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화 10대 회장 취임, 철강 or 2차전지 소재 기로 놓여
중국산 철강에 위기 맞은 본업… “초격차 제조 역량 필요”
박정희·박태준 ‘팀플레이’, 제철보국 꿈 실현
YS 갈등으로 시작된 ‘회장 잔혹사’… 1~8대 회장 임기 못 채워
잔혹사 종결에도 외국인 보유율·주가↓ 절체절명 위기
수익·환경 다잡아 국민 기업 넘어 ‘인류 기업’ 길 걸어야
6월 27일 경북 포항시 포항제철소에서 장인화 포스코그룹 회장이 4고로 풍구에 화입을 하고 있다(왼쪽). 앞서 포스코그룹은 탄소 배출량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는 ‘전기용융로(ESF)’을 공개했다. ESF는 수소환원제철(하이렉스)을 위한 핵심 기술로 꼽힌다. [포스코그룹]
첫 번째 장면은 6월 24일 탄소 배출량을 혁신적으로 줄일 수 있는 ‘전기용융로(ESF)’를 공개한 것. 이는 기후위기를 불러오는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 높은 품질의 철강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다.
두 번째는 같은 달 27일 포항제철소 4고로의 3차 개수 공사를 완료하고 본격적 재가동에 들어가며 화입식을 진행하는 장면이다. 이 자리에서 장 회장은 “오늘은 4고로에 다시 새 생명을 불어넣은 뜻깊은 날”이라며 “4고로가 생산성·원가·품질 경쟁력을 갖춰 100년 기업으로 성장하는 포스코의 굳건한 버팀목이 돼주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과거 철강산업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의지와 탈탄소로 지속적 발전을 노리겠다는 열망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장 회장은 취임 일성을 시작으로 포스코그룹의 핵심 근간을 ‘철강 경쟁력 재건’에 두고 있음을 여러 자리에서 천명했다. 전임 최정우 회장이 ‘탈(脫)철강’ 전략에 무게중심을 뒀다면 장인화 회장은 다른 노선으로 갈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본업 위기 속 新사업 성공해야 하는 현실
포스코그룹의 새로운 경영비전이 담긴 ‘2023 포스코홀딩스 지속가능경영보고서’ 표지. [포스코그룹]
장 회장은 취임 후 철강 본원의 경쟁력을 굳건히 하는 한편 생산성 향상, 기술개발, 디지털 전환 등을 통해 제철소 전반에서 초격차 제조 경쟁력도 확보할 방침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주주·투자자들을 위한 청사진과 포스코그룹이 처한 위기를 타개할 대안은 내놓지 못했다고 평가된다.
지난해 포스코홀딩스의 매출과 영업이익이 동반 하락했다. 매출은 2022년 84조7402억 원에서 77조1272억 원으로 9.8% 줄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4조8501억 원에서 3조5310억 원으로 27.2% 감소했다. 올해도 크게 개선될 여지는 보이지 않는다. 포스코홀딩스의 올해 1분기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6.9% 감소한 18조520억 원, 영업이익은 17.3% 줄어든 5830억 원에 그쳤다. 이를 반영하듯 주가도 연일 부진한 흐름이다. 지난해 7월 포스코홀딩스 주가는 장중 최고 76만4000만 원까지 오르며 투자자의 기대를 모았지만 올해 5월 40만 원 아래로 떨어진 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포스코그룹 전체 영업이익 가운데 60%를 차지하는 철강 부문의 부진이 뼈아프다. 영업이익이 2021년 8조4400억 원에서 지난해 2조5570억 원으로 2년 만에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글로벌 경기둔화로 철강 수요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중국발(發) 공급과잉까지 겹쳐 사업이 절체절명 위기에 처했다. 미국이 철강 관세 장벽을 높게 쌓으면서 중국산 밀어내기 물량이 쏟아지고 있는 것.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5월까지 중국산 철강 제품 수입 물량이 407만t에 달했다. 같은 기간 기준 2022년 270만t이었고, 지난해 2023년 396만t에 대비해도 증가 추세에 있다. 2차전지 소재 부문도 어려운 상황이다.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둔화)으로 2차전지 소재부터 완성차(OEM)까지 전·후방 산업 전반이 침체한 데다, 원자재 가격 하락에 따른 이중고를 겪고 있다.
장 회장 취임 이후 유일하게 바뀐 것은 취임 직후부터 그가 국내 주요 재계 행사에 참석하면서 현 정부와 소통이 원활해졌다는 것이다. 장 회장은 6월 15일 윤석열 대통령의 우즈베키스탄 국빈 방문 경제사절단에 참여했다. 포스코 회장이 경제단체가 꾸린 경제사절단으로 해외를 방문하는 것은 2016년 5월 이란 방문 이후 8년 만이다.
장 회장 앞엔 과제가 산적해 있다. 지난해 포스코그룹은 1987년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지정 이후 처음으로 롯데그룹을 제치고 재계 5위에 올라섰다. 덩치는 커졌지만 경영환경 불안 요인은 여전하다. 먼저 그룹 지주사인 포스코홀딩스가 세운 ‘2030년 2차전지 소재 분야 매출 62조 원’ 목표 등 신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가야 한다.
포스코그룹은 2022년 3월 포스코홀딩스가 상장사로 존속되고 철강 사업회사인 포스코는 비상장사로 남는 지배구조 개편을 단행하면서 철강기업 꼬리표를 떼고 미래 소재 기업으로 가는 ‘제2의 창업’을 단행했다. 포스코그룹은 지주회사 중심으로 기존 철강 외 리튬·니켈 등 2차전지 소재, 수소, 에너지, 식량 등 이른바 신성장 사업에 집중 투자해 친환경 미래 소재 기업으로 변신한다는 구상에서다.
투자자들은 환호했다. 단지 미래산업에 대한 기대 때문만이 아니다. 포스코그룹은 2000년 완전 민영화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주인 없는 기업’이라는 이유로 승자의 전리품과도 같은 대접을 받았다. 주주들은 포스코홀딩스 출범과 함께 변화된 지배구조를 갖춘 포스코그룹이 ‘국가의 기업’이 아니라 ‘주주와 투자자들을 위한 기업’이 되리라는 기대감으로 환호성을 보낸 것이다.
韓日협정 보상금으로 세운 포스코
사실 포스코그룹의 가장 큰 리스크는 기업환경 악화, 글로벌 경기 불확실성보다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발생하는 수장이 교체되는 ‘흑역사’였다. 10대 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국가 주도로 만들어진 그룹인지라 창업 이후 50년이 지났고, 완전 민영화를 달성한 지 24년이 됐지만 세간엔 여전히 포스코그룹이 ‘국가 기업’이라는 인식이 짙게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첫 현대식 제철소는 일제 강점기인 1918년 일본의 미쓰비시 제철이 황해도 송림시에 지은 ‘겸이포 제철소’다. 하지만 이곳은 일제 군수공업의 일부였기에 생산된 선철은 일본의 전쟁 물자로 사용됐다. 광복 후엔 6·25전쟁으로 전국의 산업시설이 잿더미가 됐고, 그나마 남아 있던 제철소도 대부분 북한 땅에 있었기에 북한이 먼저 제철소를 운영하며 경제를 활성화했다. 한국에 남아 있던 제철소는 강원 삼척의 ‘삼화제철소’로 보수를 거쳐 1954년 가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원료·기술 부족과 함께 자금난으로 3년을 넘기지 못하고 1957년 휴업하게 됐다.
1958년 8월 이승만 정부는 강원 양양 지역을 주요 입지로 한 연간 20만t 규모의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 국가 주도 계획이다. 이에 대해 ‘포스코 35년사’엔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 계획은 ICA(국제협력기금) 자금 3000만 달러, 내자 150억 환으로 1965년까지 선철 20만t 생산 규모의 시설을 건설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계획은 10월 4일 상공부 산하 철강자문위원회가 정부에 건의함으로써 재확인됐는데 외자 3475만 달러, 내자 248억3500만 환으로 1965년까지 대한중공업공사가 맡아 건설하되 제철 방식은 고로용광법과 직접환원제철법(RN법)을 병용하고 제강 방식은 LD(Linz-Donawitz) 방식으로 한다는 등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외자 유치 실패와 정부의 미숙한 일 처리로 물거품이 되고 만다. 1960년대 초에 다시 구체화되긴 하지만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면서 전면 재검토에 들어간다.
이후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이 1965년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 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그가 피츠버그 공업지대를 찾아가 미국의 제철소 건설기술 용역사인 코퍼스(Koppers Co)의 포이 회장을 만나 외자 조달을 위해 국제 제철차관단 구성을 제의한 것. 여기에 같은 해 일본 총리 관저에서 조인된, 한국과 일본 간 국교를 정상화하는 ‘한일기본조약’과 4개 부속협정이 힘을 더했다.
이때 양국은 한국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해 부속협정에서 일본이 3억 달러의 무상 자금과 2억 달러의 정부 차관 및 3억 달러 이상의 상업차관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일본 정부가 한국에 지급한 무상 자금 3억 달러 가운데 3000만 달러가 포항제철을 설립하는 비용으로 투입됐다.
1967년 박정희 정부는 종합제철사업의 신속한 진행을 위해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박태준 당시 대한중석광업 사장을 추진 기구 위원장으로 내정한다. 포스코그룹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박태준 회장이 등장한 것이다.
박태준, 그룹 중흥 이뤄냈지만… 드리운 ‘회장 잔혹사’ 그림자
박태준 회장은 1927년에 태어났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1945년 일본 와세다대에 들어가 기계공학을 공부하다가 1947년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6기로 입학한다. 그는 이곳에서 육사 2기 출신 박정희를 만나 인연을 맺는다.
박정희 정권 아래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의 산파 노릇을 한 박 회장은 1963년 만 36세 나이로 군복을 벗는다. 1965년엔 국영기업인 대한중석광업(현 대구텍) 사장이 된다. 그러곤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를 1년 만에 정상화했다. 또 일본에서 제철소를 가장 효율적으로 건설한 것으로 알려진 가와사키제철의 니시야마 야타로 사장을 초빙했고, 유력한 후보지를 함께 답사하면서 제철소 건설에 관해 자문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미 박 회장을 당시 종합제철소 추진 위원장으로 내정해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1968년 4월 1일 서울 중구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열린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식’. [포스코그룹]
일본으로부터 가져온 돈으로 제철소 건설 자금이 확보되자 본격 공사가 시작됐다. 박 회장은 공사를 독려하면서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잘 알려진 ‘우향우 정신’이다. 여전히 포스코그룹이 국민기업 혹은 민족기업이라는 이미지가 민영화된 지금도 영속하는 이유다.
1970년 4월 1일 착공한 포항제철소는 3년 2개월이 지난 1973년 6월 9일 1고로에서 처음 쇳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성공적 준공으로 한국은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을 자력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됐다. 포항 1고로 쇳물은 조선, 자동차, 가전 등 국내 제조업이 단기간에 비약적 성장을 거두고 국제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게 만든 밑거름이 됐다.
박 회장은 1967년 10월 포항종합제철소를 맡은 이후 1992년 10월 회장직에서 사임하기 까지 꼬박 25년 동안 포스코그룹을 이끌었다. 1992년 10월 2일엔 한지 두루마리 뭉치에 자필 붓글씨로 적은, ‘임무 완수’ 보고서를 들고 서울시 동작구 동작동 박정희 대통령의 묘지를 찾아 참배했고, 10월 5일 오전 11시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박 회장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정치적 외풍으로부터 포스코그룹을 흔들림 없이 지켰지만 김영삼 대통령과의 불화설은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당시 정계에선 박태준 회장이 김영삼 대통령이 민자당 후보 시절 선거대책위원장직을 거절해 사이가 틀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포스코그룹 수장 흑역사의 시작이다. 이후 최정우 회장 전까지 역대 회장 가운데 초임이든, 연임이든 임기를 다 채운 사람은 없었다.
황 회장에 이어 3대 회장에 오른 정명식 회장 역시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한 채 고작 1년 만에 물러났다. 김영삼 정부 실세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조말수 사장과의 알력설이 불거지며 낙마한 것. 김영삼 정부는 이를 계기로 1994년 3월 김만제 전 경제부총리를 포항제철 회장에 취임시켰다. 김만제 회장은 사상 처음이자 유일한 외부 인사 출신 회장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전까지 회장에 오른 사람은 모두 사장-부회장-회장 순으로 단계를 밟아 승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회장 역시 김대중 정부 출범 후 박태준 회장의 정계 복귀와 동시에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자리에서 물러난다.
김대중 정권은 포스코그룹 수장을 유상부 회장으로 교체했다. 그의 취임에는 박 회장(당시 자민련 총재)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유 회장도 ‘박태준 사단’으로 분류된 인물이다. 유 회장은 1998년 3월부터 2003년 3월까지 5년간 포스코를 맡았다. 그는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인 2003년 3월 임기 중 물러나 이구택 회장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김대중 정부 시절 타이거풀스 주식을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매입하도록 계열사에 지시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 중도 사퇴의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9대 회장 최정우, 흑역사에 종지부 찍다
이 시기 포스코그룹은 변화를 시도한다. 1997년 국내 대기업 최초로 전문 경영진의 책임경영과 이사회의 경영감독 기능을 강화한 사외이사제도를 도입, 경영 투명성을 높였다. 이후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직을 분리해 기업 지배구조를 한층 선진화했다.
대외적으론 민영화 추진을 통해 글로벌 기업으로서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포스코그룹의 민영화는 외환위기의 파고가 정점에 달한 1998년, 정부가 국가경제 회복과 경쟁력 제고를 위해 포스코그룹을 최우선 민영화 기업으로 선정하면서 빠르게 진행됐다. 당시 민영화의 가장 큰 이유는 회사 경쟁력 제고를 위해 더는 정부의 입김이 작용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었다.
3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포스코그룹은 2000년 10월 민영기업이 됐다. ‘제2의 창업’이라 불리는 민영화는 수익성으로 이어졌다. 공기업이었을 땐 사명감에 입각해 ‘관치 가격’을 적용했으나 민영화 이후, 특히 이 회장 취임 이후엔 ‘수익 중심 전략’이 강화됐다. 실제 매출이 2001년 1833억 원에서 2005년 5912억 원으로 늘어났는데, 이는 뚜렷한 판매량 증가 없이 수입만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민영화 이후에도 ‘회장 흑역사’는 멈추지 않았다. 2008년 12월 초 포스코그룹이 세무조사를 무마하기 위해 국세청에 로비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회장을 낙마시키기 위한 의혹인 셈이다. 당시 검찰은 대구지방국세청까지 압수수색했지만 사건은 무혐의로 결론 났다. 그럼에도 이 회장은 임기를 1년 2개월 남긴 채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회장 선임을 둘러싸고 내부 임원들이 찬성과 반대로 나뉘는 등 내부 갈등 양상을 보이면서 그룹 경쟁력을 약화하는 것이 문제로 남았다. 단적인 예가 있다. 2009년 초 정준양 당시 포스코건설 사장이 차기 포스코그룹 회장으로 유력하게 부각되자 일부 언론에서 그에 관한 의혹을 쏟아냈다. ‘정준양 사장이 내부 정보를 이용, 자사주를 매입해 시세차익을 올렸다’ ‘정준양 사장 친·인척이 주요 주주로 있는 회사에 대량 납품 특혜를 줬다’ 등이다.
당시 이 같은 의혹은 그룹 자체 감사에서 문제없다는 결론이 났고, 그해 말 진행된 검찰 수사에서도 무혐의로 끝났다. 당시 이 의혹을 언론사에 제보한 이는 정 사장의 회장 선임에 반대하던 그룹 내부 관계자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정 사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9년, 전임 이 회장이 임기를 1년 2개월 남기고 사퇴하자 7대 회장에 취임했다. 정 회장은 1975년 포스코(당시 포항제철) 공채 8기로 입사해 2008년 말 포스코건설 사장에 올랐고 2개월 만에 포스코그룹 회장까지 맡게 됐다. 사원으로 입사해 CEO까지 오른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정 회장은 3조5000억 원을 들여 대우인터내셔널을 인수하는 등 적극적 인수합병(M&A)과 해외순방을 통해 이명박 정부의 ‘자원외교’를 도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2년 2월 연임에 성공, 박근혜 정부 시기인 2015년 3월까지 임기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됐으나 박근혜 정부는 정 회장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2013년 6월 박근혜 대통령의 방중 당시 국빈 만찬, 그해 8월 10대 그룹 오너·총수 초청 청와대 오찬 명단에서 잇따라 제외됐다. 9월엔 박 대통령의 베트남 순방 경제사절단에서도 빠졌다. 결국 정 회장은 임기를 2년 이상 남긴 2013년 11월 사퇴를 선언했다.
2014년 3월 권오준 회장이 포스코그룹 8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포스코그룹은 권 회장의 지휘 아래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단행하고, 2017년엔 6년 만의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권 회장은 2017년 3월 연임에 성공한 이후 2020년 3월까지 임기를 확보하고 2018년 포스코 설립 50주년 기념식을 계기로 낙마설에 대해 정면 돌파를 시도했으나 결국 같은 해 4월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사퇴했다. ‘최순실 사태’에 연루됐다는 의혹에 더해 박근혜 정권이 권 회장을 포스코 수장으로 임명한 것이 영향을 미쳤다는 게 중론이다.
9대 최정우 회장은 2018년 7월 회장으로 취임한 후 2021년 3월 연임에 성공했다. 2022년 윤석열 정부로 정권교체가 이뤄짐에 따라 업계·정치권에서 중도 사퇴 가능성이 거론되기도 했지만 무사히 임기를 채웠다.
최 회장 재임 기간 포스코그룹은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며 2차전지 소재 사업 등 미래 소재 기업을 기반으로 한 7대 핵심 사업 중심으로 사업을 성공적으로 재편하면서 그룹 가치를 크게 높였다. 이러한 이유로 3연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윤석열 정부도 대통령의 해외순방 때마다 번번이 경제사절단에는 부르지 않으면서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최 회장도 3연임을 포기했다. 다만 임기를 무사히 마치며 역대 8명 회장이 임기를 채우지 못한 흑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현직 장인화 회장은 포스코 역사에서 처음으로 ‘흑역사’를 통해서가 아닌, 안정된 이사회를 통해 회장 자리에 올랐다. 그가 전임 최 회장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은 분명하다. 최 회장이 ‘탈(脫)철강’을 강조했다면 장 회장은 철강산업 환경이 글로벌 공급과잉, 경제 블록화 등으로 어느 때보다 불확실해진 형국에서 초격차 제조 경쟁력 확보를 통한 ‘철강 본업 경쟁력 강화’에 방점을 뒀다.
물론 장 회장이 2차전지 소재에 대한 투자나 경쟁력을 약화할 생각인 것은 아니겠지만 경영의 무게추가 철강으로 쏠린 것은 분명해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에 투자자·주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이다.
절체절명 위기, 올바른 청사진 필요한 때
외국인 보유지분율 하락은 지난해 3월 이후 본격화했다. 이에 대해선 두 가지 측면의 해석이 있다. 첫 번째는 지주사 체제로 지배구조가 변화되면서 생겨난 포스코홀딩스 기업가치에 대한 기준 변화다. 지주사 체제 전환 이전 포스코는 민영화됐지만 정부출자기업이라는 태생적 한계, 정부로부터 철강재 생산·판매·가격 통제를 받는 점 등으로 인해 공기업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철강기업으로 분류됐다.
일정한 매출과 수익을 유지하는 한편, 해외 동종업계 기업에 비해 높은 수익성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코는 안정적 투자기업으로 인정받았다.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도 이러한 점을 높이 사서 포스코의 주요 주주로 참여한 적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포스코홀딩스가 출범하면서 이러한 ‘중후장대’ 이미지가 희석됐다. 리튬 등 2차전지 소재와 에너지·무역 등 비철강 사업 부문이 주목받으면서 과거 사업보다는 미래 사업에 대한 기대감이 더 높아지며 주가에 반영됐다. 현재의 실적보다는 앞으로의 전망이 주가에 선반영되며 기술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안전하며 고정적인 수익률을 원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굳이 포스코홀딩스를 장기간 보유할 만한 종목으로 보지 않게 됐다. 여기에 포스코홀딩스가 집중하고 있던 전기차 시장 위축 가능성이 제기되자 주가는 더 힘을 잃고 말았다.
철강산업이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량은 전 세계 배출 총량의 8%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높다. ‘온실가스 제로 배출’ 목표를 달성하기가 가장 어려운 산업군에 속한다. 환경규제에 대응해서 탄소중립 철강제품 기술, 생산 체제를 갖추는 기업은 살아남고 성장할 것이지만 그러지 못하면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
장 회장은 ‘철강 기술 격차’를 만들어 경쟁력을 높이면서도 떠나가는 외국인 투자자의 마음을 돌리기 위한 미래 산업, 기후변화에 대한 대안도 제시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다. 어떤 방향을 택하든 포스코그룹이 국민의 기업을 넘어서 주주·인류를 위한 기업으로 가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절체절명의 시기, 10대 장 회장에게 지혜롭고 현명한 청사진이 요구되는 이유다.