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호

“폭염에 눈앞 핑 돌아… 냄새난다고 싫어해서 카페도 못 들어가”

이동노동자들, 역대급 폭염에 건강 위협…서울시 쉼터 실효성 떨어져

  • 윤채원 기자 ycw@donga.com

    입력2024-08-08 13: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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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노동자 85% “폭염 시 온열질환‧건강 이상 경험”

    • 쉼터 있지만 장소 제각각, 시설 미비로 ‘그림의 떡’

    • 전문가 “이동노동자 휴식권 보장 시급”

    5년 차 배달 라이더 이모(48) 씨는 한여름 도로 한가운데서 초록 불 신호를 기다리다 눈앞이 핑 돌았다. 목적지까지 10분 이상 남았지만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배달 사고가 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눈을 연신 깜박였다. 헬멧에서 타고 내려온 땀이 눈으로 흘러들어와 따가웠다. 눈을 비벼도 어지럼증은 가시지 않았다.

    이 씨는 “오전 9시 30분부터 4시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옆 차선 버스에서도 열기가 느껴지고, 지열도 심했다. 갑자기 졸리고 쓰러질 것 같아서 이게 더위를 먹은 건가 싶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겨우 배달을 마치고 골목에 잠시 오토바이를 세운 채 안장에 멍하니 앉아있었다”며 그때를 회상했다.

    “더운데 카페도 갈 수 없었죠. 커피값도 비싸잖아요. 마음 놓고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없고….”

    서울 중구 한 건물 앞에 이동노동자가 모는 오토바이가 주차돼 있다. [윤채원 기자]

    서울 중구 한 건물 앞에 이동노동자가 모는 오토바이가 주차돼 있다. [윤채원 기자]

    쉴 곳 마땅찮아… ‘그늘 맛집’ 전전

    7월 27일 기상청은 올여름 장마 종료를 발표했다. 폭염과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 구간에 진입한 것이다. 특히 올해는 ‘역대급 폭염’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직업 특성상 폭염에 취약한 이동노동자의 쉴 공간 부족에 따른 우려가 나온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이 이동노동자(택배노동자·배달라이더·대여제품 방문점검원·설치수리 기사·학습지 교사·대리운전기사 등) 약 1200명을 대상으로 7월 12~14일 조사한 결과, 85%가 최근 2년간 여름철 폭염 시 온열질환 및 건강 이상을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호출을 받으면 바로 업무에 들어갈 때가 많은 이동노동자는 길 한쪽 구석 또는 오토바이 안장 위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7월 29일 서울시 중구에서 만난 퀵서비스 라이더 김모(60) 씨는 휴식을 위해 카페를 가는 건 어림도 없다고 했다. “헬멧과 검은색 옷차림을 보면 카페 사람들이 다 쳐다본다. 땀 냄새도 너무 심하다 보니 앉아있으면 괜히 눈치 보인다”는 게 그의 말이다.

    이러한 사정에 폭염 속 퀵서비스 노동자 사이엔 ‘그늘 맛집’ 정보도 돈다. 20년차 퀵서비스 노동자 강모(63) 씨는 “○○공원 밑 큰 나무, 잠시 앉아 있어도 눈치 주지 않는 큰 건물 등이 있으면 우리끼리 공유한다. 아니면 이 날씨에 일 못한다”고 말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은 노동자가 고온 등으로 질병이 생기지 않도록 사업주가 보건 조치를 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에 따르면 폭염에 노출되는 장소에서 작업해 열사병 등 질병이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사업주는 적절하게 휴식하도록 하는 등 근로자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또 고용노동부가 5월 1일 배포한 ‘온열질환 예방 가이드’에 따르면, 사업주는 폭염특보 발령 시 10~15분 이상 규칙적으로 휴식을 부여해야 한다.

    서울시 쉼터 캠핑카, 에어컨 안되고 침대는 무용지물

    7월 29일 서울 성동구 한 상가 앞에 다른 차량과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가 함께 주차돼있다. [윤채원 기자]

    7월 29일 서울 성동구 한 상가 앞에 다른 차량과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가 함께 주차돼있다. [윤채원 기자]

    쉼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가 2022년 마련한 ‘찾아가는 이동노동자 쉼터’가 있다. 그러나 서울 전역을 캠핑카 4대로만 운영하고 있는 실정이다. 2대는 배달라이더를 대상으로 강남과 강북을 나눠 순회하고, 나머지 2대는 각각 퀵서비스와 대리운전 기사를 대상으로 한다.

    ‘신동아’ 취재 결과, 그마저도 주차 문제로 예정된 스케줄을 지키고 있지 못했다. 7월 29일 공지사항대로라면 서울시 동대문구 ‘동대문제기B마트’에 있어야 했던 캠핑카 1호차는 보이지 않았다. 서울권익노동센터에 문의하자 그제야 장소가 변경됐다며 차로 10분 떨어진 ‘성동옥수B마트’ 주소를 일러줬다.

    서울노동권익센터 홈페이지 7월 일정표에 명시된 9곳 가운데 캠핑카를 제대로 주차할 수 있는 곳은 3곳에 불과했다. 나머지 6곳은 아예 주차할 수 없어 장소가 바꾸거나, 약속장소와 약 500m 떨어진 유료 주차장에 캠핑카를 세운 후 간이탁자에 물건만 놓는 형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주차 장소를 조율은 현장 관리자의 몫이다. 관리 매니저 A씨는 “그 전 담당 직원에게 받은 장소를 가 본다. 대부분은 주차하지 말라고 한다. 어떤 곳은 오피스텔 앞이라 안 되고, 어떤 곳은 주차장 자체가 없다”며 “그러면 라이더들이 많이 지나다닐 곳을 우리가 예상해 본다. 지금 운영하는 곳도 지도 어플에 ‘B마트’라고 쳐서 일일이 가 본 다음에 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건물 측과 장소 조율에 실패하면 작은 탁자와 아이스박스만 둔 채로 운영해야 한다. 캠핑카는 조금 떨어진 유료 주차장에 주차하고, 직원이 캠핑카와 탁자를 오가며 물과 얼음을 보충하는 식이다. 어렵사리 주차 장소를 찾아도 쉼터 운영은 녹록하지 않다. 서비스를 위해 설치한 간이 시설을 치우라는 민원도 부지기수다.

    이동노동자 쉼터 캠핑카 옆에 정차한 버스 운전자가 “차 빼는데 걸리적거리니까 당장 차광막을 치워달라”고 항의하는 광경도 눈에 띄었다. A씨는 “정당하게 주차 요금을 내고 이용하는데도 이런 민원을 자주 받는다”라고 말했다.

    캠핑카 내부도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냉난방 시설에서 쉬라고 만든 차였지만, 차 내부는 에어컨이 되지 않았다. A씨는 “자동차 배터리로는 전기를 감당할 수 없다. 외부 전기를 가져와야 하는데, 줄 연결하려고 상가 관리인한테 허락을 받는 것도 일이다”라고 말했다.

    이동노동자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시설도 눈에 띄었다. 캠핑카 뒤편엔 성인 남자는 눕기 어려운 크기의 시트가 있었다. A씨는 “접어서 의자처럼 쓰거나 테이블 형태로 쓸 수 있으면 가장 좋은데, 이 차는 침대처럼 쓰게 돼 있다. 편히 눕지도 못하니까 아무도 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해당 시트엔 쉼터 물품을 담은 택배 상자 4개와 두루마리 휴지가 쌓여 있었다. 결국 ‘찾아가는 쉼터’를 방문한 이동노동자들은 팔토시와 물만 챙긴 후 상가 앞 계단에 쪼그려 앉아 쉬어야 했다.

    전문가들은 이동노동자에게 적절한 휴식이 주어지지 않으면 사회적 위험을 키울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이동노동자 대부분은 고용주가 없는 형태로 일을 하기에 휴식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며 “야외에서 배달 등 장시간 더위에 노출돼 있으면 열사병으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도로 위 큰 사고로 이어질 우려도 있으므로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배달‧물류가 필수노동인 만큼, 이들의 권익을 위한 정부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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