벽하진 않으나 진지하게 그 답을 찾고자 한 시도로 기억돼야 한다. 대한민국의 궁사들이 40년간 1위를 지키며 여자 단체전 10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앵발리드 양궁 경기장의 전경을 떠올려 보자. 펜싱 경기가 펼쳐지고 있는 ‘거대한 궁전’, 그랑 팔레의 모습은 또 어떠한가. 창의력을 발휘한다면 건물을 부수고 짓는데 돈을 쓰지 않고도, 오히려 더 멋진 올림픽을 치를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대신 프랑스는 올림픽 예산의 3분의 1을 센강에 투자했다. 우수와 오수가 뒤섞여 방류되는 하수 시스템을 정비하고 트라이에슬론과 장거리 수영 경기를 센강에서 치르고자 한 것이다. 일회성 이벤트를 위해 새로 경기장을 짓는 것과 “선수들에게 ‘똥물 수영’을 강요한다”는 비아냥을 감수하면서까지 시민 전체가 오랫동안 사용할 수 있는 하수 정비 시스템을 다시 갖추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바람직한 올림픽 준비 자세일지 답은 분명하다.



    오늘이 싫다고 어제로 돌아갈 순 없는 일

    물론 파리 올림픽 준비위원회의 계획과 실행엔 엉성한 부분이 많다. 탄소 배출 저감을 이유로 선수들에게 채식 식단을 강요하고 숙소와 차량에 에어컨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기후변화에 대응하려면 사람들이 고통스러워져야 한다는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한 방침이다. 스포츠 대회의 본질을 망각한 처사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올림픽을 운영하겠다는 의지 자체를 비판할 수는 없지 않을까.

    논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개막식의 이모저모 역시 마찬가지다. 목 잘린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을 과장되게 연출한 것은 보는 이에 따라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그 과격함은 센강 주변에 여성 인권을 위해 싸운 올랭프 드 구주, 시몬 보부아르 등 10명의 선구적 프랑스 여인들의 동상이 세워진 것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비난이 역사적 사실과 얼마나 부합하느냐는 잠시 논외로 해보자. 아무튼 프랑스는 이번 개막식에서 역사의 ‘영웅’뿐 아니라 ‘악당’의 자리까지도 공히 여성에게 할당한 것이다. 오늘날에 걸맞은 시대정신, 즉 상식의 반영이다. 개막식에 성소수자를 출연시킨 결정 역시 비슷한 차원에서 바라볼 일이다. 미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주요 선진국에서는 이미 동성혼이 합법화된 지 오래다. 긴 개막식 가운데 특정 부분이 성소수자라는 주제에 할애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반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모든 올림픽은 그것이 치러지는 당대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고대 올림픽은 여성의 출전은 고사하고 관람조차 금지하며 어긴 이는 사형으로 다스렸다. 나치 독일은 아리안족의 우수함을 뽐내야 한다는 목적의식 하에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흑인 선수의 출전을 금지하려 했다. 올해 파리 올림픽은 거대한 주경기장 없이 도시 각지를 배경 삼아 치러지는 최초의 친환경 올림픽을 지향하고 있다.

    오늘이 싫다고 어제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파리 올림픽이 끝까지 무사히 치러지기를, 그리고 다음 올림픽은 이번의 실수‧실패를 넘어 더 나은 화합과 평화의 장이 될 수 있기를, 그 속에서 모든 선수들, 특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노력에 걸맞은 성취를 거둘 수 있기를 희망한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칩 워’ ‘인간의 본질’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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